박사유학 준비: 시리즈를 시작하며

지금은 인터넷에 박사유학 준비 관련 글이 상당히 많아졌다. 내가 유학을 고민하던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경제학 유학이야 모 유명 블로그에 워낙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전체적인 정보량은 대단히 부족했다. 특히 인문사회계열은 더욱 그랬다. 고해커스나 하이브레인넷은 보통 이공계열 정보가 많았다. 블로그 문화가 자리잡은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를 써 보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나 자신을 위해 기록을 남기려는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서다.

나는 모두가 선망하는 탑스쿨 프로그램에 소속된 학생이 아니다. US News 기준 40위권 학교에 재학 중이며, 지원 당시 학부 GPA도 경제학 유학 지원자 중 최저 수준이었을 것이다. 이 길을 택하기까지 멀리 돌아온 것을 언제나 핑계 삼지만 어쨌든 숫자는 숫자다. 그럼에도 학문이 좋아 유학길에 올랐다. 찬란한 결과는 아니지만 복수의 학교에서 풀펀딩 어드미션을 받았고 인터뷰나 노펀딩 어드미션도 있었다.

유학준비 글 대부분은 탑스쿨 유학생들에 의해 작성된다. 이유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한국 대학원의 현실, 특히 인문사회계열의 현실을 떠올리면 학문 관심자에게 유학은 필수 옵션이다. 탑스쿨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경제학을 기준으로, 대충 지원자 풀은 TOP10만을 바라보는 집단, TOP20-25 정도를 마지노선으로 보는 집단, TOP50 들어가는 것이 목표인 집단이 있다. 1, 2번 집단을 위한 조언은 차고 넘친다. 나는 3번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정량적인 수치를 보충하려면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성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약점이 있으면 강점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령 낮은 스펙은 언제나 내 아킬레스건이었지만, 나는 기회만 준다면 지표가 나라는 인물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필했고, 어느 정도 통했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두 번째 지원을 마치고 썼던 글이다. SOP와 별도로 personal statement를 요구하는 학교들에 이와 비슷한 글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 글이 전부는 아니지만, 시리즈를 시작하기에 좋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글은 공부하다 질리면 가끔 쓸 계획이다. 1년은 안 걸리지 않을까?


지원을 마쳤다. 기초 서류 준비가 끝나면 지리한 반복작업에 불과한데도, 공란을 하나 둘 채울 때마다 지나간 시간이 스쳤다. 미래를 사기 위해서라지만 과거를 포장하기란 역시 고역인 탓이었을까. 부끄러운 성적을 보며 마음가짐을 거듭 자문했다. 남루한 이력 너머 방황과 고민의 세월을 나만은 안다. 아쉽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시골 교회 목회자였던 아버지는 톨스토이의 이 단편을 즐겨 인용했다. 일곱 살의 나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졌다. 사람은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가, 사람은 얼마만큼의 돈으로 해방되는가?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은 으레 그렇듯 가난했다. 아버지가 교회를 개척하던 19년 전, 해안 소도시 당진을 제철공업도시로 발전시키겠다 호언하던 한보철강은 외환위기 시작을 알리며 도산했다. 사람들은 도시를 떠났고 교회를 떠났다. 자애로운 목회자였던 부모님도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자 부쩍 언쟁을 벌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면 종종 물적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적 문제만을 고민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탐색하는 사색에 잠겼다. 목회자 지갑 사정이 하루아침에 나아지기 어려운 만큼 고민은 자주 찾아왔다. 질문은 이윽고 의식 깊이 자리잡았다.

기독교 문화는 청교도 식 엄격주의를 불어넣었다. 목회자 가정 장남의 삶은 매 순간 책임 의식을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 재수를 결정한 동생이 서울로 올라왔을 때, 교육비와 생활비를 모두 감당하기 어려웠던 부모님은 동생을 내게 맡겼다. 보호자로서 매일을 책임지며,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나는 번역과 과외 일을 했다. 이따금 대금을 받지 못할 때 오래된 질문은 어김없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사회과학에 매료된 것은 필연이었다. 한때 사회학에 관심을 두었지만, <우리 후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케인스), <자유로서의 발전Development as Freedom> (아마티아 센) 등이 제시한 빈곤 극복과 자유의 비전이 나를 경제학과로 인도했다. 질문이야 일견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나, 해결의 실마리가 숫자에 있으리라는 막연한 추측에 이끌린 까닭이다.

케인스는 1932년 “설득에 관한 논고Essays in Persuasion” 서문에서 썼다.

 …[책 후반부에서] 필자는 보다 먼 미래로 시선을 돌려, 더딘 발전의 시간 후에야 파악할 수 있을 사안을 고찰한다. 여기서 필자의 깊은 확신이 한층 명료하게 드러난다. 결핍과 빈곤의 문제, 계급·국가 간 투쟁, 한 마디로 경제 문제란 그저 불쾌한 혼란, 일시적이고 불필요한 혼란에 불과하다. 서구 세계가 이미 자원과 기술을 가지고 있으므로, 적절히 활용할 단체를 조직한다면 오늘날 도덕적·물질적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는 경제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둘 수 있다.

따라서 본 논고의 필자가 여전히 믿고 희망하는 바, 경제 문제가 제자리인 뒷전으로 밀려나고, 진정한 문제 곧 삶·인간관계·창조·행위·종교의 문제가 지성과 감성의 무대를 차지 – 혹은 탈환 – 하는 날이 머지않았다. (번역은 본인의 것)

대학에서 만난 경제학은 낯설었다. 애덤 스미스를 읽어보았으나 현대 경제학 문헌을 접해 보지 않은 내게 교과서에 가득한 수식과 그래프는 그저 현실과 동떨어진 듯 했다. 임금과 노동의 한계생산물가치가 동일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교리인가? 게다가 2008 금융위기 직후 입학한 학생이 소위 신고전학파 경제학 비난을 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나는 학과 수업을 적당히 따라가며 독서에 치중했다.

학부 6학기 노동경제학, 7학기 산업조직론 수강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두 과목은 경제학이 현실을 설명하고, 현실에 관여하는 방식을 가르쳤다. 소득 격차가 왜 확산되는가, 수직적 제한이 소비자 후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모든 이론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나는 비로소 사회과학이 과학으로 호명되는 이유와 경제학이 과학적 방법론을 수용했다는 말을 “이해했고”, 연구자의 길을 타진하려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2년 동안 경제학적 인식론은 세계관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나는 톨스토이의 반대편에 서 있다. 사람은 주어진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는가, 어떻게 제약 하에서 최적 선택을 하는가? 지금까지의 지적 여정이 경제적 제약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사변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의 결과였으니, 결국 동일한 문제의 거울상을 좇아 달려온 것이기도 하다. 무수히 헤맸다. 그래도 어느 새 여기에 왔다.

한계를 시험하고 싶다. 어차피 재능이 그저 그렇다는 것쯤은 안다. 노력으로 도달가능한 상한을 알아보고 싶을 따름이다. 단 한 번도 공부에만 집중해 보지 못했다. 학위논문을 쓸 때조차도 그랬다. 한편 최신 지식, 최전선 학문공동체를 경험하는 날을 꿈꾼다. 가열찬 토론에서 배울 때 느끼는 희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미국 세미나가 살풍경하다지만, 일순 지독하게 부끄럽더라도 보다 명석판명한 인식에 다가갈 수 있다면 그 정도 대가는 감수할 수 있다. 질문이 날카로울수록 더욱 그렇다.

안다. 겪지 않고 하는 말이다. 겪어보고 싶다. 먼 길을 돌아온 미련한 자에게 기회가 허락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