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회: 저들은 저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나이다

사랑의교회 도로점유 건이 파국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오정현 “영적 배수진 쳤다. 도로 점용 포기 못 해” – 뉴스앤조이

“뭐 서울시가 뭐라 하든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우리는 늘 얘기하듯이 세상 사회 법 위에 도덕법 있고 도덕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6월 16일, 사랑의교회갱신위원회(갱신위)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에 동영상 하나가 떴다. 영상은 오정현 목사가 자리에 앉아 사랑의교회 건축에 관해 얘기하는 내용이다. 이 영상은 2012년 8월 말 사랑의교회 안성 수양관에서 열린 교역자 수련회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뭐 서울시가 뭐라 하든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우리는 늘 얘기하듯이 세상 사회 법 위에 도덕법 있고 도덕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100~200명이 그렇게 난리를 치고 행정소송한다는 것이, 서초구에만 우리 등록 교인이 2만 수천 명인데. 영적 공공재라는 게 있어요.”
“그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계 변경과 건축 기간 연장 등 수백억의 돈이 더 들어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황당함이 있기 때문에, 결국 그 말은 건축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오정현 목사는 영적 공공재라는 기막힌 표현을 떠올린 자신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 한 마디가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공공재의 정의를 들어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도 그럴 만한 맥락에서나 유효하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자 강제력을 부여한 합의다. 이걸 모르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소위 영적 제사법이 세속법에 우선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려 경제학 곧 “세속 철학”의 언어를 빌려온 모양새만으로 충분히 우습다.

사회법 < 도덕법(?) < 영적 제사법(??)이라는 도식이 맞다고 하자. 그런데 교계가 사회 평균보다 도덕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던가. 개별 목회자나 개별 교회, 개별 단체를 넘어 교계가 그랬던 일은 사실상 없다고 생각한다. 한때는 위대한 인물이라도 있었다. 이제 문익환 박형규 김수환은 떠났고 조용기 김홍도가 원로로 군림한다. 옥한흠이 떠난 자리를 오정현이 차지했고 가장 잘 알려진 기독교 기업은 이랜드다. 도덕법 위에 있다는 영적 제사법까지 갈 필요도 없다.

하지만 도덕적 우월성 상실은 문제의 원인보다는 결과다. 기독교는 도덕률을 신봉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교 윤리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에서 파생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따를 것인가? 오늘날 기독교는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있고, 윤리적 우월성의 기초가 될 고유성singularity을 찾지 못하고 있다. 종교규범이 타협불가능한 진리라고 믿는 기독교 우파, 성서가 쓰인 역사적 맥락context의 휘장 뒤로 돌아가 텍스트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현대적 맥락에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좌파 모두 다르지 않다.

성서가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다고 믿는 기독교 우파는 종교 규범을 사회 규범으로 격상시키려 한다. 술담배, 혼전순결, 동성애 문제를 두고 사회와 불화한다. 기독교 좌파는 윤리적 이슈에 관대하다. 이들에게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세상을 뒤집고[modern_footnote]복음주의 좌파 계열에서 자주 읽히는 도널드 크레이빌의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은 이미 뒤집어진 것이다.” 특별히 급진적인 텍스트에서 인용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modern_footnote] 소수자minority를 껴안은 인물이다. 하느님이 세상의 왕으로서 모든 영역에 관여한다고 선언하고, 그 연장선에서 세속 진보 담론의 “성서적 토대”를 찾아낸다. 악성부채탕감을 모토로 내세운 주빌리은행이 대표적 사례로, 구약성서 희년법이 이 운동의 사상적 배경이다. 또는 성서가 가진 차별적 요소를 찾아내 해명하거나 아예 전복적 해석을 내놓는다. 이런 접근은 전통적 접근과 달리 성소수자 문제에 개입할 여지를 만든다.

이 둘은 접근법이 다를 뿐 성서의 (무오성과) 권위를 복원한다는 목표를 공유한다. 그에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완전히 같다. 우파식 접근은 기독교를 사회로부터 유리시키며, 좌파식 접근은 기독교를 시민윤리 변동에 종속시킨다. 종교와 정치를 뒤섞어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신정법divine law과 현대 민주주의의 정치적 동력을 혼동시킨다는 점에서 좌파 쪽이 어쩌면 더 위험하다[modern_footnote]James Davidson Hunter (2010), 배덕만 역 (2014),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새물결플러스.[/modern_footnote]. 교계가 문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케케묵은 주장을 꺼내 들 생각은 없다. 세상은 변한다. 그렇다면 변화의 물결이 거듭되어도 유효한 질문과 그 답을 찾아내어야 한다. “메마르고 야윈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modern_footnote]Walter Wink (2003), 한성수 역 (2014), <참사람>, 한국기독교연구소, p. 508.[/modern_footnote] 은 무엇인가?

종교는 믿음을, 믿음은 도약을 요구한다. 믿어야 뛸 수 있고 뛰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도약하려면 최소한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무엇을, 왜 믿으라는 말인가. 왜 반드시 기독교여야 하는가. 왜 굳이 초월성이란 요소를 도입해서 인생을 귀찮게 만들어야 하는가. 기독교 우파와 좌파의 접근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도덕적, 윤리적 우월성을 확보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기독교 사상가들이 열심히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그리스도의 유일성, 성경의 권위” 에 관해 설명하지만 그들의 말은 동어반복적이다. 복음주의 사상가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한때 복음주의는 학계에서 죽은 것으로 여겨졌다”는 말로 이들 주제를 다루는 대표 저서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을 시작한다. 그 말은 틀렸는데, 신학계를 제외한 학계에서 복음주의가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계열 유명 잡지 <크리스채니티 투데이>가 이 책을 1997년 도서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이 훌륭한 책은 너무나 널리 읽혀 영문판이 구글 스칼라 기준 110번 인용되었다. 늘상 “주류가 나를 무시한다”고 주장하는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2004) 영문판 피인용횟수가 3226회, <나쁜 사마리아인들>)(2007)이 601회다.

흔히 경제성장이 종교를 위축시킨다고 여긴다. 아니다. 사회학과 경제학 연구자들의 공통된 결론이다[modern_footnote]놀랍게도 종교의 경제학economics of religion이란 분야가 있다. 20-30년 된 “젊은” 응용분과다 (주로 응용산업조직론의 형태. Hotelling, Salop의 공간경쟁모형spatial competition models이 종교시장 분석에 자주 활용된다). 사회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종교현상을 분석해 왔는데, 최근에는 종교사회학-경제사회학-종교의 경제학이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듯하다. 유명한 경제학자들도 관련 논문을 쓴다. 공공경제학 교과서로 잘 알려진 Gruber MIT 교수, 언제나 독창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Zingales 시카고 교수 등등. 이쪽 문헌 중 재미있는 논문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따위 없다는 실증연구가 있다.
경제성장과 종교, 세속화, 다원주의에 관한 참고문헌. 모두 경제학과 사회학 분야 유명 학술지에 게재된 것들이다.
– Buser (2014), “The Effect of Income on Religiousness.”, American Economic Journal: Applied Economics.
– Hungerman (2013), “Substitution and Stigma: Evidence on Religious Markets from the Catholic Sex Abuse Scandal.”, American Economic Journal: Economic Policy.
– Hungerman (2005), “Are Church and State Substitutes? Evidence from the 1996 Welfare Reform.” Journal of Public Economics.
– McBride (2010), “Religious Market Competition in a Richer World.”, Economica.
– McBride (2008), “Religious Pluralism and Religious Participation: A Game Theoretic Analysis”,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 Montgomery (2003), “A Formalization and Test of the Religious Economies Model.” American Sociological Review.[/modern_footnote][modern_footnote]베버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테제를 정면 반박하는 연구는 이거다. 무려 경제학 탑저널 QJE에 실렸다. 제목부터 사회학자들과 한 판 붙어보겠다는 패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초록만 읽어도 재미있다. 1저자 이름이 Sascha다. 캬.. 사스가…
– Sascha O. Becker and Ludger Wößmann (2009), “Was Weber Wrong? A Human Capital Theory of Protestant Economic History.”,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modern_footnote]. 세속화secularization와 다원주의pluralism의 영향은 생각보다 복잡하며 종교가 반드시 쇠락하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속화가 사람들을 탈종교화시키리라는 전망은 종교서비스시장에서 공급이 불변이고 (모임 출석 횟수, 출석 시 시간, 기부금 액수 등으로 측정한) 수요만 줄어든다는 말과 같다. 공급도 변한다면, 그러니까 개별 종교의 수요가 줄어들더라도 다양한 종교 내지 교파가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실은 어땠는가? 데이터는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 유럽은 분명히 세속화되었다(수요 변화가 지배적). 미국에서는 다양한 교파가 출현하고 개별 종교 내지 종파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수요 공급 모두 변화). 한국 기독교는 종교시장이라는 난장에서 어디에 자리잡을 것인가. 적어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어야 하고, 주는 방식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신학자가 아니며 저 주제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다만, 종교시장의 공급자로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공급곡선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한국 교계는 쇠락을 피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쌓아올린 사회적 부를 투자해 정신적 유산을 만들고, 무엇을 믿을지 묻고 답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예배와 모임에서 요구하는 시간을 줄여 기회비용을 낮추는 것도 한 방법이다. 특히 시장지배적 지위에 있는 대형교회, 대형 단체들이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물론 시장지배적 지위를 누리던 자들이 접근성을 높일, 공급곡선을 옮길 리가 없다. 모든 것은 수요 측의 문제니, “불신자들”을 보고 “주님을 모르는 세대”가 오고 있다고 개탄하고, 뜨뜻미지근해 보이는 신자들에게는 “네 돈과 시간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훈계하면 되니까. 믿음대로 될 테니까.

예수는 믿음이 부족했다. 돌을 떡으로 바꾸지도, 성전에서 뛰어내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모른다 할 것이다. 돌을 떡으로 바꾼 자들,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한 자들,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불가능하다던 도로 점용허가를 따낸 자들, “그들이 나를 알지 못하듯 나도 그들을 알지 못한다.”

아무런 기대가 없다. 실망도 하지 않는다. 축적된 종교자본이 사라지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어차피 그들에겐 “종교적” 힘이 없다. 길 찾을 능력과 의지가 없으니 긍정적 영향력이 나올 수 없으며, 더 악화시킬 위상이 없으니 부정적 영향력도 나올 수 없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더라도 놀랍지 않다. 오래 전 길 잃은 무리에게 예정된 파산일 뿐이다.

나는 예수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제도종교와 멀어져 신앙의 변방에서 헤매는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교계가 내 길을 찾아 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헤맬 필요는 없다. 여전히 세상에 예수가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첨탑 세워 십자가 매다는 건 그만두고 사람의 아들을 보는 법을 고민하고 나누어야 한다. 오정현 목사가 공공재 타령을 했으니 그대로 돌려주자면, 교계에서 무엇이, 왜 과소공급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수학 중등교육을 둘러싼 잡음에 관한 단상

수학 교과과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 있는 모양이다. 난 수학/수학교육의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6년간 고교 수학 과외 선생 노릇을 해온 경제학도로서 드는 생각을 난삽하나마 정리해 본다.

새로 맡은 학생과의 첫만남에서 나는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진다. “원이 뭔가요?” (“한 점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라는 원의 정의는 중학교 1학년 때 배운다.)

열의 여섯은 잠깐 생각하다 답을 내놓는다. 그러면 이어서 묻는다. “원의 방정식이 어떻게 되나요?”

여섯 중 넷은 암기한 대로 대답한다(넷은 여기서 포기). “엑스제곱 더하기 와이제곱은 알제곱이요.” 역시 이어서 묻는다. “그게 무슨 뜻이죠?”

“방금 말한 원의 정의를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대답한 학생을 나는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네?” 하더니, 앞서 물어본 질문을 생각하고 “아하!” 하는 학생도 한 번 본 일이 있다(여기까지만 되어도 괜찮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은 “선생님, 그거야말로 무슨 말씀이시죠?”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이 때 당황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이어 간다. “좌표평면에서 두 점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구하죠?”(이건 중학교 3학년 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운 뒤 배운다.)

공식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학생은 편안한(?) 마음으로 아예 처음부터 공사를 시작한다(원의 정의도 마찬가지). 내가 맡았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식을 암기하고 있었는데, 이런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착잡해진다. “그 공식과 원의 정의를 합치면 원의 방정식이 나와요. 앞으로 이런 것 계속 물어볼 거예요. 수업 시작합시다.”

이런 문답은 학생들이 어디서부터 개념의 연결고리를 놓쳤는지 점검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리고 이건 원 말고 다른 개념으로도 가능하다. 가령 “이차방정식의 근과 계수의 관계”,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 “완전제곱식”, “제곱근의 정의”의 연속기도 유용하다. 어쨌든, 비극은 내가 묻는 내용이 무슨 비기(秘技)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내가 묻는 내용은 전부 교과서에 언급되거나 교사용 지도서에서 강조하도록 되어 있다. 곧, 학생들의 침묵은 수학 수업이 학생들에게 교과과정을 숙지시키는 데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다. 무엇이 문제인가?

수학 교과서는 설명과 예제, 유제, 연습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설명은 말 그대로 “핵심”을 “간결”하게 서술하는 데 그친다. 때문에 초심자의 이해를 돕기에 부족하다(설명 자체는 훌륭하다). 요새 시끄러운 “스토리텔링”은 초심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심화학습을 목적하는 중급자 이상에게는 싱겁다. 그러니 이도저도 아닌 책이다. 교과과정 전체의 지도를 그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근 단원 시작과 끝에 이전 학년 및 이후 학년과의 연관성이나 이전 학년 내용의 복습을 돕는 내용이 삽입되었으나, 그 역시 학생들에게 충분한 안내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수학 교과서는 교수자의 보조가 있어야만 전체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과서 수준” 이라는 말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다.

수학 교사들은 이러한 내용을 충실히 다루어 주는가? (직간접적인) 경험상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수학 수업은 적당히 내용을 가르치고 공식을 암기하도록 한 뒤 문제풀이 위주로 진행된다. 가끔 학생들이 나와서 풀도록 시키기도 한다. 이런 수업의 문제를 짚자면 끝이 없다. “수학을 왜 배워야 하나요?”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그보다 작은 “이건 왜 배워요?”에도 대답하지 못한다. 또한 문제풀이에 역점을 두면서 “왜 그렇게 풀어야 하는가?”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역설적 방식이다. 숱한 사람들이 경험하여 알듯, 최악의 방식이라는 말이다.

가령 “겹치는 부분은 치환한다”를 생각해 보자. 문자를 이용한 단항식과 다항식의 연산을 배울 때 학생들은 처음으로 수학적 추상화를 배운다(집합이 중학교 과정에서 빠졌기 때문). 수가 문자로 바뀌고, 문자가 식을 이루어 다항식이 된다. 이 때 다항식을 또다른 문자로 놓을 수 있다는 것과 그 의미를 잘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백에 아흔아홉은 지루하게 (a+b)(c+d)=ab+ad+bc+bd 식의 계산을 반복하거나 곱셈공식을 암기시키는 데서 수업이 끝난다. 여기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치환’은 테크닉으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개념의 지도를 그리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개념의 지도”는 해당 내용을 배우는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 줄 때 형성된다. 수열 단원에서 등장하는 계차수열 문제를 학생들은 싫어한다. 어려운 수열 문제에서 늘 출현하고 계산이 귀찮은데 다른 어떤 내용과도 연관되지 않아 쓸모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차수열은 미분에서 배우는 도함수의 예고편이다. 수열의 극한을 배운 뒤 함수의 극한을 배우는 것과, 계차수열을 배운 뒤 도함수를 배우는 것은 같은 원리다. 이러한 연관관계나 전체를 꿰뚫는 원리를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다. 문제 푸는 기술보다 훨씬 중요한 것인데도.

그러면 왜 교사들은 원리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는가? 교과과정의 양이 많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얼핏 보면 그 말이 맞을 수 있다. 한국의 수학 중등교육이 포함하는 분량이 세계에서 손에 꼽는 수준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교과과정의 내용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교과과정을 축소하면 정말 이 문제가 개선될까? 나는 회의적이다. 그럼 수학 교사들의 자질과 헌신도가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예로 제7차 교육과정 인문계열 학생들은 미적분을 배우지 않았다. 그것이 수학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해 주었는가? 미지수다. 한편 중학교 교과과정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중학생들은 더 이상 집합을 배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렇다 해서 ‘수포자’가 줄어들었는가? 이에 관한 정량적 평가를 나는 어디서도 접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최근에 맡았던 학생과의 첫날 대화 한 대목을 옮기고 싶다: “그럼 수학을 언제부터 놓았어요?” “….아마, ‘혼합계산’ 배울 때 였던 것 같아요.” 혼합계산은 초등학교 과정이다. 이래도 교과과정의 양이 문제인가?

수학 교육의 문제는 교과과정의 양보다 수학교육이 놓인 환경에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의 목적은 좋은 성적이다. 어느 수준까지는 교과 이해도를 높이는 것보다 문제풀이 기술을 배우는 것이 (시간 대비) 효율적인 성적 향상을 담보한다. 그러나 기초가 부실하면 멀리 가지 못한다. 결국 수포자가 양산된다. 특히 상대평가는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한다. 제한된 범위 안에서 문제의 난도를 높이다 보면 괴랄한 문제가 출현하고, 그런 문제를 맞히기 위해 사교육을 받으며, 다시 그런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한 문제가 출제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그렇다고 시험이 쉬워지면 실수 확률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무한정 문제풀이를 반복해야 한다(선행학습을 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제한된 시수를 문제풀이에 배분하다 보면 당연히 기본 원리 설명에 할애할 시간은 줄어든다.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낙오를 피할 수 없다. 기본 원리를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 문제풀이를 거듭하면 누구라도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교과 내용을 줄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의 평가방식이 유지된다면 교과과정을 절반으로 줄여도 문제가 눈에 띄게 완화되리라 보기 어렵다. 수학 교사들의 자격과 헌신도를 문제삼는 시각은 여기서 기각된다(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주 특별한 개인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러한 제약 하에서 수학 교사들이 학생들의 교과 이해도 제고를 수업 목표로 택하기 어렵다.

결국, 문제는 교수법의 파행을 낳는 평가방식과 교과서의 한계로 인한 자율학습의 어려움에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수학 공교육 체계는 교수자가 필수적이지만 사실상 교수자가 부재한 것과 같은 상황이며 개인이 공교육 범주 안에서 그를 타개하기 어렵다. 이 중 평가의 문제가 압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평가는 교육의 사회적 역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니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자율학습의 문제에 관해 나는 교과서가 보다 충실한 설명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좋은 참고서가 많이 나와 있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하나, 결국 교과서가 자기완결적으로 학습자를 인도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눈감는다(그리고 ‘참고서’의 설명은 많은 경우 요점정리에 지나지 않는다). 최소한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학생이 수학을 포기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 고교 생활은 수학과의 분투기로 요약된다. 특히 고교 1, 2학년 때 수학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선행학습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고 수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흔히들 부딪히는 삼각함수의 벽에서 포기하고 문과를 택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3학년 때에야 전체 그림을 좀 잡았다. 좋은 설명이 있었다면 시행착오가 덜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그리고 경제학과에 진학하게 되는데…) 그 경험이 수학 과외에는 큰 도움이 되었으나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현재 수학 교과서의 편집 방향은 교육부의 방침이라고 알고 있다. 이 방침을 바꾸어 충실한 수학적 설명을 수록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상한 스토리텔링이 아닌 조밀하고 친절한 설명이어야 한다. 이런 문제를 그대로 둔 채 교과과정의 양을 줄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공교육은 보편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나면서부터 미분방정식을 푸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필요도, 모든 사람을 미분방정식을 풀도록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러나 교과의 기본 원리와 사고방식을 익히도록 돕는 것은 결코 공교육이 버릴 수 없는 책무이다. 해당 목표가 달성되지 않고 있다고 해서 교과과정의 축소를 해결책으로 삼는 것은 문제를 우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경을 해체하겠습니다” 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기실 교과과정의 파행적 운영은 수학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심각한데 단계적 학습이 비교적 중요한 수학에서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본질적 문제와 씨름하지 않으면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반복/재현된다. 평가가 사회시스템의 함수이므로 쉽사리 손댈 수 없으니 그렇다 친다면, 현재의 조건 하에서 수학 교사들의 유인을 재설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단순 성과급제 말고. 단순 성과급제는 평가의 문제를 확대할 것이다). 어쨌든 교육의 제1문제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