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야민 아펠바움, 경제학자들의 시간: 거짓 선지자들, 자유시장, 그리고 사회의 분열

빈야민 아펠바움, 경제학자들의 시간: 거짓 선지자들, 자유시장, 그리고 사회의 분열
빈야민 아펠바움 (Binyamin Appelbaum)
경제학자들의 시간: 거짓 선지자들, 자유시장, 그리고 사회의 분열 (The Economists’ Hour: False Prophets, Free Markets, and the Fracture of Society)
 
대부분의 국가에서 1950년대에 비해 의사가 훨씬 많아졌다. 기대수명도 늘어났다. 경제학자도 많아졌다. 그게 우리의 삶을 어떻게 실질적으로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켰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 빈야민 아펠바움이 팟캐스트 대담에서 던진 도발은 경제학과 대학원생을 낚기에 충분했다.
 
2차 세계 대전 후 경제학자들은 공공정책과 공론장, 나아가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이는 정책의 형태와 목표를 바꾸는 데도 일조했지만 무엇보다 정부 개입의 범위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 적어도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그들은 모든 전선에서 승전을 거듭했다. 아펠바움은 이들 변화가 일어난 시기를 경제학자들의 시간이라고 명명한다.
 
아펠바움의 입장은 단순하다. “경제학 혁명은 너무 멀리 갔다.” “시장은 위대한 발명품이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자유시장이 만들어낸 불평등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즉, 그는 현대 경제학의 기여와 성과를 인정하나 근본적인 시선은 시장을 사회에 배태된 제도로 본 칼 폴라니에 닿아 있다. 실제 본문에서도 저 유명한 “사회와 경제의 이중운동 (dual movement)”을 인용한다. 그렇게 보면 새로울 것이 없다. 이런 책은 2008년 이후 무수히 많이 나오지 않았던가. 자유시장 정책 패키지를 가장 충실히 따른 국가들의 실패를 조망하며 칠레, 피노체트, 아옌데 얘기를 또 꺼내는 대목은 진부하다 못해 고루했다. 그러니 현대 경제학의 모순을 꿰뚫는 통찰이나 통렬한 비판을 바라고 이 책을 집어든다면 십중팔구 실망할 것이다.
 
이 책은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정책과 공론장,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바꾸었는지를 추적하는 저널리즘이다. 그러니까 경제학이 아니라 경제학자 이야기다. 짐작하듯 밀튼 프리드먼과 조지 스티글러를 위시한 70년대 시카고 경제학자들이 주연으로 등장하지만, 이들을 악역으로 묘사하는 진부한 전개를 택하지는 않는다. 아펠바움은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여 이들이 정치인과 일반대중에게 자유시장이라는 사상을 세일즈하는 데 성공하는 과정을 재구성한다. 완전변동환율제 같은 과감한 상상, 비용편익분석처럼 생소한 도구가 현실에 자리잡기까지 누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 때로 어떤 은밀한 배경이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경제학 10년 전공하면서도 처음 보는 이야기가 즐비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답게 글빨 하나는 확실하다. “거짓 선지자” 라는 어그로부터 범상치 않다. 제목의 의미를 넘겨짚자면, 저자는 이름에서 짐작하다시피 유태인이며 거짓 선지자라는 표현-메타포는 성서에서 유래한다. 구약성서가 그리는 거짓 선지자들은 신의 뜻을 사칭하여 임의의 가르침을 전한다. 따라서 자유 시장의 거짓 선지자란 표현은 경제학자들이 자유시장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했다고 비판하면서도 자유시장과 경제학을 부정하지는 않는 그의 입장을 썩 적절하게 요약한다. 저자는 “내 책은 90%가 내러티브고 10%가 판단인데, 어딜 가도 할애된 시간의 90%를 책의 10%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시킨다”고 불평하지만, 어느 정도 제목을 그렇게 지은 탓도 있을 테다.
 
주인공들이 경제학자일 뿐 저자가 어디서 학자들 말 한두 줄 읽고 망상을 투영한 무협지 아니냐는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다. 그는 집요할 정도로 꼼꼼하게 대화록을 찾아내 주석을 달고,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는 경우에도 출처를 최대한 확실히 명기한다. 경제학자들이 직접 진행하는 유명 팟캐스트 EconTalkCapitalisn’t도 인증했다. 우선 Capitalisn’t 호스트인 루이지 징갈레스는 그 자신 시카고 대학교 교수이다. 전형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진보 게스트 여럿을 혹독하게 보내버린 전력이 있는 EconTalk 호스트 루스 로버츠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펠로우)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그는 책에 등장한 이들이 서사에 극찬을 보냈다고 전한다. 그 역시 시카고 경제학 박사로 책에 등장하는 학자 대부분과 친분이 있다.
 
아펠바움 서사의 가치는 무엇보다 경제학이 세계를 변화시키던 영광의 순간에 혁명가들은 당대의 질서(status quo)에 도전하며 치열하게 논증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어느 학문이 그렇지 않겠느냐만 트루먼의 저 유명한 “외팔이 경제학자는 없느냐?”는 말이 시사하듯 경제학은 유독 따지고 논쟁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 상대는 정부 규제와 케인즈일 수도, 또는 불간섭주의 흐름과 프리드먼일 수도 있다. 2000년대 이후 학계에서는 최저임금제에 대한 적대감이 누그러진 것은 물론, 리카도 이래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자유무역도 도전을 피하지 못하여 무역질서 재편의 희생자들을 위한 재분배정책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같은 선상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경제학자라면 누구나 알듯 시장도 완전한 자원 배분 메커니즘이 아니다. 하여 래리 서머스의 “불완전한 시장, 불완전한 정부 중에서는 전자를 택하겠다”는 말은 차라리 솔직하다.
 
경제학자들의 악덕이 있(었)다면, 학계 내에서 네 가정 틀렸다며 벌이는 격렬한 토론과 대중-대학교육 수준 커뮤니케이션은 내용뿐 아니라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 공세적 선교의 시대는 끝나고 “공짜 점심은 없다” 류의 경제학 기본 원칙은 상식 수준으로 자리잡았다. 그렇다면 어떤 명제가 언제 어떻게 성립하는지 따지는 법을 가르쳐야 하지, “경제학자처럼 생각하기”가 <맨큐의 10계명>으로 요약되는 교리문답에 그쳐서는 안 된다. 코로나 초기 마스크 대란에서 보았듯 밑도 끝도 없이 시장 원리 네 글자면 논증이 끝난다고 믿는 경우, 동어반복적 기술통계량 몇 개 들이밀며 경알못들 입 닫으라는 경우를 보면 교리문답의 실패를 통감한다. 한편 하버드 경제학 박사학위에 빛나는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이 반대파가 칠레를 베네수엘라처럼 만들 거라는 프로파간다로(“Chilezuela”) 손쉽게 2017년 선거 승리를 이끌었다는 일화를 보면 그 이상의 악덕을 고발하는 목소리에 대답할 말이 궁색해지곤 한다.
 
그럼에도 늘어난 경제학자 수만큼 세계가 좋아졌냐는 아펠바움의 공박에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다. 지난 20년간 미국 백인 노동자 계층의 자살률, 약물 남용, 알코올 중독이 심각해졌고 그 배후에 장기적인 사회구조 변동이 있음을 체계적으로 보고한 학자들은 프린스턴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튼이었다. 금융위기는 물론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대응에 있어도 경제학 연구 성과는 분명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거짓 선지자라는 놀림에는 여전히 타당한 구석이 있다. 경제학자들이 선호와 제약을 구분하며 드러난 행동의 동기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작지만 확실한 인과적 경로를 찾아낼 때, 나아가 그런 사고방식 전파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때 비로소 야유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학계의 말석에 끼려는 대학원생이 더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상당 부분 일어나고 있는 변화라고 믿는다.
 
 
아래는 간단한 요약. 1-7장은 대체로 괜찮은데 8장부터 좀 늘어지기 시작해서 9, 10장 읽다가 때려치울 뻔했다. 좀 익숙한 독자에겐 차라리 2장 케인즈 대 프리드먼이 장벽일 수도 있다. 워낙 여기저기서 다뤄진 내용이라 지루하다. 1장이 워낙 잘 쓰여져서 더욱 비교체험 극과 극이기도 하고.
 
프리드먼이 제안한 징병제 폐지는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통해 닉슨 행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아카데미 경제학이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1장) 스태그플레이션의 시대를 전후해 무기력에 빠진 케인지언 “행동주의 경제학”을 대체할 새 교의로 통화주의가 등장했다. (2장) 인플레이션 – 실업률 관리 목표가 상충할 때 낮은 실업률을 우선하던 정책 당국자들은 실업률을 다소 희생해서라도 인플레이션을 관리해야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했고, 볼커 시대 이후 2-30년간 각국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관리를 제1사명으로 삼기에 이른다. (3장)
 
레이건 시대에 이르러 로버트 먼델식 감세론과 아서 래퍼의 공급 중시 경제학은 공화당의 기조를 아이젠하워 식 재정 보수주의에서 감세와 정부지출 삭감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4장) 조지 스티글러를 위시한 경제학자들은 반독점 규제의 근간을 공정과 정의 대신 소비자후생과 효율성 보호로 대체하며 법률가들로부터 경쟁법을 빼앗는 데 성공하며, 반독점법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5장) 스티글러의 세례는 공화당과 보수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카터는 탈규제를 밀어붙였고, 그의 단임 임기 중에 규제산업의 대표이던 항공업을 자유화시켰다. (6장) 이 즈음 비용편익분석은 정책평가방법론의 주류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래도 생명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고 믿던 진보 진영이 추진한 공공 및 직장 내 안전 규제가 번번이 비용편익분석의 벽에 부딪혔을 때, 이들의 제일 조력자는 다름아닌 생명의 가치를 높게 산출한 경제학자 킵 비스쿠시였다. 그렇게 모두가 비용편익분석으로 개종한다. (7장)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언이 불가피했다 해서 그 출구가 반드시 변동환율제가 될 필요는 없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스미소니언 협정). 그러나 프리드먼 등의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통화가치의 불안정성을 억제한다는 논리로 변동환율제를 탄생시켰다. 약속했던 통화가치와 무역질서 안정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8장) 자유 시장 경제학의 가장 충실한 학생들은 경제 발전에 실패했다. 시카고 보이들이 경제정책을 주도한 칠레와 공대식 계획경제 타이완의 대조가 이를 보여준다. (9장) 아이슬란드의 이전가능 어업권 쿼터제는 금융화와 맞물려 막대한 경제 붐을 가져왔지만, 잔치가 끝났을 때의 대가도 컸다. (10장)
 
마지막으로. 칼럼니스트라 그런지 챕터 작제 실력이 나쁘지 않다. 단순 패러디가 아니라 챕터 내용도 훌륭하게 요약하는 한편, 생각해 보면 내용 자체가 원 맥락과 적절한 대조를 이룬다.
  • 3장. One Nation, Under Employed (링컨의 One Nation, Under God)
  • 4장. Representation Without Tax (물론 보스턴 티파티의 No Tax Without Representation)
  • 5장. In Corporations We Trust (물론 In God We Trust)
  • 6장. Freedom from Regulation (규제로부터의 자유 – 루스벨트의 4대 자유)

쉽니다.

2년차 시작하고부터 이미 정전 상태였지만 아마 무기한으로 블로그를 쉴 듯 합니다. 서지관리에 대한 포스팅을 정리하던 게 있는데 그건 언젠가 올리겠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접속하시는 것 같아서 남겨 둡니다.

 

저출산의 청구서로서의 성별 임금격차, 그리고 미래

6월 초 경향신문에서 노동연구원 자료를 인용하여 “왜 여성 임금은 20대 후반부터 남성보다 떨어질까” 라는 표제의 기사를 냈다. 기사가 정리한 바를 옮겨오면 “남성의 임금은 연령에 따라 꾸준히 증가해 40대 후반에 최고점을 맞고 점차 하락한다. 반면 여성은 20대 중반까지는 남성과 임금 격차가 없지만 20대 후반부터 40대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남성 대비 상대임금이 감소한다. 특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에 급격하게 감소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금 더 쉽게 풀어쓰면, 성별 임금격차는 노동시장 진입 직후에 발생하며 20대 후반-30대 초반에 급격히 확대된다. 그 후 남성 임금상승률이 여성을 압도하며 고착된다. 

논쟁적인 주제인 만큼 실증의 역할이 크다. 해당 보고서는 성별로 생애주기에 걸친 임금 변동 양상을 추정한 결과를 논거로 제시한다. 이는 통상의 성별-연령별 평균임금 단순비교에 비해 체계적이다. (*연령-소득곡선 추정이라고 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생애주기 경로를 따르므로 연령별 평균임금 단순비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비교적 간단한 테크닉이지만, 최근 국내 데이터로 이런 분석을 한 자료는 내가 아는 한 이 보고서 뿐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왜 (여전히) 이런 현상이 관측되느냐는 것이다.

경력단절이 범인인가? 저자들은 경력단절을 겪은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임금 변동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한다. 경력단절이 출산 후 임금격차가 심화되는 현상을 거의 설명하지 못하며, 최근 세대에서 이런 현상이 더욱 뚜렷하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임금 격차 확대가 일자리 지속 여부보다는 결혼·출산이라는 생애사적 사건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맞벌이(였던) 부부들에게는 뻔하다 못해 진부할, 결혼-출산 전후 역할 분담, 그에 따른 부부 시간배분 전략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이야기다. 기실 “M-커브”로 상징되는 한국의 악명 높은 경력단절 현상이 2010년대 후반 들어 서서히 완화 중이기도 하다.

저출산의 청구서로서의 성별 임금격차, 그리고 미래
(경력단절과 무관하게 임금비 추세선은 하락한다.)
저출산의 청구서로서의 성별 임금격차, 그리고 미래
(M-커브는 완화되는 중이다.)

한국보다 사정이 낫다는 서구권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관측된다. 지난 2월 북유럽 (스웨덴, 덴마크), 독일어권 (독일, 오스트리아), 영미권 (영국, 미국) 6개국 데이터를 동원하여 출산이 성별 임금격차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이 나왔다. 해당 논문은 첫 출산 전후 성별 임금격차의 변동 양상을 분석한다. 곧, 출산 후 겪는 임금 하락을 “자녀 페널티”로 정의하고 자녀 페널티의 크기를 국제비교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정도를 달리할 뿐 6개국 공히 여성이 더 심한 자녀 페널티를 겪는다.

여러 요인을 통제하고 나면 출산 이전 임금 변동 양상은 성별로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가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한다. 출산 직전 자신의 임금을 기준으로, 남성 임금에는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여성 임금은 출산 즉시 최소 20% (덴마크)에서 최대 90% (오스트리아) 하락하며, 시간이 흘러도 과거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여성이 출산 5년차부터 10년차까지 겪는 남성 대비 손실은 연평균 최소 20-30%에서 (북유럽) 최대 50-60% (독일어권)에 달한다.

저출산의 청구서로서의 성별 임금격차, 그리고 미래

저출산의 청구서로서의 성별 임금격차, 그리고 미래

저출산의 청구서로서의 성별 임금격차, 그리고 미래

현상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여성이 일자리를 잃거나 (약한 형태의 경력단절), 일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여성의 시간당 임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영미에서는 경력단절이, 독일어권/북유럽에서는 노동시간이나 임금률 하락이 주된 요인으로 보인다고 보고한다. 세계 최고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작동하는 스칸디나비아에서조차 이런 현상이 관찰된다는 사실은 현상 배후에서 작동하는 사회경제적 힘의 크기를 시사한다. 한국에서 관찰된 현상 역시 유사한 메커니즘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육아부담으로 대표되는 각국의 문화나 젠더 규범이 죽여도 죽지 않는 히드라처럼 수면 밑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그 많은 노동시장 정책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논문에 따르면 육아휴직 확대 내지 육아보조 정책은 장기적으로 자녀 페널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단기에는 정책이 관용적일수록 페널티가 커진다. 가령 스웨덴 여성들이 덴마크 여성들에 비해 더 큰 임금 하락을 겪는 이유가 스웨덴 육아휴직 정책이 덴마크에 비해 “널널하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이 해석이 출산-육아정책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불이익이 가장 적지 않은가? 단지 정책이 만병통치약이 아니었거나 (자녀 페널티를 완화하지 못함), 긍정적 효과가 공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자녀 페널티를 유발). 강고한 시장주의자라면 경제정책은 만능이 아니며, 고용을 규제하면 임금이 반응한다는 단순한 원리가 재확인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한편 스칸디나비아 사례는 저출산-성별 격차라는 동전의 양면을 보다 선명히 드러낸다. 차별이 개입될 여지가 가장 적은 곳에서 나타나는 출산 전후 임금격차에 대해 차별과 직종분리에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따라서 스칸디나비아의 자녀 페널티는 논문의 정의처럼 순수한 자녀양육의 비용, 한 명의 아이를 국가공동체에 공급하기 위해 여성들이 치르는 비용일 가능성이 크다. 남성 대비 20-30% 낮은 임금. 출산이 선택이 아니던 시절 저 비용은 청구될 수 없었다. 하여 대부분의 국민경제는 여성의 생산성을 지불하여 미래 세대를 얻는 균형에 머물렀다. 아예 출산아 수가 여성의 생산성을 의미하던 시대 역시 먼 과거가 아니다. 여성이 출산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된 오늘에서야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한국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누가 그 비용을 치를 것인가? 

유럽 저출산의 원인을 분석한 다른 논문은 출산의 생물학적 주체, 여성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할 것을 주문한다. 해당 연구는 가구 내 육아 분담 양상이 출산 결정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아이는 부부가 상호동의해야 탄생하는데, 육아 부담이 여성에 집중될수록 여성들이 출산을 거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출산 국가에서 남성이 육아부담을 덜 부담했다. 여기서 가구 전체가 아니라 여성의 자녀 양육 부담 경감에 특화하는 정책이 효과적이리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역시 국가공동체가 자녀 페널티의 원인을 없앨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다.

저출산의 청구서로서의 성별 임금격차, 그리고 미래

개인적으로는 해당 논문의 결론에 동의한다. 생물학적 제약을 완전히 제거하는 <멋진 신세계> 식 중앙보육제도가 도래하지 않는 한 육아부담은 여성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가계가 아이를 공급하는 시스템을 지속하고자 한다면 부담을 경감시켜야 한다. 2018년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미혼 남성 70%가 자녀를 원하지만 미혼 여성들은 50%만이 그렇게 응답했다. 여성들은 자녀를 원치 않는 이유로 자유를 잃으리라는 점을 들었다. 위 논문의 논지에 부합하는 사례다. 그들의 처방을 따르자면 이 수치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여성에게 충분한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10억을 주면서” 육아에 전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면 없던 설득력이 생겨난다는 밈이 있는 만큼 어느 정도 효과가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저출산의 청구서로서의 성별 임금격차, 그리고 미래

그런데 2015년만 해도 여성의 70%가 출산 의사를 밝혔다. 3년 동안 전국 가구 내 역할 분담이나 성별 임금격차 양상이 크게 바뀌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결국 인식의 문제로 돌아오는데, 3년간 20%p라는 변화 속도는 다소 충격적이다. 더하여 아이를 원하는 미혼 남성의 비중 역시 3년간 10%p 줄어들었다. 이쯤 되면 지속적인 출산율 하락에도 불구하고 미혼 청년의 7-80%가 자녀를 원했다는 점을 신기해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데이터가 튀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이 급격한 변화를 이끈 요인에 관한 체계적인 분석은 애석하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이들 연구가 주는 교훈은 답보다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경력단절 문제에 있어 한국의 변화는 긍정적이나, 인구감소와 젠더 갭을 동시에 상대한 해외 국가들이 먼저 도달한 미래가 마냥 장밋빛이 아닌 까닭이다. 한국은 그들의 정책처방을 따라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공산이 크다. 서구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녀 페널티를 줄이는 정책을 벤치마킹할 것인가? 이미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하는 국가에서 서구의 질문과 답을 차용해야 하는가? 혹은, 우리는 정말 그런 정책처방으로 저출산을 극복하고자 하는가?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제목 다는 것도 그렇고 쓰는 데 꽤 애먹었다. 이 주제를 오래 고민해 보았지만 내가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은 아직 이 정도로 그치는 듯하다. 단기적인 처방은 그렇다 쳐도 장기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고등교육 (human capital supply = efficiency unit supply) 은 정의 외부성 (positive externality) 의 교과서적 예시다. 교육의 개인적 편익이 사회적 편익에 미치지 못해서 교육(받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수준보다 적게 공급되며, 따라서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 한국은 인구공급 (단순 labor supply) 역시 이런 틀로 논의해야 할 때를 맞은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의심이 있다.

 

학술 저작 레퍼런스:

노동연구원 보고서.

최세림, 방형준. 2018. “생애주기에 따른 성별 임금격차: 결혼과 출산의 영향을 중심으로”. 한국노동연구원.

논문 1. Kleven, Henrik, Camille Landais, Johanna Posch, Andreas Steinhauer, and Josef Zweimüller. 2019. “Child Penalties across Countries: Evidence and Explanations.” AEA Papers and Proceedings, 109 : 122-26.

논문 2. Doepke, Matthias, and Fabian Kindermann. 2019. “Bargaining over Babies: Theory, Evidence, and Policy Implications.” American Economic Review, 109 (9): 3264-3306.

피터 자이한,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2018.

원제는 The Accidental Superpower (2014). 박사과정 시작하고 오랜만에 읽은 책. 꽤 흥미로웠다. 워낙 화제가 되었듯 썰 푸는 솜씨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긍정적인 서평이 숱하게 있으니 굳이 그에 한 마디 거들 필요는 없겠다. 몇 가지 생각만 적어 본다.

교역은 왜 발생하는가? 국가별로 자원이 다르고 기술(생산성)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좀 더 세련되게 말해 국가별로 비교우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부존자원에 중심을 두는 경제모형을 헥셔-오린 모형이라고 한다. 지난 20년간 국제경제학자들은 헥셔-오린 모형이 오늘날의 국제무역 패턴을 거의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대체로 합의를 보았다. 현실에서, 그리고 이론의 세계에서, 교역의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기업이며, 생산성 높은 기업이 수출기업이 되어 더 넓은 시장을 상대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수확체증이 무역으로부터의 이익을 낳는다.

이 책의 주장을 요약하면 결국 이러한 변화가 미국이 세계의 바다를 감시하여 지정학의 작동을 중단시키고, 교역비용을 낮춘 데 기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감시자 역할을 그만두면 이 체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국제 분업은 느슨해지고 세계는 지역화되어, 저자의 용어를 빌리면 홉스적 국제질서가 귀환한다. 여기까지는 흥미롭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저자는 인구구조와 자본, (부활한) 지정학을 이용해 일련의 예측을 전개하는데, 이 모든 내용이 내게는 미국의 퇴장이 경제의 초점을 생산성에서 부존자원으로 옮길 것이라는 주장으로 읽힌다. 이 말은 홉스적 국제질서와 함께 맬서스 트랩이 귀환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 대목은 납득하기 어렵다.

한편 저자는 셰일 혁명과 함께 미국 GDP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는 점을 들어 미국이 교역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제무역이 일국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교역량으로만 측정할 수는 없다. 다국적 기업의 현지생산 등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가격을 통한 일반균형 효과는 간접적이지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과연 찬란한 고립 (splendid isolation) 하에서 “아마존 효과” 가 발생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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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또다른 의문은 미국의 국내정치 동학이다. 세계화는 분명히 일국의 후생, 쉽게 말해 실제로 향유하는 소비수준을 상승시키지만 임금불평등 확대에 기여한다. 이 논리가 역으로 작동한다고 하면 탈-세계화는 임금불평등을 완화시키는 대신 실질소득을 감소시킬 수도 있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다 같이 평등하게 못 살게 될 수 있다는 이야기. 임금불평등 감소가 먼저 나타나면 그나마 낫다. 불평등은 그대로인데 실질소득만 감소하면 저소득층의 불만이 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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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그나마 세계화의 파급효과에 대한 이론적 예측이 역으로도 성립하는 경우다. 탈-세계화의 결실이 에너지 기업과 (비교적 교역로 방비 필요성이 덜한) 테크 기업들에게 집중되어 불평등이 확산되면 미국 소비자-유권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이미 경제학자들이 고작 1년 남짓 진행된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가 미국의 물가를 상승시키는 한편 공화당 지지 지역에 더 큰 타격을 입혔다고 추정하고 있다. 다가올 미 대선이 이 동학의 향방을 보여줄 공산이 크니, 굳이 용감하게 예측을 내놓진 않겠다.

간단히 말해 저자는 미국이 경제적 계기로 관조자 내지 은둔자로 돌아서리라 주장하지만, 경제의 내생성에 대해서는 눈감는다. 미국이 “가장 관대한 제국”으로서 세계화의 문을 열고 그 문지기 역할을 해왔지만, 문지기가 높은 통행세를 요구하거나 어느 날 사라진다 해서 문이 닫히거나 그 자리가 무주공산이 될까? 여기서 이 책에 대한 견해가 갈린다고 본다. 정도를 달리할지언정 자유무역이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해) 비가역적인 효과를 낳았다고 믿는다면 비교적 비판적이고, 그렇지 않다면 수용적이겠다. 나는 어쨌든 전자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회의를 거두기 어렵다. 

혹자는 팍스 로마나 시대 로마 지식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비웃을지 모른다. 글쎄, 연료 전망 비관론 (“성장의 한계”), 자원 전망 비관론 (“애그플레이션”)은 어땠나? 교역비용의 비가역적 상승은 자원 부족이 아니라 자원 교환 부족을 의미하므로 결이 다른가? 예언자들은 언제나 이번에는 다르다고 설교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미합중국 군대를 배후에 둔) 미국 군사 기업이 세계 교역로를 경비하며 막대한 흑자를 기록하는 세계를 상상하는 편이 더 쉽다. 우주개발에도 민영자본이 참여하는 세상에 항로 경비라고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물론 다 박사과정 나부랭이의 아무말이다. 나는 지정학도 국제정치학도 알지 못하며, 언제나 그렇듯 이런 거대한 이야기와 상극이고, 거대한 예측과는 더욱 그러하다.

무역전쟁이 2018년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

트럼프 행정부가 기어이 유럽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벌일 모양이다. 기념으로(?) 트럼프 무역전쟁이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을 추정한 최신 논문 두 편 간단히 소개해 본다. 둘 다 내로라 하는 학자들이 썼다. 결론부터 말하면, 물론 소비자 생산자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먼저 Mary Amiti 뉴욕 연준 이코노미스트, Stephen Redding 프린스턴대 교수, David Weinstein 컬럼비아대 교수의 추정에 따르면, 2018년 내내 실질소득 감소(관세로 인한 후생손실) 폭이 확대되어 11월에는 월간 14억 달러에 달했다. 1월부터 11월까지의 누적액을 추계하면 실질소득 감소분이 69억 달러, 소비자 및 수입업자에게 전가된 관세가 123억 달러에 달했다. 한편 지난 30년 통틀어 2%p 상승하는 데 그친 생산자물가도 11개월 만에 1%p 상승했다.

무역전쟁이 2018년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

저자들은 해당 수준의 관세가 지속적으로 부과될 경우 연간 1,650억 달러 ($165 billion) 상당의 무역량이 소멸하거나 미국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리라고 예측했다. 달리 말해 글로벌 가치사슬 자체가 재편성되고 미중 양국에 투자했던 기업들에게 그 비용이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이야기.

한편 Pablo Fajgelbaum UCLA 교수, Pinelopi Goldberg 예일대 교수 및 세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Patrick Kennedy 버클리 교수, Amit K. Khandelwal 컬럼비아대 교수는 좀 더 흥미로운 실증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이들의 추계에 의하면 2018년 한 해 동안 관세로 인한 물가 상승이 야기한 소비자 및 생산자후생 손실은 688억 달러. 정부의 관세수입 및 미국 생산자들이 얻은 혜택을 감안해도 78억 달러이다 (앞서 11개월 69억 달러와 대충 비슷한 수치). 심지어 상대국의 보복관세가 없었다고 해도 40억 달러 정도 손실을 기록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렇다면 이 손실은 누구에게 집중되었는가? 저자들은 공화당 지지 성향 지역의 교역재 산업 노동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고 보고한다. (“We find that tradeable-sector workers in heavily Republican counties were the most negatively affected by the trade war.”)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 관세는 주로 정치적 경합 지역을 더 보호했고 특정 당 지지세가 뚜렷한 지역을 덜 보호했다. 그마저도 민주당 지역이 더 보호되었다. 문제는 보복관세를 얻어맞은 산업이 공화당 지역에 주로 분포했다는 것이다. 하여 공화당 지역 실질임금 감소 폭이 경합지역이나 민주당 지역보다 컸다. 저자들은 이 결과로부터 보호무역주의가 그 지지자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진부하지만 강렬한 해석을 제시한다.

무역전쟁이 2018년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

무역전쟁이 2018년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

국내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였던 철강관세처럼 다수 국가를 상대로 한 관세도 있지만, 역시 태평양을 사이에 둔 중국과의 무역전쟁이 이 결과를 불러온 주 요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서양 전선을 열어 양면전쟁을 한다면 어떻게 될지 나로선 짐작할 수도 없다. 미국인들, 감세로 몇 푼 돌려받는 건 아무것도 아닐 텐데… Make America Great Again!

Peer Quality and the Academic Benefits to Attending Better Schools (J of Labor Econ, 2018)

이번에 Journal of  Labor Economics에 나온 논문 한 편 소개한다.


좋은 고등학교에 가면 대입에 유리할까?

학업성취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기존 문헌에서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교사 수준. 친구들 수준. 그리고 학교 간 자원 수준 차이(흔히 학급 크기로 측정). 정책적 관점에서, 이들 중 주된 요인을 식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정책처방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중국의 교육행정데이터를 실증분석하여 이 질문의 답을 제공한다. 이들에 따르면 중국의 고입은 과거 한국의 경우처럼 선발시험을 치르고 지망학교 순위를 적은 원서를 제출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합불합 여부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철저히 성적에 의해 결정된다. 이 때 최상위권 학교에 소위 “문 닫고 들어간” 학생들과 “아깝게 떨어진” 학생들의 3년 뒤 (대입시험) 성취도를 비교하면 “좋은 학교 효과”를 측정할 수 있다. (회귀단절 디자인)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일반적으로/평균적으로 좋은 학교 간다고 대입 시험 더 잘 보지 않는다.
2) 최상위 학교에서만 성적 향상 효과가 나타난다. 주어진 자료 하에서, 이 차이는 급우 수준 차이로 설명이 안 되고(합격 커트라인에서 성적분포에 “점프” 가 없음) 학교 간 자원 격차(학급 크기)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이를 설명하는 요인은 뛰어난 교사 비중이 최상위권 학교에서 급격히(불비례적으로;disproportionately) 증가한다는 것뿐이다.

이 결과가 어느 나라에서나 성립한다고 보긴 어렵다. 가령 대입에서 정성적 자료의 영항력이 커질수록 좋은 학교가 신호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중등교육 이상으로 일반화하기도 어렵다. 대학교육에서는 피어그룹 효과가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다. (e.g Sacerdote 2001, QJE) 그럼에도 비교적 최근의 한국과 유사한 제도적 여건에서 나온 결과는 참고가 될 만하다고 여겨진다.

* 저자들은 두 가지 회귀단절 추정을 시행했다. 하나는 “더 좋은 학교에 가는 게 도움이 되는가?”를 추정하는 multiple cutoffs 모형. 다른 하나는 “일류 학교에 가는 게 도움이 되는가”를 추정하는 single cutoff 모형. 학교 급간별로 나타나는 선택편의 문제도 최대한 다루었다. 자세한 사항은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