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모리스 (2014), 이재경 역 (2016), 『가치관의 탄생 (Foreagers, Farmers, and Fossil Fuels)』 . 서평과 메모 중간 어디쯤.
“에너지 획득 방식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가치관을 결정한다”는 간단하지만 논쟁적인 명제를 방대한 리서치에 입각해 논증한 책. 도덕과 윤리의 총체로 여겨지는 “가치관”의 기초에 실상 도덕이 없음을 보이려는 기획이다. 전작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확장팩으로도 읽힌다. 저자가 빅 히스토리를 조직하고 전개하는 솜씨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본인 주장 – 논평 – 재반론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구성도 훌륭하다.
내용 요약에는 큰 의미가 없어 생략한다. 이 책의 탁월성은 앞의 두 가지, 방대한 사례를 거시적 안목으로 엮어내어 명제를 뒷받침했다는 점과 비판-반비판을 수록하여 논의의 깊이를 더했다는 점에 있다. 주장 자체가 참신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모든 주장이 새로울 필요는 없다. 논증의 문제는 언제나 근거이지 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모리스의 주장을 “인류 가치관 변천사를 꿰뚫는 수량적 거시지표가 존재하며 그에 따른 설명은 다음과 같다.” 라고 생각하면 보기에 따라 새로울 수는 있다. 그가 수량경제사(cliometrics)가 아니라 고고학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나는 거시적 시각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거시적 설명에는 환원주의가 불가피하다. 추상이란 으레 그런 법이지만 보통 미시방법론은 그런 경향이 덜하다. 모리스가 채택한 지수화 비교 기법(전작의 사회발전지수, 본작의 에너지 획득량)은 환원 그 자체다. 지수는 현실의 다면성을 체계적으로 사상하는 도구이며 지수화는 필연적으로 논의를 일차원으로 축소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단점이 장점을 능가한다. 따라서 연구자는 먼저 지수의 장점 내지 불가피성을 해명하고, 이어서 지수 산출 메커니즘을 설득해야 한다.
전작에 5점 만점에 5점을 주었지만, 본문에서 저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수중에 책이 없어 확인할 수 없는데, 부록에서 더 궁금한 사람은 자신의 웹페이지를 참고하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서 서두에서 모리스는 “세상의 모든 학자는 환원주의자다”라며 정면승부를 건다. 재반론 섹션에서 지수 도입의 필요성과 산출 메커니즘의 제문제도 간략하나마 해명하며 두 책의 핵심 방법론을 방어해낸다. 이 책이 전작의 확장팩 격으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전작을 낸 뒤 “유물론자이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라는 평가를 들었다고 쓴다. 내가 마르크스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과연 그런 것 같다. 이 책의 논지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테제,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토대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구성된다. 마르크스 역사이론에서 생산관계와 계급 분화, 생산력-생산관계의 갈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모리스는 생산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생산관계는 일절 논하지 않는다. 모리스의 논의는 마르크스 테제와 거리가 있는 셈이다.
오히려 이 책은 현대 경제학의 시각과 친화적이다. 효용함수, 비용-편익분석 등의 개념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핵심 논지를 조금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가치관과 물리적 현실은 분리할 수 없다. 물리적 현실은 가치관을 담는 그릇이다.” “문화적 융통성 자체도 우리의 생물학적 본질의 일부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융통성에는 환경 변화에 대응해 우리의 효용을 계속 극대화하기 위한 핵심가치 재해석 능력도 포함된다.” 효용극대화가 제일목적이라니, 역사학자가 쓴 글 맞나 싶을 정도다. 논평자 리처드 시퍼드 교수도 이 부분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환경 변화에 대응한 핵심가치 재해석 능력이 곧 가치관 변형 능력이다. 그러니 가치관이 효용극대화를 위해 변한다는 관점은 지극히 기능주의적이다. 결국 제약하의 최적화를 달성하기 위해 효용함수가 동태적으로 변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좀 우겨 보자면 요소편향적 기술진보를 상정한 경제성장이론과도 통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더하여 저자는 시퍼드 교수의 비판에 이렇게 응수한다. “시퍼드 교수는 해답이 “감성으로 유지되는 가치관”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가치관을 말하는 걸까? 아쉽게도 거기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 시장이 세상의 걱정을 모두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기후문제에는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매우 놀랐다. 과문한 탓인지 인문학 교수가 이런 식의 주장을 펼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가치관이 아니라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 본질이라면 가치관은 더 이상 정오 내지 우열이 아니라 유효성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이 결론은 내 평소 생각과 일치한다. 과거가 되어 버린 세계의 기준으로 쓰여진 기록을 현대의 시각으로 평가·비판하는 행위에는 큰 의미가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보자. 현대기준-과거비판의 대표 주자 중 하나는 PC를 과거(동화 등)에 대입하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과거기준-현대비판의 대표 주자는 기독교다. 기독교의 근간에는 유목사회 가치관이 있으며 이는 야훼와 바알의 대립으로 상징된다. (단, 모리스는 이 책에서 유목사회를 거의 다루지 않았고 그 점을 한계로 인정한다.) 내가 보기에 그 가치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러면 기독교 역시 기축시대의 종교로 이제 시효를 다했는가? 답은 아직 미지수지만, (적어도 내게는) 중요한 질문이다. 아, 내 질문 방향이 “유효했”음을 확인했다는 덤도 이 책에서 얻은 수확이다.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 중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밝혔듯 거시를 덜 선호하는 취향도 깨뜨릴 정도로 괜찮은 책이다. 이 책이 내 올해의 책이 될까? 작년에는 역대급 책인 Goldin & Katz의 『The Race between Education and Technology』가 있어 전작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를 2016 올해의 책으로 뽑지 못했다. 올해는 어떨지 궁금하다. 그런데 8월에 박사과정 들어가면 당분간 책을 읽지 못할 테다. 3개월 안에 더 나은 책을 찾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론이 어딘가 우습지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