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거스 디턴,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 2014.

앵거스 디턴,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 2014.

앵거스 디턴,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 2014.

작년 피케티 열풍 당시 한국경제신문에서 그 대항마로 내밀었던 책이다. 서문과 에필로그만 읽고 일단 꽂아 둔다는 것이 벌써 6개월 되었다. 밀린 숙제 하는 기분으로 ‘읽어 치운다’.

책 앞표지에는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진시키나”, 뒷표지에는 “정통 주류경제학자가 밝히는 불평등 그리고 빈곤 해소의 대안”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불평등이 촉발하는 성장을 찬미하기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자신의 책이 피케티의 대립항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디턴은 오히려 무척 어이없어했을 것이다. 디턴은 이 책에서 특별한 대안을 내놓기보다는 역사적 서술 및 현재 당면한 문제의 분석에 치중하며, 에필로그에 와서야 낙관론을 개진한다. 그러나 그 낙관조차 의기양양한 선언과는 거리가 멀다. 가령 에필로그에서 그는 “미국의 경우 현재와 같은 극단적인 소득과 부는 100년 이상 본 적이 없다. 부의 엄청난 집중 현상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파괴의 숨통을 막아 민주주의와 성장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조심스럽게 낙관한다”고 쓴다. 다른 대목에서 그는 불평등을 “장애”로 묘사한다. 광고에 낚여 책을 구매했다면(이런 사람들에는 나도 포함된다) 속은 기분마저 들 정도다. 어쨌든, 책의 표지를 떼어 버린다면 편견 없이 내용에 접근할 수 있을 듯하다.

책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인류는 경제성장에 힘입어 “삶, 죽음, 질병으로부터의 대탈출”을 해왔다. 비록 최근 성장세가 흔들리고, 불평등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인간의 “탈출” 욕구는 뿌리깊은 것이며 “탈출”의 역사와 수단에 관한 지식은 부의 집중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는다. 정체된 듯한 발전의 지표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온 진보가 막대했다는 증거다. “탈출”에 성공하는 국가들이 많아지며 새로운 불평등과 문제가 야기될 것이나, 이러한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전반적으로 텍스트가 잘 조직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처에서 경제학자 특유의 “on the other hand”가 명시적/암시적으로 드러나는데, 구조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각 장의 요점과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남겨 둔다.

1-2장은 기대수명, 웰빙지표, 사망률, 의학의 발달에 관해 서술하며 발전의 역사를 추적한다. 3-4장은 국가 간 사망률, 기대수명 및 영양실조 지표를 이용하여 “사망/죽음의 불평등”에 관한 논의이다. 소득이 높은 국가일수록 기대수명이 길고, 영아사망률이 낮으며, 영양공급이 잘 되어 있다는(평균신장을 대리변수로 이용) ‘당연한’ 결과와 함께, 기대수명 증가율의 정체 등이 비관론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이 부분은 교과서를 읽는 듯 지루했다.

5장은 경제성장과 빈곤의 관계를 논의한다. 1973년 이래 미국의 경제성장은 멈추지 않았으나 빈곤율은 감소하지 않았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빈곤선(poverty threshold)이 함께 상승했기 때문인가? 디턴은 여기서 미국의 빈곤선이 절대적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 입안자조차 동참한) 개혁 요청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인플레이션 보정을 제외하면 1963년에 산출된 빈곤선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니 빈곤율의 정체는 빈곤선의 지나친 상승에 기인하지 않는다. 디턴은 대신 빈곤 측정의 다른 문제에 의해 공식 수치에 정부의 빈곤 경감 프로그램 성과가 반영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빈곤율 통계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불분명한’ 주장을 내놓은 뒤, 숙련편향적 기술진보에 따른 불평등 문제를 개관한다.

이어 그는 자연스럽게(!) 상위 소득 점유율 변화와 함께 Piketty-Saez(2003) 방법론(세금 영수증을 이용한 Top Income의 역산)을 내놓는다. (피케티는 이 외에도 몇 번 더 인용된다.) 그는 피케티 연구를 폄하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 연구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빈곤 문제 해결에 진전이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고 평가한다. 6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에 따라 야기되는 불평등을 다룬다. 과거에 비해 국가 간(inter-national) 불평등은 줄어들고 국가 내(intra-national) 불평등은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 제시된다. (이는, 내가 알기로, 불평등 논의에서 합의된 몇 항목 중 하나다.)

7장에서 디턴은 국제원조의 비효율성(내지 무용성)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는 “1인당 0.3$만 기부한다면 세계 빈곤이 해결됩니다” 식의 슬로건을 한 쪽에서 물을 공급하면 다른 쪽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 여기는 수력학적 접근(hydraulic approach)이라 부르며 이것은 곧 원조 환상(aid ilusion)이라 단정한다. 이의 연장에서 “최빈국이 발전의 사다리에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수준의(최소한의) 원조”를 주장하는 제프리 삭스는 가장 강력한 비판 대상이다.

이 주장은 단순히 복지(=국내원조)가 야기하는 문제가 국제원조에서도 재현된다는 논리에 기반하지 않는다. 흔히 국내 원조를 둘러싼 논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조가 인센티브를 왜곡하여 빈곤의 영구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단순 실업급여가 음의 순임금을 발생시켜 노동의욕을 하락시킨다는 것은 신고전학파 노동공급모형의 가장 간단한 확장이다) 그러나 국제원조의 문제는 원조가 수혜국 빈곤층의 행태에 미치는 영향이 아닌 수혜국 정부의 행태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 일반적으로 정부의 예산제약은 세금에 의해 결정된다. 정부지출이 비효율적일 경우 (민주주의에서는 선거에 의한) 정치적 피드백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다. 바꾸어 말하면 방만한 재정지출의 기회비용은 집권자의 임기이고, 따라서 정부는 정치적 합의 하에서 예산 지출/세금 인상을 단행해야 한다.

그러나 국제원조가 존재할 경우 정부는 정치적 책임을 크게 지지 않고도 원조금에 의해 예산제약을 확대할 수 있다. 이는 결국 권위적 정치체제 및 엘리트의 부패로 연결된다. 책에 나오는 사례에서도 나타나듯, 여러 실무적 문제에 의해 기부국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복잡한 조건을 설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부패는 피할 수 없다. 간단히 애쓰모글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논지를 빌리면, 민주주의는 포용적 정치제도로써 정치권력의 적절한 분배와 사유재산권의 보장을 통해 포용적 경제체제와 보완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국제원조는 민주주의의 환류 기능을 약화시켜 수혜국의 정치제도가 포용적 정치제도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거나 민주주의를 착취적 경제제도로 회귀시킨다. 그리고 “악순환은 착취적 정치제도에서 비롯된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낳고, 이어 경제적 부와 권력으로 정치권력을 살 수 있으므로 착취적 경제제도 역시 착취적 정치제도를 뒷받침한다.” 디턴의 눈으로 볼 경우 국제원조야말로 ‘사다리 걷어차기’인 셈이다. (단..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관계는 그 역사만큼이나 복잡한 논쟁이다.)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은 추천사에서 7장을 원용하여 대북 원조 중단을 주장한다. 대북 원조가 북한 정권(=착취적 정치체제)의 존속을 지속시키는가? 나는 북한 전문가가 아니지만 정황상 그럴 것이라는 추측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나는 대북원조를 디턴이 보여준 원조국-수혜국의 구도에 대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경제학자보다는 국제정치학자의 목소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원조를 중단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가? 이 주장은 당장 신문만 펴도 알 수 있는 중국의 존재를 무시하는 견해다. 다시 말해 “원조가 자생적 기반 형성을 저해한다”는 디턴의 논지에 따른 원조 중단은 무의미하다. “친중, 통미봉남” 등 북한의 행태에 따른 외교역학을 배제하더라도 저 주장은 잘못되었다.

어쨌든, 통일을 하지 않더라도 평화체제의 구축은 반드시 달성되어야 할 목표다. 원조를 시작으로 경제적 교류를 확장하고 공동의 이해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당장 개성공단이 그러한 목표 하에 운영되고 있지 않는가.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개성공단이 닫혔고, 실제 폐쇄 이후 재가동되기도 했으나, 규모가 더욱 커질 경우 외교가 경제적 교류를 차단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그리고 경제의 상호의존성은 전쟁의 기회비용 중 하나이며 무력충돌의 사전적 제동장치로 작동한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큰 관계가 없는 두 국가는 전쟁의 기회비용이 상대적으로 작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두 국가가 전쟁을 벌이기란 어렵다. 대북관계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차후 방침은 달라질 것이다. 통일로 가는 주춧돌이건, 평화체제 구축의 시발점이건, 원조는 그를 위한 비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한반도 문제에서는 보다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짐작컨대 추천사는 책을 꼼꼼히 읽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되었을 것이다.)

디턴은 전반적으로 건조한 어조를 유지한다. 그러나 7장의 끝에서 그는 다분히 경제학자답게도 이렇게 쓴다.

“프린스턴대학의 학생들이 세상이 더 살기 좋고 부유한 곳이 되도록 돕는 데 깊은 도덕적 의무감을 품고 찾아와 이야기하는 경우, 나는 이런 아이디어에 대해 토론하며 학생들이 장래 소득에서 십 퍼센트를 기부하려는 계획, 이것도 해외 원조 금액을 늘리려는 계획에서 이들을 멀리 떼어놓는다. 나는 학생들에게 정부에 대항하지 말고 자신의 정부 안에서 일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해치는 정책을 중단하도록 정부를 설득하고, 세계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국제 정책을 지원하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아직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의 탈출을 위한 진정한 방책이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가령 정부에 대항해야 하는 이유는 빈곤 외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진보의 믿음은 도덕적 동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디턴은 지루한 도표를 들여다보며 연구했을 것이며 독자인 나도 꼼꼼히 읽으려 노력했다.

어딘가 아쉬운 독서. 주 논지를 파악하려면 5-7장만 읽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디턴은 영국사를 언급하며 키스 토머스나 로이 포터 등 역사학 권위자들을 인용한다. 경제학자가 역사학자를 인용하는 풍경이 사뭇 낯선 한편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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