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중등교육을 둘러싼 잡음에 관한 단상

수학 교과과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 있는 모양이다. 난 수학/수학교육의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6년간 고교 수학 과외 선생 노릇을 해온 경제학도로서 드는 생각을 난삽하나마 정리해 본다.

새로 맡은 학생과의 첫만남에서 나는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진다. “원이 뭔가요?” (“한 점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라는 원의 정의는 중학교 1학년 때 배운다.)

열의 여섯은 잠깐 생각하다 답을 내놓는다. 그러면 이어서 묻는다. “원의 방정식이 어떻게 되나요?”

여섯 중 넷은 암기한 대로 대답한다(넷은 여기서 포기). “엑스제곱 더하기 와이제곱은 알제곱이요.” 역시 이어서 묻는다. “그게 무슨 뜻이죠?”

“방금 말한 원의 정의를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대답한 학생을 나는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네?” 하더니, 앞서 물어본 질문을 생각하고 “아하!” 하는 학생도 한 번 본 일이 있다(여기까지만 되어도 괜찮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은 “선생님, 그거야말로 무슨 말씀이시죠?”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이 때 당황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이어 간다. “좌표평면에서 두 점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구하죠?”(이건 중학교 3학년 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운 뒤 배운다.)

공식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학생은 편안한(?) 마음으로 아예 처음부터 공사를 시작한다(원의 정의도 마찬가지). 내가 맡았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식을 암기하고 있었는데, 이런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착잡해진다. “그 공식과 원의 정의를 합치면 원의 방정식이 나와요. 앞으로 이런 것 계속 물어볼 거예요. 수업 시작합시다.”

이런 문답은 학생들이 어디서부터 개념의 연결고리를 놓쳤는지 점검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리고 이건 원 말고 다른 개념으로도 가능하다. 가령 “이차방정식의 근과 계수의 관계”,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 “완전제곱식”, “제곱근의 정의”의 연속기도 유용하다. 어쨌든, 비극은 내가 묻는 내용이 무슨 비기(秘技)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내가 묻는 내용은 전부 교과서에 언급되거나 교사용 지도서에서 강조하도록 되어 있다. 곧, 학생들의 침묵은 수학 수업이 학생들에게 교과과정을 숙지시키는 데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다. 무엇이 문제인가?

수학 교과서는 설명과 예제, 유제, 연습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설명은 말 그대로 “핵심”을 “간결”하게 서술하는 데 그친다. 때문에 초심자의 이해를 돕기에 부족하다(설명 자체는 훌륭하다). 요새 시끄러운 “스토리텔링”은 초심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심화학습을 목적하는 중급자 이상에게는 싱겁다. 그러니 이도저도 아닌 책이다. 교과과정 전체의 지도를 그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근 단원 시작과 끝에 이전 학년 및 이후 학년과의 연관성이나 이전 학년 내용의 복습을 돕는 내용이 삽입되었으나, 그 역시 학생들에게 충분한 안내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수학 교과서는 교수자의 보조가 있어야만 전체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과서 수준” 이라는 말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다.

수학 교사들은 이러한 내용을 충실히 다루어 주는가? (직간접적인) 경험상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수학 수업은 적당히 내용을 가르치고 공식을 암기하도록 한 뒤 문제풀이 위주로 진행된다. 가끔 학생들이 나와서 풀도록 시키기도 한다. 이런 수업의 문제를 짚자면 끝이 없다. “수학을 왜 배워야 하나요?”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그보다 작은 “이건 왜 배워요?”에도 대답하지 못한다. 또한 문제풀이에 역점을 두면서 “왜 그렇게 풀어야 하는가?”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역설적 방식이다. 숱한 사람들이 경험하여 알듯, 최악의 방식이라는 말이다.

가령 “겹치는 부분은 치환한다”를 생각해 보자. 문자를 이용한 단항식과 다항식의 연산을 배울 때 학생들은 처음으로 수학적 추상화를 배운다(집합이 중학교 과정에서 빠졌기 때문). 수가 문자로 바뀌고, 문자가 식을 이루어 다항식이 된다. 이 때 다항식을 또다른 문자로 놓을 수 있다는 것과 그 의미를 잘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백에 아흔아홉은 지루하게 (a+b)(c+d)=ab+ad+bc+bd 식의 계산을 반복하거나 곱셈공식을 암기시키는 데서 수업이 끝난다. 여기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치환’은 테크닉으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개념의 지도를 그리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개념의 지도”는 해당 내용을 배우는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 줄 때 형성된다. 수열 단원에서 등장하는 계차수열 문제를 학생들은 싫어한다. 어려운 수열 문제에서 늘 출현하고 계산이 귀찮은데 다른 어떤 내용과도 연관되지 않아 쓸모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차수열은 미분에서 배우는 도함수의 예고편이다. 수열의 극한을 배운 뒤 함수의 극한을 배우는 것과, 계차수열을 배운 뒤 도함수를 배우는 것은 같은 원리다. 이러한 연관관계나 전체를 꿰뚫는 원리를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다. 문제 푸는 기술보다 훨씬 중요한 것인데도.

그러면 왜 교사들은 원리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는가? 교과과정의 양이 많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얼핏 보면 그 말이 맞을 수 있다. 한국의 수학 중등교육이 포함하는 분량이 세계에서 손에 꼽는 수준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교과과정의 내용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교과과정을 축소하면 정말 이 문제가 개선될까? 나는 회의적이다. 그럼 수학 교사들의 자질과 헌신도가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예로 제7차 교육과정 인문계열 학생들은 미적분을 배우지 않았다. 그것이 수학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해 주었는가? 미지수다. 한편 중학교 교과과정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중학생들은 더 이상 집합을 배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렇다 해서 ‘수포자’가 줄어들었는가? 이에 관한 정량적 평가를 나는 어디서도 접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최근에 맡았던 학생과의 첫날 대화 한 대목을 옮기고 싶다: “그럼 수학을 언제부터 놓았어요?” “….아마, ‘혼합계산’ 배울 때 였던 것 같아요.” 혼합계산은 초등학교 과정이다. 이래도 교과과정의 양이 문제인가?

수학 교육의 문제는 교과과정의 양보다 수학교육이 놓인 환경에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의 목적은 좋은 성적이다. 어느 수준까지는 교과 이해도를 높이는 것보다 문제풀이 기술을 배우는 것이 (시간 대비) 효율적인 성적 향상을 담보한다. 그러나 기초가 부실하면 멀리 가지 못한다. 결국 수포자가 양산된다. 특히 상대평가는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한다. 제한된 범위 안에서 문제의 난도를 높이다 보면 괴랄한 문제가 출현하고, 그런 문제를 맞히기 위해 사교육을 받으며, 다시 그런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한 문제가 출제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그렇다고 시험이 쉬워지면 실수 확률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무한정 문제풀이를 반복해야 한다(선행학습을 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제한된 시수를 문제풀이에 배분하다 보면 당연히 기본 원리 설명에 할애할 시간은 줄어든다.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낙오를 피할 수 없다. 기본 원리를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 문제풀이를 거듭하면 누구라도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교과 내용을 줄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의 평가방식이 유지된다면 교과과정을 절반으로 줄여도 문제가 눈에 띄게 완화되리라 보기 어렵다. 수학 교사들의 자격과 헌신도를 문제삼는 시각은 여기서 기각된다(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주 특별한 개인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러한 제약 하에서 수학 교사들이 학생들의 교과 이해도 제고를 수업 목표로 택하기 어렵다.

결국, 문제는 교수법의 파행을 낳는 평가방식과 교과서의 한계로 인한 자율학습의 어려움에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수학 공교육 체계는 교수자가 필수적이지만 사실상 교수자가 부재한 것과 같은 상황이며 개인이 공교육 범주 안에서 그를 타개하기 어렵다. 이 중 평가의 문제가 압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평가는 교육의 사회적 역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니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자율학습의 문제에 관해 나는 교과서가 보다 충실한 설명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좋은 참고서가 많이 나와 있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하나, 결국 교과서가 자기완결적으로 학습자를 인도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눈감는다(그리고 ‘참고서’의 설명은 많은 경우 요점정리에 지나지 않는다). 최소한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학생이 수학을 포기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 고교 생활은 수학과의 분투기로 요약된다. 특히 고교 1, 2학년 때 수학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선행학습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고 수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흔히들 부딪히는 삼각함수의 벽에서 포기하고 문과를 택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3학년 때에야 전체 그림을 좀 잡았다. 좋은 설명이 있었다면 시행착오가 덜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그리고 경제학과에 진학하게 되는데…) 그 경험이 수학 과외에는 큰 도움이 되었으나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현재 수학 교과서의 편집 방향은 교육부의 방침이라고 알고 있다. 이 방침을 바꾸어 충실한 수학적 설명을 수록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상한 스토리텔링이 아닌 조밀하고 친절한 설명이어야 한다. 이런 문제를 그대로 둔 채 교과과정의 양을 줄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공교육은 보편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나면서부터 미분방정식을 푸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필요도, 모든 사람을 미분방정식을 풀도록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러나 교과의 기본 원리와 사고방식을 익히도록 돕는 것은 결코 공교육이 버릴 수 없는 책무이다. 해당 목표가 달성되지 않고 있다고 해서 교과과정의 축소를 해결책으로 삼는 것은 문제를 우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경을 해체하겠습니다” 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기실 교과과정의 파행적 운영은 수학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심각한데 단계적 학습이 비교적 중요한 수학에서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본질적 문제와 씨름하지 않으면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반복/재현된다. 평가가 사회시스템의 함수이므로 쉽사리 손댈 수 없으니 그렇다 친다면, 현재의 조건 하에서 수학 교사들의 유인을 재설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단순 성과급제 말고. 단순 성과급제는 평가의 문제를 확대할 것이다). 어쨌든 교육의 제1문제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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