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 2016.
이 책은 젊은 나이에 눈부신 성취를 이룬 저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기록이다. 저자 폴 칼라니티는 인도계 미국인으로 스탠퍼드, 케임브리지, 예일에서 학위를 받았다.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영문학도로 출발하여 의학과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탐구의 일환으로 신경외과 의사가 되었다. 모교 스탠퍼드대학교 병원 교수직을 제의받기 직전 폐암에 걸려 서른여섯에 사망했다.
저자는 먼저 의사가 되기까지 거친 지적 여정을 회고한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한사코 거부했던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돌아온 길을 이야기 형식으로 술회한다. 그리고 암 투병을 겪으며 경험한 지적·생애적 전환을 기술한다.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지 않는다. 의사이자 철학자로서의 사유를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어린 딸을 생각할 때를 제외하면 격정적인 대목이 없다. 한창 삶의 의미를 고민할 때, 언젠가 죽음을 대면한다면 쓰고 싶다 생각한 글의 전범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담담하게 글을 남기는 사람은 드물다.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묻는다. 칼라니티가 의사로서 남들보다 오래 독립을 지킬 수 있었기에 이 기록이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몇 주 전, 말기 난소암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여성이 뉴욕타임스에 자기 남편은 좋은 사람이며, 함께 해줄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기고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녀도 전업 작가였다.
읽기 힘들었다. 늘상 들여다보는 책과 달리 수식은커녕 도표 하나 없었고 문장도 평이했다. 분량도 적었다. 그럼에도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반 이상 느렸다. 어머니를 떠올린 까닭이다.
나는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하길 바랐다. 어머니는 간호사, 종교인이자 “똑똑한 셋째 누나”였다. 글도 잘 쓰셔서 학부모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도 몇 차례 하셨다.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다. 간호사로서 가진 난소암에 대한 지식과 경험, 살고 싶다는 소망, 목회자로서 의연하게 하느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해하지는 못했다. 어째서 병증에 대한 지식이 공포로만 귀결되는가.
길을 찾기 위해 나는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싯다르타 무케르지가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에 “암 환자는 생의 새로운 정상상태(new normal)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쓴 말을 옮긴 날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말은 뒷전이고 내가 상황을 파악하려 그 두꺼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더 기뻐했다. 답답했다.
칼라니티의 수려한 문장을 빌려 그런 어머니를 조금 이해했다. 그는 어린 딸 케이디에게 짧은 편지를 남긴다.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생애사 정리를 권할 게 아니라 내가 귀 기울였어야, 길 잃은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갔어야 했다.
톨스토이는 죽어가는 인물의 심리를 충격적인 묘사로 정리한 바 있다. “아무도 그를 그가 원하는 만큼 동정하지 않았다.” 이 무심한 자는 그 대목을 읊조리면서도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인텔리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귀가 없단 말인가.
책을 다 읽고 며칠 뒤 꿈을 꾸었다. 얄궂은 꿈이었다. 초기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했다. 재활 중 눈 뒤에 악성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시간이 교묘히 뒤틀려, 첫 수술 때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 재활을 다짐하며 같이 잘 해보자고 말할 때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의사는 두 번째 종양 소견을 내놓으며 리스크가 크니 선택은 본인의 몫이라고 말했다. 말의 심연 속에서 한참 헤매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다. 돌아보지 않던 얼굴이었다. 한참 울다 깨어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목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구약성서 창세기가 연상되는 표현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보다 세련된 언어로 나를 일깨워 주어 감사하다. 바람 된 그의 숨결이 안식하기를 빈다.
“나는 스탠퍼드에서 영문학을, 케임브리지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며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 나는 죽음의 두 가지 수수께끼인 경험적인 징후와 생물학적인 징후, 즉 아주 인격적이면서도 철저히 비인격적인 측면들을† 파헤치기 위해 의학을 탐구했다.”
“폐암 진단은 확정되었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무척 익숙했던 죽음이 이제 내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죽음과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지만, 아직 죽음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치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이 남긴 발자국을 보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할 텐데, 기로에 선 내 앞에 보이는 거라곤 텅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유한성에 굴복한다. 이런 과거 완료 상태에 도달한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대부분의 야망은 성취되거나 버려졌다. (..) 돈, 지위, <전도서>의 설교자가 설명한 그 모든 허영이 시시해 보인다. 바람을 좇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 : 역자는 “personal and impersonal”을 “개인적이면서도 비개인적인”이라고 옮겼다. 문맥상 “인격적이면서도 비인격적인”이 맞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