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 1주차

박사과정 첫 학기 첫 주가 끝났다. 사무실을 배정받았고, 시간표가 대략 확정됐고, 할 일도 정해졌다.

퍼듀 대학교는 학기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박사과정의 경우 변형된 학기제를 운영한다. 한 학기를 두 개의 모듈(module)로 나누어 모듈이 바뀌면 수강 과목도 모두 바뀐다. 수업 밀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보인다. 이번 모듈에 수강하는 과목은 총 3+1과목으로 표준 커리큘럼 구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선 Micro Theory 1, Macro Theory 1, Math for Econ이 있고, P/F 과목인 Teaching Economics(“경제학교수법”)가 있다.

미시 수업은 하루 휴강해서 아직 감이 안 잡힌다. 경제학교수법은 부담이 크지 않다. 첫 주 수업에서는 교수님이 대충 경제학원론 첫 수업에 해당하는 내용을 샘플로 강의해주고 본인 강의를 평가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 샘플 수업의 내공이 어마어마해서 비판할 게 많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원론조차 직관보다 수리적 전개 중심이었다. 그래서 직관적으로 가르치라는 말이 잘 와닿지 않았는데, 40분짜리 강의를 들으면서 마음 속으로 무릎을 얼마나 쳤는지 모른다. 하아.

거시는 신고전파 성장이론을 중심으로 거시에서 쓰는 도구(dynamic programming과 그 수리적 배경)를 훈련할 것 같다. 수업이 아주 건조하다. 농담은 커녕 미소조차 짓지 않고 수식을 적어 내려가는 교수님을 보고 있자면 참… 식 전개도 스킵하는 경우가 많아서 진도가 아주 빠르다. 특이한 점은 optimal control을 아예 배제하고 시작했다는 거다. 석사 때 거시에서도 Bellman Equation을 배웠지만, 사실 cake-eating problem 수준에서 끝났고 Ramsey model 등은 전부 optimal control로 간단하게 풀고 넘어갔다. 여기서는 optimal control 따위 언급조차 하지 않고(…) 바로 discrete time model로 시작한다. 아직 별 문제는 없지만 Hamiltonian 사용하는 방법은 언급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경제수학은 최적화이론을 자세히 다룬다. Math Camp 없이 수업을 시작해서, 수강한지 5년 넘은 선형대수 지식을 끌어오는 데 좀 시간이 걸렸다. 인간적으로 1주일은 math camp 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경제수학 가르치는 분은 본인이 쓴 교과서를 갖고 있다. 경제수학의 바이블 Simon & Blume (1994)보다 1년 먼저 나온 책이고 매우 컴팩트하게 쓰인 책이다. 정작 수업은 그냥 강의노트로 한다. 원래 이 분이 작년까지 미시도 담당했는데 올해부터 바뀌었다고 한다. 고년차 학생들 얘기를 들어 보니 일단 바뀐 게 잘 된 것 같긴 한데, 미시 시험을 보면 또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겠다만, 수학 수업과 미시 수업 분위기가 같아지는 건 끔찍할 것 같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공부에 전력투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퍼듀는 모든 입학생에게 TA 의무를 부과한다. Fellowship을 받더라도 부담이 절반으로 줄어들 뿐 TA를 해야 한다. 나는 매주 한 시간동안 40명의 학생을 데리고 리뷰 세션을 진행하고, 역시 매주 4시간의 office hour를 운영해야 한다. 끔찍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TA를 하려면 영어 말하기 능력 시험에 통과해야 하는데, 5점 차이로 떨어져서 ESL를 수강해야 한다. ㅋㅋㅋㅋㅋㅋㅋ… 이 ESL이 매주 4+1+0.5시간을 잡아먹는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견뎌내야 한다.

그래도 공부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앞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장단기 목표도 모두 정해져 있다. 물론 험난한 과정을 마치고 박사를 받는다고 해서 밝은 미래가 보장되진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나는 간신히 TOP50 안 프로그램에 들어왔고, 경제학 유학 나오는 사람은 나 내지는 앞뒤 세대가 가장 많을 것이다. 한국 대학 임용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으며, 정출연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많이 유지될지도 미지수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고개를 들지만,

안토니오 그람시에게 다시 기대어 보자.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 본시 진지전에 임하는 혁명가의 말이지만 이제는 탈맥락화되어 독자적인 의미를 획득했으니 그냥 내 맘대로 쓰기로 한다. 앞으로 망하기만 하라는 법은 없잖은가. 이 곳에서 내가 어떤 연구자로 준비될 것이고, 어떤 연구를 하게 될 지에 집중하는 게 우선이다. 여기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다 쓰고 나서 비관해도 늦지 않다. 따지고 보면 유학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 나날도 있었다.

나올 때, 내가 아는 모든 교수님이 생각을 복잡하게 하지 말라고 조언하셨다. 특히 1년차 때는 더더욱. 다행히 예전과 달리 잡상에 시달리지 않는다. 얻어맞기 전에는 계획이 그럴 듯 한 법이니, 시험 한 번 말아먹으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차피 퀄 떨어지면 그 뒤의 일은 아예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고, 지금부터 플랜 B를 준비하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어리석은 일이다. 다시, 오늘에 집중하면 된다는 결론이다. 20대 초중반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이런 마인드로 지낼 것이다. 당장의 과외 염려는 여자친구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고, 이 역시 내가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지난 12월에 나는 썼다. “먼 길을 돌아온 미련한 자에게 기회가 허락되기를 빈다.” 기회는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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