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읽은 책

작년에는 총 30권(시리즈물은 1권으로)의 책을 읽었습니다. 개인사와 학위논문이 겹쳐 책을 많이 읽지 못했네요. 앞으로도 주로 전공서나 논문을 읽을 것 같아서 단행본 독서량은 줄어들 듯… ㅠㅠ 어쨌든 읽은 책을 별점과 함께 소개해 봅니다.
* 5점 만점이지만 인플레를 막으려고 점수를 짜게 매기는 편이라, 사실상 4점 만점으로 보시면 됩니다. 별 4개 반-5개는 최소 “올해의 책”인 것이지요.

 

2016년 읽은 책 (분야, 별점(5점 만점) 순)

I. 교양(인문, 자연)

  1.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이언 모리스 ★★★★☆
  2.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김시덕 ★★★★
  3.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
  4. 나는 고백한다, 현대 의학을, 아툴 가완디 ★★★★
  5.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박훈 ★★★☆
  6. 노벨상과 수리공, 권오상 ★★★☆
  7. 번역의 탄생 이희재 ★★★☆
  8. 갈등하는 번역, 윤영삼 ★★★☆
  9. 틀리지 않는 법, 조던 엘렌버그 ★★★
  10. 자유를 위한 탄생: 미국 여성의 역사, 사라 에번스 ★★★
  11. 플루토크라트,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
  12. 글쓰기 달인이 되려면 잘못된 문장부터 고쳐라, 박찬영 ☆

 

II. 경제

  1. The Race between Education and Technology, Goldin & Katz ★★★★★
  2. 환율의 미래, 홍춘욱 ★★★★
  3. 파생금융 사용설명서, 권오상 ★★★★
  4. 기아와 기적의 기원, 차명수 ★★★☆
  5.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
  6.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아비지트 배너지 & 에스테르 듀플로 ★★★☆
  7. 기업은 투자자의 장난감이 아니다, 권오상 ★★★☆
  8. 부동산은 끝났다, 김수현 ★★★☆

 

III. 소설

  1.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
  2. 채식주의자, 한강 ★★★★
  3.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더글러스 애덤스 ★★★☆

 

IV. 종교

  1.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게르트 타이센 ★★★★
  2. 떠나보낸 하느님, 돈 큐피트 ★★★☆
  3. 세속도시, 하비 J. 콕스 ★★★
  4. 종교의 세속화: 사회학적 관점, 이원규 ★★☆
  5.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 톰 라이트 ★☆

 

덧. 2016년 경제학 학술논문 (practical issues) Best 3

  1. Autor (2015), “Why Are There Still So Many Jobs? The History and Future of Workplace Automation”,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2. Gentzkow & Shapiro (2014), “Competition and Ideological Diversity: Historical Evidence from US Newspapers”, The American Economic Review.
  3. Gentzkow & Shapiro (2006), “Media Bias and Reputation”,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Autor(2015) 아주 쉽고 분량도 30페이지가 채 안 됩니다. 수식도 하나 없고요. 장담하는데 제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잡서 100권보다 나을 겁니다. 이쪽 관심 있으신 분들 읽어 보세요. Gentzkow & Shapiro(2014)는 저것보단 좀 어려운데 반지성주의와 정치적 양극화 시대의 미디어 산업, 특히 이념적 다양성을 이론적/실증적으로 다루는 멋진 논문입니다.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2013.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The Why Axis: Hidden Motives and the Undiscovered Economics of Everyday Life), 2013.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2013.

무엇이 서평쓰게 하는가?

읽는 재미가 있는 실험경제학 교양서. 최전방 연구자들이 2013년에 출간한 만큼 최근 연구 사례가 잘 정리되어 있다. 전반적 톤이 유쾌하다. 이런 농담도 던진다. “전통적 경제학에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므로 기부를 부탁하는 다이렉트메일을 그저 씩 웃으며 던져버리리라 추측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전부 이기적인 것은 아니고 심지어 경제학자들 중에도 친절한 행동에 친절하게 보답하고 싶어하는 좋은 사람이 있다.”

저자들은 화려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입담으로 자신들의 연구 분야를 세일즈한다. “사람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가 통상 경제학의 금과옥조다. 이 책은 한 걸음 나아가 사람이 ‘어떤’ 인센티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주목한다. 저자들은 경우에 따라 비금전적 인센티브가 금전적 인센티브만큼 중요하며, 무작위대조실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 RCT)이 인센티브의 종류와 정도를 식별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설파한다.

성 격차(2, 3장), 교육과 불평등(4, 5장), 차별(6, 7장), 공공정책(8장), 자선사업(9, 10장), 기업활동(11장) 등 다양한 사례가 근거로 동원된다. 내용을 떠나 글에 흡인력이 있다. 만만치 않은 액수의 실험연구 예산을 확보한 비결을 알 법하다. 읽다 보면 우울한 과학에 오염된 나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 읽을 때쯤 서평 많지 않으니 하나 쓰는 게 어떠냐고 쿡쿡 찌른다. 관심 있게 읽은 대목 위주로 정리했다.

성 격차(gender gap)의 원인은 무엇인가? 노동경제학자들은 이 주제를 오랫동안 탐구해 왔다. 최근 성별 교육수준 균등화에 따라 학력의 영향이 줄어들자 연구자들은 인적자본이론 바깥에서 원인을 찾는다. 저자들은 성별 경쟁심리 차이를 든다. 여성이 남성보다 경쟁적 환경을 덜 선호하며, 근로계약조건을 협상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도 더 많다는 것이다. 군인은 남성, 간호사는 여성 식의 성별 직종분리(occupational segregation) 현상도 경쟁심 차이로 설명한다.

문제는 본성과 사회적 학습 중 경쟁심 차이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nature vs. nurture”). 이 문제는 단순히 계량경제학을 적용하기 어렵다. 경쟁심 측정이 어렵다는 점을 둘째 치더라도, 기존 데이터가 문화적 요인에서 자유롭지 않다. 서구사회에서의 실험 역시 무의미하다. 저자들은 실험을 위해 부계•모계사회로 떠난다. 실험 결과를 토대로 이들은 사회적 학습이 경쟁심리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문화적 요인에 따라 여성은 남성만큼, 혹은 그보다 더 경쟁심이 강할 수 있다 (Gneezy, Leonard, List 2009, Econometrica).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2013.
마사이족이 부계 사회, 카시족이 모계 사회다.

이는 성 담론뿐 아니라 정책에도 시사점을 갖는다. 생물학적 요인의 영향이 지배적이라면 남성에게 유리한 교육환경이나 노동시장 관행 개선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청(소)년-성인 타겟팅). 사회적 요인의 영향이 크다면 여자아이들이 조기에 경쟁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아동 타겟팅). 저자들은 후자의 손을 들어 주면서 성별 사회화 양상을 바꾸기 위해 “남학교와 여학교를 분리하는 시스템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다른 실험에서 모계사회 구성원들에게서 이기심이 덜 나타났다고 보고하며, 저자들은 “여성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라고 ‘경제학스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학교 성별 분리 주장은 일견 당황스럽지만 논리적이다. 똑같이 시험 만점 받아도 여학생은 별 말 없이 넘어가고 남학생은 칭찬한다면 경쟁심은 다르게 발달할 것이다. 남자 형제를 둔 여성에게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들이 인용하는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교사들이 평균적으로 남학생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인다. 성별을 분리하면 그런 요인이 원천차단된다.

발전된 논의를 접해보지 못한 탓인지, 경제학을 못해서인지 동의하기 어렵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아닐까. 진부한 이야기지만, 이성과 인간 대 인간으로 공존하는 법은 매우 중요하고 조기에 익혀야 한다. 나는 학교가 최소한의 시민윤리 교육의 일환으로 이를 가르쳐야 하며 남녀공학이 그에 알맞는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곳에서 습득할 수 있다면 고려해 볼 수 있겠지만, 1자녀 가구가 늘고 하다못해 교회 출석인구도 줄어드는 마당에 어디서 배우겠는가?

양육이 본성보다 경쟁심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과 여성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인류를 구원할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모계 문화에서만 발현된다면 양육의 영향이 큰 것이므로 여성성으로 명명할 수 없다. 게다가 모계문화가 여성 가부장제일 뿐이라면?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는 대답은 유전자를 특정하지 못하는 한 결국 “우리들의 무지(our ignorance)”를 인정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대목이었다고 생각한다. 괴테를 꼭 오마쥬하고 싶었던 걸까

챕터 마지막에서 당혹감이 짙어진다. “끝으로, 효과적으로 경쟁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행복해지는 열쇠는 아니다. 마음의 평정은 자신의 직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 부모로 이웃으로 살아가면서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딸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힘빠지는 문장이다. 마음의 평정이라니? 동네 목사님 설교라면 납득할 수 있겠다. 청교도적 발상이 아니라는 학교 성별분리도 의심스러워진다. 페미니즘 찬반여부를 떠나, 경제학자의 글쓰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육과 불평등을 다룬 4-5장은 새롭지 않다. 시카고 교육정책 개혁에 실험적 방법을 응용한 사례를 중심으로 내용을 풀어 간다. 학업성취도 증진을 위해 어떤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공부는 내적 동기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일회성 보상이 장기적으로는 악영향을 미친다”는 통설에 근거가 희박하다고 말한다. 일회성 보상엔 분명히 학업성취도 증진 효과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긍정적 효과가 없지만 부정적 효과도 없다. 아동교육정책에 조기개입이 중요하다는 결론은 체티(Chetty), 헤크만(Heckman)의 유명한 연구와 궤를 같이한다. (여담으로 내 부모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런 약속을 하지 않으셨는데, 10년 전으로 돌아가서 이 책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전과목 만점을 받은 날 부모님은 탕수육을 하나 시켜 주셨다. 다음날 그 이야기를 들은 담임 선생이 그게 다냐며 어이없어하던 표정이 기억난다. 흑.)

6-7장 차별의 경제학은 교과서적이다. 게리 베커 스타일 선호에 의한 차별(discrimination by preference)과 통계적 차별(statistical discrimniation, 책에서는 경제적 차별이라는 용어 사용)을 설명하고 차별 원인을 식별한 실험사례를 소개한다. 장애인에게 더 비싼 가격을 부르는 자동차 딜러들이 차별주의자인가? 실험 결과는 그들이 합리적 선택을 할 뿐 차별주의자가 아님을 시사한다. 딜러들이 장애인들이 딜러를 여럿 만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가격을 책정한 것. 결국 차별이 타인에 대한 적의에 기반하면 선호에 의한 차별, 불완전정보 하 이윤극대화의 결과라면 통계적 차별이다. 국내로 눈을 돌리면, 최근 논란이 된 서강대 쥬시 아르바이트 채용 공고가 전형적인 통계적 차별 사례다.

저자들은 현대 미국에서 선호에 의한 차별보다 통계적 차별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주장은 시사점이 뚜렷하다. 통계적 차별 완화에는 할당제 등 적극적 평등실현조치(affirmative action)보다 경제주체들 간 정보전달(signalling)을 원활하게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다. 장애인 의무고용법보다 비장애인과 생산성 차이가 없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돕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것. 정보경제학의 전형적 결론이다. 소비자가 기업에 정보를 제공하는만큼 기업은 그 정보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밝혀야 한다는 결론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박사과정 지망생으로서 명문대 교수인 저자들에게 묻고 싶었다. “지원자들이 정보(GPA, SOP, 연구경력, 추천서 등)를 제공하는 만큼, 정보가 심사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공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8장 공공정책의 경제학은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라는 “미국적이지 않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넛지>처럼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실험을 통해 알아낸 사례를 소개한다. 아무런 물음 없이 기본값을 정해 버리는 넛지 방식(별도의 의사 표명 없다면 장기를 기증)에 도덕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과정을 간소화하고 선택의 결과를 알려주는 뉴슨스nuisance 방식(의사 표명할 경우 장기 기증하지 않음)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여기서부터 책이 좀 지루해졌다. 시카고 범죄통계시스템 구축을 오라클에 의뢰하고, 조건으로 전국 경찰서에 DB를 팔아주겠다고 했다는 대목이 가장 흥미로웠다. 한국이라면 경찰청이 통합 DB 사업 발주하고, 사업은 하청에 하청을 거쳐…(이하 생략)

9, 10장 자선사업의 경제학은 기부행위의 동기를 밝히고 기부액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찾는다. 사례 자체는 모두 흥미롭다. 자선단체에 기업경영 방식을 도입한 스마트트레인 소개, 기부 동기의 이중성(자기만족, 이타심)을 분석하며 이기적 이타주의(egoistic altruism)를 말하는 과정은 꽤 읽을 만 하다. 여러 기부 요청 방법 실험을 일일이 소개할 때 조금 호흡이 늘어지지만 능란한 글솜씨 덕분에 무난하게 읽힌다.

내가 이 장에서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한 이유는 이 문제에 관심이 없으며, 기부 문화가 미국보다 덜 활성화된 한국인이기 때문인 것 같다. 경제학의 합리성 가정 비판에 익숙한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이 장에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 나온다. “인간의 행동이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동기를 이해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각자 충족하려고 애쓰는 서로 다른 욕구와 필요는 전통적이고 제한적인 전제, 고정관념,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방법, 전통적 행동방식에 맞지 않는다.”

저자들은 끝까지 실험의 우월성을 역설한다. 좀 과격한 표현이지만 외팔이 경제학자 – “on the other hand”가 없는 – 느낌. 이 책에서만큼은 균형잡힌 안내자보다 세일즈맨을 자처하는 듯하다. 연구 파트너나 기금 지원자에 대해 후하게 서술할 때면 그런 느낌이 두드러진다. 후반부로 갈수록 방법론 홍보를 위해 무리수를 던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실험이 기업활동 혁신을 돕는다는 주장(11장)은 성기고 동어반복적이다. 실험을 종용하는 에필로그도 비슷하다. RCT의 한계와 향후 연구 전망을 정리하며 마무리하는 편이 더 나았으리라 생각한다. 세일즈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다 이해할 수는 있겠다.

짧은 독서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실험경제학이 다른 분야보다 교양서에 적합한 것 같기도 하다. 일화로 각색하기 편하다. 이 책이나, 역시 RCT를 활용한 개발경제학의 간판 스타 에스테르 듀플로의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가 앵거스 디튼의 <위대한 탈출>, 앤서니 앳킨슨의 <불평등을 넘어>보다 재미있었다. 둘 중 관심분야를 뽑으라면 후자인데도 그랬다. (전자 그룹이 20세 이상 젊은 것도 한 이유겠다. 후자 그룹과 동년배인 탈러의 <넛지>는 아주 지루했다.)

경제학은 인간이 합리적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있는가? 이 책은 그러한 비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알리는 훌륭한 전도서다. 쉽게 쓰려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추론을 따라가는 재미도 있다. 베개맡에 두고 가볍게 읽기 좋다. 경제학 연구자들이 인간행동 원리를 밝히기 위해 생각보다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입문 강의 보충자료로 써도 좋겠다. 여전히 표준 원론 교과서로 군림하는 <맨큐의 경제학>에는 적어도 5판까지 실험경제학 관련 내용이 없다시피하다.

대가의 깊이를 원하는 독자에겐 다른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은 학술적 토론에서 성공한 논거를 위트 있게 소개하지만, 엄밀한 논리를 전개하지는 않는다. 책의 강점인 다양한 사례 전부가 새롭지도 않다. 1장의 유치원 원장 사례부터 스티븐 레빗이 <괴짜경제학>에서 다룬 에피소드다. 관련 독서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을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관심 분야만 골라 읽거나 성평등, 자선사업의 경제학 부분만 읽어도 충분하다. 그래도 저자들의 필력을 감상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번역도 괜찮다.

케네스 포머란츠,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 한국어 번역본은 지뢰밭이다.

이번 달에는 케네스 포머란츠의 역저 『대분기』를 반드시 다 읽겠노라 다짐하고 읽기 시작했다. 4일 만에 결론을 내렸다. 국역본은 초벌번역 수준도 안 되는 지뢰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읽어 보려다가 79페이지에서 인내심이 다하고 말았다. 왜 4일 동안 100페이지도 못 읽었는가 하면, 번역 때문에 도무지 몰입이 안 된다.

웬만하면 번역은 그러려니 하는데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책의 분량이 많고 포메란츠 교수의 문장이 간결미와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넘어가기 어렵다. 유사한 주제, 유사한 볼륨인 이언 모리스 저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번역은 읽을 만했던 것으로 기억하건만.

투박한 직역으로 문장과 단어의 어감을 살리지 못한 것은 예사다. 아예 기본적인 뜻을 틀리거나 문장을 제멋대로 잘라서 옮긴 경우도 많다. 번역이 아닌 국문 글쓰기의 문제도 한몫하는데 특히 주술호응 안되는 문장이 부지기수다.

오류를 몇 개만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딱 두 단락에서 뽑았다.

(언급하는 오류의 전후 내용을 요약 소개하자면 이렇다. 산업화 당시 유럽의 기술 발전은 전적으로 독보적인 수준은 아니었으며, 유럽이 우위를 구축하는 과정은 유럽의 성과뿐 아니라 석탄 발견 등의 행운이나 중국의 은 경제 전환 같은 외부의 독자적 발전에 따른 이득에도 의존했다.)

먼저 내가 폭발하고 만 79쪽 마지막 문장이다.

“만약 이런 ‘부수적‘ 요인이 없었다면, 유럽의 발명품만으로는 18세기 중국과 인도 및 다른 국가에서 꾸준히 이룩해온 주변적 기술 향상보다 사회.경제적으로 훨씬 더 혁명적인 충격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적”이 단어 뜻이 미묘하게 계속 엇나가는 듯하다는 느낌에 물증을 제공한 단어다. 일반적으로 “주변부”는 “혁명적”과 대조되지 않는다. “미미한”을 의미하는 marginal의 직역으로 보여 찾아보니 실제로 그랬다. 다음은 원문이다.

“Without these “external” factors, Europe’s inventions alone might have been not much more revolutionary in their impact on economy and society than the marginal technological improvements that continued to occur in eighteenth-century China, India, and elsewhere.”

포머란츠는 이 문장에서 당대 타 지역에 비해 혁명적이었다고 평가되는 유럽 기술 발전 역시 단독으로 떼어 놓고 보면 오늘날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미미한”) 타 지역 기술 발전과 별 차이 없었을 수 있다는 주장을 요약하며 주 논지 중 하나를 제시한다. 이런 문장을 틀렸다는 건 독자가 책 내용을 이해하건 말건 신경쓰지 않겠다는 것과 진배없다.

“주변적”은 “덜 중요한” 뭐 이런 뜻이니 대충 비슷하게 이해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다고 치고 계속 살펴보자. 당장 이 문장에서 “external”을 “부수적”으로 옮긴 것 역시 오류다. 강조를 살린 “외부적”으로 옮기는 게 맞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나타난 이유를 추적하자면 내용을, 특히 이 문장의 앞 단락을 제대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차차 보기로 하고 내용도 파악할 겸 문제의 앞 단락을 첫 문장부터 한 번 살펴보자.

총자본으로 구현한 기술을 비교해보면, 유럽이 우위를 점한 분야 중 상당수가 산업혁명 이전 2세기 또는 3세기 동안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유럽에는 여전히 낙후한 분야가 있었다.”

“When we turn to comparisons of the technology embodied in the capital stock, we do find some important European advantages emerging during the two or three centuries before the Industrial Revolution; but we also still find areas of European backwardness.”

“총자본으로 구현한 기술”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자본량/자본스톡에 체화된(포함된) 기술”이 맞다. 포머란츠는 이 앞 문단에서 1800년 이전 서유럽의 자본스톡이 다른 구세계보다 더 많지 않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흐름상 이 문단에서는 자본스톡의 양적 수준 말고 그에 내재된 기술수준을 비교해보자는 말이다. 국문번역은 자본으로 기술을 구현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구현한” = “embody” = “체화한” 의 뇌내번역이 가능한 독자라야 제대로 이해할 것이다. 그 정도로 눈감아 주자면 번역은 왜 하는가?

역자들은 이 문장에서 “area”를 “분야”로 번역했다. 맞는 번역이다. 이 다음 문장에서도 그렇게 했는데, 갑자기 다다음 문장에서는 “지역”으로 바뀌면서 문장이 이상해진다. 거기선 그 뜻으로 쓴 걸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한다면, 전문 연구자는 그런 혼동을 만들지 않으며 여기서 “지역”은 place로 쓰고 있다. 문제의 문장은,

“그렇기 때문에 우세한 유럽의 몇몇 지역은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 중요했던 반면, 기술적으로 앞선 사회임에도 특정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As it worked out, some of the areas in which Europe had an edge turned out to be important for truly revolutionary developments, while the particular areas in which other societies had better techniques did not.”

그냥 통째로 틀렸다. “유럽이 우세했던 분야의 일부는 실제로 혁명적 발전에서 중요했던 반면, (유럽에 비해) 다른 사회[구세계]가 우세했던 특정 분야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특정 분야”는 유럽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분야로, 이 문장과 첫 문장 사이의 내가 건너뛴 문장에 이미 소개된 분야(THE paricular areas!)다.

이 다음 문장에서 포머란츠는 유럽이 타 지역과 달리 토지의 제약을 상당히 해결하고 비약적인 자립 성장(breakthrough self-sustaining growth)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에는 상기 기술 발전 외에도 특정 자원(석탄, 은)의 발견이라는 행운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 문장 번역도 괴상하지만 넘어간다)

그리고 나서 나오는 내용은,

“이는 부분적으로 세계적 연관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적 연관성이라는 것도 결국 유럽인이 이룬 성과(대부분 폭력으로 획득한), 계속된 행운 그리고 독자적 발전이 결합해 형성된 것이다.”

“It was also partly due to global conjunctures. Those global conjunctures, in turn, were shaped by a combination of European efforts (many of them violent), epidemiological luck, and some essentially independent developments.”

단어부터 보자. 세계적 “연관성”이 무슨 번역일까? “conjuncture”는 “a combination of circumstances or events”라는 뜻이다. 적절한 역어를 떠올리기는 어렵지만 단순히 “연관성”이라 하기는 어렵다. 주석이라도 달았어야 한다.

게다가 “epidemiological(역학적)”을 “계속적”이라는 전혀 상관없는 뜻으로 옮겼다. “역학적 행운”은 유럽의 신대륙 정복을 도운 전염병을 가리키는데, “계속적 행운” 이라고 하면 앞에서 나온 자원 발견이 계속되었다는 식의 말이 되어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이 오역은 이유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European efforts” 역시 “유럽인들의 활동”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

본문에서 “부분적으로(partly)”라는 표현은 유럽의 성장요인을 열거할 때 쓰였다. 즉 “세계적 연관성” 역시 기술발전, 행운 같은 하나의 요인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국문번역 두 번째 문장은 “세계적 연관성”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는 뉘앙스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건 멋대로 “하지만”을 첨가하고 “in turn”을 “결국”으로 옮겼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세계적 연관성은 ~ 결합으로 형성되었다.”로 옮겨야 한다.

포머란츠가 언급한 사례를 활용하여 내용 해설을 하자면 신항로개척/신대륙 발견(유럽인들의 활동), 전염병(역학적 행운), 중국의 은 경제 전환([유럽 외 지역의] 독자적 발전)이 결합한 “”상황””이 바로 “세계적 연관성” 이다.

이제 다시 나를 폭발하게 만든 문장으로 돌아와 보자. “global conjunctures”를 가리키는 “external factors”가 왜 “부수적 요인”이 되었을까? “하지만”을 첨가해서 “global conjunctures”를 평가절하했기 때문에 부수적일 수밖에! 그리고 원문에서 external에 강조 표시를 한 이유는 “global”이지만 “conjuncture”이기 때문인데 (단순히 외부에서만 결정되는 요인이 아니라는 것) 이 압축적 표현이 “부수적 요인” 이라는 오역으로 바뀌면서 내용이 미궁에 빠진다. “부수적 요인” 이 있다면 “주 요인”은 무엇인가? 유럽의 기술? 줄곧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해 왔는데도?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external의 뜻은 중학생 수준이므로 이 번역은 의도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역자의 이해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놀랍게도 이들 오류를 뽑아내는 데는 두 단락으로 충분했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간단하다. 역자들이 책을 완벽히 이해하고 전체 원고의 통일성(consistency)을 기하며 원고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역자들의 전체적 이해도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문자 그대로 읽자면 앞뒤가 안 맞으니 내용의 통일성이 없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솔직히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면 이렇게 내용 흐름이 박살나지는 않는다.

왜곡번역 논란이 있었던 앵거스 디튼의 <위대한 탈출>조차도 자의적 편집 때문에 흐름이 중간중간 끊겼을망정 대충 읽을 만 했다. 이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수준이다. 어차피 한정된 독자가 읽을 책, 1쇄절판시키고 새 번역으로 새로 내는 게 낫겠다.

난 영어를 그리 잘 하지도 않고,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이런 식으로 단정적인 글을 쓰는 것도 싫어한다. 그럼에도 번역이 정말 끔찍해서 쓸 수 밖에 없었다. 근 3년 사이 읽은 책 중 최악이었다. 혹시나 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본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앵거스 디턴,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 2014.

앵거스 디턴,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 2014.

앵거스 디턴,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 2014.

작년 피케티 열풍 당시 한국경제신문에서 그 대항마로 내밀었던 책이다. 서문과 에필로그만 읽고 일단 꽂아 둔다는 것이 벌써 6개월 되었다. 밀린 숙제 하는 기분으로 ‘읽어 치운다’.

책 앞표지에는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진시키나”, 뒷표지에는 “정통 주류경제학자가 밝히는 불평등 그리고 빈곤 해소의 대안”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불평등이 촉발하는 성장을 찬미하기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자신의 책이 피케티의 대립항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디턴은 오히려 무척 어이없어했을 것이다. 디턴은 이 책에서 특별한 대안을 내놓기보다는 역사적 서술 및 현재 당면한 문제의 분석에 치중하며, 에필로그에 와서야 낙관론을 개진한다. 그러나 그 낙관조차 의기양양한 선언과는 거리가 멀다. 가령 에필로그에서 그는 “미국의 경우 현재와 같은 극단적인 소득과 부는 100년 이상 본 적이 없다. 부의 엄청난 집중 현상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파괴의 숨통을 막아 민주주의와 성장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조심스럽게 낙관한다”고 쓴다. 다른 대목에서 그는 불평등을 “장애”로 묘사한다. 광고에 낚여 책을 구매했다면(이런 사람들에는 나도 포함된다) 속은 기분마저 들 정도다. 어쨌든, 책의 표지를 떼어 버린다면 편견 없이 내용에 접근할 수 있을 듯하다.

책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인류는 경제성장에 힘입어 “삶, 죽음, 질병으로부터의 대탈출”을 해왔다. 비록 최근 성장세가 흔들리고, 불평등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인간의 “탈출” 욕구는 뿌리깊은 것이며 “탈출”의 역사와 수단에 관한 지식은 부의 집중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는다. 정체된 듯한 발전의 지표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온 진보가 막대했다는 증거다. “탈출”에 성공하는 국가들이 많아지며 새로운 불평등과 문제가 야기될 것이나, 이러한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전반적으로 텍스트가 잘 조직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처에서 경제학자 특유의 “on the other hand”가 명시적/암시적으로 드러나는데, 구조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각 장의 요점과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남겨 둔다.

1-2장은 기대수명, 웰빙지표, 사망률, 의학의 발달에 관해 서술하며 발전의 역사를 추적한다. 3-4장은 국가 간 사망률, 기대수명 및 영양실조 지표를 이용하여 “사망/죽음의 불평등”에 관한 논의이다. 소득이 높은 국가일수록 기대수명이 길고, 영아사망률이 낮으며, 영양공급이 잘 되어 있다는(평균신장을 대리변수로 이용) ‘당연한’ 결과와 함께, 기대수명 증가율의 정체 등이 비관론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이 부분은 교과서를 읽는 듯 지루했다.

5장은 경제성장과 빈곤의 관계를 논의한다. 1973년 이래 미국의 경제성장은 멈추지 않았으나 빈곤율은 감소하지 않았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빈곤선(poverty threshold)이 함께 상승했기 때문인가? 디턴은 여기서 미국의 빈곤선이 절대적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 입안자조차 동참한) 개혁 요청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인플레이션 보정을 제외하면 1963년에 산출된 빈곤선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니 빈곤율의 정체는 빈곤선의 지나친 상승에 기인하지 않는다. 디턴은 대신 빈곤 측정의 다른 문제에 의해 공식 수치에 정부의 빈곤 경감 프로그램 성과가 반영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빈곤율 통계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불분명한’ 주장을 내놓은 뒤, 숙련편향적 기술진보에 따른 불평등 문제를 개관한다.

이어 그는 자연스럽게(!) 상위 소득 점유율 변화와 함께 Piketty-Saez(2003) 방법론(세금 영수증을 이용한 Top Income의 역산)을 내놓는다. (피케티는 이 외에도 몇 번 더 인용된다.) 그는 피케티 연구를 폄하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 연구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빈곤 문제 해결에 진전이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고 평가한다. 6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에 따라 야기되는 불평등을 다룬다. 과거에 비해 국가 간(inter-national) 불평등은 줄어들고 국가 내(intra-national) 불평등은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 제시된다. (이는, 내가 알기로, 불평등 논의에서 합의된 몇 항목 중 하나다.)

7장에서 디턴은 국제원조의 비효율성(내지 무용성)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는 “1인당 0.3$만 기부한다면 세계 빈곤이 해결됩니다” 식의 슬로건을 한 쪽에서 물을 공급하면 다른 쪽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 여기는 수력학적 접근(hydraulic approach)이라 부르며 이것은 곧 원조 환상(aid ilusion)이라 단정한다. 이의 연장에서 “최빈국이 발전의 사다리에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수준의(최소한의) 원조”를 주장하는 제프리 삭스는 가장 강력한 비판 대상이다.

이 주장은 단순히 복지(=국내원조)가 야기하는 문제가 국제원조에서도 재현된다는 논리에 기반하지 않는다. 흔히 국내 원조를 둘러싼 논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조가 인센티브를 왜곡하여 빈곤의 영구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단순 실업급여가 음의 순임금을 발생시켜 노동의욕을 하락시킨다는 것은 신고전학파 노동공급모형의 가장 간단한 확장이다) 그러나 국제원조의 문제는 원조가 수혜국 빈곤층의 행태에 미치는 영향이 아닌 수혜국 정부의 행태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 일반적으로 정부의 예산제약은 세금에 의해 결정된다. 정부지출이 비효율적일 경우 (민주주의에서는 선거에 의한) 정치적 피드백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다. 바꾸어 말하면 방만한 재정지출의 기회비용은 집권자의 임기이고, 따라서 정부는 정치적 합의 하에서 예산 지출/세금 인상을 단행해야 한다.

그러나 국제원조가 존재할 경우 정부는 정치적 책임을 크게 지지 않고도 원조금에 의해 예산제약을 확대할 수 있다. 이는 결국 권위적 정치체제 및 엘리트의 부패로 연결된다. 책에 나오는 사례에서도 나타나듯, 여러 실무적 문제에 의해 기부국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복잡한 조건을 설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부패는 피할 수 없다. 간단히 애쓰모글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논지를 빌리면, 민주주의는 포용적 정치제도로써 정치권력의 적절한 분배와 사유재산권의 보장을 통해 포용적 경제체제와 보완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국제원조는 민주주의의 환류 기능을 약화시켜 수혜국의 정치제도가 포용적 정치제도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거나 민주주의를 착취적 경제제도로 회귀시킨다. 그리고 “악순환은 착취적 정치제도에서 비롯된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낳고, 이어 경제적 부와 권력으로 정치권력을 살 수 있으므로 착취적 경제제도 역시 착취적 정치제도를 뒷받침한다.” 디턴의 눈으로 볼 경우 국제원조야말로 ‘사다리 걷어차기’인 셈이다. (단..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관계는 그 역사만큼이나 복잡한 논쟁이다.)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은 추천사에서 7장을 원용하여 대북 원조 중단을 주장한다. 대북 원조가 북한 정권(=착취적 정치체제)의 존속을 지속시키는가? 나는 북한 전문가가 아니지만 정황상 그럴 것이라는 추측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나는 대북원조를 디턴이 보여준 원조국-수혜국의 구도에 대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경제학자보다는 국제정치학자의 목소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원조를 중단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가? 이 주장은 당장 신문만 펴도 알 수 있는 중국의 존재를 무시하는 견해다. 다시 말해 “원조가 자생적 기반 형성을 저해한다”는 디턴의 논지에 따른 원조 중단은 무의미하다. “친중, 통미봉남” 등 북한의 행태에 따른 외교역학을 배제하더라도 저 주장은 잘못되었다.

어쨌든, 통일을 하지 않더라도 평화체제의 구축은 반드시 달성되어야 할 목표다. 원조를 시작으로 경제적 교류를 확장하고 공동의 이해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당장 개성공단이 그러한 목표 하에 운영되고 있지 않는가.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개성공단이 닫혔고, 실제 폐쇄 이후 재가동되기도 했으나, 규모가 더욱 커질 경우 외교가 경제적 교류를 차단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그리고 경제의 상호의존성은 전쟁의 기회비용 중 하나이며 무력충돌의 사전적 제동장치로 작동한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큰 관계가 없는 두 국가는 전쟁의 기회비용이 상대적으로 작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두 국가가 전쟁을 벌이기란 어렵다. 대북관계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차후 방침은 달라질 것이다. 통일로 가는 주춧돌이건, 평화체제 구축의 시발점이건, 원조는 그를 위한 비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한반도 문제에서는 보다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짐작컨대 추천사는 책을 꼼꼼히 읽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되었을 것이다.)

디턴은 전반적으로 건조한 어조를 유지한다. 그러나 7장의 끝에서 그는 다분히 경제학자답게도 이렇게 쓴다.

“프린스턴대학의 학생들이 세상이 더 살기 좋고 부유한 곳이 되도록 돕는 데 깊은 도덕적 의무감을 품고 찾아와 이야기하는 경우, 나는 이런 아이디어에 대해 토론하며 학생들이 장래 소득에서 십 퍼센트를 기부하려는 계획, 이것도 해외 원조 금액을 늘리려는 계획에서 이들을 멀리 떼어놓는다. 나는 학생들에게 정부에 대항하지 말고 자신의 정부 안에서 일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해치는 정책을 중단하도록 정부를 설득하고, 세계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국제 정책을 지원하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아직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의 탈출을 위한 진정한 방책이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가령 정부에 대항해야 하는 이유는 빈곤 외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진보의 믿음은 도덕적 동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디턴은 지루한 도표를 들여다보며 연구했을 것이며 독자인 나도 꼼꼼히 읽으려 노력했다.

어딘가 아쉬운 독서. 주 논지를 파악하려면 5-7장만 읽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디턴은 영국사를 언급하며 키스 토머스나 로이 포터 등 역사학 권위자들을 인용한다. 경제학자가 역사학자를 인용하는 풍경이 사뭇 낯선 한편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