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Air), 2016.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 2016.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Air), 2016.

이 책은 젊은 나이에 눈부신 성취를 이룬 저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기록이다. 저자 폴 칼라니티는 인도계 미국인으로 스탠퍼드, 케임브리지, 예일에서 학위를 받았다.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영문학도로 출발하여 의학과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탐구의 일환으로 신경외과 의사가 되었다. 모교 스탠퍼드대학교 병원 교수직을 제의받기 직전 폐암에 걸려 서른여섯에 사망했다.

저자는 먼저 의사가 되기까지 거친 지적 여정을 회고한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한사코 거부했던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돌아온 길을 이야기 형식으로 술회한다. 그리고 암 투병을 겪으며 경험한 지적·생애적 전환을 기술한다.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지 않는다. 의사이자 철학자로서의 사유를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어린 딸을 생각할 때를 제외하면 격정적인 대목이 없다. 한창 삶의 의미를 고민할 때, 언젠가 죽음을 대면한다면 쓰고 싶다 생각한 글의 전범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담담하게 글을 남기는 사람은 드물다.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묻는다. 칼라니티가 의사로서 남들보다 오래 독립을 지킬 수 있었기에 이 기록이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몇 주 전, 말기 난소암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여성이 뉴욕타임스에 자기 남편은 좋은 사람이며, 함께 해줄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기고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녀도 전업 작가였다.

읽기 힘들었다. 늘상 들여다보는 책과 달리 수식은커녕 도표 하나 없었고 문장도 평이했다. 분량도 적었다. 그럼에도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반 이상 느렸다. 어머니를 떠올린 까닭이다.

나는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하길 바랐다. 어머니는 간호사, 종교인이자 “똑똑한 셋째 누나”였다. 글도 잘 쓰셔서 학부모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도 몇 차례 하셨다.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다. 간호사로서 가진 난소암에 대한 지식과 경험, 살고 싶다는 소망, 목회자로서 의연하게 하느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해하지는 못했다. 어째서 병증에 대한 지식이 공포로만 귀결되는가.

길을 찾기 위해 나는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싯다르타 무케르지가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에 “암 환자는 생의 새로운 정상상태(new normal)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쓴 말을 옮긴 날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말은 뒷전이고 내가 상황을 파악하려 그 두꺼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더 기뻐했다. 답답했다.

칼라니티의 수려한 문장을 빌려 그런 어머니를 조금 이해했다. 그는 어린 딸 케이디에게 짧은 편지를 남긴다.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생애사 정리를 권할 게 아니라 내가 귀 기울였어야, 길 잃은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갔어야 했다.

톨스토이는 죽어가는 인물의 심리를 충격적인 묘사로 정리한 바 있다. “아무도 그를 그가 원하는 만큼 동정하지 않았다.” 이 무심한 자는 그 대목을 읊조리면서도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인텔리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귀가 없단 말인가.

책을 다 읽고 며칠 뒤 꿈을 꾸었다. 얄궂은 꿈이었다. 초기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했다. 재활 중 눈 뒤에 악성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시간이 교묘히 뒤틀려, 첫 수술 때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 재활을 다짐하며 같이 잘 해보자고 말할 때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의사는 두 번째 종양 소견을 내놓으며 리스크가 크니 선택은 본인의 몫이라고 말했다. 말의 심연 속에서 한참 헤매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다. 돌아보지 않던 얼굴이었다. 한참 울다 깨어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목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구약성서 창세기가 연상되는 표현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보다 세련된 언어로 나를 일깨워 주어 감사하다. 바람 된 그의 숨결이 안식하기를 빈다.

“나는 스탠퍼드에서 영문학을, 케임브리지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며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 나는 죽음의 두 가지 수수께끼인 경험적인 징후와 생물학적인 징후, 즉 아주 인격적이면서도 철저히 비인격적인 측면들을† 파헤치기 위해 의학을 탐구했다.”

“폐암 진단은 확정되었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무척 익숙했던 죽음이 이제 내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죽음과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지만, 아직 죽음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치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이 남긴 발자국을 보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할 텐데, 기로에 선 내 앞에 보이는 거라곤 텅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유한성에 굴복한다. 이런 과거 완료 상태에 도달한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대부분의 야망은 성취되거나 버려졌다. (..) 돈, 지위, <전도서>의 설교자가 설명한 그 모든 허영이 시시해 보인다. 바람을 좇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 : 역자는 “personal and impersonal”을 “개인적이면서도 비개인적인”이라고 옮겼다. 문맥상 “인격적이면서도 비인격적인”이 맞다고 생각한다.

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2015.

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2015. 서평은 아니고 메모.

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2015.

존잘러가 쓴 한국 사회과학계 현실 비판서이자 본인 학술이력 자기민속지. 민속지를 가장한 자기 PR로 읽을 수도 있다. 저자의 의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학문적 진로를 희망하는 학부생을 위한 안내서로도 훌륭하다. 김종영 교수의 <지배받는 지배자>와 함께 읽으면 그 책이 제시한 “Academia Immunda(학문은 더럽다)”는 명제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책 모두 부르디외 이론을 원용한다는 점에서 이들도 “지배받는 지배자”이며 “글로벌 지식장 상징폭력”의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전반부에서 한국 사회과학계(저자가 속한 사회학)를 가차없이 비판하고 후반부에서 본인이 학계 내 상징자본을 획득한 과정을 상술한다. 먼저 김경동, 조한혜정, 강정인, 한완상 등 국내 유명 학자들을 시쳇말로 극딜한다. “서구에 종속되지 않은 한국적 사회과학”, “우리 땅에서 적실성 있는 학문”이라는 무의미한 기치에 매몰되었다고 지적한다. 소위 적실성을 따지기 전에 글로벌 학문 장에 맞는 수준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게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적실성 구호 자체가 허황되었으며, 이들의 학술적 기여와 교육 모두 엉망이라고 융단폭격을 가한다. 학자들이 “일반인을 위한 OO학” 류 대중서적, 강연 등에 골몰하는 행태도 비판한다.

후반부에서는 본인이 박사과정 시절부터 현재까지 겪은 학계 이야기를 부르디외의 장 이론을 축으로 서술한다. 저자는 학계 컨텍스트를 예로 들어 장 이론의 주요 개념을 설명한다. 학생이 지식 장의 규칙을 체득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아비투스), 학술활동이 유의미하며 일생을 걸 만한 일이라는 공모(일루지오), 축적된 학술활동 성과(상징자본), 상징자본을 가진 선행연구자의 저작을 읽어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상징폭력) 무엇을 읽을지, 무엇이 가치있는 탐구 대상인지 설정하는 권한을 둔 경쟁(상징투쟁). 그리고, 한국 학계에는 상징자본이 될 만한 독창적 이론/이론가가 없으므로 서구 학자들이 행사하는 상징권력에 의해 상징폭력을 겪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뒤에는 논문을 완성하고 투고하는 과정, 학계 내 역학 관계 등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다른 교수에게 논문 논평을 요청했다가 대판 싸운 일화가 아주 흥미롭다. 학자들도 사람이라는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은 상징투쟁이며, 저자는 그가 상징투쟁을 통해 획득한 상징자본을 전시하며 독자에게 상징폭력을 행사한다. 전반부에 한국 사회과학계를 비판한 것도 상징폭력의 일환이다. (굳이 이런 식으로 쓰는 까닭은 저자 본인이 책에서 이렇게 언급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뛰어난 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 납득할 만한 내용이었는데, 솔직히 “대가”들의 자필 편지를 일일이 사진찍어 실은 걸 보면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어쨌든 국내 석사과정 정도 거치면 이런 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 저자처럼 개념화하지는 못하겠지만. 학계에 대한 환상을 가진 학부생이 읽으면 큰 도움이 될 듯하다. 나로서는 유학을 앞두고 읽으니 생각이 많아진다. 상징자본은커녕 박사학위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그 전에 내게 pacific-wide한 어장관리를 하고 있는 학교들이 과연 최종 어드미션을 줄까. 이러다 보면 저자가 쓰듯 “우리가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한국의 현실은 해외유학의 역사가 반세기를 넘겼지만 아직도 숱한 학생이 박사학위를 받으려 미국과 유럽의 명문대학으로 떠난다는 사실이다. 왜일까?”라는 질문을 부질없이 다시 던져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답은 잘 알고 있다.

덧. 저자는 경제학과 출신이다. 학부생 때 교재며 이론이 모두 영미의 것이었기 때문에 경제학을 때려치우고 사회학을 택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학자와의 서신에서 이렇게 쓴다. “비록 경제학은 과학장의 요건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부르디외가 이상적으로 상정한 자연과학 모형에 가장 가깝지만, 경험적 타당성에서 평가할 때 완벽한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들부들…ㅋㅋㅋㅋㅋ (경제학이 경성과학hard science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고민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RCT 하는 사람들은 – 가령 Duflo – 그렇게들 말하던데, 나는 아직 유보적이다.)

3월 둘째 주 NBER (2017-03-06)

총 13편. 한 편 빼고 전부 흥미로웠다. 석사과정 학생일 때 이렇게 읽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ㅠㅠ


– 어떻게 “틀린 게 맞게 되는”가? 마술적 전쟁기술과 잘못된 믿음의 지속성 (Why Being Wrong can be Right: Magical Warfare Technologies and the Persistence of False Beliefs)
= 과학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 어째서 소멸하지 않는지를 이론적으로 밝힌 논문. 이런 믿음은 1) 관찰하기 어려운 제약이 있어 반박하기 어렵고 2)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내부경쟁을 촉진할 때 유지된다.

어떤 고대 부족 전사들이 샤먼의 축복을 받으면 칼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고 믿는다고 하자. 단, 남의 것을 훔치거나, 여성과 잠자리를 갖거나, 사과를 먹으면 안 된다. 이 경우 전사가 죽더라도 샤먼의 축복이 무효인지 축복이 유효했으나 어젯밤 실수로 음식에 든 사과를 먹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절도나 성관계가 금지당하므로 무력집단이 평판과 기강을 잃는 최대 요인 중 두 개가 원천차단된다. 이러면 전사집단의 행태가 사회적 최적에 가까워지고, 유지될 조건을 만족한다. 대충 이런 얘기. 논문은 아프리카 사례를 가져왔는데 꽤 재미있다. 예시가 논문의 절반이고 엄청 흥미롭다.

그냥 학부 게임이론만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다 해서 13페이지니 그냥 심심풀이로 읽어 볼 수 있을 정도. 처음 읽었을 때는 뭐 이런 게 NBER까지 가나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뻗어나갈 여지가 많은 것 같다.

– 도구변수와 인과메커니즘: 무역이 노동자들과 유권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Instrumental Variables and Causal Mechanisms: Unpacking The Effect of Trade on Workers and Voters
= 계량방법론을 확장해서(식별문제 해결) 최근의 “포퓰리즘 반동(populist backlash)”과 국제무역의 관계를 세 단계로 나누어 분석한다. 아주 시사적인 페이퍼. 가설은 쉽다. 어떤 국가가 저임금 제조업 국가들과의 무역에 “노출”됨 – 노동시장에 영향 – 투표행태에 영향.

여기서는 먼저 무역 “노출”이 투표행태에 미치는 영향의 인과관계를 확립한다. 그리고 무역에 따른 노동시장 교란의 인과관계를 정립한다. 마지막으로 이 두 효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도출한다.

독일 데이터를 이용해 실증분석한 결과, 수입경쟁은 극우정당 지지율을 상승시켰다. 이 상승분을 (무역의) “직접효과” 와 노동시장을 거친 “간접효과(mediated effect)”로 분해한 결과, 간접효과가 더 컸다. 직접효과는 비교적 작았고 방향이 달랐다. 즉, 간접효과를 상쇄했다는 것.

저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효과를 차단할 수 있다면 무역이 오히려 정치적으로 “중재적인(moderating)” 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시사점을 내놓는다. (미국의 분석결과와는 조금 다르다고 한다.)

– 경제발전과 윤리적으로 민감한 행위 규제의 관계 Economic Development and the Regulation of Morally Contentious Activities
= 저자들은 윤리적으로 첨예한 이슈인 낙태와 성매매, 대리모와 경제발전의 관계를 실증분석하고 간단한 해석 틀을 제공한다. 해당 이슈에 “관대한” 입법이 이루어지려면 관대한 유권자들이 늘어나야 한다.

유권자 수 변화는 크게 1) “관대한” 입법의 경제효과 2) 경제발전이 사람들의 “도덕적 분노”에 미치는 효과 3) 경제발전에 따른 사람들의 가치평가 기준 변화라는 3개 요인에 영향받는다. 요인분해한 항등식을 40년짜리 국가별 데이터로 실증분석한 논문.

결과 자체는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비경제적 요인이 이만큼이나 중요했다”라서 뻔하다면 뻔한 논문. 최근 실증연구자들이 비경제적 요인으로 계속 눈을 돌리는 것 같다. 종속변수건 독립변수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 보편 프리스쿨 교육은 성공적인가? 프로그램 접근성과 프리스쿨의 효과 (Does Universal Preschool Hit the Target? Program Access and Preschool Impacts)
= 프리스쿨은 불평등으로 직결되는 성취도 격차를 줄일 방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다양한 프리스쿨 프로그램이 사회적 취약계층 아동들에게 미친 영향을 비교분석한 연구는 없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선택적 프로그램보다 주 재정지원 보편 프리스쿨 프로그램이 더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이건 제목을 번역할 재간이 없었다. 한국어가 “보편 vs. 선택”인데 비해 영어는 “universal vs. targeted”라서 가능한 제목. 보편적 프로그램이 선택적 프로그램보다 정책효과를 “적중” 시켰다는 본인 주장을 깔끔하게 요약했다. 키야..

– 학교 점심식사 품질과 학업성취도의 관계 (School Lunch Quality and Academic Performance)
= 급식충 헌정 페이퍼(…) 학교 식단의 영향은 오래된 주제다. 식단은 학생들의 육체적 건강(비만)과 정신적 건강(충분한 영양공급과 인지발달의 상관관계) 둘 모두와 연관되어 있다.

캘리포니아 데이터로 분석한 결과 1) 건강한 식단이 비만율을 낮춘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2) 건강한 식단을 공급할수록 시험 점수가 향상되었다. 식단 칼로리 총량보다 식단 영양구성 품질의 영향이었다. 이제 캘리포니아 학생들은 학교 탓을 할 수 있게 됐다. “내가 하버드에 못 간 건 고딩 때 학교 식단이 bullxxxx였기 때문이야.”

– 국가 모델 차이가 지역 내 집합행동과 경제발전에 미치는 영향: 베트남 역사의 사례 The Historical State, Local Collective Action, and Economic Development in Vietnam
= 오래 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지배했던 국가가 각각 중앙집권/지방분권적이었다는 점을 이용한 연구. 국가가 역사적으로 사라지더라도 그 유산은 남아 영향을 미치는가? 즉, 과거의 정치체제 차이는 오늘날의 생활수준과 경제발전 정도에 영향을 주는가? 이 질문을 자연실험/회귀단절법으로 실증분석한 논문.

국경지역에 위치한 탓에 중간에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지배권이 넘어간 지역을 그렇지 않은 지역과 비교했다. 중앙집권형 국가(북베트남)가 멸망하더라도 국가 강제력이 사회적 규범의 형태로 남아 해당 지역의 경제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짓는다. 역사적 데이터 많이 썼다는데, 글쎄… 솔직히 이런 페이퍼 처음 봤을 땐 fancy하다고 생각했지만 요샌 좀 회의적이다. 흠…

여담으로, 본문에서 제임스 스콧의 <농민의 도덕경제 (The Moral Economy of the Peasant)>가 인용되었다. 내가 경제학 논문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이 책 인용 처음 봤다. 어쨌든 정치학 쪽에 더 가까운 페이퍼인 건가 싶다.

=== 이외 논문.

– 최초의 공공보건 캠페인은 성공적이었는가? 결핵운동의 사망률효과 (Was The First Public Health Campaign Successful? The Tuberculosis Movement and Its Effect on Mortality)

– 이스라엘 이민사와 세계화의 교훈 Israel’s Immigration Story: Globalization Lessons
– 브렉시트가 해외투자와 생산에 미친 영향 (The Impact of Brexit on Foreign Investment and Production)

– 충동적 소비와 재무적 웰빙: 술 마시기 쉬워지면 어떻게 될까? Impulsive Consumption and Financial Wellbeing: Evidence from an Increase in the Availability of Alcohol
– 대공황기의 재무마찰과 고용 Financial Frictions and Employment during the Great Depression

– 큰 은행이 고평가되는가? Are Larger Banks Valued More Highly?
– FX 시장의 계량경제학: CLS 은행결제 자료에서 나온 새로운 발견 (FX Market Metrics: New Findings Based on CLS Bank Settlement Data)

3월 첫째 주 NBER (2017-02-27)

총 20개. 흥미로운 페이퍼가 많다. 노동/교육경제학이 많고 금융/통화와 경제사 연구도 세 개나 있다.


– 컴퓨터보조학습에서 나타나는 동료효과: 무작위실험의 결과 (Peer Effects in Computer Assisted Learning: Evidence from a Randomized Experiment)
= 동료효과,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맹모삼천지교는 교육경제학의 오래된 주제다. 존재하는가?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저자들은 수학 컴퓨터보조학습(CAL)에서의 동료효과를 측정한다. 중국 시골 초등학교에서 무작위실험을 진행했다.

결과는: 1) CAL은 학생들의 수학 평균점수를 유의미하게 상승시킨다. 2) 혼자 하건 다른 학생과 짝지어 하건 효과는 유사하다. 3) 못하는 학생은 혼자 할 때보다 잘하는 학생과 짝이 될 때 점수를 더 많이 올린다. 4) 잘하는 학생은 혼자 할 때보다 못하는 학생과 짝이 될 때 점수를 더 많이 올린다. 4) 평균 수준 학생은 누구와 짝이 되어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5) CAL이 학생들 수준을 “수렴”시킨다는 증거가 없다.

우열반 나누는 것보다 섞는 게 낫다는 정책 시사점이 있나 싶었는데, 저자들이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짝짓는 방법을 바꿀 때도 이 결과가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학생들이 주고받는 상호영향이 중요하다. 일대일 매칭이 아니라면 학생들은 보다 어울리고 싶은 사람을 찾아갈 수 있고, 그 때는 개선효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다.

공군사관학교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최적 동료집단”을 설계하여 동료효과를 측정하였으나 학생들이 “지정된” 동료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하고 동질집단을 형성(endogenous peer group formation)했다는 Carrell, Sacerdote, and West (Econometrica 2013)의 연구 결과를 remind.

 

– 온라인 중등후교육 수익률 연구 (The Returns to Online Postsecondary Education)
= 제목만 봐도 매우 핫한 주제를 건드리는 페이퍼. 퍼미션 문제로 NBER 웹사이트에서 잠시 내려졌다. SSRN에서 초록 볼 수 있었는데 없어졌다. 나도 내용을 보진 못했는데 아마 전형적인 교육수익률 추정 연구일 듯하다. 다른 요약문을 참고해 보니 연구에 따르면 온라인 중등후교육 수익률이 매우 낮다. 3년 이상 등록한 학생을 기준으로, 완전온라인(exclusively online)은 연평균 853달러, 온라인-대면 병행(partly online and partly in person)은 연평균 1,670달러의 추가 수입을 얻었다. 더 짧은 기간 등록한 학생은 수입 상승률이 더 낮았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 효과성이 낮고, 심지어 교육수익률이 온라인 과정 등록금 대출도 못 갚을 정도라면 간단히 말해 낭비라는 결과. 논쟁을 일으킬 만한 연구다. 역시나 이쪽 업계 종사자들의 십자포화를 맞는 모양이다. 논문을 못 봐서 뭐라 평가는 못 하겠다.

 

– 산업화 초기의 기술-숙련 보완성 (Technology-Skill Complementarity in Early Phases of Industrialization)
= 기술-숙련 보완성이란 기술이 숙련노동을 수요하는 방향으로 진보한다는 것을 말한다. 원본은 Griliches(1969)의 자본-숙련 보완성 가설(Capital-Skill Complemtarity Hypothesis). 대단히 흥미로운 논문. 프랑스 자료를 이용해서 산업화 초기인 19세기에도 기술-숙련 보완성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기존에는 산업화 초기에는 기술-비숙련이 보완적이었고(Mokyr 1993), 차차 기술-숙련이 보완관계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Goldin and Katz QJE 1998). 초기에도 기술-숙련 보완성이 성립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렇게 되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결국 교육의 산물에 불과했다는 연구 결과(Becker and Wößmann 2009) 와 함께 인적자본이론 1승 추가인가. “인적자본의 세기”를 넘어 “인적자본의 시대” 아닌가.

 

– 진보적 도시와 살기 좋은 도시 중 어디에서 지역 공공부문에 의한 지대추출이 더 큰가? (Is Local Public Sector Rent Extraction Higher in Progressive Cities or High Amenity Cities?)
= 정치인이 주어진 권한을 자신의 이익극대화에 활용하는 것을 지대추출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Public Finance를 잘 모른다) 다른 생활여건이 좋은 도시일수록 사람들이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수요가 비탄력적) 정치인이 지대추출할 여지가 커진다. 공공부문 종사자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납세자들로부터 더 많은 돈을 “뜯어낼” 수 있다는 얘기. Brueckner and Neumark (AEJ 2014) 연구가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내놓았다.
이 연구는 “그렇다면 생활환경이 좋은 도시에 사는 공공부문 종사자들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론한다(보상적 임금격차). 오히려 임금수준은 지역의 정치적 성향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연방 레벨 데이터로 비교하자 깡시골 앨러배마에 비해 캘리포니아 임금프리미엄이 그리 높지 앞다(=보상적 임금격차가 존재한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도시 레벨 데이터로 비교하자, 환경이 좋은 해안 도시들은 공공고용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임금을 많이 지급하진 않았다. 같은 카운티 내에 있더라도 진보적인 도시일수록 공공부문 임금이 높았다. BN2014를 성공적으로 반박하는 듯.

 


그 외 흥미로운 논문.
– 선거 캠페인에서의 페니매칭게임: 상원의원 선거 언론 보도 실증연구 (Matching Pennies on the Campaign Trail: An Empirical Study of Senate Elections and Media Coverage)
– 건강 인센티브의 구조: 현장실험 결과 (The Structure of Health Incentives: Evidence from a Field Experiment)
– 주 의료보험 의무가입과 노동시장 성과의 관계: 오래된 질문, 새로운 증거 (State Health Insurance Mandates and Labor Market Outcomes: New Evidence on Old Questions)

– 브레튼우즈체제의 성립과 종말: 1958-1971 (The Operation and Demise of the Bretton Woods System; 1958 to 1971)
– 1933년 런던 세계경제회의와 대공황의 끝: “체제변화” 분석 (The London Monetary and Economic Conference of 1933 and the End of The Great Depression: A “Change of Regime” Analysis)
– 통화단일화의 여진: 금융시장의 이력현상 (Aftershocks of Monetary Unification: Hysteresis with a Financial Twist)
= 아이켄그린 논문이다. 내가 거시알못이긴 한데, 통상 노동시장이 이력현상 channel이라고 들었다. 여기서는 금융시장도 channel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듯. 서론 결론하고 본론 반쯤 읽었는데 대충 맞는 것 같다.
– 파마를 위한 “버블” ( Bubbles for Fama)
= 제목만 봐도 감이 온다.

– “우리 가족끼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관찰한 혈연조직과 신뢰의 범위 (Keeping It in the Family: Lineage Organization and the Scope of Trust in Sub-Saharan Africa)
– 농업 다양성, 구조적 변화, 그리고 장기 발전: 미국의 증거 (Agricultural Diversity, Structural Change and Long-run Development: Evidence from the U.S.)

2월 넷째 주 NBER (2017-02-20)

이번 주 NBER working paper 중 흥미로운 페이퍼. 난 언제 질문 빌드업하고 이런 페이퍼 써 보나… 우울에 빠져들다가 적어 본다.

– “High-Skilled Immigration, STEM Employment, and Non-Routine-Biased Technical Change” (링크)
= 고숙련이민의 파급효과, 이민자(아시아계)들이 STEM/혁신적 일자리에 몰리는 경향을 “내생적 비-루틴 편향적 기술진보(endogenous non-routine-biased technological change)” 모형에 기초해서 실증분석(calibration)한 논문. 이에 따르면 고숙련이민은 불평등을 감/소/시/켰/다. 또람프 보고있나?

– “Political Cycles and Stock Returns” (링크)
= 민주당 집권기에 평균 주식수익률 (& 경제성장률)이 더 높다는 “presidential puzzle”을 예측하는 모형.

-“When Work Disappears: Manufacturing Decline and the Falling Marriage-Market Value of Men” (링크)
= 제목이면 됐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망했어요(…) 제조업 쇠락에 따른 노동수요 감소가 “결혼할 만한” 남성을 줄였다. 소득이나 구직가능성 감소는 물론, 더 위험한 일자리에 종사하는 경우도 늘어났기 때문. 결혼시장에 “괜찮은 남자” 공급이 줄어들자, 혼인율 & 출산율이 하락한 반면 미성년미혼모 & 빈곤1인가구 출산아 비율이 늘어났다. 갓갓 Autor 센세의 논문.

-“Human Decisions and Machine Predictions” (링크)
=법무부 판결 데이터를 머신러닝 갖고 어떻게 했다는 것 같아 우와 싶은데 머신러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뭔 말인지 잘 모르겠다. 이럴 땐 결론만 읽어본다(…) 결론인즉슨 1) ML 아주 귀중한 도구 맞는데 기존 계량경제학 성과를 머신러닝에 반영할 필요도 있다 2) 경제학적 틀로 머신러닝의 결과를 깔끔하게 해석할 수 있다(“이런 이슈는 우리가 늘상 하는 거다”). 역시 존잘분들이 이콘을 잘 팔아 주신다(…)

스티븐 스티글러, 『통계학을 떠받치는 일곱 기둥 이야기』, 2017.

스티븐 스티글러, 통계학을 떠받치는 일곱 기둥 이야기, 2017. 서평은 아니고 메모.

스티븐 스티글러, 『통계학을 떠받치는 일곱 기둥 이야기』, 2017.

1. 책 소개에 “이 책은 통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전문적으로 통계를 다루는 사람 모두에게 매력적인 도서로…” 라고 쓰여 있다. 아니다. 기초 통계학을 모르면 읽을 수 없다.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불친절한 저자를 욕하며 책을 덮게 될 거다. 제목만 보면 일곱 기둥을 설명한 뒤 그걸로 통계학이라는 집을 지어 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이런 느낌이다. “너 통계학이란 집에 살지? 니네 집 기둥 7개가 요렇게 만들어졌고 조렇게 집을 지탱하고 있음 ㅋ” 일단 그 집에 살아야 한다는 얘기. 문면만 파악하려 해도 조건기대(분포)의 성질과 최소자승추정법, 베이즈 추론의 기본을 알아야 한다.

2. 배경지식을 알면 대단히 재미있다. 현재 배우는 깔끔한 이론이 형성된 과정과 그 과정을 주도한 거인들을 만날 수 있다. 개념을 알기 위해 반드시 개념의 형성사에 달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형성사를 통해 이해가 깊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동 저자가 쓴 『통계학의 역사』가 두꺼워서 부담스럽다면 이 책만 읽어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듯.
가령 회귀분석의 경우를 보자. 회귀regress가 골턴Galton의 “평균으로의 회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본 교과서 대부분은 저 사실을 언급했다. 간단히만 언급했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이 책은 골턴의 선구적 연구를 인상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내 수준이 그렇고 그렇다는 걸 감안하면 더 알수록 더 재미있지 않을까.

2-1. 골턴도 골턴이지만 2-3장 “정보 측정”, “가능도”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계량경제학 베이스로 통계학을 공부해선지 2-3장은 주제부터 익숙하지 않다. (1, 4-7장은 그나마 낫다) 당장 최우추정법 배울 때 피셔 정보행렬Fisher Information Matrix이 나오자 모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이름이 왜 ‘정보행렬’인지 묻지 마라. 비생산적이다.” 이게 궁금한 경제학도는 이 책을 보면 된다. 엄연히 의미가 있다.

3. 번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직역을 넘어 번역기 수준 문장은 그렇다 치자. 역자가 전산통계 전공이라 해서 기대했는데 솔직히 책을 100% 이해했는지 의문이다. 뒤로 갈수록 의혹이 짙어진다.

가령 제5장 “회귀”에 Stein’s Paradox가 나온다. 원저자 설명이 대단히 압축적이긴 하지만 통계 전공자라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나도 아니까). 그런데 역서로는 도무지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다. 당장 수식 하첨자 틀리는 건 차치하더라도, 내용을 이해했다면 나올 수 없는 번역이다. 아는 내용도 더 헷갈리게 하는 마법같은 번역. 어찌어찌 읽다가 여기서 결국 원서를 펼치고 말았다. 경제사상사 명저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의 섬세한 번역이 떠오르며 아쉬움이 더했다. 사실 책 소개 첫 문장부터 알아봤어야 한다. “통계학에 과학으로서의 독특함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김훈 문장력 바라는 게 아닌데…ㅠㅠ

* 자세히 짚는다. 스티글러 교수는 Stein’s Paradox를 다룰 때 어김없이 나오는 “naive estimator” (혹은 “obvious estimator”)를 말로 풀어 설명한다. “At the time, it was taken as too obvious to require proof that one should estimate each μi by the corresponding Xi.” (여기서 Xi ~ N(μi, 1). i= 1, .. k, 각 Xi는 독립.) 이 문장이 이렇게 번역되었다. “당시에는 해당 X에 따라 각 mu를 추정해야 하는 것을 너무 당연히 여겨 증명이 필요 없었다.”

나라면 이렇게 번역한다. “당시에는 μi의 추정량으로 그에 대응하는 X값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증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당연하게 여겨졌다.” 더 나은 문장을 찾을 수야 있겠으나, 핵심은 μi hat = Xi 라는 등식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내용을 안다면 이렇게 옮겨야 한다. 그래야 이 뒷 문단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역자가 “the corresponding Xi“를, 나아가 앞뒤 내용 전체를 이해하고 번역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