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란 지식생산 활동을 말한다. 연구자의 소임은 지식생산이다.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생산이라고 부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만들어내야 한다.
만들어낸 결과가 인식 지평을 많이 넓힐수록 좋은 연구다. 전에 명지대 김두얼 교수님이 쓰신 일화를 빌려오면, “그 교수는 남들이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상황을 놓고 중요한 직관을 도출한 논문을 쓰고 나면, 그것을 N명으로 일반화시키는 논문을 쓴다. (…) 그의 논문이 정말로 어떤 부가가치가 있나 보면 거의 0에 가깝다.” 어쨌든 좋은 연구는 좋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남의 질문에서 출발한 연구가 좋을 수 있을까. 그보다, 난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이 고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그 교수가 나보다 훨씬 똑똑하겠지.)
나는 흐름을 파악하여 체계를 잡고 종합정리하는 데 능하다. 어디까지나 다른 능력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엄밀히 말해 지식생산은 아니다. 가공이라면 모를까. 당장 연재가 그렇다. 어느 정도 공부하면 누구나 쓸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석사논문도 미국에서 나왔던 연구결과를 한국에서 재현해 본 것이었다. 내생성 검증에 그치지 않고 생존분석을 이용해 주어진 문제에서 내생성의 함의를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좋은 질문? 글쎄.
끝까지 가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딜레탕트로 남는 게 어떠냐는 회의가 공존한다. 지금라도 늦지 않았을지 모른다, 굳이 끝까지 가 봐야 알겠느냐는 속삭임이다. 유학을 가고 박사를 받으면 이 양가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마 답은 얻을 게다. 어떤 방향이건.
예상 문답 준비는 마쳤건만 자문자답이 더 어렵다. 아, 자문자답은 영어로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긴 하다. 그것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