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말로 하는 연구, 독일의 글로 하는 연구.
(먼저, 이 글에서 예로 드는 사례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독일과 한국의 모든 연구실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알려드립니다)
독일의 현재 연구실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큰 문화 충격은 바로 랩 세미나 발표가 없다는 점이었다. 과제 워크숍 및 학회 발표 외에는 PPT 발표를 해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충격적인 이유는 한국에서는 모든 연구를 PPT 자료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첫 연구 주제 PPT 발표부터, 마지막 졸업 논문 심사 PPT 발표까지.. 연구 아이디어 정리도 PPT 문서에 하고, 관련 논문 조사하고 공부도 PPT 문서에 하고, 강의를 위한 수업 자료도 PPT 문서로 만들었다.
그 시절은 스티브 잡스의 Keynote 스피치가 붐을 일으키고, 서점에는 스티브 잡스의 노하우 분석 및 따라 하기 책이 넘쳐났다. 교수님께서도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PPT 발표를 강조하셨고, 랩 세미나 발표 때는 PPT 자료의 글자 크기, 폰트, 그림의 배치, 색깔 등에 대한 지적을 받으며 올바른 PPT 자료 만드는 법을 숙달해 왔다.
단지 발표자료뿐만 아니라, 유머와 비유를 섞어가며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센스와 물 흐르듯이 유창한 언변술은 박사과정이라면 필수로 익혀야 하는 중요한 자질이었다. 또한, 신입생이 새로운 기법으로 화려하게 PPT 발표를 하면, 단번에 훌륭한 학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발표 즉 말로 하는 연구가 중요하게 여겨진 이유는, 한국에서는 연구 평가를 글이 아닌 말로 하기 때문이다. 연구과제 제안서 심사도 발표로 하고, 연구결과 심사도 발표로 한다. 물론 제안서와 결과 보고서를 글로 제출하긴 하지만, 그 문서를 심사위원들이 정말 읽어보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실제 평가는 발표 비중이 크다.
대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석박사 학위 논문 심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학위 논문은 발표 심사 일주일 전에 제출하고, 논문에 대한 평가보다는 발표 심사 때 발표 내용을 기반으로 당락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 후에 논문은 다시 수정해서 제출하면 되는데, 논문의 최종본은 대부분 심사를 받지 않고 통과된다.
즉, 글이 아닌 말로 연구에 대한 모든 중요한 평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의 장점은 효율성이다. 글로 된 논문, 제안서, 보고서는 읽고 의견서를 작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말로 된 발표는 듣고 바로 의견을 말로 전달하면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 대부분 매주 정기적인 랩 세미나는 한 번에 한 명의 교수님이 여러 학생의 연구 진행 사항을 점검하고 지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로 빠르게 진행된 연구는 그만큼 많은 것을 놓치게 되는데, 그것들은 글로 된 논문을 작성할 때 역습으로 나타난다. 내 경험을 얘기해보면,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하다가 결국 introduction은 맨 마지막에 쓰기로 하고 건너뛴다. 두 번째 관련 연구 부분을 쓸 때는, 지금껏 찾고 공부한 논문들이 좀 오래된 것 같아서 최근 논문을 찾다가 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게 된다. 세 번째, 내가 한 연구가 기존 방법보다 더 좋다는 점을 적어야 하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이쯤 되면 논문 마감은 며칠 남지 않았고 맨붕에 빠진다. 연구 방법과 실험 결과만 잘 정리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어찌어찌 제출은 하지만… 예상대로 이렇게 작성된 논문은 대부분 reject 되고 만다.
연구 결과도 잘 나왔고, 그동안 세미나 때 교수님과 선배님들 지도받으면서 잘한 것 같은데.. 뭐가 잘못되었을까?
말의 힘은 화자에게 주도권이 있다는 점이다. 화자의 태도, 언변술, 발표의 진행속도에 청자는 따라갈 수밖에 없다. 특히 토론 형태가 아닌 일방적인 발표에서는 청자는 화자의 주장에 설득당할 가능성이 높다. 히틀러가 쓴 책은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말로 독일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만 봐도 말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연구자에게도 발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연구 진행을 말의 힘을 빌려 하게 되면, 논리 전개의 세밀한 검토를 받을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는 점이다. 세미나 때 발표자가 보여주는 제한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발표 속에서 연구의 단계 단계 논리적인 결함을 찾기란 쉽지 않다. 특히 PPT 자료의 속성상 발표자는 연구의 단점은 최대한 감추고 장점은 최대한 부각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서 청중을 설득하려고 애쓰게 된다.
만약 충분히 검증되어 출판된 논문을 설명하는 발표라면 장점이나 특징을 부각해도 되겠지만, 연구가 진행 중인 내용을 발표를 통해 지도받기에는 세밀한 논리 전개를 검증하기에 자료와 시간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그렇게 말로 전개되고 완료된 연구는 글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본인 스스로 모순을 발견하여 전개가 안 되거나, 그 글을 읽은 평가자에게 쉽게 논리적인 결함을 지적받게 된다.
이런 말로 하는 연구 시스템에서 잘 훈련된 필자가 독일에서 연구를 진행하며 가장 먼저 놀란 사실은 랩 세미나 없이도 연구실이 잘 굴러가는 것이었다. 대신 교수님이 연구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고 자주 순회하며 개개인 학생들과 토의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에 비교하자면 같은 방에 있는 선배 같은 느낌이랄까.. 석사 학생들에게는 포닥들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 (참고로 우리 랩은 박사과정 10명에 포닥이 4명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연구 지도는 글로 진행한다. 처음 학생에게는 교수님 또는 포닥이 작성한 연구주제가 1~2장의 요약 논문 형태의 글로 주어지고, 학생도 연구를 진행할수록 논문 형태의 문서를 구체화해가며 지도교수 또는 포닥에게 정기적으로 피드백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지도하는 입장에서는 이 학생이 연구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 얼마나 관련 연구 조사를 했는지, 본인의 의견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장 사이의 논리적 전개에 대해서도 이유를 물어보고 설명이 부족하면 보충하게 한다.
지금까지 네 명의 석사 논문을 이런 식으로 지도하며 느낀 점은, 처음에는 주어진 연구주제를 비판 없이 따라 하던 학생들이 점점 스스로 각 논리적 단계마다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연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자연스럽게 논문 한 편이 완성된다. 그다음에 발표는 이렇게 완성된 논문을 요약해서 사람들에게 내용을 소개하는 자리이다. 지적이 아니라 박수받아 마땅한 자리이다.
독일의 박사학위 심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먼저 논문을 제출하면, 심사위원들이 읽어보고 의견 및 수정사항을 준다. 그걸 바탕으로 논문을 수정해서 다시 제출하고 피드백을 받는다. 이런 과정을 보통 일 년 넘게 진행하고, 심사위원들에게 통과가 되면, 비로소 많은 사람에게 논문을 발표하고 축하를 받는다. 즉, 말로 된 발표는 글로 된 논문을 요약해서 설명하는 수단이지, 말로 진행한 연구를 글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말과 글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말은 이해시키는 주도권이 화자에게 있고, 글은 이해하는 주도권이 독자에게 있다. 또 말은 감정적이고 글은 이성적이다. 연구를 말이 아닌 글로 해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이 철저하고 세밀해야 하고 점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연구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하는데 비해,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말로 진행되는 연구 분위기는 아마 우리 사회가 글을 읽고 생각하고 묵상하는 여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래도 연구는 긴 호흡으로 차분히 꼼꼼하게 생각하고 서로 점검하고 타인의 지적을 이성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발표자료 꾸미느라 밤새는 시간에 자기 생각을 한 문장이라도 더 글로 표현해보고, 교수님들이 학위논문을 읽어보고 논리적인 문제점들을 찾아주고, 과제 심사위원들이 연구보고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의견서를 작성해서 피드백을 준다면… 그 안에서 여러 생각이 모아지고 구체화 돼서 우수한 연구도 훌륭한 연구자도 길러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