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회: 저들은 저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나이다

사랑의교회 도로점유 건이 파국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오정현 “영적 배수진 쳤다. 도로 점용 포기 못 해” – 뉴스앤조이

“뭐 서울시가 뭐라 하든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우리는 늘 얘기하듯이 세상 사회 법 위에 도덕법 있고 도덕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6월 16일, 사랑의교회갱신위원회(갱신위)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에 동영상 하나가 떴다. 영상은 오정현 목사가 자리에 앉아 사랑의교회 건축에 관해 얘기하는 내용이다. 이 영상은 2012년 8월 말 사랑의교회 안성 수양관에서 열린 교역자 수련회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뭐 서울시가 뭐라 하든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우리는 늘 얘기하듯이 세상 사회 법 위에 도덕법 있고 도덕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100~200명이 그렇게 난리를 치고 행정소송한다는 것이, 서초구에만 우리 등록 교인이 2만 수천 명인데. 영적 공공재라는 게 있어요.”
“그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계 변경과 건축 기간 연장 등 수백억의 돈이 더 들어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황당함이 있기 때문에, 결국 그 말은 건축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오정현 목사는 영적 공공재라는 기막힌 표현을 떠올린 자신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 한 마디가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공공재의 정의를 들어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도 그럴 만한 맥락에서나 유효하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자 강제력을 부여한 합의다. 이걸 모르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소위 영적 제사법이 세속법에 우선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려 경제학 곧 “세속 철학”의 언어를 빌려온 모양새만으로 충분히 우습다.

사회법 < 도덕법(?) < 영적 제사법(??)이라는 도식이 맞다고 하자. 그런데 교계가 사회 평균보다 도덕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던가. 개별 목회자나 개별 교회, 개별 단체를 넘어 교계가 그랬던 일은 사실상 없다고 생각한다. 한때는 위대한 인물이라도 있었다. 이제 문익환 박형규 김수환은 떠났고 조용기 김홍도가 원로로 군림한다. 옥한흠이 떠난 자리를 오정현이 차지했고 가장 잘 알려진 기독교 기업은 이랜드다. 도덕법 위에 있다는 영적 제사법까지 갈 필요도 없다.

하지만 도덕적 우월성 상실은 문제의 원인보다는 결과다. 기독교는 도덕률을 신봉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교 윤리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에서 파생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따를 것인가? 오늘날 기독교는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있고, 윤리적 우월성의 기초가 될 고유성singularity을 찾지 못하고 있다. 종교규범이 타협불가능한 진리라고 믿는 기독교 우파, 성서가 쓰인 역사적 맥락context의 휘장 뒤로 돌아가 텍스트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현대적 맥락에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좌파 모두 다르지 않다.

성서가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다고 믿는 기독교 우파는 종교 규범을 사회 규범으로 격상시키려 한다. 술담배, 혼전순결, 동성애 문제를 두고 사회와 불화한다. 기독교 좌파는 윤리적 이슈에 관대하다. 이들에게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세상을 뒤집고[modern_footnote]복음주의 좌파 계열에서 자주 읽히는 도널드 크레이빌의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은 이미 뒤집어진 것이다.” 특별히 급진적인 텍스트에서 인용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modern_footnote] 소수자minority를 껴안은 인물이다. 하느님이 세상의 왕으로서 모든 영역에 관여한다고 선언하고, 그 연장선에서 세속 진보 담론의 “성서적 토대”를 찾아낸다. 악성부채탕감을 모토로 내세운 주빌리은행이 대표적 사례로, 구약성서 희년법이 이 운동의 사상적 배경이다. 또는 성서가 가진 차별적 요소를 찾아내 해명하거나 아예 전복적 해석을 내놓는다. 이런 접근은 전통적 접근과 달리 성소수자 문제에 개입할 여지를 만든다.

이 둘은 접근법이 다를 뿐 성서의 (무오성과) 권위를 복원한다는 목표를 공유한다. 그에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완전히 같다. 우파식 접근은 기독교를 사회로부터 유리시키며, 좌파식 접근은 기독교를 시민윤리 변동에 종속시킨다. 종교와 정치를 뒤섞어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신정법divine law과 현대 민주주의의 정치적 동력을 혼동시킨다는 점에서 좌파 쪽이 어쩌면 더 위험하다[modern_footnote]James Davidson Hunter (2010), 배덕만 역 (2014),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새물결플러스.[/modern_footnote]. 교계가 문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케케묵은 주장을 꺼내 들 생각은 없다. 세상은 변한다. 그렇다면 변화의 물결이 거듭되어도 유효한 질문과 그 답을 찾아내어야 한다. “메마르고 야윈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modern_footnote]Walter Wink (2003), 한성수 역 (2014), <참사람>, 한국기독교연구소, p. 508.[/modern_footnote] 은 무엇인가?

종교는 믿음을, 믿음은 도약을 요구한다. 믿어야 뛸 수 있고 뛰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도약하려면 최소한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무엇을, 왜 믿으라는 말인가. 왜 반드시 기독교여야 하는가. 왜 굳이 초월성이란 요소를 도입해서 인생을 귀찮게 만들어야 하는가. 기독교 우파와 좌파의 접근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도덕적, 윤리적 우월성을 확보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기독교 사상가들이 열심히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그리스도의 유일성, 성경의 권위” 에 관해 설명하지만 그들의 말은 동어반복적이다. 복음주의 사상가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한때 복음주의는 학계에서 죽은 것으로 여겨졌다”는 말로 이들 주제를 다루는 대표 저서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을 시작한다. 그 말은 틀렸는데, 신학계를 제외한 학계에서 복음주의가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계열 유명 잡지 <크리스채니티 투데이>가 이 책을 1997년 도서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이 훌륭한 책은 너무나 널리 읽혀 영문판이 구글 스칼라 기준 110번 인용되었다. 늘상 “주류가 나를 무시한다”고 주장하는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2004) 영문판 피인용횟수가 3226회, <나쁜 사마리아인들>)(2007)이 601회다.

흔히 경제성장이 종교를 위축시킨다고 여긴다. 아니다. 사회학과 경제학 연구자들의 공통된 결론이다[modern_footnote]놀랍게도 종교의 경제학economics of religion이란 분야가 있다. 20-30년 된 “젊은” 응용분과다 (주로 응용산업조직론의 형태. Hotelling, Salop의 공간경쟁모형spatial competition models이 종교시장 분석에 자주 활용된다). 사회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종교현상을 분석해 왔는데, 최근에는 종교사회학-경제사회학-종교의 경제학이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듯하다. 유명한 경제학자들도 관련 논문을 쓴다. 공공경제학 교과서로 잘 알려진 Gruber MIT 교수, 언제나 독창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Zingales 시카고 교수 등등. 이쪽 문헌 중 재미있는 논문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따위 없다는 실증연구가 있다.
경제성장과 종교, 세속화, 다원주의에 관한 참고문헌. 모두 경제학과 사회학 분야 유명 학술지에 게재된 것들이다.
– Buser (2014), “The Effect of Income on Religiousness.”, American Economic Journal: Applied Economics.
– Hungerman (2013), “Substitution and Stigma: Evidence on Religious Markets from the Catholic Sex Abuse Scandal.”, American Economic Journal: Economic Policy.
– Hungerman (2005), “Are Church and State Substitutes? Evidence from the 1996 Welfare Reform.” Journal of Public Economics.
– McBride (2010), “Religious Market Competition in a Richer World.”, Economica.
– McBride (2008), “Religious Pluralism and Religious Participation: A Game Theoretic Analysis”,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 Montgomery (2003), “A Formalization and Test of the Religious Economies Model.” American Sociological Review.[/modern_footnote][modern_footnote]베버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테제를 정면 반박하는 연구는 이거다. 무려 경제학 탑저널 QJE에 실렸다. 제목부터 사회학자들과 한 판 붙어보겠다는 패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초록만 읽어도 재미있다. 1저자 이름이 Sascha다. 캬.. 사스가…
– Sascha O. Becker and Ludger Wößmann (2009), “Was Weber Wrong? A Human Capital Theory of Protestant Economic History.”,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modern_footnote]. 세속화secularization와 다원주의pluralism의 영향은 생각보다 복잡하며 종교가 반드시 쇠락하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속화가 사람들을 탈종교화시키리라는 전망은 종교서비스시장에서 공급이 불변이고 (모임 출석 횟수, 출석 시 시간, 기부금 액수 등으로 측정한) 수요만 줄어든다는 말과 같다. 공급도 변한다면, 그러니까 개별 종교의 수요가 줄어들더라도 다양한 종교 내지 교파가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실은 어땠는가? 데이터는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 유럽은 분명히 세속화되었다(수요 변화가 지배적). 미국에서는 다양한 교파가 출현하고 개별 종교 내지 종파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수요 공급 모두 변화). 한국 기독교는 종교시장이라는 난장에서 어디에 자리잡을 것인가. 적어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어야 하고, 주는 방식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신학자가 아니며 저 주제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다만, 종교시장의 공급자로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공급곡선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한국 교계는 쇠락을 피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쌓아올린 사회적 부를 투자해 정신적 유산을 만들고, 무엇을 믿을지 묻고 답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예배와 모임에서 요구하는 시간을 줄여 기회비용을 낮추는 것도 한 방법이다. 특히 시장지배적 지위에 있는 대형교회, 대형 단체들이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물론 시장지배적 지위를 누리던 자들이 접근성을 높일, 공급곡선을 옮길 리가 없다. 모든 것은 수요 측의 문제니, “불신자들”을 보고 “주님을 모르는 세대”가 오고 있다고 개탄하고, 뜨뜻미지근해 보이는 신자들에게는 “네 돈과 시간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훈계하면 되니까. 믿음대로 될 테니까.

예수는 믿음이 부족했다. 돌을 떡으로 바꾸지도, 성전에서 뛰어내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모른다 할 것이다. 돌을 떡으로 바꾼 자들,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한 자들,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불가능하다던 도로 점용허가를 따낸 자들, “그들이 나를 알지 못하듯 나도 그들을 알지 못한다.”

아무런 기대가 없다. 실망도 하지 않는다. 축적된 종교자본이 사라지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어차피 그들에겐 “종교적” 힘이 없다. 길 찾을 능력과 의지가 없으니 긍정적 영향력이 나올 수 없으며, 더 악화시킬 위상이 없으니 부정적 영향력도 나올 수 없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더라도 놀랍지 않다. 오래 전 길 잃은 무리에게 예정된 파산일 뿐이다.

나는 예수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제도종교와 멀어져 신앙의 변방에서 헤매는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교계가 내 길을 찾아 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헤맬 필요는 없다. 여전히 세상에 예수가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첨탑 세워 십자가 매다는 건 그만두고 사람의 아들을 보는 법을 고민하고 나누어야 한다. 오정현 목사가 공공재 타령을 했으니 그대로 돌려주자면, 교계에서 무엇이, 왜 과소공급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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