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채용제 단상

한국 노동시장의 학벌 차별은, 존재하는 경우, 그리고 산업/직종별 차이도 고려해야겠지만, 전체적으로 선호에 따른 차별taste discrimination보다 통계적 차별statistical discrimination인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야 SKY 애들만 뽑아”보다 “야 시켜보면 걔네들이 일도 잘하니까 걔네 뽑자” 에 가까우리라는 것이다. (근거자료 없는 추측이다.)

고용주들은 정보부족 때문에 통계적 차별을 시행한다. 교과서적 예를 들어 보자. 고용주는 구직자를 뽑아 일을 시키기 전에는 생산성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보유한 과거 인사기록을 기초로 구직자가 속한 집단의 평균 생산성을 따져본 뒤 구직자 역시 평균적으로 그 정도일 것이라 예측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과거 인사기록 정보 자체가 특정 집단에 편중되어 있다면? 쉽게 말해 지금까지 100% SKY 출신만 있던 회사에 비SKY 출신이 입사지원을 하는 경우다. 이 때는 비SKY의 성과에 관해 참조할 정보 자체가 없으므로 불확실성이 커진다. 따라서 인사담당자가 학교 서열 등을 전혀 모른다 해도 SKY 출신을 뽑게 된다. 참고로 이 논리는 SKY-비SKY를 바꾸어도 성립한다. “이런 학교 나온 애가 왜 여길 왔지? / 몇 번 뽑아 봤는데 다 금방 그만 두더라.”

이론적으로 통계적 차별은 구직자 생산성 정보가 고용주에게 충분히 제공될 때 사라진다(Phelps 197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뽑아 보기 전에는 모르는데, 모르니까 뽑지 않는다. 적극적 조치로 대표되는 소수 집단 우대정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별을 인지한 소수자(이 예시에서는 비SKY)들이 능력계발을 포기한다면 통계적 차별이 실질적인 격차로 고착되기 때문이다(Arrow 1972, Lundberg and Startz 1982).

대표적 노동시장 차별인 성차별 문제의 경우 여성할당제를 채용하여 정보량을 늘린다. 집단이 둘이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다. 학벌은 집단이 여럿이므로 수량규제인 할당제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 때 블라인드채용제는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정책대안이다. 통계적 차별의 근거가 사라지며, 고용주가 구직자 생산성을 예측할 때 사용하는 정보에서 다른 정보 – 가령 인턴십 경험 – 비중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차별의 경우 블라인드 방식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존 방식에 맞추어 준비해 온 구직자들의 손실과 저항이 불가피하다.

통계적 차별이 일반화된 노동시장에서 교육은 역량 증진의 수단이 아니라 신호발송signalling의 수단이 된다. 소위 학교 간판은 “이러이러한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보다 “난 이런 학교 나올 능력을 갖고 있다”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통계적 차별을 없애려는 시도는 개인의 역량(인적자본) 자체를 평가하겠다는 의지로서, 교육을 신호발송의 수단으로 여겼던 집단에게는 불리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들도 주어진 제약 하에서 최적선택을 했던 것이니, 적응기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블라인드채용제 시행 유예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마 정치적인 이유로 불가능하겠지만.

블라인드채용제를 성토하는 모교 대나무숲 게시물이 페이스북에서 여러 차례 공유되었다. 지금까지 노력해서 이 학교 들어왔는데 노력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다른 “낮은” 학교 학생들과 동일하게 평가된다는 것이 불만이라는 이야기였다. 전형적인 신호 내러티브다. 한 마디만 얹고 싶다. 소위 명문대는 다른 학교에 비해 자원 규모가 압도적이다. 재학생들이야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겠으나, 채용설명회라도 한 번 더 있고, 전반적인 정보나 선후배 인맥, 진로상담 등 학교 인프라 자체가 다른 학교보다 우월하다. 학창 시절의 수고와 노력은 이 자원에 접근하는 대가로 지불된 것이지 평생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런 자원을 갖고도 학교 이름 없이는 경쟁력이 없다면 그거야말로 노력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돌아와서, 그럼에도 “역량중심사회”로 이행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문제가 채용에서 끝나지 않는 까닭이다. 직장 내 평가도 역량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평가 결과에 따라 승진과 해고가 가능한 수준의 노동시장 유연성 역시 필요하다. 그런데 사내 평가에 정부가 개입할 수 있겠는가? 하여 지금으로서는 블라인드채용제가 기폭제가 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는데,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참고문헌.

Arrow (1972), “Some Mathematical Models of Race in the Labor Market”. AH Pascal (Ed.), Racial discrimination in economic life, Lexington Books.

Lundberg and Startz (1983), Private Discrimination and Social Intervention in Competitive Labor Markets, American Economic Review.

Phelps (1972), The Statistical Theory of Racism and Sexism, American Economic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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