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오바마 대통령 기고 번역에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제게 읽고 번역하며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선사했는데, 비슷한 경험을 하셨기 바랍니다.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부탁을 하나 하고, 원글 앞에 너무 긴 도입을 붙이는 것 같아 쓰지 않았던 코멘트를 몇 줄 적으려고 합니다.
예상은 했지만 페친 신청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상한 분 아니면 일단 수락하긴 할텐데 혹시 정보나 식견을 기대하신다면, 감사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저는 전문번역가도 경제학 박사도 아닙니다. 장삼이사 중 한 명입니다(듣보가 듣보를 자처하면 슬퍼지는데ㅠㅠ). 당장 그 글도 제가 쓰지 않았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글을 옮긴 것에 불과하지요.
전 평소 페이스북에 글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정보함량이 높은(informative) 글 별로 없습니다. 이따금 일상적인 또는 사변적인 글을 올리는 정도입니다. 아직 제대로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다 어디서 조금 읽은 내용 표현 바꿔서 아는 척 하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이고, 페이스북에서 숱한 고수들을 보고 배운 게 많으니 저도 무언가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부분이지만 저는 내향적인 사람이라 의도한 이상으로 노출된다는 게 상당한 스트레스거든요. 뻘글의 자유도 중요하구요 ㅋ 정말 가끔 이런 글을 올릴 때는 전체공개로 올립니다. 그러니까! 혹시 생각이 궁금하신 분들은 팔로우만 해 주시면 됩니다. 이미 친구신청하신 분들은 아니다 싶으면 얼른얼른 끊어 주십시오. ^^
이쯤하고, 글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전 글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번역을 마음먹었습니다. 첫 번째 문단에서 이민, 무역, 기술 혁신을 둘러싼 갈등이 현재 미국의 문제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단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것들을 “변화”로 묶으면서 슬쩍 2008 대선 슬로건을 상기시킵니다. “저는 분명히 변화를 외치며 당선되어 8년의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군요. 그럼 앞으로는 어쩌죠?”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으신가요? 1, 2문단은 대충 봐도 잘 요약된 깔끔한 문제제기입니다. 그런데 배후에 이런 메시지까지 있는 도입부라니요.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글이 다루려는 주제를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와우!
이민배척주의의 역사를 언급한 세 번째 문단은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노예해방 슬로건 “We shall overcome”을 연상시키는 “We will overcome(우리는 넘어설 겁니다.)”으로 끝납니다. 역사적 맥락을 배치하지 않았다면(있는 지금도), 이 추론이 억지라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상시키는 인상”만 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변화”에 강조 표시가 없었던 것처럼요. “We shall overcome”을 그대로 가져오면 Shall이 사실상 사어인 건 둘째 치고, 문구가 가진 역사적 무게 때문에 물 흐르듯 하던 흐름이 확 끊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We will overcome”은 정확히 그 목적에 부합합니다. 정말 훌륭한 구성이지요. 내용도 정말 훌륭하지만, 이런 세련미가 글의 품격을 배가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 비판도 통쾌했지만, 저는 여기서 번역을 생각했습니다.
글에는 오바마가 최근 거시경제 이슈는 물론 경제(학) 자체를 어느 정도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시장실패의 사례로 언급한 내용들은 미시경제학 교과서의 시장 실패와 정보경제학 항목을 정확히 예시로 옮긴 겁니다. 거시경제정책의 두 축이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며, 그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미국 탑스쿨 졸업하고 기라성 같은 경제학 교수들으로 구성된 경제자문위원회를 갖고 있는 미국 대통령이 저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네. 경제학원론만 들은 학부생도 그 정도 지식은 압니다. 하지만, 우선 이 글은 그 뿐 아니라 최근의 총요소생산성(TFP) 둔화 및 그 측정(measurement) 이슈, 교육과 기술의 경주, 국제무역의 효과, 불평등, 법인세와 투자 등 여러 주제도 간결하지만 핵심을 잘 짚고 있습니다. 더하여, 이론과 자신의 지식, 경험을 결합하여 한 편의 완결된 글을 써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경제학 박사까지 하고도 이상한 말 하는 사람 정말 많습니다.
노동경제학에 관심이 많은 제게는 최저임금과 근로장려세제(EITC)가 같이 언급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글에는 열거만 되었지만, 조금 풀어쓰면 “최저임금을 올립시다! 어느 정도 올리는 건 고용에 그렇게 심각한 영향까지는 주지 않는다는 실증연구 결과도 꽤 축적되었습니다. 최저임금은 빈곤 대책으로는 비효율적이라고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빈곤가구 타겟팅이 확실한 근로장려세제를 무자녀가구에게도 확대합시다.”가 됩니다. 경제학자나 관료가 아니라 대통령이 이 정도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덮어놓고 오바마 찬양하려는 확대해석이 아닙니다. 비꼬려는 의도는 없습니다만 대다수 최저임금 인상론자들이 저렇게 두 가지를 묶어서 언급하시는 것을 본 적 있으신가요? 최저임금 인상과 EITC를 묶기 위해서는 저런 이해, 최저임금제와 EITC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숱한 현안을 처리해야 하는 대통령이 머릿속에 꼭 이론적 틀을 정리해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그림을 이해하고 참모를 잘 기용하는 것도 훌륭한 리더십입니다. 그렇지만 본인이 충분한 이해력과 통찰력을 가진다면 더욱 훌륭하겠지요. 이 글에는 그런 식견과 식견으로부터 나온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말 쉽습니다. 경제학도로서, 그리고 선출된 지도자를 보는 시민으로서 감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말 잘 안 하지만, 이쯤 되면 글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 않습니까?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글이 주는 인상만큼 100% 성공적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걸 일일이 지적할 만큼 미국 경제에 밝지 않기 때문에 섣부른 논평은 삼가겠습니다. (전문가라도 정책의 모든 파급효과를 당대에 “정확히” 평가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무모하고 빗나가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글이 교묘하게 그런 실패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글이 폄하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가 명확한 이해와 뚜렷한 철학을 바탕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며 포괄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경제정책론으로 이 글은 정말 탁월합니다. 이 글의 청사진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우리가 알던 경제 지식을 전부 뒤엎어야 하는 날일 겁니다. 이 글은 현대 경제학의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글의 가치입니다. 당분간 이 정도의 글이 나오긴 어려울 거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사진은 이 글이 실린 <이코노미스트> 표지입니다. 타이틀은 <The Road to Brexit>지만, 오황상 칼럼 제목인 <The Way Ahead>로 바꾸어도 될 만한 표지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트럼프와 클린턴으로, 앞에 놓인 갈림길을 “우리 앞에 놓인” 갈림길이라고 생각해 볼 만 하지 않을까요? 아닌 것 같으시면… 마음의 눈으로 보시면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