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두고 미국 최대 일간지 중 하나인 워싱턴포스트(WP)가 “한국이 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였다”고 극찬했습니다. 한편 새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이 트럼프 행정부와 다를 수 있으나,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와 맞물리면 긍정적인 협력도 가능할 것이라 전망했습니다. 이는 WP가 지난 2일 진행한 문재인 대통령과의 대담 기사 논조와도 유사합니다.
기사 번역본을 보지 못해서 옮겨 보았습니다. 경제정책 이슈가 불거지지 않는다면, 이 포스팅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정치 관련 포스팅을 쉽니다. 이하는 전문번역입니다. 참고를 위해 원문에 있는 링크도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강조 역시 원문을 따랐습니다. 번역 관련 지적 환영합니다. 대괄호[] 안은 역자 첨부입니다.
한국, 세계에 민주주의 운영의 모범을 보이다 (South Korea just showed the world how to do democracy)
서구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위기와 [국제 질서를] 좀먹는 국수주의의 발흥을 두고 개탄하고 있는 지금, 한국은 인민의 힘(people power)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기쁜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화요일에 치러진 조기대선에서 한국 유권자들은 문재인을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리버럴 정치인 문재인은 [보수 집권 후] 10년 만에 청와대를 차지한 첫 진보 대통령으로서 취임했다. 새 대통령의 대북 정책 철학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와 마찰을 빚을 수 있다.
그러나 문재인의 승리가 놀라운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지난 7개월 간 이어진 정치적 혼란 와중에 집권했다. 한국 언론은 당시 대통령 박근혜를 둘러싼 부패·뇌물 혐의를 취재하여 보도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시위와 법적 절차가 뒤따랐고 박근혜는 결국 탄핵되어 3월에 권좌를 떠났다. 대선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변화를 원한 유권자들은 적폐청산을 내세운 전직 인권변호사 문재인을 지지했다.
반(反)박근혜 시위는 곳곳에 만연한 재벌 대기업의 영향력 및 정경유착 의혹을 보며 국가적으로 확산된 좌절감과 연관되어 있다. 시위가 시작되던 11월, 김완규 씨(34세, 회사원)는 안나 피필드(Anna Fifield) 본지 도쿄 지국장에게 한국인들이 박근혜의 범법행위(misdeed)로부터 “우리가 정치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정부 운영 감시를 얼마나 게을리했는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감동적인 이야기다. 미국 후원 하의 독재정권이 수십 년 통치했고, 1980년대 후반에야 민주주의로 이행한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크리스찬 카릴(Christian Caryl) 본지 오피니언 편집자는 박근혜가 파면된 3월에 이렇게 썼다. “한국은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보기 드문 시민행동에 고무되어, 관행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인상적으로 변화를 향한 운동(campaign)을 벌였고, 오늘 가장 극적인 형태의 결실을 얻었다. 북쪽 사촌들은 꿈 속에서나 비슷하게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시간이 멈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무기에 의존하는 것 외에는 미래 계획이 없는 지도자에게 얽매여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지난 화요일, 피필드 지국장은 그가 대내적으로 “정부 투명성을 강화하고 한국 경제를 지배하는 대기업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썼다. “유권자들은 또한 경제 부진과 빈부 격차 심화를 염려했다. 문 대통령은 공공부문 일자리 81만 개 창출, 노동시간 단축 등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약속했다.” 여당 의석은 과반수 미만이다.
그러나 워싱턴 평론가들에게는 한국과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떻게 변화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다. 문 대통령은 북한과의 화해(rapprochement), 적어도 적극적 대화(positive engagement)를 지향한 정치 전통에 속한 인물이다. 이는 북한의 최근 미사일 실험 이후 단계적으로 압박 강도를 높여 온 백악관 방침과 어긋난다.
앤드류 여 미국가톨릭대 교수는 본지 블로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북 제재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해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남북대화를 추진하고 ‘경제공동체’를 촉진하며, 역내 협력국들을 설득하여 대북 강경책에서 대화로 선회하려는 새 정부는 워싱턴과 대북정책을 조율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재인은 또한 미국의 첨단 미사일 방어 시스템, 사드 배치를 맹비판했다. 그는 지난 정부가 충분한 검토 없이, 대선 직전 서둘러 배치를 결정했다고 주장한다. 한국 진보 진영의 불만은 트럼프가 사드 배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더욱 심화되었다. 김두연 한반도미래포럼 객원연구원의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 기고에 따르면, “워싱턴이 사드를 배치하도록 서울을 협박한 뒤, 가까운 동맹국에게 비용을 뒤집어씌운다는 인식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한미관계를 낙관할 이유 역시 존재한다.
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시사한다. “한국의 과거 진보 대통령들처럼, 문재인은 한반도 문제에 보다 주도적인 자세로 임할 것이다. 그는 미국이나 중국에 단순히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는 “아메리카 퍼스트” 독트린을 강조하며 [다른 곳에서도] 미국이 지정학적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우선하는 트럼프 행정부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선거 전 문 대통령은 피필드 지국장에게 말했다. “저는 트럼프 대통령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합리적인 사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강경한 어조로 대하지만, 선거 기간 중 그는 ‘김정은과 햄버거 먹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저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그런 실리적 접근법을 지지합니다.”
문재인이 트럼프와 견고한 교감을 형성한다면 평양과의 긴장을 완화시킬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변화를 향한 요구가 실질적 결과를 낳는다는 징표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마크 릴라 컬럼비아대학교 교수는 서구 정치·종교사상사를 연구한 학자입니다. 그는 계몽주의와 그 비판의 역사를 연구하고, 다른 주제로 정치와 종교의 상호연관을 탐구합니다. 2007년 출판한 <사산된 신>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 100선 선정)은 정교분리를 표방하는 서구 자유-민주주의가 끝내 종교와 결별하지 못했고, 정교분리라는 목표란 달성하기 어려우며, 정치신학(또는 신학-정치)의 뿌리가 매우 깊다는 것을 밝힌 역작입니다.
이 글은 지난 11월 대선 이후 마크 릴라가 민주당 패배 요인을 분석한 글입니다. 기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에 책임을 돌리는 글은 많았습니다만, 대부분 단순히 PC를 비난하는 데 그쳤습니다. 이 글은 정치적 올바름이 민주주의의 기초가 될 수 없음을 차분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글이 기고될 때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는 당선자 신분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 취임 후 행정명령을 난발하고 있는 지금, 트럼프 현상에 여전히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공유합니다.
아래는 기고문을 읽고 나서 그의 예전 저작을 참조하여 릴라 사유의 배경을 짐작한 것을 조금 쓴 겁니다. 정치철학에 관해 잘 모르니 몇 마디만 보탭니다.
근대 정치철학은 종교개혁이 낳은 파국, 30년 전쟁이 일단락된 베스트팔렌 조약을 배경으로 탄생했습니다. 종교적 열정이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력을 제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고,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그 문제를 정교분리의 원칙으로 답했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뒤로하고 서로 “이를 꽉 깨물고” 존중하라. 종교는 공론장에서 위협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고, 대신 국가는 종교 통제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오늘날 보편원칙이 된 관용tolerance이 여기서 출발합니다.
릴라는 정교분리가 소원처럼 깔끔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서구 사상사에서 정치신학적 사유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2차 세계대전, 근대의 모든 정신적 유산이 파괴된 “문명의 붕괴” 현장은 종교가 공론장에 재등장하는 계기이자 무대였습니다. 냉전기 정치 이념들은 나야말로 인류를 “구원하리라”고 속삭였죠. 릴라에 따르면 정교분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듯한 현대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사상적 토대가 일정 부분 종교적 사유와 언어에 침습되어 있습니다. 정치 질서가 위태로울 때 종교적 열정이 목소리를 내거나, 사람들이 종교를 호출할 태세가 갖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미국 우파 복음주의의 거두 제리 포웰Jerry Falwell 목사가 설립한 단체 이름이”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라는 데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머리 아프지만 당신이 믿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으며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요. 1980년대 미국에서 보수적 가치의 옹호자를 자임한 도덕적 다수는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니었습니다. 20개 주 조직, 4백만 회원과 2백만 후원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도덕적 다수의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로버츠 빌링 목사가 레이건 선거운동의 종교담당 보좌관이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자유주의의 기초를 놓은 홉스는 종교적 열정이 공포에 기원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위협받으며 느끼는 공포를 종교적 열정으로 치환하고, “구원받기” 위한 선택을 한 결과 트럼프 대통령이 탄생했다, 저는 이것이 릴라의 현실인식이 아닌가 합니다. 이 글에서는 전략만을 말하며 (본인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지만요.
언제나 그렇듯 모든 안경은 현실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릴라 역시 현실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지는 못합니다. 당장, 어쨌든 힐러리 클린턴은 총득표 수에서 승리했죠. 하지만 민주주의의 기초를 고민한다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LA에서 백인 여성이 한국계 노인을 공격하는 등 갈등이 격화되고 있지만, 어쨌든 외부 관찰자인 한국 독자들은 어느 쪽을 비난하기보다 한 발짝, 적어도 반 발짝 밖에서 상황을 고민하기 유리하겠지요.
지적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단, 리버럴리즘이 미국 진보주의를 의미하는 건 압니다. 현재 리버럴리즘의 용법이 대단히 미묘하며 개념도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옮겼습니다. 모든 주석은 역주입니다.
미국 사회가 점점 다양화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보기 좋은 일이다. 외국 관광객, 특히 인종·종교 간 융합에 난항을 겪는 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이를 해내고 있는 미국을 보며 놀라워한다. 물론 완벽하지 않지만, 오늘날 어떤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보다 낫다. 다양성 확대를 이루어 온 미국 역사는 보기 드문 성공담이다.
그런데 다양성에 따라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가 바뀐다면, 어떤 쪽이 바람직한가? 지금까지 약 한 세대 동안 차이를 인지하고 “예찬”해야 한다는 것이 리버럴 표준 답안이었다. 도덕교육(moral pedagogy)의 찬란한 원칙이지만, 오늘과 같은 이념적 시대에 민주정치의 기초로는 형편없다. 최근 미국 리버럴리즘은 인종, 생물학적·사회적 성 정체성에 관한 도덕적 패닉에 빠져들었다. 이는 리버럴의 메시지를 왜곡했고, 리버럴이 수권 능력을 갖춘 통합된 힘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이번 대선 캠페인과 그 불유쾌한 결과의 여러 교훈 중 하나는 정체성 리버럴리즘 시대의 막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세계 정세에 있어 미국의 이익,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민주주의 이해와 연관되는지를 논할 때 가장 탁월하고 사람들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국내 문제로 오자 클린턴은 선거 유세 중 그 넓은 시야를 잃고 다양성 수사법(the rhetoric of diversity)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가는 곳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라틴계, LGBT, 여성 유권자를 콕 짚어 불러냈다. 이는 전략적 실수였다. [다양화된] 미국에서 어떤 “집단”을 거명하려면 모든 집단에 대해 말해야 한다. 불리지 못한 사람들이 배제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데이터에서 나타나듯, 이것이 바로 백인 노동계급 및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이다. 대졸 미만 백인 유권자의 3분의 2가 모두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고 백인 복음주의자의 80% 이상 역시 그랬다.
도덕적 힘 – 정체성과 밀접한 – 에는 물론 순효과가 여럿 있다. 적극적 평등실현조치affirmative actions는 기업 문화를 바꾸고 개선시켰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modern_footnote]2012년 트레이본 마틴 살인 사건 이후 시작된 흑인민권 운동.[/modern_footnote]은 모든 양심적 미국인에게 경종을 울렸다. 대중문화에서 동성애를 정상화하려는 할리우드의 노력은 미국 가정과 공직에서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학교와 언론이 다양성에 집착한 결과, 자기 도취에 빠져 스스로 규정한 집단 바깥 상황에 무지하고, 각계각층 사람들과 접촉한다는 [긴요한] 과제에는 무관심한 리버럴과 진보주의자progressives 세대가 출현했다. 미국 아동들은 정체성이 형성되기도 전인 아주 어린 시기부터 개인 정체성individual identity에 관해 말하도록 주문받는다. 대학에 올 때쯤 그들은 당연히 다양성 담론이 정치 담론을 망라한다 여기고, 계급과 전쟁, 경제, 공공선 등 오래되고 언제나 중요했던 문제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다. 이는 고교 역사 교육과정이 시대착오적이게도 현대식 정체성 정치the identity politics of today를 과거에 투사하고, 우리 나라를 만들어 온 위인과 원동력에 대해 왜곡된 상을 만들어내는 데 상당 부분 기인한다. (가령 여권 신장 운동이 거둔 성취는 실제로 중요했지만, 권리 보장에 기초한 정치체제를 수립한 건국의 아버지들the founding fathers의 업적을 먼저 이해해야 그 성취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학에 온 젊은이들에게, 학생 집단과 교수진, 또한 다양성 전담 행정 관리자들은 “자기 [생활과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정체성 정치에 초점을 맞추고 “다양성 이슈”를 중시하라”고 권고한다. 폭스 뉴스 및 다른 보수 매스컴은 이들 이슈를 둘러싼 “캠퍼스 광기”를 조롱하고, 대개 옳다. 이런 식으로는 대학 캠퍼스에 한 발짝도 들여놓은 적 없는 사람들의 시선에 교육의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대중 선동가 손에 놀아날 뿐이다. “대학생들에게 ‘불리기를 원하는 젠더 대명사designated gender pronouns‘를 선택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의 소위 도덕적 긴급성the supposed moral urgency을 평균적인 유권자에게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유권자들이 젠더 대명사 자리에 “황제 폐하”라고 썼다는 짓궂은 미시간대 학생 이야기[modern_footnote]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가 학내 사이트 개인정보 기입 시 학생들에게 (기존의 Mr., Ms. 등이 아닌) 자유로운 젠더 대명사를 써도 좋다고 하자, 한 학생이 “황제 폐하(His Majesty)”라는 대명사를 입력하며 비꼬았다. 이 기사 참조.[/modern_footnote]에 폭소를 터뜨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캠퍼스식 다양성 의식campus-diversity consciousness[modern_footnote]”다양성 의식”이라는 표현이 그리 직관적이지 않다면 유사한 조어인 “역사 의식”을 떠올리면 되겠다. 아니면 맥락상 의미가 유사한 “젠더 감수성”을 대신 집어넣어도 이해가 빠를 듯하다.[/modern_footnote]이 수 년간 리버럴 언론에 요란하게 침투했다. 미국 신문방송계에서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적극적 평등실현조치는 보기 드문 사회적 성취를 거두었다. Megyn Kelly 前 Fox News, 現 NBC News 앵커, Laura Ingraham라디오 프로 The Laura Ingraham Show 진행자같은 언론인이 명성을 얻으며, 우익 미디어의 얼굴을 문자 그대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어 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한편 소장 언론인·편집자 사이에서 정체성에만 치중하면 할 일을 다 한 것이라는 식의 억측을 조장했다.
최근 프랑스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나는 작은 실험을 했다. 1년 내내 유럽 언론 기사만 읽고 미국 언론엔 손대지 않았다. 유럽 독자들처럼 세상을 보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생각보다 훨씬 유익해서, 나는 미국 기사를 읽으며 근년간 정체성이라는 렌즈가 어떻게 미국 언론보도를 바꾸어 왔는지를 알아차렸다. 가령 “최초로 Y를 해낸 X” 식의 게으른 기사가 재삼 보도된다[modern_footnote]”최초로 유리천장을 뚫고 IT 대표 기업 CEO가 된 …” 식 기사를 말한다. 이 기사 제목이 익숙하다면 바로 읽었다. 한성숙 현 네이버 대표이사가 취임할 때 국내 언론에서 무수히 쏟아진 헤드라인이다.[/modern_footnote]. 정체성 드라마에 열광하는 보도 행태는 안 그래도 보도가 부족한 해외부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이집트 성전환자transgender들의 운명을 다룬 기사[modern_footnote]이런 기사를 말하는 듯하다. Liam Stack, “Gay and Transgender Egyptians, Harassed and Entrapped, Are Driven Underground“, NYT 2016년 8월 10일.[/modern_footnote]가 그렇다. 아무리 흥미롭더라도, 이집트의 미래를 결정하고 미국에도 간접적 영향을 미칠 유력 정치적·종교적 조류[modern_footnote]무슬림 형제단을 가리키는 듯하다.[/modern_footnote]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유럽의 어떤 메이저 언론사도 그런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 정체성 정치가 가장 화려하게 실패한 곳은 선거정치electoral politics다. [정치 담론이] 건전했던 시절 국가정치는 “차이”가 아니라 공통성commonality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운명에 관한 사람들의 상상을 가장 잘 포착하는 사람이, 그가 누구든 국가정치를 지배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아주 잘 해냈다. 그의 비전을 무어라 생각하건. 레이건 전술을 모방한 빌 클린턴도 그랬다. 빌 클린턴은 민주당을 장악해 정체성-의식을 중시하는 계파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고, (국가건강보험처럼)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국내 정책에 힘을 쏟은 한편 1989년 소련 이후의 세계에서 미국이 맡을 역할을 규정했다. 그는 재선에 성공하며 민주당 지지세력 내의 여러 집단을 위해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정체성 정치는, 표현이야 아주 풍부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정체성 정치가 선거에서 결코 승리하지 못하며, 오히려 패배할 이유이다.
미국 언론이 분노한 백인 남성에게 인류학적이라고까지 할 법한 관심을 기울이자, 이들 비난받고 숫제 잊혀졌던 집단에 대해서만큼이나 리버럴리즘의 현주소도 낱낱이 드러났다. 리버럴들은 이번 대선을 두고 트럼프가 경제적 손해를 인종적 분노로 바꾼 것이 주효했다는 손쉬운 해석을 내놓는다. 이른바 “백인우월주의 반동” 명제the “whitelash” thesis다. 이렇게 해석하면 여전히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한편 다른 유권자들이 주장하는 우선 관심사를 무시할 수도 있어 편리하다. 공화당이 장기적으로 인구통계학적으로 끝장나고 리버럴이 미국을 접수하리라는 망상을 부추겨 현실에 눈감을 수도 있다. [실상은] 트럼프의 라틴계 득표율이 예상 외로 높았다는 사실로부터 인종 집단이 미국에 오래 머무를수록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분화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끝으로, 백인우월주의 반동 명제를 받아들이면 다양성에 대한 강박 때문에 다른 미국인들, 백인이고 지방민이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체성이 위협받거나 무시받는 소외 집단이라고 여기게 된 책임을 면피할 수 있어 편리하다.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다양화된 미국의 현실에 반발하며 나서진 않는다 (그들은 어쨌든 비교적 동질 지역에서 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으로 일컬어지며 도처에서 울려퍼지는 다양성 수사법에 반발하고 있다. 리버럴들은 아직도 존속하는 KKKKu Klux Klan가 미국 정치 최초의 정체성 운동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정체성 놀음에 빠진 사람들은 패배를 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탈-정체성 리버럴리즘a post-identity liberalism이 필요하다. 이는 정체성 정치 이전의 리버럴리즘이 거둔 성공에서 출발해야 한다. 새 리버럴리즘은 [정체성 집단 성원이 아니라] 미국 국민으로서의 미국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 다수에게 중요한 사안을 강조하여 지지기반을 넓히는 데 집중해야 한다. 시민이라면 공존하며 서로 도와야 하는 국가[공동체]로서의 미국을 말해야 한다. 범위가 한정된 사안, 특히 섹슈얼리티나 종교와 연관되어 상징성이 강하며 잠재적 지지자의 마음을 돌아서게 할 법한 사안은 점잖고 섬세하게, 적절한 수준으로 다루어야 한다. (버니 샌더스 식으로 말하자면, 미국은 리버럴들의 빌어먹을 화장실 타령에 신물이 났다.)
이에 투신하는 교사들은 민주주의 질서가 부여한 정치적 책임에 다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미국의 정부 체제, 역사상 주요 사건과 중요 세력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는 열성적 시민 육성이 바로 그 책임이다. 탈-정체성 리버럴리즘은 또한 민주주의 시민이 권리와 함께 의무를 부여받는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가령 현실을 명확히 알 것, 투표에 참여할 것. 탈-정체성 리버럴 언론은 국가 내에서 무시되어 온 영역 – 특히 종교 –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modern_footnote]기고문 앞에 코멘트했듯 릴라는 근대 민주주의와 정치신학의 충돌에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자다.[/modern_footnote]. 그리고 세계 정치를 바꾸는 힘, 특히 그 역사적 층위에 관해 미국 대중을 교육할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몇 해 전 플로리다에서 열린 노조 대회에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1941년 “네 가지 자유” 연설 패널 토론자로 초청받았다. 홀을 가득 메운 지부 대의원 중에는 남성과 여성, 흑인, 백인, 라틴계가 모두 있었다. 애국가 제창으로 행사를 시작했고, 루스벨트의 연설 녹음을 들으려 자리에 앉았다. 무리를 둘러보며, 다르게 생긴 얼굴들이 열 맞추어 앉은 모습, 루스벨트 연설에 놀라울 정도로 집중하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감명받았다. 그가 만인을 위해 주문한 네 가지 자유, 곧 의사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와 신앙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를 선포하는 루스벨트 본인의 강렬한 음성을 들으며, 현대 미국 리버럴리즘의 진정한 토대가 무엇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 기고 번역에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제게 읽고 번역하며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선사했는데, 비슷한 경험을 하셨기 바랍니다.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부탁을 하나 하고, 원글 앞에 너무 긴 도입을 붙이는 것 같아 쓰지 않았던 코멘트를 몇 줄 적으려고 합니다.
예상은 했지만 페친 신청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상한 분 아니면 일단 수락하긴 할텐데 혹시 정보나 식견을 기대하신다면, 감사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저는 전문번역가도 경제학 박사도 아닙니다. 장삼이사 중 한 명입니다(듣보가 듣보를 자처하면 슬퍼지는데ㅠㅠ). 당장 그 글도 제가 쓰지 않았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글을 옮긴 것에 불과하지요.
전 평소 페이스북에 글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정보함량이 높은(informative) 글 별로 없습니다. 이따금 일상적인 또는 사변적인 글을 올리는 정도입니다. 아직 제대로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다 어디서 조금 읽은 내용 표현 바꿔서 아는 척 하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이고, 페이스북에서 숱한 고수들을 보고 배운 게 많으니 저도 무언가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부분이지만 저는 내향적인 사람이라 의도한 이상으로 노출된다는 게 상당한 스트레스거든요. 뻘글의 자유도 중요하구요 ㅋ 정말 가끔 이런 글을 올릴 때는 전체공개로 올립니다. 그러니까! 혹시 생각이 궁금하신 분들은 팔로우만 해 주시면 됩니다. 이미 친구신청하신 분들은 아니다 싶으면 얼른얼른 끊어 주십시오. ^^
이쯤하고, 글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전 글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번역을 마음먹었습니다. 첫 번째 문단에서 이민, 무역, 기술 혁신을 둘러싼 갈등이 현재 미국의 문제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단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것들을 “변화”로 묶으면서 슬쩍 2008 대선 슬로건을 상기시킵니다. “저는 분명히 변화를 외치며 당선되어 8년의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군요. 그럼 앞으로는 어쩌죠?”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으신가요? 1, 2문단은 대충 봐도 잘 요약된 깔끔한 문제제기입니다. 그런데 배후에 이런 메시지까지 있는 도입부라니요.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글이 다루려는 주제를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와우!
이민배척주의의 역사를 언급한 세 번째 문단은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노예해방 슬로건 “We shall overcome”을 연상시키는 “We will overcome(우리는 넘어설 겁니다.)”으로 끝납니다. 역사적 맥락을 배치하지 않았다면(있는 지금도), 이 추론이 억지라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상시키는 인상”만 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변화”에 강조 표시가 없었던 것처럼요. “We shall overcome”을 그대로 가져오면 Shall이 사실상 사어인 건 둘째 치고, 문구가 가진 역사적 무게 때문에 물 흐르듯 하던 흐름이 확 끊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We will overcome”은 정확히 그 목적에 부합합니다. 정말 훌륭한 구성이지요. 내용도 정말 훌륭하지만, 이런 세련미가 글의 품격을 배가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 비판도 통쾌했지만, 저는 여기서 번역을 생각했습니다.
글에는 오바마가 최근 거시경제 이슈는 물론 경제(학) 자체를 어느 정도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시장실패의 사례로 언급한 내용들은 미시경제학 교과서의 시장 실패와 정보경제학 항목을 정확히 예시로 옮긴 겁니다. 거시경제정책의 두 축이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며, 그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미국 탑스쿨 졸업하고 기라성 같은 경제학 교수들으로 구성된 경제자문위원회를 갖고 있는 미국 대통령이 저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네. 경제학원론만 들은 학부생도 그 정도 지식은 압니다. 하지만, 우선 이 글은 그 뿐 아니라 최근의 총요소생산성(TFP) 둔화 및 그 측정(measurement) 이슈, 교육과 기술의 경주, 국제무역의 효과, 불평등, 법인세와 투자 등 여러 주제도 간결하지만 핵심을 잘 짚고 있습니다. 더하여, 이론과 자신의 지식, 경험을 결합하여 한 편의 완결된 글을 써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경제학 박사까지 하고도 이상한 말 하는 사람 정말 많습니다.
노동경제학에 관심이 많은 제게는 최저임금과 근로장려세제(EITC)가 같이 언급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글에는 열거만 되었지만, 조금 풀어쓰면 “최저임금을 올립시다! 어느 정도 올리는 건 고용에 그렇게 심각한 영향까지는 주지 않는다는 실증연구 결과도 꽤 축적되었습니다. 최저임금은 빈곤 대책으로는 비효율적이라고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빈곤가구 타겟팅이 확실한 근로장려세제를 무자녀가구에게도 확대합시다.”가 됩니다. 경제학자나 관료가 아니라 대통령이 이 정도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덮어놓고 오바마 찬양하려는 확대해석이 아닙니다. 비꼬려는 의도는 없습니다만 대다수 최저임금 인상론자들이 저렇게 두 가지를 묶어서 언급하시는 것을 본 적 있으신가요? 최저임금 인상과 EITC를 묶기 위해서는 저런 이해, 최저임금제와 EITC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숱한 현안을 처리해야 하는 대통령이 머릿속에 꼭 이론적 틀을 정리해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그림을 이해하고 참모를 잘 기용하는 것도 훌륭한 리더십입니다. 그렇지만 본인이 충분한 이해력과 통찰력을 가진다면 더욱 훌륭하겠지요. 이 글에는 그런 식견과 식견으로부터 나온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말 쉽습니다. 경제학도로서, 그리고 선출된 지도자를 보는 시민으로서 감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말 잘 안 하지만, 이쯤 되면 글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 않습니까?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글이 주는 인상만큼 100% 성공적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걸 일일이 지적할 만큼 미국 경제에 밝지 않기 때문에 섣부른 논평은 삼가겠습니다. (전문가라도 정책의 모든 파급효과를 당대에 “정확히” 평가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무모하고 빗나가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글이 교묘하게 그런 실패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글이 폄하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가 명확한 이해와 뚜렷한 철학을 바탕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며 포괄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경제정책론으로 이 글은 정말 탁월합니다. 이 글의 청사진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우리가 알던 경제 지식을 전부 뒤엎어야 하는 날일 겁니다. 이 글은 현대 경제학의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글의 가치입니다. 당분간 이 정도의 글이 나오긴 어려울 거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사진은 이 글이 실린 <이코노미스트> 표지입니다. 타이틀은 <The Road to Brexit>지만, 오황상 칼럼 제목인 <The Way Ahead>로 바꾸어도 될 만한 표지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트럼프와 클린턴으로, 앞에 놓인 갈림길을 “우리 앞에 놓인” 갈림길이라고 생각해 볼 만 하지 않을까요? 아닌 것 같으시면… 마음의 눈으로 보시면 보입니다. ^^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10월 8일 이코노미스트 지에 기고한 칼럼 전문을 번역했습니다. 워낙 훌륭한 글이라 전문 번역이 금방 올라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직 없길래(발견하지 못했음) 조금이라도 더 읽히기를 바랄 겸, 혼란한 국내 정세에서 눈도 돌릴 겸 해보았습니다. 답답하신 분들은 천조국 황상의 품격을 보시고 잠깐이나마 힐링하시기를. 약 A4 5-6매 분량입니다.
쉽게 쓰인 글이라 될 수 있으면 편하게 읽히도록 번역했습니다. 능력이 닿는 한 원문을 살렸습니다만 내용 전달에 중점을 두고 의역도 많이 했습니다. 원문이 매우 명료하게 잘 쓰인 글이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전적으로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원문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오류 지적 환영합니다.
(추가) 제가 이 글을 번역한 이유는 당장 해야 할 한영번역이 하나 있는데 귀찮아서..는 아니고, 우선 경제를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거시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경제학 전공자랍니다. ㅋㅋ
오바마 대통령은 이 글에서 임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간을 정리하고, 현재 미국 정계에서 벌어지는 논쟁(결국 대선 경선 과정의 트럼프, 샌더스 식 포퓰리즘)을 단호하게 평가하는 한편 앞으로 자신의 후임자들과 미국이 나아갈 비전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글의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했습니다.
* 퍼가셔도 좋지만 출처는 밝혀 주십시오.
우리 앞에 놓인 길 (The Way Ahead) | 버락 오바마 미합중국 대통령 | The Economist
저는 요즘 어딜 가던 비슷한 질문을 듣습니다. 미국 정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이민, 무역, 기술 혁신으로부터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큰 혜택을 누려 온 나라가 어떻게 갑자기 반이민, 반무역 경향을 보이는 건가요? 왜 일부 극좌, 그보다 좀더 많은 극우 인사들은 되돌릴 수 없고, 대다수에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식의 조악한 포퓰리즘을 내세우는 건가요?
미국에서 세계화, 이민, 기술, 심지어 변화 자체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불안감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종종 국제기구나 무역협정, 이민에 대한 회의론에서 비치는 불만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유럽연합을 탈퇴하기로 결정한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나 세계 곳곳에서 포퓰리즘 정당이 득세하는 현상에서도 관찰됩니다.
이런 불만은 대부분 본질적으로 비경제적인 공포에서 비롯됩니다. 오늘날 일부 미국인들이 표출하는 반이민, 반멕시코, 반무슬림, 반난민 감정은 예전에도 있었던 이민배척주의 파동(nativist lurches)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가령 1789년 외국인과 선동방지법(Alien and Sedition Acts), 1800년대 중반 무지주의당(Know-Nothings),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반아시아 감정, 그 외에도 미국을 위협하는 집단이나 사상을 통제한다면 과거의 영광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는 메시지가 외쳐졌던 모든 시대 말입니다[modern_footnote]역사적 명칭은 앨런 브랭클린의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국역본을 참조했습니다.[/modern_footnote]. 우리는 이 공포를 넘어섰고, 또다시 넘어설 겁니다[modern_footnote]원문은 “We will overcome…”입니다. 흑인인 오바마 대통령이 노예해방 운동(어쨌든 제도적으로는 성공한) 의 슬로건 “We shall overcome”을 변주하면서 이민 문제도 동일하게 성공할 것이라는 신념을 암시한 것은 아닐까 해서 밝혀 둡니다.[/modern_footnote].
하지만 일부 불만이 기인하는 장기적 경제 요인(long-term economic forces)에 대한 염려는 타당합니다. 몇십 년 간의 생산성이 하락하고 불평등이 심화되며 저소득·중산층 가계의 소득증가가 둔화되었습니다. 세계화와 자동화가 진행되며 노동자들이 괜찮은 임금(a decent wage)이나 자리를 확보할 힘을 꽤 잃었습니다. 물리학자나 공학자가 될 수 있었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실물경제의 혁신에 재능을 발휘하는 대신 금융권에서 돈을 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8년 금융 위기를 거치며 기존에도 종종 ‘다른 세상’에 있다고 여겨지던 기업과 엘리트 계층은 더욱 일반인들에게서 유리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게임이 조작됐다”는 주장을 선뜻 받아들인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납득할 만한 불만은 우선 문제를 개선하기보다 대체로 악화시킬 정치인들이 부채질한 것이고, 불만스러울지라도 자본주의가 번영과 기회를 향한 역사상 최고의 견인차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25년간 극빈곤층 인구 비율은 40% 근방에서 10% 밑으로 하락했습니다. 작년에 미국 가구의 소득이득(income gain)은 기록적인 수준이었고 빈곤율은 1960년대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하락했습니다. 실질임금은 1970년대 이래 가장 빠르게 상승했습니다. 이러한 발전은 지금의 정치적 논쟁 근저에 있는 불안감을 자극하는 세계화와 기술 변혁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세계를 규정하는 모순입니다.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지만, 사회는 불안과 불만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과거의 낡은 폐쇄경제로 후퇴하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세계화와 그에 수반될 수 있는 불평등을 인지하고, 세계 경제가 최상위층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작동하도록 하는 데 전념하며 전진하는 것 사이에서 말입니다.
풍요를 향한 힘(A force for good)
이윤 추구 동기는 기업이 소비자들이 열광하는 제품을 만들고, 은행이 성장산업에 여신을 제공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모두에게 공유되는 번영과 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경제학자들은 경제가 방임될 경우 실패할 수 있음을 오랫동안 인정해 왔습니다. 시장 실패는 <The Economist>가 보도해 온 대로 독점·지대추구 경향, 공해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기업활동, 소비자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정보 격차, 또는 과도하게 비싼 건강보험 등의 형태로 발생하곤 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에 의해 지배되며 다수 대중에 책임지지 않는 자본주의는 모두에게 위협입니다. 경제는 빈부 격차가 줄어들고 성장 기반이 넓어질 때 더욱 번영합니다. 인류의 1%가 가 99%가 가진 만큼의 부를 소유하는 세계는 결코 안정적일 수 없습니다. 부자와 빈자의 격차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기술 발전에 따라 이제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고 특권층의 생활을 마치 슬럼가 어린이가 인근 고층 건물을 보듯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는 정부가 그에 부응하는 결과를 내놓는 것보다 빠르게 커지고, 불공정 의식이 만연하며 체제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약화됩니다. 신뢰가 없다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지난 수 세기 동안 성취해 온 발전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진보와 위험의 이러한 모순은 수십 년간 진행 중입니다. 저는 지난 8년간의 행정부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합중국을 완벽하게 만드려면 훨씬 오래 걸리리라는 것을 늘 인정합니다. 대통령직은 국가가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도록 각자 맡은 부분을 수행하는 릴레이입니다. 그럼 제 후임자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더 나은 진보를 위해서는 미국 경제 메커니즘이 대단히 복잡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거대 은행을 분할한다거나 수입 관세를 대폭 인상한다는 급진적인 개혁이 언뜻 매력적으로 들리겠지만, 경제는 그렇게 관념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경제를 대대적으로 재설계한 뒤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가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성공할 수 있는 체제라는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대신 네 가지의 구조적 과제에 대처해야 합니다. 생산성 증가를 촉진하고, 불평등과 맞서 싸우고, 모든 구직자들에게 일자리를 보장하고, 미래 성장이 대비된 탄력적이고 견실한(resilient) 경제를 이룩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경제 활력 회복하기(Restoring economic dynamism)
첫째, 최근 우리는 인터넷, 모바일 기기 및 네트워크, 인공지능, 로봇공학, 신소재, 에너지 효율성 향상, 개인맞춤의학(personalized medicine)으로부터 놀라운 기술진보를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은 생활을 변화시킨 데 비해, 아직 생산성 증가율 집계에 포함되지는 않았습니다[modern_footnote]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아직 측정된 생산성 성장률(measured productivity growth)을 증가시키지는 못했습니다.”가 됩니다. 관련 연구 맥락을 살리자면 직역이 맞겠지만, 편독성을 위해 의역했습니다.[/modern_footnote]. 지난 10년간 미국의 생산성 증가율이 G7 국가 중 가장 높긴 했지만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증가 속도 자체가 느려졌습니다(차트 1 참조). 경제가 더 빠르게 성장하지 않는다면 파이를 어떻게 나누어도 사람들이 원하는 수준의 소득을 창출할 수는 없습니다.
최근 생산성 둔화의 주 요인은 공공/민간투자 부족이고, 이는 어느 정도 금융위기의 후유증입니다. 하지만 투자 부족의 또다른 원인은 우리가 자초하는 여러 제약입니다. 사실상 모든 새로운 공적 자금원 조성을 거부하는 반세금 이데올로기, 미래에 닥칠 (특히 기간시설물의) 유지보수비 부족에 대한 집착, 교량·공항 개선 등 이전에 초당파적으로 합의했던 계획을 가망 없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당파적 정치체제 말입니다.
법정세율을 낮추고 허점은 없애는 법인세 개혁과 기초 연구개발에 대한 공공투자를 통해 민간투자와 혁신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교육 중심 정책은 경제성장률 증대와 성장의 과실을 공유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정책은 조기 아동교육 예산 증액부터 고등학교 개선, 대학 교육비 부담 완화, 양질의 직업훈련 확대까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생산성과 임금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제무역 하에서 “정상을 향한 글로벌 경주(a global race to the top)”[modern_footnote]문맥 상 “경주”보다는 “경쟁”이 적합해 보이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교육지원정책 중 하나 “A Race To the Top (정상을 향한 경주, 성과중심 교육정책)”의 명칭을 가져왔다고 보여서 이렇게 옮겼습니다.[/modern_footnote]을 창출해야 합니다. 몇 지역은 대외 경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나, 무역의 이익은 피해보다 훨씬 컸습니다. 수출은 불황 탈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 경제자문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수출을 하는 미국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평균 18% 높은 임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를 통과시키고, 유럽연합과의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협상을 타결하도록 의회를 계속 압박할 겁니다. 이들 협정과 강화된 무역집행(trade enforcement)은 노동자와 기업 모두에게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마련할 겁니다.
둘째, 생산성이 둔화되는 한편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그 폭은 미국에서 가장 현저했습니다. 1979년에 미국 상위 1% 가구는 전체 세후소득의 7%를 차지했습니다. 2007년에 그 비율은 17%로 두 배 이상 상승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라는 본질적인 의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성공을 시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공을 열망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사실 우리는 노력하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고, 우리 자녀 세대는 더욱 그러리라 확신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 더 많은 불평등을 용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했듯, “우리는 자본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지만, 가장 비천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modern_footnote]”while we do not propose any war upon capital, we do wish to allow the humblest man an equal chance to get rich with everybody else.”[/modern_footnote] 심화된 불평등의 문제는 바로 여기, 즉 지위 상승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데 있습니다. 불평등은 부의 사다리의 맨 위와 아래 발판을 끈끈하게 만들어서, 아래에서 올라가는 것과 정상에서 내려오는 것 모두 어려워집니다.
경제학자들은 불평등 심화의 다양한 원인을 열거한 바 있습니다. 기술, 교육, 세계화, 노조 쇠퇴, 최저임금 하락 같은 요인 말입니다. 아마 이 모두가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이 모든 분야에 대해 실질적인 진보를 달성해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문화와 가치의 변화 역시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기업 임원과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는 교회, 자녀의 학교, 시민단체 등 곳곳에서 이루어진 노동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제한되었습니다. 그래서 CEO들은 평균적인 노동자에 비해 20-30배 정도의 보수를 가져가는 데 그쳤습니다. 이러한 제약의 감소 내지 소멸이 오늘날 최고경영자들이 250배 이상의 보수를 지급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경제는 빈부 격차를 줄이고, 성장 기반을 광범위하게 확대할 때 더욱 번영합니다. 단순한 도덕적 차원의 주장이 아닙니다. 연구에 따르면 불평등이 심한 국가일수록 성장이 취약하고, 자주 불황을 겪습니다. 부가 상류층에 집중되었다는 것은 시장경제를 견인하는 다수 소비자들의 지출이 감소한다는 뜻입니다.
미국은 진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작년 소득분포 하위, 중위 가구의 소득이득은 상위 가구보다 많았습니다(차트 2 참조). 집권 기간 동안, 그러니까 2017년을 기준으로, 우리는 소득 하위 5분위 가구소득을 18% 상승시켰습니다. 반면 연간소득 추산 8백만 달러 이상인 상위 0.1% 가구의 평균세율은 (재무부 계산에 따르면) 거의 7%p 인상했습니다. 우리 행정부 하에서 입법된 세제 변경에 따르면, 상위 1% 가구가 “정당한 몫(their fair share)” 이상을 납부하는 반면 그 외 가구들은 적어도 1960년 이전 어떤 행정부의 세제 변경에 의해서보다도 더 많은 소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의 노력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수십 년간 심화된 불평등을 되돌리는 법안을 더욱 적극적으로 제정해야 합니다. 노조는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노동자들이 파이의 더 큰 몫을 차지하도록 돕는 한편, 글로벌 경쟁에 적응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연방최저임금 인상, 무부양자녀 노동자에 대한 근로장려세제(EITC) 확대, 고소득자 조세 혜택 제한, 성실한 학생의 학업을 가로막는 터무니없는 대학 교육비 책정 금지, 그리고 성별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셋째, 경제의 번영은 구직자들이 충분한 일자리 기회를 얻을 수 있는가에도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장기적인 핵심생산인구(prime-age workers) 노동시장참가율 하락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1953년에는 25-54세 남성의 3%만이 비경제활동인구였습니다. 지금은 12%가 그렇습니다. 1999년에 여성 핵심생산인구 23%가 비경제활동인구였습니다. 지금은 26%입니다. 성장하는 경제에서 경제활동인구에 편입·재편입하는 사람들은 고령화와 2013년 말부터의 베이비부머 은퇴를 상쇄하고 노동시장참가율을 안정화시키지만, 장기 감소 추세를 뒤집지는 못합니다.
비자발적 실업에는 생활만족도, 자존감, 신체건강, 그리고 사망률이라는 대가가 따릅니다. 이는 노동시장참가율이 가장 가파르게 하락한 집단인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충격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진통제(opioid) 남용, 그에 따른 과다복용 사망 및 자살(overdose death and suicides)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 놓일 때도 노동시장에 남아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전만큼의 소득을 보장하는 임금보험은 그 중 하나입니다. 양질의 커뮤니티 칼리지나 검증된 직업훈련 모델의 접근성을 확대하고, 새 일자리 탐색을 보조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따라서 더 많은 노동자들이 실업 보험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급휴가와 보장된 유급병가, 양질의 보육 및 조기교육 접근성 확대로부터 노동자와 고용주 모두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초당적 지지를 받은 형사사법제도(criminal justice system) 개혁 및 경제활동 재진입 개선 조치가 법제화된다면 역시 노동시장참가율이 향상될 겁니다.
더 견고한 기반 쌓기 (Building a sturdier foundation)
마지막으로, 금융위기는 보다 탄력적이고 견실한 경제, 오늘을 위해 내일을 희생하는 일 없이 지속가능하게 성장하는 경제의 필요성을 통렬하게 지적했습니다. 자유 시장이 구조적 실패를 대비하고 공정경쟁을 보장하는 규칙 하에서만 번창할 수 있다는 점에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경제체제는 위기 이후 은행 자본금 인상, 단기 자금 의존도 경감, 금융기관 및 시장 감독 강화 등의 월가 개혁을 통해 보다 안정적이고 장기경제성장 친화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 대형 금융기관들은 더 이상 이전에 하던 식으로 손쉽게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고, 그 증거로 시장은 점점 그들이 “대마불사”할 정도로 크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modern_footnote]”the market increasingly understands that they are no longer “too big to fail”.”[/modern_footnote]. 그리고 우리는 금융기관들이 소비자들에게 상환할 수 있도록 조건이 미리 고지·조율된 대출을 제공할 책임을 부과하기 위해 최초의 감시기구인 소비자금융보호국(CFPB)을 창설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금융 부문(shadow banking system)은 여전히 취약점을 보이고 있으며 주택 금융 시스템은 아직 미개혁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해 온 이상으로 나아가야 하지, 되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한편 더 급진적인 개혁의 옹호자들은 지금까지 성취해 온 진보를 지나치게 자주 간과하고, 체제 전체를 규탄하곤 합니다. 체제의 규칙을 구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언제나 토론 대상이지만, 지금까지의 진보를 부정하면 우리는 더 취약해질 뿐입니다. 그 반대가 아닙니다.
미국은 부정적 외부충격(negative shock)이 발생하기 전에 좀 더 대비해야 할 겁니다. 지금 같은 저금리 시대에 미래의 경기침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더 큰 규모의 재정정책을 집행해야 하며, 통화정책만으로 경제안정화를 달성하려 해서는 안 될 겁니다. 유감스럽지만 나쁜 정치는 좋은 경제를 짓밟아 버릴 수도(override) 있습니다. 우리 행정부는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10여 개 이상의 법안을 제정하여 진가를 인정받은 수준(2009-2012년 1.4조 달러 재정지원)이상의 확대재정를 확보했습니다만, 상식적 조치 하나하나를 통과시키기 위해 의회와 상당히 소모적으로 충돌해야 했습니다. 저는 시도하려던 몇 가지 확장정책을 시행하지 못했고, 의회는 역사에 남을 국가부도 사태를 들어 위협하며 성급하게 경제긴축을 강제했습니다. 제 후임자들은 어려운 시기의 긴급 조치를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어야 할 겁니다. 대신 실업 급여 같은 (경제 침체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가구 및 경제 지원금은 자동으로 인상되어야 할 겁니다[modern_footnote]”자동으로”는 대략 물가연동 정도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한편 앞 문장에서 2013년 양당의 연방정부 부채 상한선 인상 합의 결렬 후 “자동으로” 발동한 시퀘스터 조치를 언급했음을 염두에 두는 것 같기도 합니다.[/modern_footnote].
필요한 시기에 경제 지원을 확대하고 시민들에게 장기 채무를 이행하기 위해, 호경기에는 반드시 재정지출을 (적정 선에서) 유지해야 합니다. 부담적정보험법(Affordable Care Act)에 따른 의료비 경감[modern_footnote]예. 오바마케어를 가리킵니다.[/modern_footnote], 최고 부유층에 대한 세제 혜택 제한 등의 정부재정지원 억제책(curbs to entitlement growth)을 이용한다면 투자 기회나 성장을 저해하지 않고 장기적 재정 문제를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합니다. 지난 5년간 경제성장률 증대와 탄소배출량 저감이 상충한다는 관념은 끝났습니다. 미국은 에너지 부문 탄소배출량을 6% 감축했고, 바로 그 기간 동안 경제는 11% 성장했습니다. 미국의 발전은 미래 세대를 위해 지구를 구할 최고의 기회를 제시하는 역사적인 파리기후협정 도입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래를 향한 희망 (A Hope for the future)
미국의 정치 시스템은 실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요, 저도 압니다. 하지만 미국 정치는 200년 넘게 경제사회적 발전의 원천이었습니다. 지난 8년간의 발전 역시 세계에 어느 정도의 희망을 주었을 겁니다. 온갖 분열과 불화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대공황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금융 시스템은 납세자들의 부담 한 푼 없이 안정화되었고 자동차 산업도 구제되었습니다. 저는 의료 서비스를 개혁하고 새로운 차량 및 발전소 탄소배출량 감축 규칙을 도입하는 한편, 초반부에 재원을 집중 투입한(front-loaded) 경기부양책을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이상 규모로 시행했으며, 1930년 이래 가장 포괄적인 금융 시스템 규칙 개정을 감독했습니다.
결과는 명백합니다. 경제는 더욱 튼튼해졌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2010년 초부터 1,500만 개의 새로운 민간 일자리가 창출되었고, 임금이 상승하고, 빈곤율이 하락하며, 불평등 추세는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2,0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새로 건강보험 혜택을 얻은 반면 의료비는 지난 50년 사이 가장 느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연간적자는 거의 3/4 수준으로 감축되었습니다. 탄소배출량 역시 감소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를 위한 새로운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미래에는 반드시 경제성장, 특히 지속가능하며 열매가 공유되는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국은 모든 국가와 함께 최선을 다해 모든 시민과 앞으로 올 세대를 위한 보다 건실하고 번영하는 경제를 이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