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원본 링크)
제가 미국에서 공부한 학교는 나름 큰 학교이다 보니 경제학과 내에서 7-8개 분야 모두가 워크샵시리즈를 운영하였습니다. 각 세미나에는 매주 미국 각지 때로는 세계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와서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를 발표하였지요.
저는 전공 분야인 경제사 세미나와 산업조직 세미나를 참석하였는데, 시간과 마음이 허락하는 한 (미시) 이론 세미나에도 들어갔습니다.
경제학 분야 가운데 경제사는 이론과는 가장 거리가 먼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론 세미나를 들어가면 저는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직관들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참석을 하였고, 지금도 그 세미나들로부터 큰 도움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세미나들과 마찬가지로 이론 세미나 역시 1시간 반 정도 진행이 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시간이 흘러가는 방식입니다.
발표자는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대개의 경우 자신의 논문이 어떤 현실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예시를 듭니다.
예를 들어 “이 논문은 최근의 국정농단 관련 피의자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데, 이런 행동들의 핵심은 주인-대리인 모형의 이런 측면으로 개념화할 수 있고 본 논문은 그 문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한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국정농단 사태의 피의자들이 정말 그런 행동을 했느냐”, 현재 그와 관련된 핵심 문제가 피의자들의 그런 행동이냐”, “그 행동을 주인-대리인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옳으냐”를 가지고 30분을 싸웁니다.
그러다가 대략 이야기가 좀 정리가 되면 그 때서야 첫 슬라이드를 넘겨서 두 번째 슬라이드로 가서는 본격적인 set-up을 보여줍니다. 즉 수식이 드디어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때부터 또 30분을 싸웁니다. 그렇게 수식을 만드는 것이 맞느냐, 지금 열거한 가정들이 너무 작위적이지 않느냐 뭐 이런 내용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남은 30분 동안 도출 과정을 담은 수십장 슬라이드 분량을 후다닥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 가면 저는 더 이상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점점 못알아듣게 됩니다 ㅜㅜ)
다소 과장이 있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론 세미나에서 가장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수학 자체보다는 현실에 대한 추상화 과정이 제대로 되었는가 하는 부분이라는 점입니다.
제대로 된 추상화가 되려면 우선 현실을 충분히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포착해야 하지요. 그 다음에 본질적이지 않은 부분을 과감하게 처내고 뼈대만 남겨야 합니다.
이 과정을 잘 하는 것이 분야를 막론하고 논문의 성공을 결정하는 가장 큰 부분입니다. 이론 세미나를 제가 들어가던 이유는 경제사 세미나에서와는 다른 각도에서 이런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경제학에서 수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전공을 하지 않는 분들에게 설명을 드릴 수 있는 내용일 수도 있을 듯 하여 길게 적어 보았습니다.
PS: 경제학에서 수학의 의미에 대해서는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일단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를 할 계기를 마련해주신 #홍성욱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