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출판업계가 대형 서적 도매상 송인서적 부도 문제로 시끄럽다. 정부도 나섰다. 서울시가 12억원대 서적구매를 조기집행하고, 문체부가 저리 융자를 지원한다고 한다.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은 사태 직후 간담회에서 “2000년도 이전부터 정부와 정치권은 우리나라 출판 문화산업을 사양 산업으로 인식하고 지원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했다. 출판계의 자구 노력을 강조했던 분이 이런 발언을 한 심정은 이해한다. (이분은 2015년 1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출판사가 읽을 만한 책을 만드는 데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느냐 보면 ‘×판’이다. 독자가 안 읽는다고 불평하는 건 양심 없는 짓이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편 유통위원장은 “정부는 ​출판계 유통구조 개선을 민간 출판사에게만 맡겨왔다. 그 결과 출혈경쟁이 이어졌다”라며 “정부는 출판계 인프라 개선에 힘써야 한다”고 했단다.

출판업 경영 및 유통이 매우 낙후되어 있다는 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다. 외환위기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 우선 이번 건에서도 보이듯 어음 돌려막기가 만연하다. 소위 위탁판매제에서 나타나는 출판사-도매상-서점 간 거래관계도 심각하다. 서점은 매대를 제공할 뿐 출판사에서 책을 매입하지 않는다. 책이 팔리지 않으면 반품해 버리면 된다. 팔리지 않을 때의 리스크가 출판사에게 지나치게 전가된다.

그러나 출판계 의견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도서정가제 개정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 노력으로 정부가 유통구조(거래관행)에 개입해 달라는 편이 더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소비자 저항도 훨씬 적었을 것이다. 게다가 도서정가제가 출판업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에는 근거가 없었다. 유통구조 개선을 위해 가격규제(재판매가격제한)을 도입하다니, 그야말로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도서정가제가 해법이 아니라고 경고했고, 경고는 현실화되었다.

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도서정가제의 경제적 귀결은 처참하다. 도서가격(베스트셀러 및 스테디셀러)이 상승하여 사실상 담합 상태다. 온라인 거래액이 하락했고 가격 상승을 감안하면 거래량 역시 하락했다. 온라인 거래액이 하락한 만큼 오프라인 거래액이 상승했을까? 오프라인 서점 거래액 통계는 없지만 소비자들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넘어가려면 수요가 가격 변화에 아주 둔감해야 한다. 게다가 서적 구매경로에서 동네서점이 차지하는 비중은 8.15%에 불과하다.

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그런데…정가제 시행 후 송인서적 재무는 약하게나마 호전되었다. 기초적인 재무지표만 살펴보았지만 2013년과 2015년 연말을 비교하면 매출액, 영업이익, 당기순이익, 매출액증가율, 영업이익증가율 모두 상승했다(수익성 및 수익성 추이 향상). 자기자본비율은 상승하고 부채비율은 하락했으며(건전성 향상), 유동성 비율은 상승했다(지급여력 향상). 도매상이 열매를 독점했다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어차피 부도나지 않았나. 정가제가 당초 홍보했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에 정책을 요구하는 역량은 한정되어 있다. 출판계는 근거 없는 낭만 때문에 역량 배분에 실패했다.

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나는 다독가는 못 되지만 애서가를 자처한다. 밥 먹는 것 다음으로 책 사는 데 돈을 많이 쓴다. 책값 오르는 걸 환영하진 않지만 책값 때문에 살 책을 안 사진 않는다. 또한 한국어 화자로서 한국 출판업 성장을 진심으로 소망한다. (물론 정도가 있다. 어제 스티븐 스티글러 <통계학의 역사> 가 품절이고 중고가가 정가의 3배에 육박하는 걸 보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뿐인가?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는 절판 후 정가의 10배 가격에 거래되었다. 아, 한국 출판업 얘기하면서 정작 예시가 둘 다 해외 저자 아니냐는 태클은 사양한다.) 출판업계가 “구조개혁”과 “정부지원”이라는 공허한 구호만 부르짖지 말고 실질적 대책을 찾기를 바란다. 한국 시장은 작다. 이 사실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자료

도서정가제 개정 전 부작용을 경고한 KDI 보고서:
조성익(2014), 유통기업의 가격설정능력과 전자상거래의 효과: 도서유통시장 사례를 중심으로.

도서정가제 개정 후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KDI 보고서:
조성익(2015), 도서정가제의 경제적 효과.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후배님들에게 (김승섭)

고려대학교 김승섭 교수님이 박사과정에게 하는 조언 10가지. 교수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다.
원제는 <미국에서 보건학 석/박사 과정을 시작하는 후배님들에게 드리는 10가지 이야기>다. 역시 학문 일반에 적용할 수 있어 담아 둔다.


어느 순간부터 제 자신을 챙기기도 많이 부족한 제가, 제 경험들을 공유하면서 후배들의 멘토 역할을 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박사를 시작하던 때, 알았으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 이야기 10개를 골라봤습니다.

1. 모든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세요.

영어가 익숙치 않았던 첫 학기에 수업 중에 질문을 해본 적이 총 5번이 안되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부족한 영어로 인해 망신당할까봐 걱정이 되고, 궁금한게 있어도 나중에 찾아봐야지 하고 혹은 쉬는 시간에 교수님께 여쭈어봐야지 하고 참았어요. 어느 순간 깨달았던 게, 쉬는 시간에 일대 일로 하는 질문과 수업 중에 학생들 전체 앞에서 하는 질문에 대해 교수님들의 설명과 답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또 무엇보다 질문을 한번이라도 한 수업과 아닌 수업에서 제가 배우는 게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는 것 자체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과도기였던 두번째 학기를 거치고, 세번째 학기부터는 수업 내용을 미리 review를 하고서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해 공부를 했어요. 여러 논문들을 읽고서 그 분야에 대해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되는 질문을 영어 문장으로 만들어 준비를 하고, 수업전에 몇 번씩 자연스럽게 말하기 위한 연습을 했어요. 최소한 두 문장짜리 좋은 질문을 해보자. 그게 당시 목표였습니다.

2. 교과서를 읽으세요.

제가 했던 큰 착각 중에 하나가 수업 내용을 듣고 그게 대략 이해가 되면, 그 내용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부분부분 내용들을 알고 있을지언정, 그 내용이 전체 맥락속에서 어디즈음에 위치하고 있고 다른 내용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은 수업만으로 얻기 힘듭니다. 지식의 integration과 관계된 insight를 갖는 것은 학생 개개인의 몫이예요. 그러니, 적어도 본인 전공과 밀접히 관련된 내용은 꼭 기초 레벨의 교과서를 완독하기 바랍니다. Advanced level의두꺼운 교과서를 처음 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는 건 처음에 쉽지 않으니, introduction레벨의 책을 먼저 읽고 시작을 하세요. Introduction 수준의 교과서 이기 때문에, 70%의 내용은 아마 익숙할 거예요. 공부를 해볼수록,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그리고 좀 더 큰 맥락속에서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경우에는 역학과 통계가 제 기본 분야였구요, 방학 때 한달 정도 시간을 정하고 기초 교과서들을 읽는데 집중하면서 제 분야의 기본 개념들의 definition을 영어로 암기하기 위한 노력을 같이 했었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3. Tool에 최대한 빨리 익숙해지세요.

저는 역학과 통계가 public health라고 하는 도시를 연결하는 metro라고 생각합니다. 역학과 통계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어디로든 가기가 참 어려워지는 거지요. (물론 좋은 metro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이론적인 back ground도 중요하지만, 통계의 경우 특히나 빨리 자신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에 익숙해지는 게 중요합니다. SAS, STATA, SPSS, R, METLAB 등등의 프로그램 중 자신이 앞으로 사용해야 하는 통계 프로그램을 하나 고르고 최대한 빨리 그 프로그램과 친숙해지세요. 자신이 원하는 data management와 data analysis를 실제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 경험이 중요해요. 나중에 논문을 쓰게 될 때, 데이터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야와 상상력이 실은 자신이 통계 프로그램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많이 좌지우지 된다는 것을 알게 될거예요.

4. 함께 일하고 싶은 존경하는 교수님이 나타나면, 놓치지 말아요.

자신의 분야에서 함께 일하고 싶은 존경하는 교수님을 만날 기회는 있지만, 생각보다 그 분들과 함께 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너무 바쁘시니까요. 많이들 그래서 실은 포기를 하곤 하는데요, 그렇지 말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절박하게 그 분들의 손이든 발이든 붙잡고 놓지 마세요. 제 경우는 박사과정 중에 7편의 논문을lead author로 썼는데, 그 중 6편의 senior author가 다른 과의 교수님이셨습니다. 관심사가 비슷하고 제가 너무 함께 일하고 싶은데, required coursework으로 들어야 하는 수업들이 있어서 그 분들 수업을 들을 수는 없는데 그 분들과 함께 일하면 관점과 내용면에서 많이 배울 수 있을 게 분명했거든요. 6편 논문의 senior author인 3분의 교수님들과 함께 일하게 되는 과정이 달랐어요. 한 분은 너무 바쁘셔서 이메일로는 시간 약속을 잡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첫 만남 이후로 계속 그자리에서 다음 약속을 잡아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우연히 약속이 취소되고 미팅이 계속 미뤄지자,수업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는 교수님을 따라가며 미팅을 잡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허허’ 하는 웃음을 지으시더니, 그러자고 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게 1년뒤 저희 과 소속도, 박사논문 committee의 member도 아닌 교수님과 2편의 논문을 출판하게 된 시작이었습니다.

또 다른 교수님은 주기적으로 만나기 위해 independent study를 신청을 하고, 그 교수님의 프로젝트 들어가있는 연구원과의 만남에서 현재 프로젝트에서 어떤 게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어요. 그 연구원의 말이 프로젝트에서 사용하는 중요한 설문지가 있는데, 그 설문지에 대해 다들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교수님을 만나 제 학점으로 하는 independent study를 하면서, 제가 그 설문지의 역사와 사용 사례에대한 review 리포트를 쓰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시작을 해서, 교수님들과 연구원들로 이루어진 프로젝트에 유일한 박사과정 학생으로 참여를 할 수 있었어요. 실은 그 report를 열심히 만들고도 , 제가 잘 쓴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요. 두 가지 일 때문에, 그 report로 인해 제가 프로젝트에 들어가 그 데이터로 3편의 논문을 publish할 수 있었던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첫번째는, 몇 달뒤 그 프로젝트 팀의 박사후과정 연구원이 연락이 와서 제가 만든 report에 대해서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을 들었다며 받아볼 수 있냐고 했던 거구요, 둘째는 그 프로젝트의 다른 교수님께서 그 리포트를 보고서 제게 비슷한 일을 시키기 위해 저를 고용하고 싶다면서 연락이 왔던 것입니다. 그 일이 제가 미국에서 처음 돈을 받고 일해본 제 job 이었습니다.

5. 미팅을 빈 손으로 가지 마세요.

제 경우에는 항상 미팅 페이퍼를 hardcopy로 준비해서 들고 갔습니다. 처음에는 부족한 영어로 인해 중요한 이야기가 전달이 안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또 함께 연구를 하고 싶은 교수님을 처음 만날 때는, 노트북에 혼자서 powerpoint presentation을 준비해서 들고가 시키지도 않은 발표를 하기도 했어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또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귀한 시간을 미팅으로 쓰게 된 만큼 그 시간들에 대해 그만큼 appreciation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제 나름의 방법이었습니다. 항상 이게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meeting paper를 작성하며 적어도 미팅에서 무엇을 논해야 하는지 스스로 정리하고 말하는 것을 연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버드에서 박사를 마칠무렵, 다른 학교 학과장으로 가게 된 교수님 한 분을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박사가 끝나고 어디로 갈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자, 그 분이 제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를 연구원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데, 조건이 뭐니?” 결국 그 분과 함께 너무 감사한 조건으로 박사후 과정을 하게 되었는데, 박사논문 자격시험 심사위원이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제가 그 분 수업을 들은 적도 없고, 제 박사논문 committee member 도 아니셨던 그 분이 어떻게 저에 대한 신뢰가 있으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언제인가 흘리듯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RA로 일하며 리뷰 리포트를 썼던 내용에 대해 궁금하셔서 저와 미팅을 했을 때 제가 노트북을 들고와 교수님 사무실에서 발표를 했던 것과 박사논문 자격시험에서 발표 슬라이드가 40장인데, 질문에 대비한 백업 슬라이드를 80장가량 만들어갔던 걸 말씀하시더라구요. 인상적이었다구요.

6. Citation manager를 최대한 많이 사용하세요.

EndNote이나 Refwork 같은 citation manager를 최대한 많이 활용하세요. 논문을 찾게 되면, 반드시 자신의 citation manager에 적절한 folder를 만들어서 그 안에 저장을 하고 가능하면 pdf 파일을 함께 attach 하세요.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양의 논문들을 읽게 되는데, 그런 지식들을 구조적으로 잘 저장하는 게 점점 중요해집니다. 그렇게 저장되지 않은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알고 있는게 아니라고 저는 스스로 생각합니다. 지식을 어떻게 축적하고 organize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가장 좋은 답은 citation manager를 잘 활용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싶어요.
제 경우에는 EndNote를 쓰는데 논문들 뿐 아니라, 인터넷에서 찾은 좋은 강의 슬라이드나 다른 학교의 lab document 같은 것들도 citation을 짧게라도 만들어 EndNote에 저장을 합니다. 그래야 훗날 필요할 때 찾을 수 있거든요. 개인적으로 citation manager에 저장하지 않은 모든 논문은 제가 읽은 적이 없는 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7. 전공과 당장 직접적으로 닿아있지는 않는 논문들을 읽는데 시간을 배당하세요.

모두들 학제간 연구의 시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학문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Collaboration 중요하다고 하지요. 그게 가능해질려면, 다른 분야의 언어, 적어도 그 분야의 핵심 아이디어에 대해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분야를 따로 공부할 시간은 없는 거지요.
제 경우에는 수업을 듣다가 스쳐가듯 인용되는 흥미로운 논문이 있으면, 메모를 하고 citation manager에 great paper라는 폴더를 만들고 그 안에 저자별로 정리를 따로 해서 pdf 파일을 attach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논문 같아서 시간나면 읽어보려고 별다른 의동벗이 시작했는데, 언제인가부터 그게 힘이 되는 순간이 오더라구요. 다른 과의 누군가랑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그 분야의 landmark 논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면 대화가 훨씬 생산적으로 흘러가고, 거기서 collaboration이 시작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짬짬이 한 시간 정도는 그런 논문들을 읽는데 썼었는데, 그 논문들은 대체로 제가 흥미가 있어 고른 논문들인 만큼, 재미있는게 많아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8. 자신이 주도한 첫 논문을 최대한 빨리 써보세요.

많은 분들이 논문을 기계적으로 찍어낸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그게 어느 정도는 사실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논문을 쓰는 일은 좋은 시나 수필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결국은 다 글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다 보니, 새로워야 하고, 이해가 쉬워야 하고, 간결해야 하고, 읽고나서 감흥이 있어야 하구요.
첫번째 논문을 publish하기 전까지는, 연구가설을 설정하고, 데이터를 찾고 (혹은 수집하고), 기존 논문을 검토하고, 데이터를 분석/해석하고, 그 결과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논문을 쓰는 일인 줄 알았어요. Final이라는 이름의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내용의 문서가 한 30개즈음 (끝인 줄 알았는데, 뭐가 더 있는 거지요. 항상 그랬어요.) 쌓여 이제 submit할 수 있다 싶을 때, 이제 첫번째 단계가 끝난 것 뿐이었습니다. 거기서부터 journal의 format에 맞게 논문을 수정하고 submission에 필요한 문서들을 작성하고 reject을 당하면 다시 시작하고 review를 받을 경우에는 comment로 온 의견들에 대해 하나하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서로 설득하고 수정해야 하구요, 실제 논문이 accept되고 나서는 journal에서 요구한proof reading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typo를 수정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있었습니다.

첫 논문의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첫 논문을 자신의 힘으로 쓰고나면 다른 사람들이 쓴 논문을 읽는 눈이 훨씬 밝아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논문을 시작할 때, 훨씬 더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 쉬워지구요.

9. 통시적인 관점에서 지식를 축적하고 문제를 접근하는 습관을 기르세요.

Public health에서 어떤 연구 주제가 있으면, 그 주제 대해 통시적으로 해서 정리를 해보세요. 예를 들어 제 연구 주제 중 하나인 작업장의 safety climate이라는 topic이 있자면, safety climate이라는 개념의 역사에 대해 정리하고 그 개념을 처음 도입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게 어떻게 지난 30여년동안 발전해왔는지 정리하는게 통시적인 관점에서 정리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당장은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친구들이 역학의 많은 개념들이 역사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고 또 변화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교수님들은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최선의 레벨에서 명확히 개념들을 설명해주시려고 강의를 하시기 때문에,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할 수 있는 개념의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쉽사리 보이지 않는 학파들이 있어서 기초적인 연구에 대해 의견을 달리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핀란드 출신의 역학자 Olli Miettinen같은 이는case-control study자체가 confounding과 관련된 오류로 인해 사용하지 말아야 할 디자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역학자들 사이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 역학이 individual level의 risk factor를 밝혀내는데 초점을 맞춰지는 것에 trend 대한, Kenneth Rothman, Neil Pearce, Melvin Susser등의 훌륭한 역학자들 사이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논쟁이 있습니다. 하버드 보건대학원에서 특히나 중요한 causality에 대한 이론도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대에 시작한 Bradford Hill criteria와 1980년대의 Rothman의 Sufficient Component Cause model에 이어서 Counterfactual, marginal structural model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거구요. 수업시간에 이런 이야기들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깊게 다뤄지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Epidemiology(Journal)에서 역사적인 역학자들과의 interview를 계속해서 제공하고 있는데, 그 내용들을 읽고 있으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읽은 수업시간에 배운 확고한 것처럼 보이는 지식들이 실은 변화해왔고 변화해갈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10. 건강을 챙기세요.

20대 초 중반이면 아직 못 느끼실 수도 있지만, 체력이 실력인 순간이 곧 옵니다.
제가 박사과정을 미국에서 시작하던 때, 제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 10개를 정리해봤습니다. 실은 저는 지금도 이 10가지 내용 모두에서 하루하루가 도전과 실패의 연속입니다. 후배님들의 건투를 빕니다.

2016년 읽은 책

작년에는 총 30권(시리즈물은 1권으로)의 책을 읽었습니다. 개인사와 학위논문이 겹쳐 책을 많이 읽지 못했네요. 앞으로도 주로 전공서나 논문을 읽을 것 같아서 단행본 독서량은 줄어들 듯… ㅠㅠ 어쨌든 읽은 책을 별점과 함께 소개해 봅니다.
* 5점 만점이지만 인플레를 막으려고 점수를 짜게 매기는 편이라, 사실상 4점 만점으로 보시면 됩니다. 별 4개 반-5개는 최소 “올해의 책”인 것이지요.

 

2016년 읽은 책 (분야, 별점(5점 만점) 순)

I. 교양(인문, 자연)

  1.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이언 모리스 ★★★★☆
  2.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김시덕 ★★★★
  3.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
  4. 나는 고백한다, 현대 의학을, 아툴 가완디 ★★★★
  5.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박훈 ★★★☆
  6. 노벨상과 수리공, 권오상 ★★★☆
  7. 번역의 탄생 이희재 ★★★☆
  8. 갈등하는 번역, 윤영삼 ★★★☆
  9. 틀리지 않는 법, 조던 엘렌버그 ★★★
  10. 자유를 위한 탄생: 미국 여성의 역사, 사라 에번스 ★★★
  11. 플루토크라트,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
  12. 글쓰기 달인이 되려면 잘못된 문장부터 고쳐라, 박찬영 ☆

 

II. 경제

  1. The Race between Education and Technology, Goldin & Katz ★★★★★
  2. 환율의 미래, 홍춘욱 ★★★★
  3. 파생금융 사용설명서, 권오상 ★★★★
  4. 기아와 기적의 기원, 차명수 ★★★☆
  5.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
  6.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아비지트 배너지 & 에스테르 듀플로 ★★★☆
  7. 기업은 투자자의 장난감이 아니다, 권오상 ★★★☆
  8. 부동산은 끝났다, 김수현 ★★★☆

 

III. 소설

  1.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
  2. 채식주의자, 한강 ★★★★
  3.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더글러스 애덤스 ★★★☆

 

IV. 종교

  1.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게르트 타이센 ★★★★
  2. 떠나보낸 하느님, 돈 큐피트 ★★★☆
  3. 세속도시, 하비 J. 콕스 ★★★
  4. 종교의 세속화: 사회학적 관점, 이원규 ★★☆
  5.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 톰 라이트 ★☆

 

덧. 2016년 경제학 학술논문 (practical issues) Best 3

  1. Autor (2015), “Why Are There Still So Many Jobs? The History and Future of Workplace Automation”,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2. Gentzkow & Shapiro (2014), “Competition and Ideological Diversity: Historical Evidence from US Newspapers”, The American Economic Review.
  3. Gentzkow & Shapiro (2006), “Media Bias and Reputation”,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Autor(2015) 아주 쉽고 분량도 30페이지가 채 안 됩니다. 수식도 하나 없고요. 장담하는데 제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잡서 100권보다 나을 겁니다. 이쪽 관심 있으신 분들 읽어 보세요. Gentzkow & Shapiro(2014)는 저것보단 좀 어려운데 반지성주의와 정치적 양극화 시대의 미디어 산업, 특히 이념적 다양성을 이론적/실증적으로 다루는 멋진 논문입니다.

주님의 기업 이랜드, “임금꺾기”로 세상과 구별되다

이랜드가 “임금 꺾기” 꼼수를 활용해서 지급하지 않은 임금총액이 83억, 피해자 4만 명이라는 기사가 떴다.

기사에서 소개된 “임금 꺾기”는 이랜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랜드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가령 커피 프랜차이즈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댓글에 달아 둘 텐데,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커피전문점 노동자들의 근무환경을 조사한 바 있다. 대략 비슷하다.

“노동시장에 저숙련노동자가 초과공급된 상태에서, 균형임금보다 최저임금이 높아 이런 변칙이 발생한다.” 그러지 말라고 최저임금법 제정한 거다. 그리고 한국 최저임금은 지난 10-15년간 가파르게 인상되었는데 (그 전에는 너무 낮았다), 이랜드는 10년 전에도 이랬다. 그 때도 최저임금이 너무 높았다고? 오바마의 대답을 들려주겠다. “Go, and try it.”

저숙련 노동이라고 해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 역시 생산에 기여한다. 생산에 기여한 만큼 – 그러니까 부가가치 – 받아가는 게 미시경제학의 기본이다. “임금은 한계생산물가치와 같다.” 누가 더 하라고 했나.

그게 아까워서 인건비 아끼고 싶으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한다. 아마존이 창고 인력 줄이려고 로봇 개발한 것처럼. 그건 물류업체고 우린 유통뿐 아니라 요식업도 한다고? 맥도널드는 전자주문 도입했다. 패스트푸드와 우리는 다르다고? 고급화 전략을 취할거면 그거 만드는 인력에게도 그만한 대접을 해 주어야 한다. 임금은 한계생산물가치랑 같다니까.

그게 어디 쉽냐고 묻는다면, 그런 걸 해내는 걸 기업가 정신이라고 한다. 기술진보가 바로 같은 노동량 투입해서 더 많은 생산을 하는 것, “생산성 혁신”을 말하는 것이다. 경영자, 임원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는 건 혁신을 포함한 경영상의 결정을 잘 하라는 것이다. 못하겠으면 제 값 치르고 사람 써야지. 아니면 직접 나와서 만들던가. 그게 싫으니 만만한 사람 후려치기 하는건데. 할 줄 아는게 문어발식 사업확장 & 알바 후려치기 뿐인가?

헌금할 돈으로 임금지불이나 제대로 제 때 하기 바란다.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1-(1). 톺아보기: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0. 들어가며

구약성서 레위기 2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어느 누구든지, 주에게 사람을 드리기로 서약하고, 그 사람에 해당되는 값을 돈으로 환산하여 드리기로 하였으면, 그 값은 다음과 같다.스무 살로부터 예순 살까지의 남자의 값은, 성소에서 사용되는 세겔로 쳐서 은 오십 세겔이고,  여자의 값은 삼십 세겔이다. …” (새번역 레위기 27:1-4. Fuchs (1971))

성 격차gender gap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자연스레 노동시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저 성서 구절도 괄호 안에 쓰인 경제학 논문 도입부를 따온 겁니다. 연구 과정에서 여러 방법론을 탄생시키며 노동경제학 발전을 촉진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학계의 중심, 미국의 경우 1990년대 들어 각종 불평등이 심화되었으나 성 불평등은 완화되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이 현상을 “젠더 대수렴The Great Gender Convergence“으로 명명했습니다(Claudia Goldin 하버드대 교수). 비슷한 맥락에서, 시대적 조류를 거스르는 현상(“Swimming Upstream”)이라 쓰기도 합니다(Francine Blau 코넬대 교수). “수렴”이 곧 완전 성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대폭 완화되었다는 점에는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이 글은 한국의 성평등 현황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손에 잡히는 숫자가 필요합니다. 노동시장을 대표하는 지표는 뭐니뭐니해도 고용과 임금입니다. 이외에도 성 격차 지표가 많고 이 둘을 측정하는 방법도 여럿 있지만 여기서는 전통적인 지표를 택하겠습니다. 고용 지표로 경제활동참가율/고용률, 임금 지표로 시간당 임금 (그냥 임금이라 생각하면 됨)을 보겠습니다. 설명하겠지만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용어를 설명하겠습니다.


용어 설명

– 인구 분류:

노동시장을 분석할 때 인구를 보통 이렇게 분류합니다.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경제활동 상태에 따른 인구 분류

 

그리고,

경제활동참가율 = 경제활동인구/생산가능인구

고용률 = 취업자 / 생산가능인구,

실업률 = 실업자 / 생산가능인구

로 정의합니다. 생산가능인구 모두가 경제활동에 참가하면 경제활동참가율이 100%, 아무도 참가하지 않으면 0%가 되는 식입니다.

 

코호트:

어떤 특성을 공유하는 인구집단을 가리켜 코호트cohort라고 합니다. 가령 1970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1970 출생코호트”, 1980-84년에 결혼한 사람들은 “1980-84 결혼코호트”입니다. 1970-74 출생코호트가 50-54세가 되는 2020년에 평균소득을 알아보려면 50-54세 자료를 보면 됩니다. 통계적으로 세대 차이를 감안하는 방법이라 생각하세요.

※ 표와 그래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 수치는 모두 퍼센트입니다.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한국 경제활동참가율은 최근 20년간 남성 70-75%, 여성 50% 내외로 안정적입니다. 그런데 20%p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요? 이 질문에서 출발해 보겠습니다. 성별 참가율을 연령별로 보면 이렇습니다.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자료: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2015).

남성 참가율 곡선은 매끈하게 증가했다 감소합니다. 이런 형태를 흔히 역U자 곡선inverse-U shaped curve이라고 합니다. 반면 여성은 30대에 뚝 떨어졌다가 40대에 어느 정도 회복됩니다만, 벌어진 차이는 메워지지 않습니다. 20대는 남성을 앞서거나 비슷한데요. 보통 한국 여성 경제활동참가율 곡선의 이런 형태를 “M-커브M-curve 현상”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요?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결혼, 출산, 육아가 대표적인 원인입니다. 그건 세계 누구나 겪는 일 아니냐고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눈금 한 칸이 20%라는 데 주의하세요. 생각보다 큽니다.)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자료: ILO (2015). 출처는 본인의 석사학위논문.

다른 나라 여성 참가율 곡선은 한국 남성과 비슷한 역U자 형태입니다. 일본이 한국과 비슷한 M-커브 형태입니다. 경제규모가 어느 정도 이상인 국가 중 한국과 일본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났고, 일본은 최근 10년간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그림에서도 한국보다 일본 곡선이 더 위에 있습니다. 같은 연령대로 비교하면 일본 참가율이 더 높다는 말이지요. 한국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면 역U자 곡선의 일부가 되었을 여성들을 가리키는 단어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경력단절여성”, 줄여서 “경단녀”. 20%p 격차가 여기서 출발합니다.

아니, 미국은 무려 “수렴”했다고 하고, 일본도 나아졌다는데 한국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요? 그래도 지난 세월 많이 나아졌습니다. 지난 50년간 데이터로 그린 연령별 참가율 곡선을 두 개 보겠습니다. 색깔이 진해질수록 현재와 가까워지고, 위로 올라올수록 “좋아지는”겁니다.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자료: 각년도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위 그림은 연도별-연령별 참가율, 아래 그림은 연령별-코호트별 참가율입니다. 5년마다 15-19세 코호트를 새로 추적한 것입니다. 현재 30대 중반인 1995 15-19세 코호트 (1976-80년생) 까지만 의미가 있고, 그 뒤 코호트는 참고만 하십시오.

사실 경활참가율을 단순 연도별로 비교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2014년을 예로 들면, 해당연도 참가율 곡선엔 2014년 20-24세 집단(1986-90년생)과 55-59세 집단(1955-59년생)이 공존합니다. 단순히 이 자료를 이용해 비교하면 세대 차이가 무시됩니다. 코호트별로 보면 여성이 나이 들며 발생하는 변화를 세대별로 관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연도별 비교에는 시대 변화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연도별 그림을 보면 50년간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코호트별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20대 여성의 참가율이 눈에 띄게 상승했습니다. 맨 처음 그림(2015)에서도 20대에는 성별 격차가 거의 없었지요. 그런데 코호트별로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35세 이상으로 가면 코호트별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일자리가 없대도 그렇지, 30년 차이가 나는 1966 코호트와 1995 코호트에 기껏해야 5%p 차이밖에 없다니요. (잠깐! 20대 초반 참가율이 1985 코호트 이후 하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학교육 확대입니다.)

이 숫자들은 채용 차별이 과거에 비해 완화된 것이 사실이나 직장-가정생활 병행이 여전히 어렵다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한창 육아에 바쁠 35-44세 참가율에 코호트별 차이가 없다시피 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한편 20대 참가율 상승은 여성들이 대학에 더 많이 가고, 결혼이 늦어지며 과거 20대에 그만두던 사람들이 30대에 그만두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조삼모사 같지만 그럼에도 30대 참가율은 하락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느리게나마 바뀌고 있다는 뜻입니다.

2001년 11월 정부는 일-가정 양립 정책의 일환으로 출산전후휴가 기간을 60일에서 90일로 확대했습니다. 늘어난 30일분의 급여를 국가에서 지원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육아휴직 급여도 고용보험기금으로 지급하기 시작했지요. 이 때부터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사용자 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산휴가가 1953년, 육아휴직이 1987년에 도입되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늦었습니다. 이듬해부터 집계된 통계를 보면 30대 참가율이 하락하지 않은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modern_footnote]이 통계는 공식 자료를 기반으로 제가 산출한 것이라 오차가 있습니다. 심각하진 않을 거고, 있더라도 실제보다 높은 수치는 아닐 겁니다. 현실이 이 통계보다는 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적당히 참고하세요. 설명은 마지막에 나옵니다.[/modern_footnote].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자료: 각년도 통계청 인구동향조사, 고용보험 DB

간신히 한 자리 수를 유지하는 2002년 수치가 말합니다. 사용이 어느 정도 되어야 집계되는 법이라고요. 다른 자료를 보아도 상황이 비슷합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1970년대부터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실태조사』라는 이름으로 인구·가족 관련 조사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성의 일-가정 양립, 그러니까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관한 내용도 다룹니다. 그런데 2006년에야 이 항목이 포함되었습니다. 법 개정 직후인 2003년 즈음에는 집계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간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보시다시피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모두 사용률이 급상승했습니다. 출산휴가가 보장되는 직장에서 육아휴직도 보장될 거라고 가정하면, 출산휴가 쓰는 사람의 90% 가까이가 육아휴직도 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둘 중 하나만 쓰는 사람이 있으니 저 정도는 아니겠지만, 전반적인 추세가 바뀌진 않을 겁니다.) 실질적인 육아조건이 대단히 개선된 것입니다. 이게 30대 참가율이 하락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실질 보장 수준이 저렇게 향상되었다면, 보장받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역시 자료를 보겠습니다[modern_footnote]이 표의 수치는 좀 큽니다. 2011년 이후에 마지막으로 출산한 사람들 중 한 번이라도 제도를 활용한 사람이면 사용했다고 응답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2015년에” 사용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몇 년치가 누적되었다는 것이지요.[/modern_footnote].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주: <2015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실태조사>에서 인용. 편의를 위해 주요 수치 위주로 재편집.

위에서 언급한 보건사회연구원 2015년 조사에 따르면 주로 공공기관 근무자, 관리·전문직들입니다. 교사와 공무원이 최고라는 인식이 여지없이 확인됩니다. 파란 상자를 보면, 현재 경력단절을 겪는 사람들조차 다른 직장·직종 평균 내지 이상으로 출산육아 보조제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들만 써먹고 있다기보다는 아직 일반 직장에서 제도가 널리 활용되고 있지 않은 것이지요.

한편 경력단절 여성의 경우 비단절 여성에 비해 전반적으로 사용률이 낮습니다. 보조제도 사용과 경력단절 여부 사이에 매우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직 보조제도가 경력단절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계속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 직장으로, 보통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직장으로 간다면 제도보다 성향의 영향이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쇼, 이런 보조제도를 곤란해하는 직장이라면 애초에 여성 채용을 꺼리는 곳 아니겠어요? 그래서 다들 공무원 교사 하려는 거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요.” 옳은 말씀입니다. 문제는 현상의 원인이 정말 차별이냐는 질문 역시 가능하다는 겁니다. 역시 매우 오랫동안 연구된 주제입니다. 이렇게 성별로 종사산업이나 직종이 나뉘는 현상을 성별 직종분리occupational segregation라고 합니다. 아니 이 작자가 보자보자하니까 도대체 뭐라는거야? 싶으시다면 조금 더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다음 글에서 성별 직종분리를 다루겠습니다.


(참고) 출산휴가, 육아휴직 사용률 산출 방법

사용률은 (정책 수혜자 수) / (일하는 산모 수)로 계산합니다. 분자와 분모를 어디서 얻었는지 설명하면 되겠지요. 먼저 분자를 보겠습니다. 국가통계포털 KOSIS에는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에서 나온 출산휴가, 육아휴직 사용자 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출휴, 육휴 급여를 국가에서 받은 사람 수입니다. 이걸 가져왔습니다. 자영업자, 소규모 사업체 종사자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보다 적은 수치입니다.

분모가 문제죠. 출산 중 사고로 산모가 사망하는 경우는 미미하다고 하고, 쌍둥이를 감안하고 나면 출생아 수는 산모 수와 같습니다. 여기에 연도별 평균 가임기 여성 (15-49세) 고용률을 곱해 분모를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오차가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전체 추세를 보려고 하는 것이니 이 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했듯 보건사회연구원 자료는 회고적 자료 (과거 기억을 묻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연도 자료 (횡단면)를 보려면, 보다 복잡한 보정을 하지 않는다면 이 정도가 최선이겠습니다. 논문 쓰는 건 아니니까요.

내용이 좀 심심하죠? 뭘 이리 장황하게 썼나… 싶을 수도 있는데, 민감한 주제기도 하고, 단편적인 수치 나열만 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써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 노잼 숫자놀음을 누가 읽을지 모르겠지만요. ^^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들어가는 글

포스팅 예고.

한 해 동안 젠더 이슈가 많았습니다. 논의를 따라가며, 여성 노동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쓴 노동경제학 전공자로서 한 가지 아쉬웠습니다. 논의가 주로 용어, 태도, 문화에 국한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 이론과 통계자료를 통해서도 성평등, 혹은 성차별 문제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 주제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학계 밖으로 나오면 몇 가지 수치만 단편적, 편의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제의 중요성과 축적된 연구성과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고, 일반 독자를 위한 글도 찾기 어려운 것 같아 노트로 정리해 보려 합니다.

논문도 아니고 방대한 문헌을 다 요약할 순 없으니 정말 기초적인 몇 가지만 다룹니다. (여러 개 다룰 만큼 알지도 못합니다. 언젠가 시리즈를 쓰고 싶은데, 그 프리퀄 격으로 생각합니다.) 다루는 주제나 내용이 특별히 새롭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통계를 소개하고 이론적 설명을 좀 달았습니다. 관련 연구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법한 내용이고, 몇몇 통계는 통념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주는 정도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안 팔릴 건 압니다. 일단 그래프가 많이 나오거든요. 최대한 쉽게 써 보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려 합니다. 거창하게 “성평등(gender equality)”이라고 제목을 달았지만 이 글은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통계가 생물학적 성별을 기준으로 작성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