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티글러, 『통계학을 떠받치는 일곱 기둥 이야기』, 2017.

스티븐 스티글러, 통계학을 떠받치는 일곱 기둥 이야기, 2017. 서평은 아니고 메모.

스티븐 스티글러, 『통계학을 떠받치는 일곱 기둥 이야기』, 2017.

1. 책 소개에 “이 책은 통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전문적으로 통계를 다루는 사람 모두에게 매력적인 도서로…” 라고 쓰여 있다. 아니다. 기초 통계학을 모르면 읽을 수 없다.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불친절한 저자를 욕하며 책을 덮게 될 거다. 제목만 보면 일곱 기둥을 설명한 뒤 그걸로 통계학이라는 집을 지어 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이런 느낌이다. “너 통계학이란 집에 살지? 니네 집 기둥 7개가 요렇게 만들어졌고 조렇게 집을 지탱하고 있음 ㅋ” 일단 그 집에 살아야 한다는 얘기. 문면만 파악하려 해도 조건기대(분포)의 성질과 최소자승추정법, 베이즈 추론의 기본을 알아야 한다.

2. 배경지식을 알면 대단히 재미있다. 현재 배우는 깔끔한 이론이 형성된 과정과 그 과정을 주도한 거인들을 만날 수 있다. 개념을 알기 위해 반드시 개념의 형성사에 달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형성사를 통해 이해가 깊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동 저자가 쓴 『통계학의 역사』가 두꺼워서 부담스럽다면 이 책만 읽어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듯.
가령 회귀분석의 경우를 보자. 회귀regress가 골턴Galton의 “평균으로의 회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본 교과서 대부분은 저 사실을 언급했다. 간단히만 언급했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이 책은 골턴의 선구적 연구를 인상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내 수준이 그렇고 그렇다는 걸 감안하면 더 알수록 더 재미있지 않을까.

2-1. 골턴도 골턴이지만 2-3장 “정보 측정”, “가능도”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계량경제학 베이스로 통계학을 공부해선지 2-3장은 주제부터 익숙하지 않다. (1, 4-7장은 그나마 낫다) 당장 최우추정법 배울 때 피셔 정보행렬Fisher Information Matrix이 나오자 모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이름이 왜 ‘정보행렬’인지 묻지 마라. 비생산적이다.” 이게 궁금한 경제학도는 이 책을 보면 된다. 엄연히 의미가 있다.

3. 번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직역을 넘어 번역기 수준 문장은 그렇다 치자. 역자가 전산통계 전공이라 해서 기대했는데 솔직히 책을 100% 이해했는지 의문이다. 뒤로 갈수록 의혹이 짙어진다.

가령 제5장 “회귀”에 Stein’s Paradox가 나온다. 원저자 설명이 대단히 압축적이긴 하지만 통계 전공자라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나도 아니까). 그런데 역서로는 도무지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다. 당장 수식 하첨자 틀리는 건 차치하더라도, 내용을 이해했다면 나올 수 없는 번역이다. 아는 내용도 더 헷갈리게 하는 마법같은 번역. 어찌어찌 읽다가 여기서 결국 원서를 펼치고 말았다. 경제사상사 명저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의 섬세한 번역이 떠오르며 아쉬움이 더했다. 사실 책 소개 첫 문장부터 알아봤어야 한다. “통계학에 과학으로서의 독특함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김훈 문장력 바라는 게 아닌데…ㅠㅠ

* 자세히 짚는다. 스티글러 교수는 Stein’s Paradox를 다룰 때 어김없이 나오는 “naive estimator” (혹은 “obvious estimator”)를 말로 풀어 설명한다. “At the time, it was taken as too obvious to require proof that one should estimate each μi by the corresponding Xi.” (여기서 Xi ~ N(μi, 1). i= 1, .. k, 각 Xi는 독립.) 이 문장이 이렇게 번역되었다. “당시에는 해당 X에 따라 각 mu를 추정해야 하는 것을 너무 당연히 여겨 증명이 필요 없었다.”

나라면 이렇게 번역한다. “당시에는 μi의 추정량으로 그에 대응하는 X값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증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당연하게 여겨졌다.” 더 나은 문장을 찾을 수야 있겠으나, 핵심은 μi hat = Xi 라는 등식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내용을 안다면 이렇게 옮겨야 한다. 그래야 이 뒷 문단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역자가 “the corresponding Xi“를, 나아가 앞뒤 내용 전체를 이해하고 번역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우석훈 인터뷰 비판

우석훈 씨가 육아 관련 책 발간 기념 인터뷰를 했다. 그 짧은 인터뷰에도 오류가 너무 많아서 짚고 넘어가 볼까 한다.

기사를 차근차근 살펴보겠다. 기사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경제학자 우석훈(49)씨가 육아기를 펴냈다. 다섯 살, 세 살 두 아들을 키우며 몸으로 체득한 육아의 세계를 경제학자의 ‘촉’으로 짚은 『오늘 한 푼 벌면 내일 두 푼 나가고』(다산4.0)다. 6일 만난 우씨는 “한국에서 아이 키우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육아의 모든 책임을 엄마에게 뒤집어 씌운다. 육아 부담을 개인이 짊어지는 데 한계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의 가사분담률이 OECD 최저 수준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5년 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 자료를 보자. 남성들은 과거에 비해 가사분담을 더 하고 있다. 참고로 이 설문조사는 부인들에게 물어본 결과다.

우석훈 인터뷰 비판

가사를 “부인이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응답은 전 연령대에서 감소하여 평균 약 10%p 감소, “부인이 주로, 남편도 분담”은 거의 유사, “가사를 공평하게 분담”은 전 연령 평균 약 10%p 증가했다. 코호트별로도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육아 외의 가사활동만 분담하는 것은 아니냐고? 자세한 자료는 없으나 여전히 “저녁이 없는 삶”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인식 개선만으로 이 정도 나아진 것도 극적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육아연령대인 30-39세 여성 고용률이 15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은 반면 20-29세 여성 고용률은 급상승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과거 여성들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출산과 육아를 했다. 그러니 애당초 “일-가정 양립”이 필요 없었다. 지금은 일자리를 포기해야 한다. 커리어와 가정을 모두 잡아야 하는 환경이 되자 육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육아 자체가 어려워졌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다.

세상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경제학이 “우울한 과학”이라고 불린대도, 무턱대고 세상이 좋아지지 않는다며 종말 대예언을 거듭하는 샤머니즘과는 매우 다르다.

 

Q :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다.

A : “순전히 경제적 시각으로 보자면 현재 한국의 부모들은 진짜 아이를 많이 낳고 있다. 육아 비용과 주거 비용 등을 고려할 때 합계출산율이 ‘1’ 이상(2015년 1.24명)이라는 게 놀랍다. 앞으로 더 줄어들어 ‘0.8’‘0.9’로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

우석훈 씨는 합계출산율이 생각보다 높다고 한다. 무엇보다 높다는 것인가? 비교하려면 기준이 필요하다. 육아 비용과 주거 비용을 고려한 기준합계출산율(benchmark fertility rates)라도 산출했다는 말인가?

Lee, Mason and et al. (Science, 2014)에 따르면, 한국에서 생활수준을 최적으로 하는 합계출산율은 1.25-1.55 사이고 2010-2014년 한국의 평균합계출산율은 1.23이다. 최적에 가깝다.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저출산이 반드시 문제인가? 학자라면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최적에 “가깝다”는 표현에는 통계적 검증이 필요하다. 0.02가 작은 차이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최적 범위가 1.25-1.55니까 0.02는 작은 숫자가 아닐까 한다. 이 내용은 권남훈 교수님 블로그를 참조했다. 일독을 추천.)

그리고 2000년 이후 합계출산율 추이는 대단히 안정적이다. 줄어든다는 말에는 근거가 필요하다.

 

Q : 정부의 저출산 대책이 효과가 없다는 말인가. 지난해 관련 예산만 해도 21조원이 넘는다.

A : “한국의 육아 정책은 셋째 아이부터 파격적인 혜택을 준다. 전형적인 모양내기 정책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가장 안정적인 방법은 첫아이를 낳는 데 정책 목표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려면 ‘결혼하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정규직 비율을 높이고, 임대주택을 확대해 주거비용을 낮추는 등의 정책이 필요하다.”

엄밀히 말해 육아보조정책과 출산제고정책은 다르다. 육아보조에 초점을 맞추면 다자녀 가정 보조 비중을 높이고, 출산제고를 하려면 우석훈 박사 말대로 첫 출산 문턱을 낮추는 것이 맞다. 두 정책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이를 논하려면 위에서 말했듯 한국이 정책적으로 출산율을 높여야 하느냐부터 따져야 한다. 위에서 이야기했으니 넘어간다.

어쨌든 여러 가지 의미에서 첫 출산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그런데 거기서 결혼 이야기가 바로 나오는 건 조금 이상하다. 우석훈 박사는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유럽 국가들의 출산율 반등에 크게 기여한 요인이 무엇인가? 여럿 있겠으나 혼외출산자 지원제도 정비가 한몫 했다. 혼외라고 하면 불륜을 연상할 수 있으나, 법적 부부가 아니라도 출산육아정책 수혜대상이 될 수 있도록 완화한 것이다. 이런 정책을 시행할 경우 비혼·1인 가정 증가와 출산율 감소의 연관성이 약해진다. 왜 이런 얘기는 안 했을까?

한국은 혼외출산 비율이 매우 낮은 국가라서 얘기가 다르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겠다. 당장 근거는 없으나 나는 제도가 이 현상의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이건 가족제도 바깥의 출산은 개인의 인생을 끝장내기 때문이다. 제도가 바뀌면 결과도 바뀔 수 있다. 가까운 예로, 이혼에 대한 인식이 20년 사이에 얼마나 달라졌던가?

어쨌든 사회문화적 제약이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을 테니 결혼을 보자. 한국의 경우 결혼 연령과 출산 연령이 동반 상승했다. 결혼 후 출산까지 걸리는 기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97년과 2016년을 비교하면 평균 4개월 정도 늘었다. 대학진학률이 늘고 졸업까지 걸리는 기간이 길어졌음을 고려하면 큰 차이가 아니다. 그러니 결혼이 늦어져서 출산이 늦어진 건 사실이다. 그런데 결혼하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규직 비율을 높이고 임대주택을 확대하자? 아니다.

먼저, 정규직 비율을 높이자는 말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자는 말인지, 향후 채용을 정규직 중심으로 하자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둘 다 비현실적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 하에 정규직-비정규직 갭을 점차 줄여나가는 것이 현재 가장 합리적이다.

둘째로 임대주택 확대. 먼저 한국의 주거비용은 국제 기준 높은 편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자. 선진국은 소득의 20% 후반을 주거비로 지출한다. 한국은 15-20%다. 우석훈 박사가 말하는 임대주택이 공공인지 민간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민간임대주택이었기를 바란다. 공공임대주택의 경우 부지도 재원도 없다는 건 부동산알못인 나도 아는 사실이다.

 

그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20대들을 만나 가장 큰 변화가 뭐냐고 물어보니 ‘소개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면서 “결혼을 유예하고 사는 비정규직에게 출산과 육아는 사치”라고 했다.

주변에서도 이런 이야기 심심치 않게 듣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적어도 종사상지위별, 연령별 유배우율 통계라도 제시해야 한다. 경활조사 원자료 5분만 만지면 얻을 수 있는 데이터다. 원자료 제시는 스킵.

 

그는 결혼 9년 만인 2012년 첫아이를 낳았고, 2014년 둘째를 낳았다. 박사 학위 소지자로 직장 생활을 하던 그의 아내는 첫째를 낳은 뒤 1년 육아휴직을 했고, 둘째 백일 무렵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됐다. “태어나자마자 집중치료실에 들어갈 만큼 몸이 약했던 둘째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회사에서 육아휴직이 안된다고 했다. 행정소송을 하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애가 아파 소송을 할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는 지난해 파트타임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내분 이야기는 스킵. 출산휴가/육아휴직 사용률 제고는 분명 중요한 문제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그 역시 일을 줄이고 육아에 나섰다. 금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오전까지는 그가 육아를 도맡는다. 매일 오전 9시까지 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일도 그의 몫이다. 술자리 약속이 있어도 오후 8시30분까지는 귀가한다. 그는 “밤 9시에 애들을 재워야 하는데 그 시간을 놓치면 밤 11시까지 안 잔다. 혼자 애 둘을 재울 수가 없다. 각자 한 명씩 데리고 책을 읽어줘야 잔다”고 설명했다.

아주 수고가 많으시다.

 

Q : 육아 참여도가 높은 편이다.

A : “우리나라 남성들의 가사 참여율은 이슬람 국가 수준이다. 부부가 같이 일을 하면 집안일도 나눠 하는 게 당연하다. 육아엔 절대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육아를 무서워하는 아빠들이 많다. 애 보는 게 부담스러워 꼭 필요하지도 않은 야근을 하는 아빠들도 꽤 있다.”

가사참여율 이야기는 위에서 했다. 남성이 육아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경제활동과 귀찮음으로 나누면 둘 중 어느 쪽이 더 클까? 과연 지금 30대 중 “애 보는 게 부담스러워 꼭 필요하지도 않은 야근을 하는 아빠” 가 얼마나 있겠는가? 자료는 없지만 간접적으로 추론해 볼 순 있다. 과연 남성들의 인식이 그랬다면 가사참여율이 개선되었을까?

 

Q : 육아의 어떤 점이 가장 힘든가.

A : “다 어렵다. 노동 강도로 따지면 중노동 중의 중노동이다. 돈 문제도 힘들다. 출산 후 가계 소득은 줄고 지출은 늘어났다. ‘돈이 없어 못했다’는 일은 안 만들고 싶은데, 쉽지 않다.”

물론 다 어려울 것이다. 다 하려고 하면 다 어려운 법이다. 당장, 바로 아래 내용과 모순이다.

 

그는 비경제적인 육아 관행도 꼬집었다. 고가의 산후조리원과 유모차·영어유치원 등에 쓸데없이 돈 쓰는 풍토를 안타까워했다.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과 보육 교사 처우 개선 등의 필요성도 역설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첫째를 집 근처 국공립어린이집에 보내려고 2년 넘게 기다렸는데 아직도 대기 번호가 20번대”라고 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육아의 고충을 강조하며 “못 할 짓”이라는 말까지 했다.

일단 공립 어린이집 확충이 답이라고 하자. 경제학자라면 적어도 재원조달할 방법 정도는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 대기번호 이야기는 길에서 30대 후반 여성 붙잡고 물어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영어유치원을 사치처럼 얘기하는데, 국공립/병설에 보내려다 못 보내니 영어유치원 보내는 케이스도 많다. 한편 기자의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경제학자가 “쓸데없이 돈 쓰는 풍토”라고 말했다는 건 충격적이다. 하긴 예전에 “빚 내서 집 사지 말고 돈 아껴 저축해야 산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돈이 없어 못했다는 일은 안 만들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서 좋은 유모차 산다면 뭐라고 할 건가?

 

Q : 청년들에게 “아이 낳으라”는 말을 하기 힘들겠다.

A : “그래도 애들 덕에 웃고 행복하다. 아이를 낳으면 천국문과 지옥문이 동시에 열리는 셈이다. 이렇게 사는 게 삶 아니겠나.”

좋은 말씀이다. 행복을, 그가 즐겨 쓰는 표현대로라면 명랑을 빈다.

정체성 리버럴리즘의 종말 (The End of Identity Liberalism), NYT

정체성 리버럴리즘의 종말 (The End of Identity Liberalism) | NYT (Nov 20, 2016)

마크 릴라(Mark Lilla), 컬럼비아 대학교 인문학 교수. 정치철학. 『사산된 신 (The Stillborn God)』 저자.

칼럼 소개

마크 릴라 컬럼비아대학교 교수는 서구 정치·종교사상사를 연구한 학자입니다. 그는 계몽주의와 그 비판의 역사를 연구하고, 다른 주제로 정치와 종교의 상호연관을 탐구합니다. 2007년 출판한 <사산된 신>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 100선 선정)은 정교분리를 표방하는 서구 자유-민주주의가 끝내 종교와 결별하지 못했고, 정교분리라는 목표란 달성하기 어려우며, 정치신학(또는 신학-정치)의 뿌리가 매우 깊다는 것을 밝힌 역작입니다.

이 글은 지난 11월 대선 이후 마크 릴라가 민주당 패배 요인을 분석한 글입니다. 기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에 책임을 돌리는 글은 많았습니다만, 대부분 단순히 PC를 비난하는 데 그쳤습니다. 이 글은 정치적 올바름이 민주주의의 기초가 될 수 없음을 차분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글이 기고될 때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는 당선자 신분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 취임 후 행정명령을 난발하고 있는 지금, 트럼프 현상에 여전히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공유합니다.

아래는 기고문을 읽고 나서 그의 예전 저작을 참조하여 릴라 사유의 배경을 짐작한 것을 조금 쓴 겁니다. 정치철학에 관해 잘 모르니 몇 마디만 보탭니다.

근대 정치철학은 종교개혁이 낳은 파국, 30년 전쟁이 일단락된 베스트팔렌 조약을 배경으로 탄생했습니다. 종교적 열정이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력을 제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고,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그 문제를 정교분리의 원칙으로 답했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뒤로하고 서로 “이를 꽉 깨물고” 존중하라. 종교는 공론장에서 위협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고, 대신 국가는 종교 통제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오늘날 보편원칙이 된 관용tolerance이 여기서 출발합니다.

릴라는 정교분리가 소원처럼 깔끔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서구 사상사에서 정치신학적 사유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2차 세계대전, 근대의 모든 정신적 유산이 파괴된 “문명의 붕괴” 현장은 종교가 공론장에 재등장하는 계기이자 무대였습니다. 냉전기 정치 이념들은 나야말로 인류를 “구원하리라”고 속삭였죠. 릴라에 따르면 정교분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듯한 현대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사상적 토대가 일정 부분 종교적 사유와 언어에 침습되어 있습니다. 정치 질서가 위태로울 때 종교적 열정이 목소리를 내거나, 사람들이 종교를 호출할 태세가 갖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미국 우파 복음주의의 거두 제리 포웰Jerry Falwell 목사가 설립한 단체 이름이”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라는 데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머리 아프지만 당신이 믿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으며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요. 1980년대 미국에서 보수적 가치의 옹호자를 자임한 도덕적 다수는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니었습니다. 20개 주 조직, 4백만 회원과 2백만 후원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도덕적 다수의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로버츠 빌링 목사가 레이건 선거운동의 종교담당 보좌관이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자유주의의 기초를 놓은 홉스는 종교적 열정이 공포에 기원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위협받으며 느끼는 공포를 종교적 열정으로 치환하고, “구원받기” 위한 선택을 한 결과 트럼프 대통령이 탄생했다, 저는 이것이 릴라의 현실인식이 아닌가 합니다. 이 글에서는 전략만을 말하며 (본인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지만요.

언제나 그렇듯 모든 안경은 현실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릴라 역시 현실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지는 못합니다. 당장, 어쨌든 힐러리 클린턴은 총득표 수에서 승리했죠. 하지만 민주주의의 기초를 고민한다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LA에서 백인 여성이 한국계 노인을 공격하는 등 갈등이 격화되고 있지만, 어쨌든 외부 관찰자인 한국 독자들은 어느 쪽을 비난하기보다 한 발짝, 적어도 반 발짝 밖에서 상황을 고민하기 유리하겠지요.

지적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단, 리버럴리즘이 미국 진보주의를 의미하는 건 압니다. 현재 리버럴리즘의 용법이 대단히 미묘하며 개념도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옮겼습니다. 모든 주석은 역주입니다.


미국 사회가 점점 다양화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보기 좋은 일이다. 외국 관광객, 특히 인종·종교 간 융합에 난항을 겪는 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이를 해내고 있는 미국을 보며 놀라워한다. 물론 완벽하지 않지만, 오늘날 어떤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보다 낫다. 다양성 확대를 이루어 온 미국 역사는 보기 드문 성공담이다.

그런데 다양성에 따라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가 바뀐다면, 어떤 쪽이 바람직한가? 지금까지 약 한 세대 동안 차이를 인지하고 “예찬”해야 한다는 것이 리버럴 표준 답안이었다. 도덕교육(moral pedagogy)의 찬란한 원칙이지만, 오늘과 같은 이념적 시대에 민주정치의 기초로는 형편없다. 최근 미국 리버럴리즘은 인종, 생물학적·사회적 성 정체성에 관한 도덕적 패닉에 빠져들었다. 이는 리버럴의 메시지를 왜곡했고, 리버럴이 수권 능력을 갖춘 통합된 힘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이번 대선 캠페인과 그 불유쾌한 결과의 여러 교훈 중 하나는 정체성 리버럴리즘 시대의 막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세계 정세에 있어 미국의 이익,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민주주의 이해와 연관되는지를 논할 때 가장 탁월하고 사람들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국내 문제로 오자 클린턴은 선거 유세 중 그 넓은 시야를 잃고 다양성 수사법(the rhetoric of diversity)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가는 곳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라틴계, LGBT, 여성 유권자를 콕 짚어 불러냈다. 이는 전략적 실수였다. [다양화된] 미국에서 어떤 “집단”을 거명하려면 모든 집단에 대해 말해야 한다. 불리지 못한 사람들이 배제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데이터에서 나타나듯, 이것이 바로 백인 노동계급 및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이다. 대졸 미만 백인 유권자의 3분의 2가 모두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고 백인 복음주의자의 80% 이상 역시 그랬다.

도덕적 힘 – 정체성과 밀접한 – 에는 물론 순효과가 여럿 있다. 적극적 평등실현조치affirmative actions는 기업 문화를 바꾸고 개선시켰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modern_footnote]2012년 트레이본 마틴 살인 사건 이후 시작된 흑인민권 운동.[/modern_footnote]은 모든 양심적 미국인에게 경종을 울렸다. 대중문화에서 동성애를 정상화하려는 할리우드의 노력은 미국 가정과 공직에서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학교와 언론이 다양성에 집착한 결과, 자기 도취에 빠져 스스로 규정한 집단 바깥 상황에 무지하고, 각계각층 사람들과 접촉한다는 [긴요한] 과제에는 무관심한 리버럴과 진보주의자progressives 세대가 출현했다. 미국 아동들은 정체성이 형성되기도 전인 아주 어린 시기부터 개인 정체성individual identity에 관해 말하도록 주문받는다. 대학에 올 때쯤 그들은 당연히 다양성 담론이 정치 담론을 망라한다 여기고, 계급과 전쟁, 경제, 공공선 등 오래되고 언제나 중요했던 문제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다. 이는 고교 역사 교육과정이 시대착오적이게도 현대식 정체성 정치the identity politics of today를 과거에 투사하고, 우리 나라를 만들어 온 위인과 원동력에 대해 왜곡된 상을 만들어내는 데 상당 부분 기인한다. (가령 여권 신장 운동이 거둔 성취는 실제로 중요했지만, 권리 보장에 기초한 정치체제를 수립한 건국의 아버지들the founding fathers의 업적을 먼저 이해해야 그 성취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학에 온 젊은이들에게, 학생 집단과 교수진, 또한 다양성 전담 행정 관리자들은 “자기 [생활과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정체성 정치에 초점을 맞추고 “다양성 이슈”를 중시하라”고 권고한다. 폭스 뉴스 및 다른 보수 매스컴은 이들 이슈를 둘러싼 “캠퍼스 광기”를 조롱하고, 대개 옳다. 이런 식으로는 대학 캠퍼스에 한 발짝도 들여놓은 적 없는 사람들의 시선에 교육의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대중 선동가 손에 놀아날 뿐이다. “대학생들에게 ‘불리기를 원하는 젠더 대명사designated gender pronouns‘를 선택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의 소위 도덕적 긴급성the supposed moral urgency을 평균적인 유권자에게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유권자들이 젠더 대명사 자리에 “황제 폐하”라고 썼다는 짓궂은 미시간대 학생 이야기[modern_footnote]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가 학내 사이트 개인정보 기입 시 학생들에게 (기존의 Mr., Ms. 등이 아닌) 자유로운 젠더 대명사를 써도 좋다고 하자, 한 학생이 “황제 폐하(His Majesty)”라는 대명사를 입력하며 비꼬았다. 이 기사 참조.[/modern_footnote]에 폭소를 터뜨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캠퍼스식 다양성 의식campus-diversity consciousness[modern_footnote]”다양성 의식”이라는 표현이 그리 직관적이지 않다면 유사한 조어인 “역사 의식”을 떠올리면 되겠다. 아니면 맥락상 의미가 유사한 “젠더 감수성”을 대신 집어넣어도 이해가 빠를 듯하다.[/modern_footnote]이 수 년간 리버럴 언론에 요란하게 침투했다. 미국 신문방송계에서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적극적 평등실현조치는 보기 드문 사회적 성취를 거두었다. Megyn Kelly 前 Fox News, 現 NBC News 앵커, Laura Ingraham라디오 프로 The Laura Ingraham Show 진행자같은 언론인이 명성을 얻으며, 우익 미디어의 얼굴을 문자 그대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어 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한편 소장 언론인·편집자 사이에서 정체성에만 치중하면 할 일을 다 한 것이라는 식의 억측을 조장했다.

최근 프랑스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나는 작은 실험을 했다. 1년 내내 유럽 언론 기사만 읽고 미국 언론엔 손대지 않았다. 유럽 독자들처럼 세상을 보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생각보다 훨씬 유익해서, 나는 미국 기사를 읽으며 근년간 정체성이라는 렌즈가 어떻게 미국 언론보도를 바꾸어 왔는지를 알아차렸다. 가령 “최초로 Y를 해낸 X” 식의 게으른 기사가 재삼 보도된다[modern_footnote]”최초로 유리천장을 뚫고 IT 대표 기업 CEO가 된 …” 식 기사를 말한다. 이 기사 제목이 익숙하다면 바로 읽었다. 한성숙 현 네이버 대표이사가 취임할 때 국내 언론에서 무수히 쏟아진 헤드라인이다.[/modern_footnote]. 정체성 드라마에 열광하는 보도 행태는 안 그래도 보도가 부족한 해외부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이집트 성전환자transgender들의 운명을 다룬 기사[modern_footnote]이런 기사를 말하는 듯하다. Liam Stack, “Gay and Transgender Egyptians, Harassed and Entrapped, Are Driven Underground“, NYT 2016년 8월 10일.[/modern_footnote]가 그렇다. 아무리 흥미롭더라도, 이집트의 미래를 결정하고 미국에도 간접적 영향을 미칠 유력 정치적·종교적 조류[modern_footnote]무슬림 형제단을 가리키는 듯하다.[/modern_footnote]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유럽의 어떤 메이저 언론사도 그런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 정체성 정치가 가장 화려하게 실패한 곳은 선거정치electoral politics다. [정치 담론이] 건전했던 시절 국가정치는 “차이”가 아니라 공통성commonality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운명에 관한 사람들의 상상을 가장 잘 포착하는 사람이, 그가 누구든 국가정치를 지배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아주 잘 해냈다. 그의 비전을 무어라 생각하건. 레이건 전술을 모방한 빌 클린턴도 그랬다. 빌 클린턴은 민주당을 장악해 정체성-의식을 중시하는 계파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고, (국가건강보험처럼)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국내 정책에 힘을 쏟은 한편 1989년 소련 이후의 세계에서 미국이 맡을 역할을 규정했다. 그는 재선에 성공하며 민주당 지지세력 내의 여러 집단을 위해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정체성 정치는, 표현이야 아주 풍부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정체성 정치가 선거에서 결코 승리하지 못하며, 오히려 패배할 이유이다.

미국 언론이 분노한 백인 남성에게 인류학적이라고까지 할 법한 관심을 기울이자, 이들 비난받고 숫제 잊혀졌던 집단에 대해서만큼이나 리버럴리즘의 현주소도 낱낱이 드러났다. 리버럴들은 이번 대선을 두고 트럼프가 경제적 손해를 인종적 분노로 바꾼 것이 주효했다는 손쉬운 해석을 내놓는다. 이른바 “백인우월주의 반동” 명제the “whitelash” thesis다. 이렇게 해석하면 여전히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한편 다른 유권자들이 주장하는 우선 관심사를 무시할 수도 있어 편리하다. 공화당이 장기적으로 인구통계학적으로 끝장나고 리버럴이 미국을 접수하리라는 망상을 부추겨 현실에 눈감을 수도 있다. [실상은] 트럼프의 라틴계 득표율이 예상 외로 높았다는 사실로부터 인종 집단이 미국에 오래 머무를수록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분화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끝으로, 백인우월주의 반동 명제를 받아들이면 다양성에 대한 강박 때문에 다른 미국인들, 백인이고 지방민이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체성이 위협받거나 무시받는 소외 집단이라고 여기게 된 책임을 면피할 수 있어 편리하다.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다양화된 미국의 현실에 반발하며 나서진 않는다 (그들은 어쨌든 비교적 동질 지역에서 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으로 일컬어지며 도처에서 울려퍼지는 다양성 수사법에 반발하고 있다. 리버럴들은 아직도 존속하는 KKKKu Klux Klan가 미국 정치 최초의 정체성 운동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정체성 놀음에 빠진 사람들은 패배를 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탈-정체성 리버럴리즘a post-identity liberalism이 필요하다. 이는 정체성 정치 이전의 리버럴리즘이 거둔 성공에서 출발해야 한다. 새 리버럴리즘은 [정체성 집단 성원이 아니라] 미국 국민으로서의 미국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 다수에게 중요한 사안을 강조하여 지지기반을 넓히는 데 집중해야 한다. 시민이라면 공존하며 서로 도와야 하는 국가[공동체]로서의 미국을 말해야 한다. 범위가 한정된 사안, 특히 섹슈얼리티나 종교와 연관되어 상징성이 강하며 잠재적 지지자의 마음을 돌아서게 할 법한 사안은 점잖고 섬세하게, 적절한 수준으로 다루어야 한다. (버니 샌더스 식으로 말하자면, 미국은 리버럴들의 빌어먹을 화장실 타령에 신물이 났다.)

이에 투신하는 교사들은 민주주의 질서가 부여한 정치적 책임에 다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미국의 정부 체제, 역사상 주요 사건과 중요 세력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는 열성적 시민 육성이 바로 그 책임이다. 탈-정체성 리버럴리즘은 또한 민주주의 시민이 권리와 함께 의무를 부여받는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가령 현실을 명확히 알 것, 투표에 참여할 것. 탈-정체성 리버럴 언론은 국가 내에서 무시되어 온 영역 – 특히 종교 –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modern_footnote]기고문 앞에 코멘트했듯 릴라는 근대 민주주의와 정치신학의 충돌에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자다.[/modern_footnote]. 그리고 세계 정치를 바꾸는 힘, 특히 그 역사적 층위에 관해 미국 대중을 교육할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몇 해 전 플로리다에서 열린 노조 대회에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1941년 “네 가지 자유” 연설 패널 토론자로 초청받았다. 홀을 가득 메운 지부 대의원 중에는 남성과 여성, 흑인, 백인, 라틴계가 모두 있었다. 애국가 제창으로 행사를 시작했고, 루스벨트의 연설 녹음을 들으려 자리에 앉았다. 무리를 둘러보며, 다르게 생긴 얼굴들이 열 맞추어 앉은 모습, 루스벨트 연설에 놀라울 정도로 집중하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감명받았다. 그가 만인을 위해 주문한 네 가지 자유, 곧 의사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와 신앙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를 선포하는 루스벨트 본인의 강렬한 음성을 들으며, 현대 미국 리버럴리즘의 진정한 토대가 무엇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성별 임금격차, 보상의 비선형성, 한국 노동시장에 관한 단상

어느 여성판사 죽음에 관한 보고서

‘판사의 과로’ 법과 양심에 영향 없을까, 살인적인 업무량으로 재판의 부실화 우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의 방한 사흘째이던 지난 8월 5일. 대법원의 고위 관계자들은 이날 오후 강연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 기사가 다시 공유되는 걸 보자니 착잡하다.

Claudia Goldin 하버드 경제학과 교수는 2000년대에도 남아 있는 미국 성별 임금격차의 원인을 노동자 간 대체성(substitutability)과 보상의 비선형성(nonlinearity of compensation)으로 든다. 표현이 추상적인 것뿐이지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다.9 to 6을 지키고 업무가 표준화된 직업보다 업무 시간이 불규칙하고 대인관계가 중요한 직업의 보수가 더 높다. 가령 전문직 중 약사가 전자, 변호사가 후자에 속한다. 전자 직업군은 1시간 일할 때 1천 달러를 벌면 2시간에 2천 달러, 3시간에 3천 달러를 번다(선형적). 후자 직업군은 1시간에 1천 달러, 2시간에 4천 달러, 3시간에 9천 달러를 번다(비선형적).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 새벽 2시에 클라이언트의 전화를 받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고, 클라이언트와 친밀성 (rapport)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인력 간 대체가 쉽지 않은 직업이 그 반대급부로(compensating differentials) 비선형적으로 상승하는 고임금을 얻는다.

Goldin은 여성이 출산을 거치며 시간을 탄력적으로 쓸 수 없기 때문에 비선형적 임금 프로파일 직업을 선택하지 못하게 된다고 설명하며 성별 임금격차와 이 현상을 연결한다. 그리고 이 문제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며, 혹독한 업무환경의 대가로 비선형적 고임금을 주는 것이 해당 직종에서 짧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패널티를 부과하는 것과 동일하므로 젠더 문제와 무관하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시장 조건 개선, 특히 시간선택제 근무 확산 및 파트타임과 정규직 대우 갭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한다. (하루이틀에 바뀔 문제는 물론 아니다. 어차피 노동은 파생수요이며, 생산물 수요가 우선한다. 클라이언트가 새벽 2시에 전화를 건다는 데 어쩔 거냔 말이다.)

갑자기 웬 성별 임금격차 얘기를 했느냐. 비선형성을 설명하는 예시로 생각하심 되겠다.

한국은 최저임금 알바 이외 모든 직업에 비선형성이 있다. 최저임금 알바 뺀 것도 최저임금의 정의(시간당 고정임금)를 생각해서 뺀 것이지 근무환경이 나아서 뺀 것이 아니다. 당장 비선형성을 입증하는 데이터는 없지만, 한국 노동공급이 매우매우매우 비탄력적이라는 점이 간접적인 증거다. 파트타임 일자리 자체가 적거나 열악해서 일을 하느냐 마느냐를 선택하지 근무시간을 선택하는 경우가 극도로 적기 때문이다.

이 점은 Goldin이 말한 파트타임 비선형 패널티가 모든 직종에서 매우 심각하게 존재한다는 것으로 해석해봄직하다. 그런데 한국엔 비선형 패널티만 있지, 노동자 간 대체성은 매우 높다(너 아니라도 일할 사람 많다). 이 둘이 양립가능할 조건은… 간단하다. 그냥 노동시장 환경이 안 좋은 거다.

이 문제는 국가경제를 좀먹는다. 하여 나는 최근 고용노동부가 시간선택제 일자리 등을 도입해서 무언가 해보려는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한국이 정책이 부족했던 국가가 아니며 일자리란 게 정부가 도입해서 어떻게 해 볼 문제가 아니라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저런 단어를 공식 문건에 올렸다는 것도 나름의 진전이라고 생각한다.

Goldin 교수가 저 내용을 아주아주 쉽게 풀어 쓴 대중용 아티클을 하나 소개한다. Claudia Goldin (2010), “How to achieve gender equality in pay”, The Milken Institute Review.

한국 개신교회: 저들은 저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나이다

사랑의교회 도로점유 건이 파국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오정현 “영적 배수진 쳤다. 도로 점용 포기 못 해” – 뉴스앤조이

“뭐 서울시가 뭐라 하든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우리는 늘 얘기하듯이 세상 사회 법 위에 도덕법 있고 도덕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6월 16일, 사랑의교회갱신위원회(갱신위)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에 동영상 하나가 떴다. 영상은 오정현 목사가 자리에 앉아 사랑의교회 건축에 관해 얘기하는 내용이다. 이 영상은 2012년 8월 말 사랑의교회 안성 수양관에서 열린 교역자 수련회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뭐 서울시가 뭐라 하든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우리는 늘 얘기하듯이 세상 사회 법 위에 도덕법 있고 도덕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100~200명이 그렇게 난리를 치고 행정소송한다는 것이, 서초구에만 우리 등록 교인이 2만 수천 명인데. 영적 공공재라는 게 있어요.”
“그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계 변경과 건축 기간 연장 등 수백억의 돈이 더 들어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황당함이 있기 때문에, 결국 그 말은 건축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오정현 목사는 영적 공공재라는 기막힌 표현을 떠올린 자신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 한 마디가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공공재의 정의를 들어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도 그럴 만한 맥락에서나 유효하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자 강제력을 부여한 합의다. 이걸 모르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소위 영적 제사법이 세속법에 우선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려 경제학 곧 “세속 철학”의 언어를 빌려온 모양새만으로 충분히 우습다.

사회법 < 도덕법(?) < 영적 제사법(??)이라는 도식이 맞다고 하자. 그런데 교계가 사회 평균보다 도덕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던가. 개별 목회자나 개별 교회, 개별 단체를 넘어 교계가 그랬던 일은 사실상 없다고 생각한다. 한때는 위대한 인물이라도 있었다. 이제 문익환 박형규 김수환은 떠났고 조용기 김홍도가 원로로 군림한다. 옥한흠이 떠난 자리를 오정현이 차지했고 가장 잘 알려진 기독교 기업은 이랜드다. 도덕법 위에 있다는 영적 제사법까지 갈 필요도 없다.

하지만 도덕적 우월성 상실은 문제의 원인보다는 결과다. 기독교는 도덕률을 신봉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교 윤리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에서 파생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따를 것인가? 오늘날 기독교는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있고, 윤리적 우월성의 기초가 될 고유성singularity을 찾지 못하고 있다. 종교규범이 타협불가능한 진리라고 믿는 기독교 우파, 성서가 쓰인 역사적 맥락context의 휘장 뒤로 돌아가 텍스트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현대적 맥락에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좌파 모두 다르지 않다.

성서가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다고 믿는 기독교 우파는 종교 규범을 사회 규범으로 격상시키려 한다. 술담배, 혼전순결, 동성애 문제를 두고 사회와 불화한다. 기독교 좌파는 윤리적 이슈에 관대하다. 이들에게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세상을 뒤집고[modern_footnote]복음주의 좌파 계열에서 자주 읽히는 도널드 크레이빌의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은 이미 뒤집어진 것이다.” 특별히 급진적인 텍스트에서 인용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modern_footnote] 소수자minority를 껴안은 인물이다. 하느님이 세상의 왕으로서 모든 영역에 관여한다고 선언하고, 그 연장선에서 세속 진보 담론의 “성서적 토대”를 찾아낸다. 악성부채탕감을 모토로 내세운 주빌리은행이 대표적 사례로, 구약성서 희년법이 이 운동의 사상적 배경이다. 또는 성서가 가진 차별적 요소를 찾아내 해명하거나 아예 전복적 해석을 내놓는다. 이런 접근은 전통적 접근과 달리 성소수자 문제에 개입할 여지를 만든다.

이 둘은 접근법이 다를 뿐 성서의 (무오성과) 권위를 복원한다는 목표를 공유한다. 그에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완전히 같다. 우파식 접근은 기독교를 사회로부터 유리시키며, 좌파식 접근은 기독교를 시민윤리 변동에 종속시킨다. 종교와 정치를 뒤섞어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신정법divine law과 현대 민주주의의 정치적 동력을 혼동시킨다는 점에서 좌파 쪽이 어쩌면 더 위험하다[modern_footnote]James Davidson Hunter (2010), 배덕만 역 (2014),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새물결플러스.[/modern_footnote]. 교계가 문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케케묵은 주장을 꺼내 들 생각은 없다. 세상은 변한다. 그렇다면 변화의 물결이 거듭되어도 유효한 질문과 그 답을 찾아내어야 한다. “메마르고 야윈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modern_footnote]Walter Wink (2003), 한성수 역 (2014), <참사람>, 한국기독교연구소, p. 508.[/modern_footnote] 은 무엇인가?

종교는 믿음을, 믿음은 도약을 요구한다. 믿어야 뛸 수 있고 뛰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도약하려면 최소한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무엇을, 왜 믿으라는 말인가. 왜 반드시 기독교여야 하는가. 왜 굳이 초월성이란 요소를 도입해서 인생을 귀찮게 만들어야 하는가. 기독교 우파와 좌파의 접근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도덕적, 윤리적 우월성을 확보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기독교 사상가들이 열심히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그리스도의 유일성, 성경의 권위” 에 관해 설명하지만 그들의 말은 동어반복적이다. 복음주의 사상가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한때 복음주의는 학계에서 죽은 것으로 여겨졌다”는 말로 이들 주제를 다루는 대표 저서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을 시작한다. 그 말은 틀렸는데, 신학계를 제외한 학계에서 복음주의가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계열 유명 잡지 <크리스채니티 투데이>가 이 책을 1997년 도서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이 훌륭한 책은 너무나 널리 읽혀 영문판이 구글 스칼라 기준 110번 인용되었다. 늘상 “주류가 나를 무시한다”고 주장하는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2004) 영문판 피인용횟수가 3226회, <나쁜 사마리아인들>)(2007)이 601회다.

흔히 경제성장이 종교를 위축시킨다고 여긴다. 아니다. 사회학과 경제학 연구자들의 공통된 결론이다[modern_footnote]놀랍게도 종교의 경제학economics of religion이란 분야가 있다. 20-30년 된 “젊은” 응용분과다 (주로 응용산업조직론의 형태. Hotelling, Salop의 공간경쟁모형spatial competition models이 종교시장 분석에 자주 활용된다). 사회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종교현상을 분석해 왔는데, 최근에는 종교사회학-경제사회학-종교의 경제학이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듯하다. 유명한 경제학자들도 관련 논문을 쓴다. 공공경제학 교과서로 잘 알려진 Gruber MIT 교수, 언제나 독창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Zingales 시카고 교수 등등. 이쪽 문헌 중 재미있는 논문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따위 없다는 실증연구가 있다.
경제성장과 종교, 세속화, 다원주의에 관한 참고문헌. 모두 경제학과 사회학 분야 유명 학술지에 게재된 것들이다.
– Buser (2014), “The Effect of Income on Religiousness.”, American Economic Journal: Applied Economics.
– Hungerman (2013), “Substitution and Stigma: Evidence on Religious Markets from the Catholic Sex Abuse Scandal.”, American Economic Journal: Economic Policy.
– Hungerman (2005), “Are Church and State Substitutes? Evidence from the 1996 Welfare Reform.” Journal of Public Economics.
– McBride (2010), “Religious Market Competition in a Richer World.”, Economica.
– McBride (2008), “Religious Pluralism and Religious Participation: A Game Theoretic Analysis”,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 Montgomery (2003), “A Formalization and Test of the Religious Economies Model.” American Sociological Review.[/modern_footnote][modern_footnote]베버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테제를 정면 반박하는 연구는 이거다. 무려 경제학 탑저널 QJE에 실렸다. 제목부터 사회학자들과 한 판 붙어보겠다는 패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초록만 읽어도 재미있다. 1저자 이름이 Sascha다. 캬.. 사스가…
– Sascha O. Becker and Ludger Wößmann (2009), “Was Weber Wrong? A Human Capital Theory of Protestant Economic History.”,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modern_footnote]. 세속화secularization와 다원주의pluralism의 영향은 생각보다 복잡하며 종교가 반드시 쇠락하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속화가 사람들을 탈종교화시키리라는 전망은 종교서비스시장에서 공급이 불변이고 (모임 출석 횟수, 출석 시 시간, 기부금 액수 등으로 측정한) 수요만 줄어든다는 말과 같다. 공급도 변한다면, 그러니까 개별 종교의 수요가 줄어들더라도 다양한 종교 내지 교파가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실은 어땠는가? 데이터는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 유럽은 분명히 세속화되었다(수요 변화가 지배적). 미국에서는 다양한 교파가 출현하고 개별 종교 내지 종파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수요 공급 모두 변화). 한국 기독교는 종교시장이라는 난장에서 어디에 자리잡을 것인가. 적어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어야 하고, 주는 방식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신학자가 아니며 저 주제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다만, 종교시장의 공급자로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공급곡선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한국 교계는 쇠락을 피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쌓아올린 사회적 부를 투자해 정신적 유산을 만들고, 무엇을 믿을지 묻고 답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예배와 모임에서 요구하는 시간을 줄여 기회비용을 낮추는 것도 한 방법이다. 특히 시장지배적 지위에 있는 대형교회, 대형 단체들이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물론 시장지배적 지위를 누리던 자들이 접근성을 높일, 공급곡선을 옮길 리가 없다. 모든 것은 수요 측의 문제니, “불신자들”을 보고 “주님을 모르는 세대”가 오고 있다고 개탄하고, 뜨뜻미지근해 보이는 신자들에게는 “네 돈과 시간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훈계하면 되니까. 믿음대로 될 테니까.

예수는 믿음이 부족했다. 돌을 떡으로 바꾸지도, 성전에서 뛰어내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모른다 할 것이다. 돌을 떡으로 바꾼 자들,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한 자들,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불가능하다던 도로 점용허가를 따낸 자들, “그들이 나를 알지 못하듯 나도 그들을 알지 못한다.”

아무런 기대가 없다. 실망도 하지 않는다. 축적된 종교자본이 사라지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어차피 그들에겐 “종교적” 힘이 없다. 길 찾을 능력과 의지가 없으니 긍정적 영향력이 나올 수 없으며, 더 악화시킬 위상이 없으니 부정적 영향력도 나올 수 없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더라도 놀랍지 않다. 오래 전 길 잃은 무리에게 예정된 파산일 뿐이다.

나는 예수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제도종교와 멀어져 신앙의 변방에서 헤매는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교계가 내 길을 찾아 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헤맬 필요는 없다. 여전히 세상에 예수가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첨탑 세워 십자가 매다는 건 그만두고 사람의 아들을 보는 법을 고민하고 나누어야 한다. 오정현 목사가 공공재 타령을 했으니 그대로 돌려주자면, 교계에서 무엇이, 왜 과소공급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경제학과 수학의 관계 (김두얼)

김두얼 교수님 페이스북에서 옮겨 왔다. 총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제학 연구자의 덕목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부분도 있다.


1편. (원본 링크)

(거시)경제학과 수학에 대한 제 생각에 대해 #홍성욱 선생님께서 질문을 주셨는데, 그와 관련해서 한 번에 답을 드리기는 어렵고 두 세 차례에 걸쳐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많은 분들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수학을 보고 경제학자들이 연구를 하거나 정책을 개발하는데 수학을 많이 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맞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비유를 들어 말씀드린다면, 경제학 교과서는 연습을 하기 위한 책입니다. 피아노로 치면 하논 같은 책이라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들은 손가락 연습을 하기 위해 하논을 치는 것이지, 그 음악이 아름다워서 하논을 치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학 교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사고 훈련을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많은 훈련들이 실전보다 높은 강도로 특정 행동을 반복하게 함으로써 몸에 익숙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신다면 수학을 안쓰는 교과서를 쓰면 되는 것이지요.

어떤 교과서를 써야 경제학적 사고를 더 잘 함양할 수 있는가는 학자의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교과서 선택이나 강의 내용도 그에 따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을 받은 다음에 실제 논문을 쓸 때 그런 수학을 쓰는지 안 쓰는지는 연구 분야, 연구질문의 내용, 학자의 성향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저만 하더라도 대학원 수업 때는 온갖 수학적인 내용을 배웠습니다만, 지금까지 수십편의 논문을 쓰면서 수학이라고 부를 만한 내용을 논문에 넣은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수식을 간혹 넣긴 하지만 그걸 수학이라고 부르면 수학에게 미안한 수준입니다.

경제학에서 중요한 것은 수학이 아닙니다. 경제학적 사고와 경제학적 직관이지요. 이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훈련이 필요한데, 수학이 많이 들어 있는 미시, 거시 교과서를 공부하는 것은 바로 그런 훈련 중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훈련용 책을 보고 경제학을 평가하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앞으로는 좀 삼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