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rdim et al. (2017), Minimum Wage Increases, Wages, and Low-Wage Employment: Evidence from Seattle (NBER w23532)

Jardim, Long, Plotnick, van Inwegen, Vigdor, and Wething (2017), “Minimum Wage Increases, Wages, and Low-Wage Employment: Evidence from Seattle”, NBER w23532.

어제 NBER에서 공개한 이 페이퍼가 화제인 모양이다. 이 논문은 시애틀의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을 실험 삼아 인상의 효과를 실증분석했다. 논문에 따르면 최저임금 2년 연속 인상 결과 총 payroll이 통계적-실질적으로 유의하게 줄어들었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 반대 입장이라면 환영할 만한 결과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헌데 저 유명한 Card & Krueger 이래 대체로 받아들여지는 합의는 1) 완만한 인상은 고용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2) 이론의 예측대로 일률적인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양쪽 입장을 지지하는 논문이 모두 생산되고 있으며, 이 논문을 통해 반대 측의 유력한 증거가 추가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실제로 같은 현상을 두고 UC 버클리 연구진이 분석한 페이퍼는 결과가 달랐다.

이 논문의 차별점은 머릿수로 측정한 고용에는 영향이 미미하나 노동시간으로 측정한 고용에는 영향이 막대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최저임금 인상 시 시간당 임금이 오르지만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 최저임금노동자의 소득이 줄어든다는 것. 한편 Headcount 고용은 영향을 덜 받았고, 첫 인상 때는 부작용이 덜했으나 두 번째 인상 때 커졌다는 점에서는 기존 문헌과 분명히 연속성을 갖는다. 방법론적으로는 이전 연구의 고용변동 측정법이 인상 전 최저임금 이상-인상 후 최저임금 미만 구간에 속하는 노동자들의 변동을 과소평가했다고 지적한다. (전에 과외돌이가 짚은 포인트. 과외돌이 경제학과 가라고 할까?)

논문의 기여점은 확실해 보인다. 우리는 조금 더, 아니 조금 많이 더(??)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최저임금 실증논문은 늘상 일반화 가능성이 문제시되는데, 이 논문에서도 레스토랑 산업에서는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았다. 2년 새 1.53달러가 올랐는데도. “최저임금 인상의 영향은 부정적이나, 지역 내 산업 구성, 고용비중 등에 따라 정도가 다르다”는 뜨뜻미지근한 결론에 다시금 이르게 된다. 분석 결과가 어느 한쪽에 쐐기를 박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근시일 내에 최저임금 1만원을 달성하자는 주장에 극히 회의적이다. 그러나 논문 한 편으로 이 첨예한 이슈가 끝났다는 태도는 곤란하다. 게다가 이 논문은 아직 워킹 페이퍼 아닌가. 논의에 종지부를 찍으려면 이 결과가 후속연구에서 지속적으로 재현되어야 한다. 이 점을 유념하지 않으면 연구를 취사선택할 위험이 있다.

가장 원하던 결과, 가장 그럴 듯한 결과가 나왔을 때를 경계하라. 나는 그렇게 배웠다.


해당 논문 초록.

This paper evaluates the wage, employment, and hours effects of the first and second phase-in of the Seattle Minimum Wage Ordinance, which raised the minimum wage from $9.47 to $11 per hour in 2015 and to $13 per hour in 2016. Using a variety of methods to analyze employment in all sectors paying below a specified real hourly rate, we conclude that the second wage increase to $13 reduced hours worked in low-wage jobs by around 9 percent, while hourly wages in such jobs increased by around 3 percent. Consequently, total payroll fell for such jobs, implying that the minimum wage ordinance lowered low-wage employees’ earnings by an average of $125 per month in 2016. Evidence attributes more modest effects to the first wage increase. We estimate an effect of zero when analyzing employment in the restaurant industry at all wage levels, comparable to many prior studies.

블라인드채용제 단상

한국 노동시장의 학벌 차별은, 존재하는 경우, 그리고 산업/직종별 차이도 고려해야겠지만, 전체적으로 선호에 따른 차별taste discrimination보다 통계적 차별statistical discrimination인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야 SKY 애들만 뽑아”보다 “야 시켜보면 걔네들이 일도 잘하니까 걔네 뽑자” 에 가까우리라는 것이다. (근거자료 없는 추측이다.)

고용주들은 정보부족 때문에 통계적 차별을 시행한다. 교과서적 예를 들어 보자. 고용주는 구직자를 뽑아 일을 시키기 전에는 생산성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보유한 과거 인사기록을 기초로 구직자가 속한 집단의 평균 생산성을 따져본 뒤 구직자 역시 평균적으로 그 정도일 것이라 예측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과거 인사기록 정보 자체가 특정 집단에 편중되어 있다면? 쉽게 말해 지금까지 100% SKY 출신만 있던 회사에 비SKY 출신이 입사지원을 하는 경우다. 이 때는 비SKY의 성과에 관해 참조할 정보 자체가 없으므로 불확실성이 커진다. 따라서 인사담당자가 학교 서열 등을 전혀 모른다 해도 SKY 출신을 뽑게 된다. 참고로 이 논리는 SKY-비SKY를 바꾸어도 성립한다. “이런 학교 나온 애가 왜 여길 왔지? / 몇 번 뽑아 봤는데 다 금방 그만 두더라.”

이론적으로 통계적 차별은 구직자 생산성 정보가 고용주에게 충분히 제공될 때 사라진다(Phelps 197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뽑아 보기 전에는 모르는데, 모르니까 뽑지 않는다. 적극적 조치로 대표되는 소수 집단 우대정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별을 인지한 소수자(이 예시에서는 비SKY)들이 능력계발을 포기한다면 통계적 차별이 실질적인 격차로 고착되기 때문이다(Arrow 1972, Lundberg and Startz 1982).

대표적 노동시장 차별인 성차별 문제의 경우 여성할당제를 채용하여 정보량을 늘린다. 집단이 둘이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다. 학벌은 집단이 여럿이므로 수량규제인 할당제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 때 블라인드채용제는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정책대안이다. 통계적 차별의 근거가 사라지며, 고용주가 구직자 생산성을 예측할 때 사용하는 정보에서 다른 정보 – 가령 인턴십 경험 – 비중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차별의 경우 블라인드 방식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존 방식에 맞추어 준비해 온 구직자들의 손실과 저항이 불가피하다.

통계적 차별이 일반화된 노동시장에서 교육은 역량 증진의 수단이 아니라 신호발송signalling의 수단이 된다. 소위 학교 간판은 “이러이러한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보다 “난 이런 학교 나올 능력을 갖고 있다”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통계적 차별을 없애려는 시도는 개인의 역량(인적자본) 자체를 평가하겠다는 의지로서, 교육을 신호발송의 수단으로 여겼던 집단에게는 불리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들도 주어진 제약 하에서 최적선택을 했던 것이니, 적응기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블라인드채용제 시행 유예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마 정치적인 이유로 불가능하겠지만.

블라인드채용제를 성토하는 모교 대나무숲 게시물이 페이스북에서 여러 차례 공유되었다. 지금까지 노력해서 이 학교 들어왔는데 노력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다른 “낮은” 학교 학생들과 동일하게 평가된다는 것이 불만이라는 이야기였다. 전형적인 신호 내러티브다. 한 마디만 얹고 싶다. 소위 명문대는 다른 학교에 비해 자원 규모가 압도적이다. 재학생들이야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겠으나, 채용설명회라도 한 번 더 있고, 전반적인 정보나 선후배 인맥, 진로상담 등 학교 인프라 자체가 다른 학교보다 우월하다. 학창 시절의 수고와 노력은 이 자원에 접근하는 대가로 지불된 것이지 평생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런 자원을 갖고도 학교 이름 없이는 경쟁력이 없다면 그거야말로 노력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돌아와서, 그럼에도 “역량중심사회”로 이행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문제가 채용에서 끝나지 않는 까닭이다. 직장 내 평가도 역량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평가 결과에 따라 승진과 해고가 가능한 수준의 노동시장 유연성 역시 필요하다. 그런데 사내 평가에 정부가 개입할 수 있겠는가? 하여 지금으로서는 블라인드채용제가 기폭제가 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는데,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참고문헌.

Arrow (1972), “Some Mathematical Models of Race in the Labor Market”. AH Pascal (Ed.), Racial discrimination in economic life, Lexington Books.

Lundberg and Startz (1983), Private Discrimination and Social Intervention in Competitive Labor Markets, American Economic Review.

Phelps (1972), The Statistical Theory of Racism and Sexism, American Economic Review.

‘Apple Way’ 와 재벌개혁의 역설 (김현성)

페이스북 원문 링크


‘주주자본주의’ 와 ‘재벌개혁’ 이라는 두 가지의 의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를 오랫 동안 지배해 온 것이었다. 또한 이 두 가지의 의제가 지향하는 목표 또한 뚜렷하다. 공정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확립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의제는 현재 한국 경제에 과연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먼저 주주자본주의부터 생각해 보자. KRX와 금융투자협회가 발간하는 주식투자인구통계와 자본시장 Factbook에 따르면, 한국의 주식투자인구 비중은 경제활동인구의 20% 남짓이다. 그런데 문제는 보유금액별 비중이다. 2012년 기준으로 전체투자자 중 기관/외국인을 제외한 개인투자자 중 1.0%가 시가총액의 60% 가량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들은 대부분 대기업의 개인 대주주들이다. 5년 전의 자료이지만 자본집중도 자체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도 비슷하리라 본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보도가 되고 있는 내용처럼 대기업들이 ‘Apple Way’ 를 따른다고 가정해 보자. 미국식 주주자본주의가 실현되고 배당수익률은 고공행진을 지속하며 주가는 상승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자본시장을 통한 공정한 부의 재분배로 이어질 것인가? 유가증권 자본집중도가 극히 높은 한국에서는 결국 이 과실이 시총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상위 1.0%에게 돌아갈 것이며, 삼성전자나 현대차 등은 ROE를 최대한 높여 주주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고용을 줄이고 생산 아웃소싱의 비중을 늘려 나갈 것이다. 주주자본주의 의제의 실현과 공정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꼭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벌들을 을러메어 정부의 주도로 중소기업으로 부를 재분배하는 방법은 또 어떠한가? 우리나라에서는 중소기업 육성을 강조하면서 꼭 ‘독일’ 을 언급한다. 그러나 정작 독일 중소기업의 수출참여도가 10%에 이르는 반면, 한국 중소기업의 수출참여도는 독일의 1/4 수준인 2.6%에 머무르며, 국내 중소기업의 96.1%가 해외진출 계획이 없다는 사실은 항상 제외된다. (2017.2.27 산업통상자원부) 결국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도는 중소기업의 대다수가 내수시장인 대기업에 매달려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재벌개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악의 제국인 삼성그룹과 현대차가 매년 중소 협력업체에게 강요한다고 전해지는 CR(Cost Reduction)을 중지하고 협력업체와 상생을 추구하면 우리나라는 일본이나 독일처럼 중소기업이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를 잡아야 하는데 닭을 잡는 칼을 쓰는 격이다. 중소기업 육성과 재벌개혁은 관련성도 없거니와, 관련이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는 의제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만 해결할 수 있다. 현재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생각하는 방향이 아직까지 틀리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경제정책에서의 실패를 면하기 위해서는 정책수석과 공정위, 기재부와 경제수석의 합이 잘 맞아야 하는 점도 있다는 것에서 불안한 점이 있는 것이다.

미국이 지난 금융위기 기간 동안 ‘GATFA’ 를 통해 IT 르네상스를 경험한 것처럼 보이지만, 왜 8년 간의 르네상스 이후 미국민들은 트럼프를 선택하였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 통신사들은 담합이익을 챙기고 있는가?

통신비 인하 대책이 발표되며 또다시 통신시장이 이슈다. 한국 통신시장은 과점시장이 맞지만, 망투자 부담을 생각하면 ‘자연과점’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담합은?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훑어보니 마케팅비가 높은 반면 영업이익률은 높다고 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점을 담합의 부재증거로 꼽는 것 같다. 또다른 증거로 상호접속료interconnection charge 고시제가 있다.

상호접속료란 서로 다른 통신사 간 착신 서비스를 구매하는 비용이다. 예를 들어 KT 이용자가 SKT 이용자에게 전화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KT 이용자 → KT 네트워크 → SKT 네트워크 → SKT 이용자.

의 흐름이 발생한다. 여기서 두 번째 화살표의 망접근비용이 접속료다. 첫 번째, 세 번째 화살표는 물론 소매가격.

산업조직론 연구자들은 상호접속료를 통신시장에서 가장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담합 & 후발주자 배제 수단(collusion & market foreclosure device)으로 지목한다. 왜일까?

우선 상대방이 내 망에 접근하는 비용을 높이면 1) 착신 수익이 증가하고 2) 경쟁사업자 비용이 높아진다. 이 때 상호접속료라는 비용을 근거로 소매가격을 산정한다면, 높은 접속료를 ‘핑계 삼아’ 소매가격을 높게 유지하며 경쟁을 회피할 수 있다.

요금제 설정방식이나 통신사 규모, 상호 통화량 격차 등에 따라 이론적 분석 결과가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상호접속료를 기업 간 완전 자유 협상에 맡기면, 담합까지 가지 않더라도 1) 상호접속료가 높아질 가능성이 크고 2) 높은 상호접속료는 소매요금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상호접속료는 통신시장 경쟁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의 통신사 상호접속료는 정부가 고시한다. 게다가 작년까지 후발주자(LGT) 보호를 위해 통신사 간 비대칭 접속료 정책을 유지했다. 이는 노벨상 수상자 장 티롤을 위시한 산업조직 이론가들의 경쟁정책 연구성과를 철저히 따르는 것이다. 더하여 요금인가제도 운영되고 있다. 요금인가제와 상호접속료 고시제가 동시에 작동하는 시장에서 담합이나 진입저지 등 반경쟁적 행태가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한국 통신시장의 최대 문제점은 사실상 모든 소비자가 단말기-요금제를 동시에 구매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는 적어도 경쟁에 관한 문제는 없다고 본다. 국가 규모 상 MVNO 외에 여기서 더 나아질 방법도 거의 없을 테다. 외국 통신사 진출 허용으로 경쟁을 촉진한다? 경쟁은 충분하다. 그리고 망 투자가 통신산업의 기본이라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다음의 선구적 연구를 참조하라.

Laffont, Rey,& Tirole (1998). Network competition: I & II. RAND Journal of Economics.
___ (1997). Competition between telecommunications operators, European Economic Review.
___ (1998). Creating competition through interconnection: Theory and practice, Journal of Regulatory Economics.
Armstrong (1998). Network interconnection in telecommunications. The Economic Journal.

우리에게 조상은 누구인가? (Eunhee Kim)

페이스북 원문 링크


요즘 상고사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일련의 역사논쟁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논쟁의 근저에 있는 ‘조상’이라는 문화적 개념이다. 우리 모두 단군이라는 뛰어난 인물의 후손이어서 ‘ 남남’이 아니라 ‘한 핏줄’이며 한 때 북방을 정복했던 ‘우수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한민족의 기원’이나 비슷한 ‘유사역사학’의 고대사를 향한 열정 밑에 깔려 있다. 또한 지금의 영호남 사람들이 천오백년 쯤 전에 번성했다고 추정되는 가야 왕국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후손들이라는 전제 하에 가야사의 복원은 국가가 주도해야 할 학술연구가 되었다. 가양왕국을 만든 훌륭한 조상의 자손들인데 지금 싸우며 살아야 하겠는가?

자고로 한국 사회에서 조상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극도로 중요했으며 아직도 그러하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조상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기록하는족보의 발간이 성행했고 조선이 망한 후에도 인쇄술과 통신, 교통이 발달하면서 족보발간은 오히려 급증했다. 일상생활에서도 본관을 밝히는 관습은 한국사회에서 조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본관은 수 백 년 전에 혹은 천년도 훨씬 전에 살았다고 하는 먼 조상의 본적지가 있는 행정구역의 이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고 가까운 조상이 살았던 곳도 아니다. 그럼에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본관을 알고 있고 호적제도가 폐지된 후에 등장한 가족관계 기록부에도 본관을 기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와 본관이 같은 동성동본이라는 것은 그 사람도 까마득히 오래 전에 살았던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얼마 전까지도 동성동본 간의 결혼은 마치 근친상간이나 가까운 혈족 간의 결혼처럼 법으로 금지되었고 도덕적으로도 터부시되었다.

역사학자 송준호는 “조선사회사 연구” 에서 본관제도처럼 적게는 몇 백 년 길게는 천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먼 조상의 후손임을 확인해주는 제도는 전 세계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 조선시대 후기이래 한국에만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고려시대에 본관은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곳, 즉 본적과 같았으며 왕실에서조차 동성동본불혼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가계기록이었던 ‘팔고조도’는 ‘나’를 기점으로 하여 친가와 외가의 조상들을 고조부까지만 기록하였다. 고조의 대에서 모두 16명의 조상이 존재하게 되는데 고조할머니들은 빼고 고조할아버지만 8명이 되기에 ‘팔고조도’라고 불렀다.

동북아의 유교적 문화권에 속한 중국이나 일본에도 우리나라처럼 본관을 따지는 습속은 없다. 대규모 부계친족집단이 존재했던 중국에서도 본관은 송 대 이후로 조상 대대로 살았던 본적지를 가리키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될 때는 본관을 바꿨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아주 가까운 조상이 같아도 사는 지역이 다르면 본관이 다를 수 있다.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지역에서 대대로 눌러 살게 되면 각각 독립된 씨족집단을 이루게 된다. 중국식이라면 남원에서 몇 백년 살아온 전주 이씨들은 아마도 남원 이씨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후손들이 조상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몇 백 년을 살아도 자신들의 출신을 말할 때 몇 백년 전의 조상들이 살았던 행정구역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 조상들의 후손임을 밝혔다. 그래서 동성동본인 사람들은 일정한 지역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살았다.

아득히 먼 부계 조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사대부 계층에서 시작되었다. (문옥표&김광억의 “조선양반의 생활세계” 참조). 유학자들은 각 집안에 내려오는 여러가지 가계기록들, 호적, 묘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등을 수집하여 보통 사오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 자신들의 부계 시조를 추적하는 ‘조상찾기’ 사업을 전개하였고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동성동본 전체 혹은 그 분파의 족보를 편찬하고 간행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주요 족보에서 계보가 비교적 확실한 실질적인 시조(중시조)는 언제나 고려시대에 중앙의 관계에 진출해 크게 성공하여 가문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시조와 명목상의 시조 사이에는 정확한 계보를 알 수 없어 여러 세대가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뛰어난 조상을 중시조로 내세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슷하게 동성동본 집단이 분파되어가는 과정에서도 높은 관직에 올랐거나 뛰어난 유학자로 이름을 날린 인물의 직계 후손들은 독립된 ‘파’ 를 형성하였고 이 ‘파’를 흔히 문중 혹은 종중이라고 불렀다.

동성동본집단이 가문의 이름을 빛낸 명망있는 인물 중심으로 분파되어가는 과정은 중국의 친족집단이 공동재산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분파되어가는 과정과 대조적이다. 본관의 개념이 없는 중국에서는 언제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지역에 처음으로 이주하여 후손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준 입향조가 시조로 받들어진다. 공동재산(corporate property)으로 조묘(신위를 모시는 사당)를 짓고 공동재산의 수익금으로 기제사를 지내며 남는 돈은 자손들이 나누어 갖는다. 입향조보다 앞선 세대의 조상들에 대해선 아무 관심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개의 자손’이라는 개념도 없다. 입향조의 한 후손이 많은 공동재산을 남기게 되면 그 후손의 직계 자손들은 분리되어 나간다.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재산을 남기지 못해도 명망높은 사람의 후손들은 지역사회에서 특별히 더 존경받고 대우받게 되면서 자연히 방계 후손들로부터 구분이 되어 ‘파’가 형성된다. 이렇게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과 지위가 거의 ‘조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일반 교양인들이 ‘한민족의 기원’이나 ‘단군시대’의 연구에 전폭적인 관심을 갖는 것은 16세기, 17세기 유학자들의 조상찾기와 비슷하다. 부계 친족집단이 ‘한민족’으로 확대된 것 만이 다르다. 그들은 1000년, 1500년 이상을 한반도에서 기반을 닦아온 우리들의 입향조가 아니라 한반도로 이주해 들어오기 훨씬 전, 아니 몇 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북방의 광할한 영토를 종횡무진했던 ‘우수한’ 한민족의 조상들을 찾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당신의 부모는 몇 분인가? 두 분이다. 조부모는 몇 분인가? 네 분이다. 증조부모는? 여덟 분이다. 이렇게 세대를 거듭해 올라갈수록 우리의 생물학적 조상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는 어느 한 개인은 수없이 많은 조상들의 자손이라는 것을 뜻한다. 나보다 20대 위의 조상의 숫자는 104만 8576명이다. 이 중 겹치는 조상들도 있을 것이다. 이를 감안해도 수많은 조상들이 있는 것은 변함없다. 그런데 이 생물학적 현상에 문화가 개입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초기에는 팔고조도에서 볼 수 있듯이 위로 올라갈수록 조상의 숫자가 많아지니까 편의를 위해서 위로 4대 고조할아버지 대까지만 조상으로 인식하고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상의 개념에서는 조상은 어디까지나 개인을 중심으로 인식되며 수십대 위로 올라가며 훌륭했던 시조나 파시조를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개인을 어느 조상 한 사람의 후손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계로만 조상을 찾아 올라갈 때 아무리 많은 세대를 올라가도 부계 조상 한 사람 만이 인지될 뿐이다. 개인은 ‘우암 자손’ 처럼 ‘아무개의 자손’ 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부계 조상 한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사람이라 해도 그가 몇 십 만 명의 생물학적 조상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인식된다면 그의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은 없어진다. 가령 덕수 이씨 중에서 지금 살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후손에게 이순신은 그저 그를 낳아준 수 십만 명의 조상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 수많은 조상 중에는 잘난 사람 못지 않게 못난 사람 또한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몇 천년 전에 한반도 위의 북방을 호령했던 사람들이 21세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반만년전에 살았던 수없이 많은 우리의 생물학적 조상들이 중앙아시아와 몽골 뿐만 아니라 동남아에도, 중국에도, 일본에도 살고 있었을 것임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그 조상들은 지금의 한국 말고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일 확률도 크다. 한마디로 말해 몇 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민족의 기원’이라는 연구주제 자체가 17세기 이래 조선을 지배했던 조상 중심의 문화체계 속에서 뛰어난 조상 한 사람과 그의 남계 후손들을 상정했던 조상의 개념에서 나온 발상이다. 마찬가지로 가야사의 복원 프로젝트 역시 신라와 백제에 버금간다고 하는 1500년 전의 ‘훌륭한’ 조상들의 가야왕국을 보여주고자 하는 족보적 목적의식에서 추진되고 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 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조상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학문적 가치가 충분하다. 우리가 훌륭했던 조상 만을 찾아 나설 때 한국사 연구는 항상 조상이 얼마나 지혜롭고 훌륭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족보적 역사연구가 확대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 몇 백년 전 몇 천년 전 조상이 훌륭하다고 해서 우쭐할 것도 없으며 조상이 못났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 조상중심사회에서 탈피하여 과거지향적 조상의 관념에서 벗어나 현재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학은 현상유지편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아니다 (조석주)

페이스북 원문 링크

이 글을 내가 썼더라면, 싶은 글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제목은 내가 붙인 것이다.

“경제학은 그렇게 협소하지 않다.”


1. 제도적 관점에서 볼 때, 시장은 소유권을 정의하고 보장한 후, 자발적 교환을 통해 자원을 배분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2. 세상에 시장 메커니즘으로 모든 재화의 배분이 이루어지는 경제는 없다. 일례로, 미국에서 신종 플루가 유행해서 사망자들이 발생하는데 막 백신이 생산되면, 그걸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파는 식으로 공급하지 않는다. 그 독감이 걸렸을 때, 사망확률이 높은 예컨대 임산부, 노인, 어린이 등에 우선적으로 접종을 한다. ‘필요에 의한 분배’라는 소위 ‘공산주의’적 방식도 자본주의가 크게 발달한 국가의 자원배분 방식에 섞여있다.

3. 현실의 법, 제도하의 정치경제적 과정에서 어떠한 배분과 분배가 일어나게 되는가하는 문제와 그러한 분배가 그 공동체 성원들의 윤리적 관념에 부합하는지 특히 정의로운 분배인가 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다. 독감백신이 임산부, 노인, 어린이에게 먼저 분배되는 방식이 과연 정당한가를 물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시장메커니즘에 의해 배분되고 있는 영역도 그 결과와 과정의 정당성을 물을 수 있다.

4. ‘자본주의 사회니까 당연하다’는 말은 별로다. 첫째, 자본주의라고 해서 시장메커니즘에 의한 배분만 있는게 아니다. 둘째, ‘시장에 의한 배분’ 자체도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소유권을 공동체에서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따라 배분의 결과가 다 다르다. 셋째,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자체도 선택의 산물이지 항구불변의 상수가 아니다.

5. 내가 미시경제학을 가르치며,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경제학적 사고방법의 유용성을 알리는 것이다. 여기서 경제학적 사고방법이란, 개인들의 인센티브와 선택의 총체적 결과로 자원의 배분을 설명함과 동시에, 여러 경제의 과정을 사회전체에서 자원이 배분되고 희소한 가치가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방식의 ‘하나’로 바라보고 그 결과를 궁극적으로 사람 개인들의 행복과 불행의 척도로 평가하는 방법을 말한다. 내 미시경제학 수업의 많은 부분은 가격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에 관한 것이고, 또한 시장 메카니즘에 의한 배분이 갖는 고유의 장점을 강조해서 가르친다. 하지만, 학생들이 더 큰 틀에서 자원배분의 방식을 이해하고, 정당하고 실현가능한 배분의 방식들을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스스로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내 능력껏 노력을 한다.

6. ‘전기는 상품인데, 상품은 많이 사면 깎아는 줘도 가격을 올리는 법은 없으니 전기요금 누진제는 잘못되었다’는 주장. ‘토지와 건물의 소유자가 얻는 임대소득이 임대관리로 고용된 노동자의 임금 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높지 않느냐는 문제제기에, 자본주의니까 자본의 기회비용만큼 얻는게 당연하지 무슨 노동가치론이냐’는 응답

이런 말들의 맞고 틀림과 별도로, 이런게 마치 당연히 ‘경제학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경제학은 그렇게 협소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