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상고사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일련의 역사논쟁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논쟁의 근저에 있는 ‘조상’이라는 문화적 개념이다. 우리 모두 단군이라는 뛰어난 인물의 후손이어서 ‘ 남남’이 아니라 ‘한 핏줄’이며 한 때 북방을 정복했던 ‘우수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한민족의 기원’이나 비슷한 ‘유사역사학’의 고대사를 향한 열정 밑에 깔려 있다. 또한 지금의 영호남 사람들이 천오백년 쯤 전에 번성했다고 추정되는 가야 왕국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후손들이라는 전제 하에 가야사의 복원은 국가가 주도해야 할 학술연구가 되었다. 가양왕국을 만든 훌륭한 조상의 자손들인데 지금 싸우며 살아야 하겠는가?
자고로 한국 사회에서 조상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극도로 중요했으며 아직도 그러하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조상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기록하는족보의 발간이 성행했고 조선이 망한 후에도 인쇄술과 통신, 교통이 발달하면서 족보발간은 오히려 급증했다. 일상생활에서도 본관을 밝히는 관습은 한국사회에서 조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본관은 수 백 년 전에 혹은 천년도 훨씬 전에 살았다고 하는 먼 조상의 본적지가 있는 행정구역의 이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고 가까운 조상이 살았던 곳도 아니다. 그럼에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본관을 알고 있고 호적제도가 폐지된 후에 등장한 가족관계 기록부에도 본관을 기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와 본관이 같은 동성동본이라는 것은 그 사람도 까마득히 오래 전에 살았던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얼마 전까지도 동성동본 간의 결혼은 마치 근친상간이나 가까운 혈족 간의 결혼처럼 법으로 금지되었고 도덕적으로도 터부시되었다.
역사학자 송준호는 “조선사회사 연구” 에서 본관제도처럼 적게는 몇 백 년 길게는 천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먼 조상의 후손임을 확인해주는 제도는 전 세계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 조선시대 후기이래 한국에만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고려시대에 본관은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곳, 즉 본적과 같았으며 왕실에서조차 동성동본불혼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가계기록이었던 ‘팔고조도’는 ‘나’를 기점으로 하여 친가와 외가의 조상들을 고조부까지만 기록하였다. 고조의 대에서 모두 16명의 조상이 존재하게 되는데 고조할머니들은 빼고 고조할아버지만 8명이 되기에 ‘팔고조도’라고 불렀다.
동북아의 유교적 문화권에 속한 중국이나 일본에도 우리나라처럼 본관을 따지는 습속은 없다. 대규모 부계친족집단이 존재했던 중국에서도 본관은 송 대 이후로 조상 대대로 살았던 본적지를 가리키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될 때는 본관을 바꿨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아주 가까운 조상이 같아도 사는 지역이 다르면 본관이 다를 수 있다.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지역에서 대대로 눌러 살게 되면 각각 독립된 씨족집단을 이루게 된다. 중국식이라면 남원에서 몇 백년 살아온 전주 이씨들은 아마도 남원 이씨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후손들이 조상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몇 백 년을 살아도 자신들의 출신을 말할 때 몇 백년 전의 조상들이 살았던 행정구역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 조상들의 후손임을 밝혔다. 그래서 동성동본인 사람들은 일정한 지역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살았다.
아득히 먼 부계 조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사대부 계층에서 시작되었다. (문옥표&김광억의 “조선양반의 생활세계” 참조). 유학자들은 각 집안에 내려오는 여러가지 가계기록들, 호적, 묘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등을 수집하여 보통 사오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 자신들의 부계 시조를 추적하는 ‘조상찾기’ 사업을 전개하였고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동성동본 전체 혹은 그 분파의 족보를 편찬하고 간행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주요 족보에서 계보가 비교적 확실한 실질적인 시조(중시조)는 언제나 고려시대에 중앙의 관계에 진출해 크게 성공하여 가문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시조와 명목상의 시조 사이에는 정확한 계보를 알 수 없어 여러 세대가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뛰어난 조상을 중시조로 내세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슷하게 동성동본 집단이 분파되어가는 과정에서도 높은 관직에 올랐거나 뛰어난 유학자로 이름을 날린 인물의 직계 후손들은 독립된 ‘파’ 를 형성하였고 이 ‘파’를 흔히 문중 혹은 종중이라고 불렀다.
동성동본집단이 가문의 이름을 빛낸 명망있는 인물 중심으로 분파되어가는 과정은 중국의 친족집단이 공동재산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분파되어가는 과정과 대조적이다. 본관의 개념이 없는 중국에서는 언제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지역에 처음으로 이주하여 후손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준 입향조가 시조로 받들어진다. 공동재산(corporate property)으로 조묘(신위를 모시는 사당)를 짓고 공동재산의 수익금으로 기제사를 지내며 남는 돈은 자손들이 나누어 갖는다. 입향조보다 앞선 세대의 조상들에 대해선 아무 관심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개의 자손’이라는 개념도 없다. 입향조의 한 후손이 많은 공동재산을 남기게 되면 그 후손의 직계 자손들은 분리되어 나간다.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재산을 남기지 못해도 명망높은 사람의 후손들은 지역사회에서 특별히 더 존경받고 대우받게 되면서 자연히 방계 후손들로부터 구분이 되어 ‘파’가 형성된다. 이렇게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과 지위가 거의 ‘조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일반 교양인들이 ‘한민족의 기원’이나 ‘단군시대’의 연구에 전폭적인 관심을 갖는 것은 16세기, 17세기 유학자들의 조상찾기와 비슷하다. 부계 친족집단이 ‘한민족’으로 확대된 것 만이 다르다. 그들은 1000년, 1500년 이상을 한반도에서 기반을 닦아온 우리들의 입향조가 아니라 한반도로 이주해 들어오기 훨씬 전, 아니 몇 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북방의 광할한 영토를 종횡무진했던 ‘우수한’ 한민족의 조상들을 찾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당신의 부모는 몇 분인가? 두 분이다. 조부모는 몇 분인가? 네 분이다. 증조부모는? 여덟 분이다. 이렇게 세대를 거듭해 올라갈수록 우리의 생물학적 조상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는 어느 한 개인은 수없이 많은 조상들의 자손이라는 것을 뜻한다. 나보다 20대 위의 조상의 숫자는 104만 8576명이다. 이 중 겹치는 조상들도 있을 것이다. 이를 감안해도 수많은 조상들이 있는 것은 변함없다. 그런데 이 생물학적 현상에 문화가 개입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초기에는 팔고조도에서 볼 수 있듯이 위로 올라갈수록 조상의 숫자가 많아지니까 편의를 위해서 위로 4대 고조할아버지 대까지만 조상으로 인식하고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상의 개념에서는 조상은 어디까지나 개인을 중심으로 인식되며 수십대 위로 올라가며 훌륭했던 시조나 파시조를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개인을 어느 조상 한 사람의 후손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계로만 조상을 찾아 올라갈 때 아무리 많은 세대를 올라가도 부계 조상 한 사람 만이 인지될 뿐이다. 개인은 ‘우암 자손’ 처럼 ‘아무개의 자손’ 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부계 조상 한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사람이라 해도 그가 몇 십 만 명의 생물학적 조상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인식된다면 그의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은 없어진다. 가령 덕수 이씨 중에서 지금 살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후손에게 이순신은 그저 그를 낳아준 수 십만 명의 조상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 수많은 조상 중에는 잘난 사람 못지 않게 못난 사람 또한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몇 천년 전에 한반도 위의 북방을 호령했던 사람들이 21세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반만년전에 살았던 수없이 많은 우리의 생물학적 조상들이 중앙아시아와 몽골 뿐만 아니라 동남아에도, 중국에도, 일본에도 살고 있었을 것임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그 조상들은 지금의 한국 말고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일 확률도 크다. 한마디로 말해 몇 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민족의 기원’이라는 연구주제 자체가 17세기 이래 조선을 지배했던 조상 중심의 문화체계 속에서 뛰어난 조상 한 사람과 그의 남계 후손들을 상정했던 조상의 개념에서 나온 발상이다. 마찬가지로 가야사의 복원 프로젝트 역시 신라와 백제에 버금간다고 하는 1500년 전의 ‘훌륭한’ 조상들의 가야왕국을 보여주고자 하는 족보적 목적의식에서 추진되고 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 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조상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학문적 가치가 충분하다. 우리가 훌륭했던 조상 만을 찾아 나설 때 한국사 연구는 항상 조상이 얼마나 지혜롭고 훌륭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족보적 역사연구가 확대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 몇 백년 전 몇 천년 전 조상이 훌륭하다고 해서 우쭐할 것도 없으며 조상이 못났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 조상중심사회에서 탈피하여 과거지향적 조상의 관념에서 벗어나 현재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