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조상은 누구인가? (Eunhee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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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상고사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일련의 역사논쟁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논쟁의 근저에 있는 ‘조상’이라는 문화적 개념이다. 우리 모두 단군이라는 뛰어난 인물의 후손이어서 ‘ 남남’이 아니라 ‘한 핏줄’이며 한 때 북방을 정복했던 ‘우수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한민족의 기원’이나 비슷한 ‘유사역사학’의 고대사를 향한 열정 밑에 깔려 있다. 또한 지금의 영호남 사람들이 천오백년 쯤 전에 번성했다고 추정되는 가야 왕국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후손들이라는 전제 하에 가야사의 복원은 국가가 주도해야 할 학술연구가 되었다. 가양왕국을 만든 훌륭한 조상의 자손들인데 지금 싸우며 살아야 하겠는가?

자고로 한국 사회에서 조상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극도로 중요했으며 아직도 그러하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조상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기록하는족보의 발간이 성행했고 조선이 망한 후에도 인쇄술과 통신, 교통이 발달하면서 족보발간은 오히려 급증했다. 일상생활에서도 본관을 밝히는 관습은 한국사회에서 조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본관은 수 백 년 전에 혹은 천년도 훨씬 전에 살았다고 하는 먼 조상의 본적지가 있는 행정구역의 이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고 가까운 조상이 살았던 곳도 아니다. 그럼에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본관을 알고 있고 호적제도가 폐지된 후에 등장한 가족관계 기록부에도 본관을 기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와 본관이 같은 동성동본이라는 것은 그 사람도 까마득히 오래 전에 살았던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얼마 전까지도 동성동본 간의 결혼은 마치 근친상간이나 가까운 혈족 간의 결혼처럼 법으로 금지되었고 도덕적으로도 터부시되었다.

역사학자 송준호는 “조선사회사 연구” 에서 본관제도처럼 적게는 몇 백 년 길게는 천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먼 조상의 후손임을 확인해주는 제도는 전 세계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 조선시대 후기이래 한국에만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고려시대에 본관은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곳, 즉 본적과 같았으며 왕실에서조차 동성동본불혼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가계기록이었던 ‘팔고조도’는 ‘나’를 기점으로 하여 친가와 외가의 조상들을 고조부까지만 기록하였다. 고조의 대에서 모두 16명의 조상이 존재하게 되는데 고조할머니들은 빼고 고조할아버지만 8명이 되기에 ‘팔고조도’라고 불렀다.

동북아의 유교적 문화권에 속한 중국이나 일본에도 우리나라처럼 본관을 따지는 습속은 없다. 대규모 부계친족집단이 존재했던 중국에서도 본관은 송 대 이후로 조상 대대로 살았던 본적지를 가리키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될 때는 본관을 바꿨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아주 가까운 조상이 같아도 사는 지역이 다르면 본관이 다를 수 있다.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지역에서 대대로 눌러 살게 되면 각각 독립된 씨족집단을 이루게 된다. 중국식이라면 남원에서 몇 백년 살아온 전주 이씨들은 아마도 남원 이씨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후손들이 조상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몇 백 년을 살아도 자신들의 출신을 말할 때 몇 백년 전의 조상들이 살았던 행정구역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 조상들의 후손임을 밝혔다. 그래서 동성동본인 사람들은 일정한 지역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살았다.

아득히 먼 부계 조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사대부 계층에서 시작되었다. (문옥표&김광억의 “조선양반의 생활세계” 참조). 유학자들은 각 집안에 내려오는 여러가지 가계기록들, 호적, 묘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등을 수집하여 보통 사오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 자신들의 부계 시조를 추적하는 ‘조상찾기’ 사업을 전개하였고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동성동본 전체 혹은 그 분파의 족보를 편찬하고 간행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주요 족보에서 계보가 비교적 확실한 실질적인 시조(중시조)는 언제나 고려시대에 중앙의 관계에 진출해 크게 성공하여 가문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시조와 명목상의 시조 사이에는 정확한 계보를 알 수 없어 여러 세대가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뛰어난 조상을 중시조로 내세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슷하게 동성동본 집단이 분파되어가는 과정에서도 높은 관직에 올랐거나 뛰어난 유학자로 이름을 날린 인물의 직계 후손들은 독립된 ‘파’ 를 형성하였고 이 ‘파’를 흔히 문중 혹은 종중이라고 불렀다.

동성동본집단이 가문의 이름을 빛낸 명망있는 인물 중심으로 분파되어가는 과정은 중국의 친족집단이 공동재산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분파되어가는 과정과 대조적이다. 본관의 개념이 없는 중국에서는 언제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지역에 처음으로 이주하여 후손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준 입향조가 시조로 받들어진다. 공동재산(corporate property)으로 조묘(신위를 모시는 사당)를 짓고 공동재산의 수익금으로 기제사를 지내며 남는 돈은 자손들이 나누어 갖는다. 입향조보다 앞선 세대의 조상들에 대해선 아무 관심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개의 자손’이라는 개념도 없다. 입향조의 한 후손이 많은 공동재산을 남기게 되면 그 후손의 직계 자손들은 분리되어 나간다.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재산을 남기지 못해도 명망높은 사람의 후손들은 지역사회에서 특별히 더 존경받고 대우받게 되면서 자연히 방계 후손들로부터 구분이 되어 ‘파’가 형성된다. 이렇게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과 지위가 거의 ‘조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일반 교양인들이 ‘한민족의 기원’이나 ‘단군시대’의 연구에 전폭적인 관심을 갖는 것은 16세기, 17세기 유학자들의 조상찾기와 비슷하다. 부계 친족집단이 ‘한민족’으로 확대된 것 만이 다르다. 그들은 1000년, 1500년 이상을 한반도에서 기반을 닦아온 우리들의 입향조가 아니라 한반도로 이주해 들어오기 훨씬 전, 아니 몇 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북방의 광할한 영토를 종횡무진했던 ‘우수한’ 한민족의 조상들을 찾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당신의 부모는 몇 분인가? 두 분이다. 조부모는 몇 분인가? 네 분이다. 증조부모는? 여덟 분이다. 이렇게 세대를 거듭해 올라갈수록 우리의 생물학적 조상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는 어느 한 개인은 수없이 많은 조상들의 자손이라는 것을 뜻한다. 나보다 20대 위의 조상의 숫자는 104만 8576명이다. 이 중 겹치는 조상들도 있을 것이다. 이를 감안해도 수많은 조상들이 있는 것은 변함없다. 그런데 이 생물학적 현상에 문화가 개입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초기에는 팔고조도에서 볼 수 있듯이 위로 올라갈수록 조상의 숫자가 많아지니까 편의를 위해서 위로 4대 고조할아버지 대까지만 조상으로 인식하고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상의 개념에서는 조상은 어디까지나 개인을 중심으로 인식되며 수십대 위로 올라가며 훌륭했던 시조나 파시조를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개인을 어느 조상 한 사람의 후손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계로만 조상을 찾아 올라갈 때 아무리 많은 세대를 올라가도 부계 조상 한 사람 만이 인지될 뿐이다. 개인은 ‘우암 자손’ 처럼 ‘아무개의 자손’ 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부계 조상 한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사람이라 해도 그가 몇 십 만 명의 생물학적 조상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인식된다면 그의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은 없어진다. 가령 덕수 이씨 중에서 지금 살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후손에게 이순신은 그저 그를 낳아준 수 십만 명의 조상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 수많은 조상 중에는 잘난 사람 못지 않게 못난 사람 또한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몇 천년 전에 한반도 위의 북방을 호령했던 사람들이 21세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반만년전에 살았던 수없이 많은 우리의 생물학적 조상들이 중앙아시아와 몽골 뿐만 아니라 동남아에도, 중국에도, 일본에도 살고 있었을 것임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그 조상들은 지금의 한국 말고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일 확률도 크다. 한마디로 말해 몇 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민족의 기원’이라는 연구주제 자체가 17세기 이래 조선을 지배했던 조상 중심의 문화체계 속에서 뛰어난 조상 한 사람과 그의 남계 후손들을 상정했던 조상의 개념에서 나온 발상이다. 마찬가지로 가야사의 복원 프로젝트 역시 신라와 백제에 버금간다고 하는 1500년 전의 ‘훌륭한’ 조상들의 가야왕국을 보여주고자 하는 족보적 목적의식에서 추진되고 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 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조상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학문적 가치가 충분하다. 우리가 훌륭했던 조상 만을 찾아 나설 때 한국사 연구는 항상 조상이 얼마나 지혜롭고 훌륭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족보적 역사연구가 확대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 몇 백년 전 몇 천년 전 조상이 훌륭하다고 해서 우쭐할 것도 없으며 조상이 못났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 조상중심사회에서 탈피하여 과거지향적 조상의 관념에서 벗어나 현재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학은 현상유지편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아니다 (조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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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내가 썼더라면, 싶은 글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제목은 내가 붙인 것이다.

“경제학은 그렇게 협소하지 않다.”


1. 제도적 관점에서 볼 때, 시장은 소유권을 정의하고 보장한 후, 자발적 교환을 통해 자원을 배분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2. 세상에 시장 메커니즘으로 모든 재화의 배분이 이루어지는 경제는 없다. 일례로, 미국에서 신종 플루가 유행해서 사망자들이 발생하는데 막 백신이 생산되면, 그걸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파는 식으로 공급하지 않는다. 그 독감이 걸렸을 때, 사망확률이 높은 예컨대 임산부, 노인, 어린이 등에 우선적으로 접종을 한다. ‘필요에 의한 분배’라는 소위 ‘공산주의’적 방식도 자본주의가 크게 발달한 국가의 자원배분 방식에 섞여있다.

3. 현실의 법, 제도하의 정치경제적 과정에서 어떠한 배분과 분배가 일어나게 되는가하는 문제와 그러한 분배가 그 공동체 성원들의 윤리적 관념에 부합하는지 특히 정의로운 분배인가 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다. 독감백신이 임산부, 노인, 어린이에게 먼저 분배되는 방식이 과연 정당한가를 물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시장메커니즘에 의해 배분되고 있는 영역도 그 결과와 과정의 정당성을 물을 수 있다.

4. ‘자본주의 사회니까 당연하다’는 말은 별로다. 첫째, 자본주의라고 해서 시장메커니즘에 의한 배분만 있는게 아니다. 둘째, ‘시장에 의한 배분’ 자체도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소유권을 공동체에서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따라 배분의 결과가 다 다르다. 셋째,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자체도 선택의 산물이지 항구불변의 상수가 아니다.

5. 내가 미시경제학을 가르치며,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경제학적 사고방법의 유용성을 알리는 것이다. 여기서 경제학적 사고방법이란, 개인들의 인센티브와 선택의 총체적 결과로 자원의 배분을 설명함과 동시에, 여러 경제의 과정을 사회전체에서 자원이 배분되고 희소한 가치가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방식의 ‘하나’로 바라보고 그 결과를 궁극적으로 사람 개인들의 행복과 불행의 척도로 평가하는 방법을 말한다. 내 미시경제학 수업의 많은 부분은 가격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에 관한 것이고, 또한 시장 메카니즘에 의한 배분이 갖는 고유의 장점을 강조해서 가르친다. 하지만, 학생들이 더 큰 틀에서 자원배분의 방식을 이해하고, 정당하고 실현가능한 배분의 방식들을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스스로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내 능력껏 노력을 한다.

6. ‘전기는 상품인데, 상품은 많이 사면 깎아는 줘도 가격을 올리는 법은 없으니 전기요금 누진제는 잘못되었다’는 주장. ‘토지와 건물의 소유자가 얻는 임대소득이 임대관리로 고용된 노동자의 임금 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높지 않느냐는 문제제기에, 자본주의니까 자본의 기회비용만큼 얻는게 당연하지 무슨 노동가치론이냐’는 응답

이런 말들의 맞고 틀림과 별도로, 이런게 마치 당연히 ‘경제학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경제학은 그렇게 협소하지 않다.

한국의 R&D 생산성이 낮은 이유 (강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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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연구개발(R&D)은 생산성이 낮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말 그럴까? 내 생각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우리 R&D는 혁신적인 성과를 내는데 실패하고 있다. 이유는 뭘까?

우리 연구개발이 혁신적인 결과를 내는데 실패한 이유는 혁신적인 연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 개풀 뜯어 먹는 이야기냐고? 우리 R&D 주제들을 보면,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 결과가 나온 주제들의 재탕들이 대부분이다. 처음부터 혁신적인 주제에 도전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혁신적인 결과가 나오겠는가? 처음부터 등산의 목표를 에베레스트산으로 하지 않고, 백두산이나 한라산으로 잡고는, 세계적인 등산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의 연구자들은 왜 혁신적인 주제들에 도전하지 않는가? 천성이 게을러서? 노오오력을 안하는 헬조선 인민들의 특성때문에? 난 기본적으로 노오오력 드립치는 인간들은 다 싹 모아서 국외추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대륙이라도 발견되면, 노오오력 드립치는 인간들을 보내, 자기들끼리의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주고 싶다. 그러면 거기서도 서로서로 노오오력 드립치고 있을 듯 하기는 하다만.

우리가 혁신적인 주제에 도전하지 않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거나, 생각보다 복잡하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우리 연구개발에 대한 평가가 보상보다는, 체벌 위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혹독한 체벌 위주로. 우리 연구개발에서 가장 확실하게 보장되고 지켜지는 원칙이 하나 있다. 그건 다음과 같다.

“당신이 국가연구개발에 실패하면 당신은 x된다는 것이다.” x되는 정도는 다르지만, 이건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연구팀원, 그리고 당신에게 펀딩한 전담기관과 담당부처 공무원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건 연구개발 규모가 크건 작던 상관이 없다.

연구개발은 (1) 연구개발 주제를 선정하고(기획단계), (2) 연구를 수행할 주체를 선정하고(선정평가), (3) 연구를 수행해서 결과를 산출하고, (4) 이를 평가하는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제부터 우리가 왜 혁신적인 연구에 실패하는 지 단계별로 살펴보자. 먼저 (1)의 단계에서 혁신적인 주제가 선정되지 않는다. 왜나고? 이 단계에서 주도를 하는 주체는, 정부부처 공무원과 전담기관 담당자, 그리고 기획위원으로 추천된 전문가들이다. 요즘은 전담기관에 기간제로 고용된 PD, MD, 단장들이 포함된다. 이 단계에서 기획자들은 결코 혁신적인 주제를 발굴하지 못한다. 혁신적인 연구개발 주제는, 실패확률이 80%이상이 되는 주제를 의미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실패하면 x되는 환경에서 혁신적인 주제를 발굴하는 건, 기획자집단이 그 많큼의 확률로 x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 연구개발 주제는 외부의 비전문가들이 보기에는 혁신적이고, 내부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별로 실패가능성이 없는 주제들만이 선정된다. 우리가 혁신적인 결과를 내 올수 없는 첫번째 이유이다.

(2)의 단계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반복된다. 하나의 연구개발 주제에 대하여 대략 3~4팀이 도전한다. 이중에서 비록 혁신적인 주제가 아니지만, 그래도 혁신적인 방법으로 도전하는 팀이 있다. 당신이 선정평가를 하는 주체라고 생각해 보자. 결코 이 팀을 뽑지 않는다. 왜나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혁신성은 태생적으로 그만큼의 높은 실패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니 혁신적인 연구개발 방법을 제안하는 팀은, 그만큼의 실패가능성이 높은 팀이다. 이런 팀 뽑았을 경우에는 당신도 실패에 대해 연대책임을 져야 될 가능성이 크다. 당신같으면 이런 팀을 뽑겠나?

자 이제 (3)의 단계를 살펴보자. 당신이 연구개발 책임자다. 당신은 원래부터 혁신적인 사람이라서, (1)과 (2)의 과정에서 비록 덜 혁신적인 주제와, 당신이 제출한 아주 안전한 방법의 계획서를 무시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지금까지는 훼이크다 이 xx들아. 이제부터는 내 꼴리는대로 연구개발 함 해볼거다.”라고 할 수 있을까? 전혀 불가능하다. 우리 연구개발을 감독하는 전담기관들(연구재단, KEIT, 등등)은 그렇게 핫바지들이 아니다. 연구계획서에 포함되지 않은 장비는 절대 사면안되고, 새로운 세부연구주제도 결코 시작해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계획서에 없는 해외출장 같은건 절대 가면 안된다. 원래 연구개발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뭔가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불확실한 현상이 관측되거나,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보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연구개발(R&D)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모든 연구개발은 연구개발계획서에 명확하게 정의된 것만 해야 한다. 불확실한 것에 도전하기 위하여 아주 확실한 방법만을 사용해야 한다. 왜? 연구개발이 실패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연구팀만 지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담기관은 관리감독 책임을 진다. 이때 감사관은 연구방법등에 대해서는 1도 모르기때문에, 구매내역, 출장내역 등만 줄기차게 뒤진다. 뭐 그래도 해외출장건은 좀 심하다. 연구를 진행하다보면, 해외와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가 필요해진다. 근데 어떻게 처음에 계획한 해외출장만을 인정해 주는지는 참 어이가 없다.

이제 어찌어찌 (4)의 최종평가 단계에 왔다고 보자. 당신이 평가받는 항목은 어이없게도 연구결과가 아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면, 연구결과는 세계 최초나 2~3번째 연구성과로 포장되어 있다. 평가는 결과에 집중되지 않는다. 평가는 당신이 사용한 연구비에 집중된다. 연구결과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연구수행 과정에 대한 감사다. 혁신성은 꿈도 꾸지 말라. 혁신적인 것을 추구하다가는 결과도 엉망이고, 그 과정에서 이러저런 꼬투리만 쌓인다. 그리고 한번 찍히면 다시는 국가연구개발 과제와는 바이바이다.

사실, 이런 감사와 체벌위주의 시스템은 연구개발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국가원리쯤 된다. 공무원이나, 전담기관의 담당자나, 연구개발을 진행하는 연구원이나 모두 관심사는 체벌을 받지 않는 것에 있다. 왜나고? 그 체벌의 강도가 너무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엄한 부모밑에서 훈육되는 아이들과 같다. 먹는것, 입는것, 사귀는 친구, 컴퓨터게임, 읽는 책들에 대해서 일일이 감시하고 잔소리하고, 때로는 귓방망이도 올려붙이는 아주 엄격한 부모다. 이런데 자라서 피카소가 되라고? 택도 없는 이야기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 (오욱환)

교육학자의 글이지만 학문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 듯하다. 두고두고 읽을 글이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

오욱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인생은 너무나 많은 우연들이 필연적인 조건으로 작용함으로써 다양해집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전공분야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길로 접어든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을 겁니다. 전공이 같았던 동년배 학우들이 각기 다른 진로를 선택함으로써 흩어진 경험도 했을 겁니다. 같은 전공으로 함께 대학원에 진학했는데도 전공 내 하위영역에 따라, 그리고 지도교수의 성향과 영향력에 따라 상당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겁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저는 한국교육학회나 분과학회에 정회원으로 또는 준회원으로 가입한 젊은 학자들에게 학자로서의 삶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몇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합니다. 이 조언은 철칙도 아니고 금언도 아닙니다. 학자로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하우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읽기를 바랍니다. 이 조언은 제가 젊었을 때 듣고 싶었던 것들입니다. 젊은 교육학도였을 때, 저는 이러한 유형의 안내를 받지 못했습니다. 직업에 따라 상당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직업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기 때문에, 저는 직업을 생업(生業)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학문은 권력이나 재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학자로서의 성공은 학문적 업적으로만 판가름됩니다. 자신의 직업을 중시한다면, 그 직업을 소득원으로써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치로 받아들여야 맞습니다. 아래에 나열된 조언들은 제가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조언들은 제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있다”고 확신하십시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구직난을 호소하지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구인난으로 애를 태웁니다. 신임교수채용에 응모한 학자들은 채용과정의 까다로움과 편견을 비판합니다만, 공채심사위원들은 적합한 인물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공정한 선발 과정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공정하게 진행되기를 기원하면서 요구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는 데에 더 힘쓰십시오.
  • 학문에 몰입하는 학자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젊은 학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모형이 되어줄 스승, 선배, 동료, 후배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에는 따라해 보는 방법이 효율적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스타일을 갖추면 됩니다. 학문에의 오리엔테이션을 누구로부터 받느냐에 따라 학자의 유형이 상당히 좌우됩니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면, 반드시 학문에 혼신을 다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존경할 수 없는 학자들을 직면했을 경우에는, 부정적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다시 말해서, 그 사람들과 다르기 위해 노력하면 정도(正道)로 갈 수 있습니다.
  •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위대한 학자보다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그렇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모형으로 삼으십시오. 의식을 해야만 인식되는 사람은 일상적인 모형이 될 수 없습니다. 수시로 접하고 피할 수 없는 주변의 학자들 가운데에서 모형을 찾아야 합니다. 그 모형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에는, 여러분이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때, 눈을 들어 조금 더 멀리 있는 모형 학자들을 찾으십시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분이 훌륭한 학자에 가까워집니다.
  • 아직 학문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가능한 조속히 결정해야 합니다.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학문은 적당히 해서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일에 매진할 리 없고, 매진하지 않는 일이 성공할 리 없습니다. 학계에서의 업적은 창조의 결과입니다. 적당히 공부하는 것은 게으름을 연습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게으른 학자는 학문적으로 성공할 수 없으며, 학계는 지적 업적을 촉구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읽고 쓰는 일보다 더 오래 할 수 있고 더 즐거운 일을 가진 사람은 학문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읽었는데도 이해되지 않아서 속이 상하고 글쓰기로 피를 말리는 사태는 학자들에게 예사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읽고 씁니다. 이 일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일은 어렵고 힘들수록 더 가치 있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읽고 쓰는 일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그 일에 다가간다면, 학자로서 적합합니다.
  •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다면, 대인관계를 줄여야 합니다.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학문에 투입하는 시간은 다른 업무에 할당하는 시간과 영합(zero sum)관계에 있습니다. 학문을 위한 시간을 늘리려면 반드시 다른 일들을 줄여야 합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대인관계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 전화번호부가 보험설계사의 전화번호부처럼 다양하고 많은 인명들로 채워져 있다면, 학문하는 시간을 늘릴 수 없습니다. 물론 대인관계도 사회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학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학문을 직업으로 선택하면 불행해집니다.
  • 학문 외적 업무에 동원될 때에는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헌신하지는 마십시오. 젊은 학자들은 어디에서 근무하든 여러 가지 업무―흔히 잡무로 불리는 일―에 동원됩니다. 선택할 수 있을 때에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그 일을 부탁한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보다 직위가 높고 영향력이 더 큽니다. 그리고 그들은 젊은 학자들이 일하는 자세를 눈여겨봅니다. 잡무를 부탁하는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에게 평생 직업을 제공하거나 추천하거나 소개하는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기 싫지만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성실해야 합니다.
  • 시작하는 절차를 생략하십시오. 논문을 쓸 때 가장 힘든 시기는 시작할 때입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결과가 나올 리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면 될 일을 시작하는 절차에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고 길일(吉日)이나 적일(的日)을 찾다가 실기(失機)합니다. 신학기에, 방학과 함께, 이 과제가 끝나면 시작하려니까 당연히 신학기까지, 방학할 때까지, 과제가 끝날 때까지 미루게 되고 정작 그 때가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새로운 변명꺼리를 만들어 미루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답니다(성경 잠언 26:16). 논문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즉시 그리고 거침없이 많이 기록해두어야 합니다. 적기를 기다리다가는 아이디어를 놓칩니다. 사라진 아이디어는 천금을 주어도 되찾을 수 없습니다.
  • 표절은 학자에게 치명적인 오명이 됩니다. 표절은 의식적으로도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도 일어납니다. 표절에의 유혹은 게으름과 안일함에서 시작됩니다. 표절을 알고 할 때에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유리한 변명이 충분히 만들어집니다. 표절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모르고 표절할 수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발표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글쓰기에 엄격한 사람들을 가까이 해야 하고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발표된 후에 표절로 밝혀지면, 감당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 시간과 돈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도서구입에 인색하고 음주나 명품구매에 거침없다면 학자로서 문제가 있습니다. 읽을 책이 없으면 읽어야 할 이유까지도 사라집니다. 책을 구입하고 자료를 복사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면 구입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지를 따지는 것은 책을 사지 않으려는 이유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 문헌들을 읽거나 가까이 두고 보아야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 새 책을 구입했을 때나 새 논문을 복사했을 때에는 즉시 첫 장을 읽어두십시오. 그러면 책과 논문이 생경스럽지 않게 됩니다. 다음에 읽을 때에는, 시작하는 기분이 적게 들어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구입한 책과 복사한 논문을 도서관 자료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읽은 부분에 흔적을 많이 남겨두십시오.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반론이 생각나면, 그 쪽의 여백에 적어두십시오. 그것이 저자와의 토론입니다. 그 토론은 자신이 쓸 글의 쏘시개가 됩니다.
  • 학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학회의 주체로서 활동하고 손님처럼 처신하지 마십시오. 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긍정적 모형들과 부정적 모형들을 많이 접해보십시오. 좋은 발표들로 모범 사례들을 만들어가고 실망스러운 발표들을 들을 때에는 그 이유들을 분석해보십시오. 학회에 가면 학문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학회에 가면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성적 자극도 받을 수 있습니다.
  • 지도교수나 선배가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해주지 않음을 명심하십시오. 학위논문을 작성할 때 지도교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배의 조언은 학위논문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와 도움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그들에게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홀로서기가 시련이듯이, 학자로서의 독립도 어렵습니다. 은사나 선배에의 종속은 그들의 요구 때문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젊은 학자들이 스스로 안주하려는 자세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 걸작(傑作)이나 대작(大作)보다 습작(習作)에 충실하십시오. 논문을 쓰지 못하는 학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걸작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들은 다른 학자들의 논문들을 시시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찮게 평가한 논문들과 비슷한 수준의 논문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논문을 쓰는 데 엄청난 압박을 느낍니다. 걸작에 대한 소망은 학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걸작은 쉽게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걸작을 지향한 논문이라고 해서 걸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논문을 쓸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그 논문들이 쌓여지면서 걸작과 대작이 가능해질 뿐입니다.
  •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곧바로 연구업적에 대한 압박이 시작됩니다. 교수직을 구하려면 반드시 연구업적을 충분히 갖추어야 합니다. 많은 대학에서 연구보고서는 연구업적으로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저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번역서에 대한 평가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낮습니다. 번역보다 창작에 몰두하십시오. 번역은 손쉬워 보이지만 아주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생색도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역했을 경우에는 지적 능력을 크게 의심받습니다.
  • 학자가 되고 난 후에는 저서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압박도 만만치 않습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러 책을 찾을 때 다른 학자들이 쓴 책들만 보이면 상당히 우울해집니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이 교과서와 전공서를 출판할 때에는 뒤처지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학자들이 젊었을 때부터 교과서 집필을 서두릅니다. 교과서 집필은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어렵습니다. 교과서에 담길 내용은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쓸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논문과는 다르게, 교과서 집필은 다른 학자들도 알고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작업이어서 표절의 가능성도 아주 높고, 오류가 있을 경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학자로서 최소 10년은 지난 후에 교과서 집필을 고려하십시오.
  • 학회에 투고한 논문이 게재되지 않더라도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학회에서 발행되는 정기학술지에의 게재 가능성은 50퍼센트 수준입니다. 까다로운 학술지의 탈락률은 60퍼센트를 넘습니다. 그리고 학계의 초보인 여러분이 중견·원로 학자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아이디어를 짜내어 논문을 작성한 후 발송했더니 투고양식에 맞지 않는다고 퇴짜를 맞거나,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게재불가 판정을 한 심사평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신 문헌과 자료를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문외한인 심사자를 만나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게재불가를 받은 자신의 논문보다 훨씬 못한 논문들이 게재되는 난감한 경우도 겪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투고해야 합니다. 학회에 투고하기 전에 학회 편집위원회보다 더 까다로운 사람들로부터 예비 심사를 받기를 권합니다.
  • 학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학문 활동을 쉽게 생각합니다. “앉아서 책만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은 소일거리처럼 책만 보는 일이 아닙니다. 논문작성은 피를 말리는 작업입니다. 이 일을 오랫동안 해 온 저도 논문을 작성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논문은 다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글이 아닙니다. 인문사회계에는 깜짝 놀랄 일이 많지 않습니다. 논문의 주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찾아야 합니다. 논문은 새로운 것을 밝히는 작업이라는 점에 집착함으로써 낯선 분야에서 주제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 논문을 쓰려면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논문의 아이디어는 직감(hunch)에서 나올지 몰라도 논문 글쓰기는 분명히 인내를 요구하는 노역입니다. 책상에 붙어 있으려면 책상에 소일거리를 준비해 두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컴퓨터는 최상의 제품을 구비하십시오. 프린터는 빨리 인쇄되는 제품을 구비하고 자주 인쇄하십시오. 퇴고는 반드시 모니터보다는 인쇄물로 하십시오. 퇴고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논문을 심사하듯 비판적으로 살펴보십시오. 논문의 초고를 작성했을 때쯤이면 내용을 거의 외우게 됩니다. 그래서 오류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무리 세심하게 작성하더라도 초고에는 오류가 아주 많습니다. 이 오류들을 잡아내려면 그 논문을 남의 논문처럼 따져가며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부터도 읽고, 뒤에서부터도 읽어야 하며, 중간부터도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오래 묵혔다가 다시 읽어보기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쓴 글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방법은 모두 동원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학회에 투고했을 때 심사위원들이 남의 글을 비판하듯 읽기 때문입니다. 논문심사자들은 심사대상 논문에 대해 호의적이 아닙니다. 이들은 익명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며 탈락률을 높여달라는 요구를 받을 때에는 아주 냉정해집니다.
  •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반드시 지적 업적을 갖추어야 합니다. 연구업적이 부족하면, 학계에서 설 땅이 별로 없습니다. 부족한 연구업적을 다른 것들로 보완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떳떳하지도 않습니다. 쫓기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우울해집니다. 자신의 전공영역에서 발간되는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을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관심이 끌리는 논문들은 복사하여 가까운 데 두십시오. 그 논문들을 끈기 있게 파고들면, 여러분이 써야 할 글의 주제와 소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젊은 교육학자들이 학자로서의 일상을 즐거워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 가지 학술모임에서 이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들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한국의 교육학이 발전하기를 기대합니다.

(한국교육학회 뉴스레터, 45(3), 5-9, 통권260호)

한국의 말로 하는 연구, 독일의 글로 하는 연구 (Koosy Koo)

페이스북 원문 링크


한국의 말로 하는 연구, 독일의 글로 하는 연구.

(먼저, 이 글에서 예로 드는 사례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독일과 한국의 모든 연구실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알려드립니다)

독일의 현재 연구실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큰 문화 충격은 바로 랩 세미나 발표가 없다는 점이었다. 과제 워크숍 및 학회 발표 외에는 PPT 발표를 해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충격적인 이유는 한국에서는 모든 연구를 PPT 자료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첫 연구 주제 PPT 발표부터, 마지막 졸업 논문 심사 PPT 발표까지.. 연구 아이디어 정리도 PPT 문서에 하고, 관련 논문 조사하고 공부도 PPT 문서에 하고, 강의를 위한 수업 자료도 PPT 문서로 만들었다.

그 시절은 스티브 잡스의 Keynote 스피치가 붐을 일으키고, 서점에는 스티브 잡스의 노하우 분석 및 따라 하기 책이 넘쳐났다. 교수님께서도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PPT 발표를 강조하셨고, 랩 세미나 발표 때는 PPT 자료의 글자 크기, 폰트, 그림의 배치, 색깔 등에 대한 지적을 받으며 올바른 PPT 자료 만드는 법을 숙달해 왔다.

단지 발표자료뿐만 아니라, 유머와 비유를 섞어가며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센스와 물 흐르듯이 유창한 언변술은 박사과정이라면 필수로 익혀야 하는 중요한 자질이었다. 또한, 신입생이 새로운 기법으로 화려하게 PPT 발표를 하면, 단번에 훌륭한 학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발표 즉 말로 하는 연구가 중요하게 여겨진 이유는, 한국에서는 연구 평가를 글이 아닌 말로 하기 때문이다. 연구과제 제안서 심사도 발표로 하고, 연구결과 심사도 발표로 한다. 물론 제안서와 결과 보고서를 글로 제출하긴 하지만, 그 문서를 심사위원들이 정말 읽어보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실제 평가는 발표 비중이 크다.

대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석박사 학위 논문 심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학위 논문은 발표 심사 일주일 전에 제출하고, 논문에 대한 평가보다는 발표 심사 때 발표 내용을 기반으로 당락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 후에 논문은 다시 수정해서 제출하면 되는데, 논문의 최종본은 대부분 심사를 받지 않고 통과된다.

즉, 글이 아닌 말로 연구에 대한 모든 중요한 평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의 장점은 효율성이다. 글로 된 논문, 제안서, 보고서는 읽고 의견서를 작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말로 된 발표는 듣고 바로 의견을 말로 전달하면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 대부분 매주 정기적인 랩 세미나는 한 번에 한 명의 교수님이 여러 학생의 연구 진행 사항을 점검하고 지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로 빠르게 진행된 연구는 그만큼 많은 것을 놓치게 되는데, 그것들은 글로 된 논문을 작성할 때 역습으로 나타난다. 내 경험을 얘기해보면,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하다가 결국 introduction은 맨 마지막에 쓰기로 하고 건너뛴다. 두 번째 관련 연구 부분을 쓸 때는, 지금껏 찾고 공부한 논문들이 좀 오래된 것 같아서 최근 논문을 찾다가 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게 된다. 세 번째, 내가 한 연구가 기존 방법보다 더 좋다는 점을 적어야 하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이쯤 되면 논문 마감은 며칠 남지 않았고 맨붕에 빠진다. 연구 방법과 실험 결과만 잘 정리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어찌어찌 제출은 하지만… 예상대로 이렇게 작성된 논문은 대부분 reject 되고 만다.

연구 결과도 잘 나왔고, 그동안 세미나 때 교수님과 선배님들 지도받으면서 잘한 것 같은데.. 뭐가 잘못되었을까?

말의 힘은 화자에게 주도권이 있다는 점이다. 화자의 태도, 언변술, 발표의 진행속도에 청자는 따라갈 수밖에 없다. 특히 토론 형태가 아닌 일방적인 발표에서는 청자는 화자의 주장에 설득당할 가능성이 높다. 히틀러가 쓴 책은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말로 독일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만 봐도 말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연구자에게도 발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연구 진행을 말의 힘을 빌려 하게 되면, 논리 전개의 세밀한 검토를 받을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는 점이다. 세미나 때 발표자가 보여주는 제한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발표 속에서 연구의 단계 단계 논리적인 결함을 찾기란 쉽지 않다. 특히 PPT 자료의 속성상 발표자는 연구의 단점은 최대한 감추고 장점은 최대한 부각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서 청중을 설득하려고 애쓰게 된다.

만약 충분히 검증되어 출판된 논문을 설명하는 발표라면 장점이나 특징을 부각해도 되겠지만, 연구가 진행 중인 내용을 발표를 통해 지도받기에는 세밀한 논리 전개를 검증하기에 자료와 시간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그렇게 말로 전개되고 완료된 연구는 글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본인 스스로 모순을 발견하여 전개가 안 되거나, 그 글을 읽은 평가자에게 쉽게 논리적인 결함을 지적받게 된다.

이런 말로 하는 연구 시스템에서 잘 훈련된 필자가 독일에서 연구를 진행하며 가장 먼저 놀란 사실은 랩 세미나 없이도 연구실이 잘 굴러가는 것이었다. 대신 교수님이 연구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고 자주 순회하며 개개인 학생들과 토의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에 비교하자면 같은 방에 있는 선배 같은 느낌이랄까.. 석사 학생들에게는 포닥들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 (참고로 우리 랩은 박사과정 10명에 포닥이 4명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연구 지도는 글로 진행한다. 처음 학생에게는 교수님 또는 포닥이 작성한 연구주제가 1~2장의 요약 논문 형태의 글로 주어지고, 학생도 연구를 진행할수록 논문 형태의 문서를 구체화해가며 지도교수 또는 포닥에게 정기적으로 피드백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지도하는 입장에서는 이 학생이 연구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 얼마나 관련 연구 조사를 했는지, 본인의 의견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장 사이의 논리적 전개에 대해서도 이유를 물어보고 설명이 부족하면 보충하게 한다.

지금까지 네 명의 석사 논문을 이런 식으로 지도하며 느낀 점은, 처음에는 주어진 연구주제를 비판 없이 따라 하던 학생들이 점점 스스로 각 논리적 단계마다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연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자연스럽게 논문 한 편이 완성된다. 그다음에 발표는 이렇게 완성된 논문을 요약해서 사람들에게 내용을 소개하는 자리이다. 지적이 아니라 박수받아 마땅한 자리이다.

독일의 박사학위 심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먼저 논문을 제출하면, 심사위원들이 읽어보고 의견 및 수정사항을 준다. 그걸 바탕으로 논문을 수정해서 다시 제출하고 피드백을 받는다. 이런 과정을 보통 일 년 넘게 진행하고, 심사위원들에게 통과가 되면, 비로소 많은 사람에게 논문을 발표하고 축하를 받는다. 즉, 말로 된 발표는 글로 된 논문을 요약해서 설명하는 수단이지, 말로 진행한 연구를 글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말과 글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말은 이해시키는 주도권이 화자에게 있고, 글은 이해하는 주도권이 독자에게 있다. 또 말은 감정적이고 글은 이성적이다. 연구를 말이 아닌 글로 해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이 철저하고 세밀해야 하고 점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연구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하는데 비해,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말로 진행되는 연구 분위기는 아마 우리 사회가 글을 읽고 생각하고 묵상하는 여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래도 연구는 긴 호흡으로 차분히 꼼꼼하게 생각하고 서로 점검하고 타인의 지적을 이성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발표자료 꾸미느라 밤새는 시간에 자기 생각을 한 문장이라도 더 글로 표현해보고, 교수님들이 학위논문을 읽어보고 논리적인 문제점들을 찾아주고, 과제 심사위원들이 연구보고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의견서를 작성해서 피드백을 준다면… 그 안에서 여러 생각이 모아지고 구체화 돼서 우수한 연구도 훌륭한 연구자도 길러지지 않을까?

경제학과 수학의 관계 (김두얼)

김두얼 교수님 페이스북에서 옮겨 왔다. 총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제학 연구자의 덕목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부분도 있다.


1편. (원본 링크)

(거시)경제학과 수학에 대한 제 생각에 대해 #홍성욱 선생님께서 질문을 주셨는데, 그와 관련해서 한 번에 답을 드리기는 어렵고 두 세 차례에 걸쳐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많은 분들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수학을 보고 경제학자들이 연구를 하거나 정책을 개발하는데 수학을 많이 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맞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비유를 들어 말씀드린다면, 경제학 교과서는 연습을 하기 위한 책입니다. 피아노로 치면 하논 같은 책이라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들은 손가락 연습을 하기 위해 하논을 치는 것이지, 그 음악이 아름다워서 하논을 치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학 교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사고 훈련을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많은 훈련들이 실전보다 높은 강도로 특정 행동을 반복하게 함으로써 몸에 익숙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신다면 수학을 안쓰는 교과서를 쓰면 되는 것이지요.

어떤 교과서를 써야 경제학적 사고를 더 잘 함양할 수 있는가는 학자의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교과서 선택이나 강의 내용도 그에 따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을 받은 다음에 실제 논문을 쓸 때 그런 수학을 쓰는지 안 쓰는지는 연구 분야, 연구질문의 내용, 학자의 성향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저만 하더라도 대학원 수업 때는 온갖 수학적인 내용을 배웠습니다만, 지금까지 수십편의 논문을 쓰면서 수학이라고 부를 만한 내용을 논문에 넣은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수식을 간혹 넣긴 하지만 그걸 수학이라고 부르면 수학에게 미안한 수준입니다.

경제학에서 중요한 것은 수학이 아닙니다. 경제학적 사고와 경제학적 직관이지요. 이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훈련이 필요한데, 수학이 많이 들어 있는 미시, 거시 교과서를 공부하는 것은 바로 그런 훈련 중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훈련용 책을 보고 경제학을 평가하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앞으로는 좀 삼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