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대통령 기고 번역에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제게 읽고 번역하며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선사했는데, 비슷한 경험을 하셨기 바랍니다.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부탁을 하나 하고, 원글 앞에 너무 긴 도입을 붙이는 것 같아 쓰지 않았던 코멘트를 몇 줄 적으려고 합니다.
예상은 했지만 페친 신청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상한 분 아니면 일단 수락하긴 할텐데 혹시 정보나 식견을 기대하신다면, 감사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저는 전문번역가도 경제학 박사도 아닙니다. 장삼이사 중 한 명입니다(듣보가 듣보를 자처하면 슬퍼지는데ㅠㅠ). 당장 그 글도 제가 쓰지 않았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글을 옮긴 것에 불과하지요.
전 평소 페이스북에 글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정보함량이 높은(informative) 글 별로 없습니다. 이따금 일상적인 또는 사변적인 글을 올리는 정도입니다. 아직 제대로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다 어디서 조금 읽은 내용 표현 바꿔서 아는 척 하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이고, 페이스북에서 숱한 고수들을 보고 배운 게 많으니 저도 무언가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부분이지만 저는 내향적인 사람이라 의도한 이상으로 노출된다는 게 상당한 스트레스거든요. 뻘글의 자유도 중요하구요 ㅋ 정말 가끔 이런 글을 올릴 때는 전체공개로 올립니다. 그러니까! 혹시 생각이 궁금하신 분들은 팔로우만 해 주시면 됩니다. 이미 친구신청하신 분들은 아니다 싶으면 얼른얼른 끊어 주십시오. ^^
이쯤하고, 글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전 글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번역을 마음먹었습니다. 첫 번째 문단에서 이민, 무역, 기술 혁신을 둘러싼 갈등이 현재 미국의 문제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단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것들을 “변화”로 묶으면서 슬쩍 2008 대선 슬로건을 상기시킵니다. “저는 분명히 변화를 외치며 당선되어 8년의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군요. 그럼 앞으로는 어쩌죠?”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으신가요? 1, 2문단은 대충 봐도 잘 요약된 깔끔한 문제제기입니다. 그런데 배후에 이런 메시지까지 있는 도입부라니요.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글이 다루려는 주제를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와우!
이민배척주의의 역사를 언급한 세 번째 문단은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노예해방 슬로건 “We shall overcome”을 연상시키는 “We will overcome(우리는 넘어설 겁니다.)”으로 끝납니다. 역사적 맥락을 배치하지 않았다면(있는 지금도), 이 추론이 억지라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상시키는 인상”만 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변화”에 강조 표시가 없었던 것처럼요. “We shall overcome”을 그대로 가져오면 Shall이 사실상 사어인 건 둘째 치고, 문구가 가진 역사적 무게 때문에 물 흐르듯 하던 흐름이 확 끊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We will overcome”은 정확히 그 목적에 부합합니다. 정말 훌륭한 구성이지요. 내용도 정말 훌륭하지만, 이런 세련미가 글의 품격을 배가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 비판도 통쾌했지만, 저는 여기서 번역을 생각했습니다.
글에는 오바마가 최근 거시경제 이슈는 물론 경제(학) 자체를 어느 정도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시장실패의 사례로 언급한 내용들은 미시경제학 교과서의 시장 실패와 정보경제학 항목을 정확히 예시로 옮긴 겁니다. 거시경제정책의 두 축이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며, 그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미국 탑스쿨 졸업하고 기라성 같은 경제학 교수들으로 구성된 경제자문위원회를 갖고 있는 미국 대통령이 저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네. 경제학원론만 들은 학부생도 그 정도 지식은 압니다. 하지만, 우선 이 글은 그 뿐 아니라 최근의 총요소생산성(TFP) 둔화 및 그 측정(measurement) 이슈, 교육과 기술의 경주, 국제무역의 효과, 불평등, 법인세와 투자 등 여러 주제도 간결하지만 핵심을 잘 짚고 있습니다. 더하여, 이론과 자신의 지식, 경험을 결합하여 한 편의 완결된 글을 써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경제학 박사까지 하고도 이상한 말 하는 사람 정말 많습니다.
노동경제학에 관심이 많은 제게는 최저임금과 근로장려세제(EITC)가 같이 언급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글에는 열거만 되었지만, 조금 풀어쓰면 “최저임금을 올립시다! 어느 정도 올리는 건 고용에 그렇게 심각한 영향까지는 주지 않는다는 실증연구 결과도 꽤 축적되었습니다. 최저임금은 빈곤 대책으로는 비효율적이라고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빈곤가구 타겟팅이 확실한 근로장려세제를 무자녀가구에게도 확대합시다.”가 됩니다. 경제학자나 관료가 아니라 대통령이 이 정도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덮어놓고 오바마 찬양하려는 확대해석이 아닙니다. 비꼬려는 의도는 없습니다만 대다수 최저임금 인상론자들이 저렇게 두 가지를 묶어서 언급하시는 것을 본 적 있으신가요? 최저임금 인상과 EITC를 묶기 위해서는 저런 이해, 최저임금제와 EITC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숱한 현안을 처리해야 하는 대통령이 머릿속에 꼭 이론적 틀을 정리해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그림을 이해하고 참모를 잘 기용하는 것도 훌륭한 리더십입니다. 그렇지만 본인이 충분한 이해력과 통찰력을 가진다면 더욱 훌륭하겠지요. 이 글에는 그런 식견과 식견으로부터 나온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말 쉽습니다. 경제학도로서, 그리고 선출된 지도자를 보는 시민으로서 감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말 잘 안 하지만, 이쯤 되면 글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 않습니까?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글이 주는 인상만큼 100% 성공적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걸 일일이 지적할 만큼 미국 경제에 밝지 않기 때문에 섣부른 논평은 삼가겠습니다. (전문가라도 정책의 모든 파급효과를 당대에 “정확히” 평가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무모하고 빗나가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글이 교묘하게 그런 실패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글이 폄하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가 명확한 이해와 뚜렷한 철학을 바탕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며 포괄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경제정책론으로 이 글은 정말 탁월합니다. 이 글의 청사진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우리가 알던 경제 지식을 전부 뒤엎어야 하는 날일 겁니다. 이 글은 현대 경제학의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글의 가치입니다. 당분간 이 정도의 글이 나오긴 어려울 거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사진은 이 글이 실린 <이코노미스트> 표지입니다. 타이틀은 <The Road to Brexit>지만, 오황상 칼럼 제목인 <The Way Ahead>로 바꾸어도 될 만한 표지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트럼프와 클린턴으로, 앞에 놓인 갈림길을 “우리 앞에 놓인” 갈림길이라고 생각해 볼 만 하지 않을까요? 아닌 것 같으시면… 마음의 눈으로 보시면 보입니다. ^^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10월 8일 이코노미스트 지에 기고한 칼럼 전문을 번역했습니다. 워낙 훌륭한 글이라 전문 번역이 금방 올라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직 없길래(발견하지 못했음) 조금이라도 더 읽히기를 바랄 겸, 혼란한 국내 정세에서 눈도 돌릴 겸 해보았습니다. 답답하신 분들은 천조국 황상의 품격을 보시고 잠깐이나마 힐링하시기를. 약 A4 5-6매 분량입니다.
쉽게 쓰인 글이라 될 수 있으면 편하게 읽히도록 번역했습니다. 능력이 닿는 한 원문을 살렸습니다만 내용 전달에 중점을 두고 의역도 많이 했습니다. 원문이 매우 명료하게 잘 쓰인 글이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전적으로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원문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오류 지적 환영합니다.
(추가) 제가 이 글을 번역한 이유는 당장 해야 할 한영번역이 하나 있는데 귀찮아서..는 아니고, 우선 경제를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거시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경제학 전공자랍니다. ㅋㅋ
오바마 대통령은 이 글에서 임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간을 정리하고, 현재 미국 정계에서 벌어지는 논쟁(결국 대선 경선 과정의 트럼프, 샌더스 식 포퓰리즘)을 단호하게 평가하는 한편 앞으로 자신의 후임자들과 미국이 나아갈 비전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글의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했습니다.
* 퍼가셔도 좋지만 출처는 밝혀 주십시오.
우리 앞에 놓인 길 (The Way Ahead) | 버락 오바마 미합중국 대통령 | The Economist
저는 요즘 어딜 가던 비슷한 질문을 듣습니다. 미국 정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이민, 무역, 기술 혁신으로부터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큰 혜택을 누려 온 나라가 어떻게 갑자기 반이민, 반무역 경향을 보이는 건가요? 왜 일부 극좌, 그보다 좀더 많은 극우 인사들은 되돌릴 수 없고, 대다수에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식의 조악한 포퓰리즘을 내세우는 건가요?
미국에서 세계화, 이민, 기술, 심지어 변화 자체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불안감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종종 국제기구나 무역협정, 이민에 대한 회의론에서 비치는 불만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유럽연합을 탈퇴하기로 결정한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나 세계 곳곳에서 포퓰리즘 정당이 득세하는 현상에서도 관찰됩니다.
이런 불만은 대부분 본질적으로 비경제적인 공포에서 비롯됩니다. 오늘날 일부 미국인들이 표출하는 반이민, 반멕시코, 반무슬림, 반난민 감정은 예전에도 있었던 이민배척주의 파동(nativist lurches)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가령 1789년 외국인과 선동방지법(Alien and Sedition Acts), 1800년대 중반 무지주의당(Know-Nothings),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반아시아 감정, 그 외에도 미국을 위협하는 집단이나 사상을 통제한다면 과거의 영광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는 메시지가 외쳐졌던 모든 시대 말입니다[modern_footnote]역사적 명칭은 앨런 브랭클린의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국역본을 참조했습니다.[/modern_footnote]. 우리는 이 공포를 넘어섰고, 또다시 넘어설 겁니다[modern_footnote]원문은 “We will overcome…”입니다. 흑인인 오바마 대통령이 노예해방 운동(어쨌든 제도적으로는 성공한) 의 슬로건 “We shall overcome”을 변주하면서 이민 문제도 동일하게 성공할 것이라는 신념을 암시한 것은 아닐까 해서 밝혀 둡니다.[/modern_footnote].
하지만 일부 불만이 기인하는 장기적 경제 요인(long-term economic forces)에 대한 염려는 타당합니다. 몇십 년 간의 생산성이 하락하고 불평등이 심화되며 저소득·중산층 가계의 소득증가가 둔화되었습니다. 세계화와 자동화가 진행되며 노동자들이 괜찮은 임금(a decent wage)이나 자리를 확보할 힘을 꽤 잃었습니다. 물리학자나 공학자가 될 수 있었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실물경제의 혁신에 재능을 발휘하는 대신 금융권에서 돈을 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8년 금융 위기를 거치며 기존에도 종종 ‘다른 세상’에 있다고 여겨지던 기업과 엘리트 계층은 더욱 일반인들에게서 유리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게임이 조작됐다”는 주장을 선뜻 받아들인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납득할 만한 불만은 우선 문제를 개선하기보다 대체로 악화시킬 정치인들이 부채질한 것이고, 불만스러울지라도 자본주의가 번영과 기회를 향한 역사상 최고의 견인차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25년간 극빈곤층 인구 비율은 40% 근방에서 10% 밑으로 하락했습니다. 작년에 미국 가구의 소득이득(income gain)은 기록적인 수준이었고 빈곤율은 1960년대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하락했습니다. 실질임금은 1970년대 이래 가장 빠르게 상승했습니다. 이러한 발전은 지금의 정치적 논쟁 근저에 있는 불안감을 자극하는 세계화와 기술 변혁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세계를 규정하는 모순입니다.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지만, 사회는 불안과 불만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과거의 낡은 폐쇄경제로 후퇴하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세계화와 그에 수반될 수 있는 불평등을 인지하고, 세계 경제가 최상위층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작동하도록 하는 데 전념하며 전진하는 것 사이에서 말입니다.
풍요를 향한 힘(A force for good)
이윤 추구 동기는 기업이 소비자들이 열광하는 제품을 만들고, 은행이 성장산업에 여신을 제공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모두에게 공유되는 번영과 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경제학자들은 경제가 방임될 경우 실패할 수 있음을 오랫동안 인정해 왔습니다. 시장 실패는 <The Economist>가 보도해 온 대로 독점·지대추구 경향, 공해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기업활동, 소비자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정보 격차, 또는 과도하게 비싼 건강보험 등의 형태로 발생하곤 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에 의해 지배되며 다수 대중에 책임지지 않는 자본주의는 모두에게 위협입니다. 경제는 빈부 격차가 줄어들고 성장 기반이 넓어질 때 더욱 번영합니다. 인류의 1%가 가 99%가 가진 만큼의 부를 소유하는 세계는 결코 안정적일 수 없습니다. 부자와 빈자의 격차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기술 발전에 따라 이제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고 특권층의 생활을 마치 슬럼가 어린이가 인근 고층 건물을 보듯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는 정부가 그에 부응하는 결과를 내놓는 것보다 빠르게 커지고, 불공정 의식이 만연하며 체제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약화됩니다. 신뢰가 없다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지난 수 세기 동안 성취해 온 발전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진보와 위험의 이러한 모순은 수십 년간 진행 중입니다. 저는 지난 8년간의 행정부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합중국을 완벽하게 만드려면 훨씬 오래 걸리리라는 것을 늘 인정합니다. 대통령직은 국가가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도록 각자 맡은 부분을 수행하는 릴레이입니다. 그럼 제 후임자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더 나은 진보를 위해서는 미국 경제 메커니즘이 대단히 복잡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거대 은행을 분할한다거나 수입 관세를 대폭 인상한다는 급진적인 개혁이 언뜻 매력적으로 들리겠지만, 경제는 그렇게 관념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경제를 대대적으로 재설계한 뒤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가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성공할 수 있는 체제라는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대신 네 가지의 구조적 과제에 대처해야 합니다. 생산성 증가를 촉진하고, 불평등과 맞서 싸우고, 모든 구직자들에게 일자리를 보장하고, 미래 성장이 대비된 탄력적이고 견실한(resilient) 경제를 이룩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경제 활력 회복하기(Restoring economic dynamism)
첫째, 최근 우리는 인터넷, 모바일 기기 및 네트워크, 인공지능, 로봇공학, 신소재, 에너지 효율성 향상, 개인맞춤의학(personalized medicine)으로부터 놀라운 기술진보를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은 생활을 변화시킨 데 비해, 아직 생산성 증가율 집계에 포함되지는 않았습니다[modern_footnote]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아직 측정된 생산성 성장률(measured productivity growth)을 증가시키지는 못했습니다.”가 됩니다. 관련 연구 맥락을 살리자면 직역이 맞겠지만, 편독성을 위해 의역했습니다.[/modern_footnote]. 지난 10년간 미국의 생산성 증가율이 G7 국가 중 가장 높긴 했지만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증가 속도 자체가 느려졌습니다(차트 1 참조). 경제가 더 빠르게 성장하지 않는다면 파이를 어떻게 나누어도 사람들이 원하는 수준의 소득을 창출할 수는 없습니다.
최근 생산성 둔화의 주 요인은 공공/민간투자 부족이고, 이는 어느 정도 금융위기의 후유증입니다. 하지만 투자 부족의 또다른 원인은 우리가 자초하는 여러 제약입니다. 사실상 모든 새로운 공적 자금원 조성을 거부하는 반세금 이데올로기, 미래에 닥칠 (특히 기간시설물의) 유지보수비 부족에 대한 집착, 교량·공항 개선 등 이전에 초당파적으로 합의했던 계획을 가망 없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당파적 정치체제 말입니다.
법정세율을 낮추고 허점은 없애는 법인세 개혁과 기초 연구개발에 대한 공공투자를 통해 민간투자와 혁신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교육 중심 정책은 경제성장률 증대와 성장의 과실을 공유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정책은 조기 아동교육 예산 증액부터 고등학교 개선, 대학 교육비 부담 완화, 양질의 직업훈련 확대까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생산성과 임금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제무역 하에서 “정상을 향한 글로벌 경주(a global race to the top)”[modern_footnote]문맥 상 “경주”보다는 “경쟁”이 적합해 보이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교육지원정책 중 하나 “A Race To the Top (정상을 향한 경주, 성과중심 교육정책)”의 명칭을 가져왔다고 보여서 이렇게 옮겼습니다.[/modern_footnote]을 창출해야 합니다. 몇 지역은 대외 경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나, 무역의 이익은 피해보다 훨씬 컸습니다. 수출은 불황 탈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 경제자문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수출을 하는 미국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평균 18% 높은 임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를 통과시키고, 유럽연합과의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협상을 타결하도록 의회를 계속 압박할 겁니다. 이들 협정과 강화된 무역집행(trade enforcement)은 노동자와 기업 모두에게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마련할 겁니다.
둘째, 생산성이 둔화되는 한편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그 폭은 미국에서 가장 현저했습니다. 1979년에 미국 상위 1% 가구는 전체 세후소득의 7%를 차지했습니다. 2007년에 그 비율은 17%로 두 배 이상 상승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라는 본질적인 의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성공을 시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공을 열망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사실 우리는 노력하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고, 우리 자녀 세대는 더욱 그러리라 확신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 더 많은 불평등을 용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했듯, “우리는 자본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지만, 가장 비천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modern_footnote]”while we do not propose any war upon capital, we do wish to allow the humblest man an equal chance to get rich with everybody else.”[/modern_footnote] 심화된 불평등의 문제는 바로 여기, 즉 지위 상승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데 있습니다. 불평등은 부의 사다리의 맨 위와 아래 발판을 끈끈하게 만들어서, 아래에서 올라가는 것과 정상에서 내려오는 것 모두 어려워집니다.
경제학자들은 불평등 심화의 다양한 원인을 열거한 바 있습니다. 기술, 교육, 세계화, 노조 쇠퇴, 최저임금 하락 같은 요인 말입니다. 아마 이 모두가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이 모든 분야에 대해 실질적인 진보를 달성해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문화와 가치의 변화 역시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기업 임원과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는 교회, 자녀의 학교, 시민단체 등 곳곳에서 이루어진 노동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제한되었습니다. 그래서 CEO들은 평균적인 노동자에 비해 20-30배 정도의 보수를 가져가는 데 그쳤습니다. 이러한 제약의 감소 내지 소멸이 오늘날 최고경영자들이 250배 이상의 보수를 지급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경제는 빈부 격차를 줄이고, 성장 기반을 광범위하게 확대할 때 더욱 번영합니다. 단순한 도덕적 차원의 주장이 아닙니다. 연구에 따르면 불평등이 심한 국가일수록 성장이 취약하고, 자주 불황을 겪습니다. 부가 상류층에 집중되었다는 것은 시장경제를 견인하는 다수 소비자들의 지출이 감소한다는 뜻입니다.
미국은 진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작년 소득분포 하위, 중위 가구의 소득이득은 상위 가구보다 많았습니다(차트 2 참조). 집권 기간 동안, 그러니까 2017년을 기준으로, 우리는 소득 하위 5분위 가구소득을 18% 상승시켰습니다. 반면 연간소득 추산 8백만 달러 이상인 상위 0.1% 가구의 평균세율은 (재무부 계산에 따르면) 거의 7%p 인상했습니다. 우리 행정부 하에서 입법된 세제 변경에 따르면, 상위 1% 가구가 “정당한 몫(their fair share)” 이상을 납부하는 반면 그 외 가구들은 적어도 1960년 이전 어떤 행정부의 세제 변경에 의해서보다도 더 많은 소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의 노력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수십 년간 심화된 불평등을 되돌리는 법안을 더욱 적극적으로 제정해야 합니다. 노조는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노동자들이 파이의 더 큰 몫을 차지하도록 돕는 한편, 글로벌 경쟁에 적응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연방최저임금 인상, 무부양자녀 노동자에 대한 근로장려세제(EITC) 확대, 고소득자 조세 혜택 제한, 성실한 학생의 학업을 가로막는 터무니없는 대학 교육비 책정 금지, 그리고 성별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셋째, 경제의 번영은 구직자들이 충분한 일자리 기회를 얻을 수 있는가에도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장기적인 핵심생산인구(prime-age workers) 노동시장참가율 하락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1953년에는 25-54세 남성의 3%만이 비경제활동인구였습니다. 지금은 12%가 그렇습니다. 1999년에 여성 핵심생산인구 23%가 비경제활동인구였습니다. 지금은 26%입니다. 성장하는 경제에서 경제활동인구에 편입·재편입하는 사람들은 고령화와 2013년 말부터의 베이비부머 은퇴를 상쇄하고 노동시장참가율을 안정화시키지만, 장기 감소 추세를 뒤집지는 못합니다.
비자발적 실업에는 생활만족도, 자존감, 신체건강, 그리고 사망률이라는 대가가 따릅니다. 이는 노동시장참가율이 가장 가파르게 하락한 집단인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충격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진통제(opioid) 남용, 그에 따른 과다복용 사망 및 자살(overdose death and suicides)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 놓일 때도 노동시장에 남아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전만큼의 소득을 보장하는 임금보험은 그 중 하나입니다. 양질의 커뮤니티 칼리지나 검증된 직업훈련 모델의 접근성을 확대하고, 새 일자리 탐색을 보조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따라서 더 많은 노동자들이 실업 보험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급휴가와 보장된 유급병가, 양질의 보육 및 조기교육 접근성 확대로부터 노동자와 고용주 모두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초당적 지지를 받은 형사사법제도(criminal justice system) 개혁 및 경제활동 재진입 개선 조치가 법제화된다면 역시 노동시장참가율이 향상될 겁니다.
더 견고한 기반 쌓기 (Building a sturdier foundation)
마지막으로, 금융위기는 보다 탄력적이고 견실한 경제, 오늘을 위해 내일을 희생하는 일 없이 지속가능하게 성장하는 경제의 필요성을 통렬하게 지적했습니다. 자유 시장이 구조적 실패를 대비하고 공정경쟁을 보장하는 규칙 하에서만 번창할 수 있다는 점에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경제체제는 위기 이후 은행 자본금 인상, 단기 자금 의존도 경감, 금융기관 및 시장 감독 강화 등의 월가 개혁을 통해 보다 안정적이고 장기경제성장 친화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 대형 금융기관들은 더 이상 이전에 하던 식으로 손쉽게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고, 그 증거로 시장은 점점 그들이 “대마불사”할 정도로 크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modern_footnote]”the market increasingly understands that they are no longer “too big to fail”.”[/modern_footnote]. 그리고 우리는 금융기관들이 소비자들에게 상환할 수 있도록 조건이 미리 고지·조율된 대출을 제공할 책임을 부과하기 위해 최초의 감시기구인 소비자금융보호국(CFPB)을 창설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금융 부문(shadow banking system)은 여전히 취약점을 보이고 있으며 주택 금융 시스템은 아직 미개혁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해 온 이상으로 나아가야 하지, 되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한편 더 급진적인 개혁의 옹호자들은 지금까지 성취해 온 진보를 지나치게 자주 간과하고, 체제 전체를 규탄하곤 합니다. 체제의 규칙을 구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언제나 토론 대상이지만, 지금까지의 진보를 부정하면 우리는 더 취약해질 뿐입니다. 그 반대가 아닙니다.
미국은 부정적 외부충격(negative shock)이 발생하기 전에 좀 더 대비해야 할 겁니다. 지금 같은 저금리 시대에 미래의 경기침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더 큰 규모의 재정정책을 집행해야 하며, 통화정책만으로 경제안정화를 달성하려 해서는 안 될 겁니다. 유감스럽지만 나쁜 정치는 좋은 경제를 짓밟아 버릴 수도(override) 있습니다. 우리 행정부는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10여 개 이상의 법안을 제정하여 진가를 인정받은 수준(2009-2012년 1.4조 달러 재정지원)이상의 확대재정를 확보했습니다만, 상식적 조치 하나하나를 통과시키기 위해 의회와 상당히 소모적으로 충돌해야 했습니다. 저는 시도하려던 몇 가지 확장정책을 시행하지 못했고, 의회는 역사에 남을 국가부도 사태를 들어 위협하며 성급하게 경제긴축을 강제했습니다. 제 후임자들은 어려운 시기의 긴급 조치를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어야 할 겁니다. 대신 실업 급여 같은 (경제 침체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가구 및 경제 지원금은 자동으로 인상되어야 할 겁니다[modern_footnote]”자동으로”는 대략 물가연동 정도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한편 앞 문장에서 2013년 양당의 연방정부 부채 상한선 인상 합의 결렬 후 “자동으로” 발동한 시퀘스터 조치를 언급했음을 염두에 두는 것 같기도 합니다.[/modern_footnote].
필요한 시기에 경제 지원을 확대하고 시민들에게 장기 채무를 이행하기 위해, 호경기에는 반드시 재정지출을 (적정 선에서) 유지해야 합니다. 부담적정보험법(Affordable Care Act)에 따른 의료비 경감[modern_footnote]예. 오바마케어를 가리킵니다.[/modern_footnote], 최고 부유층에 대한 세제 혜택 제한 등의 정부재정지원 억제책(curbs to entitlement growth)을 이용한다면 투자 기회나 성장을 저해하지 않고 장기적 재정 문제를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합니다. 지난 5년간 경제성장률 증대와 탄소배출량 저감이 상충한다는 관념은 끝났습니다. 미국은 에너지 부문 탄소배출량을 6% 감축했고, 바로 그 기간 동안 경제는 11% 성장했습니다. 미국의 발전은 미래 세대를 위해 지구를 구할 최고의 기회를 제시하는 역사적인 파리기후협정 도입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래를 향한 희망 (A Hope for the future)
미국의 정치 시스템은 실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요, 저도 압니다. 하지만 미국 정치는 200년 넘게 경제사회적 발전의 원천이었습니다. 지난 8년간의 발전 역시 세계에 어느 정도의 희망을 주었을 겁니다. 온갖 분열과 불화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대공황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금융 시스템은 납세자들의 부담 한 푼 없이 안정화되었고 자동차 산업도 구제되었습니다. 저는 의료 서비스를 개혁하고 새로운 차량 및 발전소 탄소배출량 감축 규칙을 도입하는 한편, 초반부에 재원을 집중 투입한(front-loaded) 경기부양책을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이상 규모로 시행했으며, 1930년 이래 가장 포괄적인 금융 시스템 규칙 개정을 감독했습니다.
결과는 명백합니다. 경제는 더욱 튼튼해졌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2010년 초부터 1,500만 개의 새로운 민간 일자리가 창출되었고, 임금이 상승하고, 빈곤율이 하락하며, 불평등 추세는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2,0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새로 건강보험 혜택을 얻은 반면 의료비는 지난 50년 사이 가장 느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연간적자는 거의 3/4 수준으로 감축되었습니다. 탄소배출량 역시 감소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를 위한 새로운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미래에는 반드시 경제성장, 특히 지속가능하며 열매가 공유되는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국은 모든 국가와 함께 최선을 다해 모든 시민과 앞으로 올 세대를 위한 보다 건실하고 번영하는 경제를 이룩해야 합니다.
수학 교과과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 있는 모양이다. 난 수학/수학교육의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6년간 고교 수학 과외 선생 노릇을 해온 경제학도로서 드는 생각을 난삽하나마 정리해 본다.
새로 맡은 학생과의 첫만남에서 나는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진다. “원이 뭔가요?” (“한 점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라는 원의 정의는 중학교 1학년 때 배운다.)
열의 여섯은 잠깐 생각하다 답을 내놓는다. 그러면 이어서 묻는다. “원의 방정식이 어떻게 되나요?”
여섯 중 넷은 암기한 대로 대답한다(넷은 여기서 포기). “엑스제곱 더하기 와이제곱은 알제곱이요.” 역시 이어서 묻는다. “그게 무슨 뜻이죠?”
“방금 말한 원의 정의를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대답한 학생을 나는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네?” 하더니, 앞서 물어본 질문을 생각하고 “아하!” 하는 학생도 한 번 본 일이 있다(여기까지만 되어도 괜찮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은 “선생님, 그거야말로 무슨 말씀이시죠?”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이 때 당황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이어 간다. “좌표평면에서 두 점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구하죠?”(이건 중학교 3학년 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운 뒤 배운다.)
공식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학생은 편안한(?) 마음으로 아예 처음부터 공사를 시작한다(원의 정의도 마찬가지). 내가 맡았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식을 암기하고 있었는데, 이런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착잡해진다. “그 공식과 원의 정의를 합치면 원의 방정식이 나와요. 앞으로 이런 것 계속 물어볼 거예요. 수업 시작합시다.”
이런 문답은 학생들이 어디서부터 개념의 연결고리를 놓쳤는지 점검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리고 이건 원 말고 다른 개념으로도 가능하다. 가령 “이차방정식의 근과 계수의 관계”,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 “완전제곱식”, “제곱근의 정의”의 연속기도 유용하다. 어쨌든, 비극은 내가 묻는 내용이 무슨 비기(秘技)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내가 묻는 내용은 전부 교과서에 언급되거나 교사용 지도서에서 강조하도록 되어 있다. 곧, 학생들의 침묵은 수학 수업이 학생들에게 교과과정을 숙지시키는 데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다. 무엇이 문제인가?
수학 교과서는 설명과 예제, 유제, 연습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설명은 말 그대로 “핵심”을 “간결”하게 서술하는 데 그친다. 때문에 초심자의 이해를 돕기에 부족하다(설명 자체는 훌륭하다). 요새 시끄러운 “스토리텔링”은 초심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심화학습을 목적하는 중급자 이상에게는 싱겁다. 그러니 이도저도 아닌 책이다. 교과과정 전체의 지도를 그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근 단원 시작과 끝에 이전 학년 및 이후 학년과의 연관성이나 이전 학년 내용의 복습을 돕는 내용이 삽입되었으나, 그 역시 학생들에게 충분한 안내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수학 교과서는 교수자의 보조가 있어야만 전체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과서 수준” 이라는 말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다.
수학 교사들은 이러한 내용을 충실히 다루어 주는가? (직간접적인) 경험상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수학 수업은 적당히 내용을 가르치고 공식을 암기하도록 한 뒤 문제풀이 위주로 진행된다. 가끔 학생들이 나와서 풀도록 시키기도 한다. 이런 수업의 문제를 짚자면 끝이 없다. “수학을 왜 배워야 하나요?”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그보다 작은 “이건 왜 배워요?”에도 대답하지 못한다. 또한 문제풀이에 역점을 두면서 “왜 그렇게 풀어야 하는가?”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역설적 방식이다. 숱한 사람들이 경험하여 알듯, 최악의 방식이라는 말이다.
가령 “겹치는 부분은 치환한다”를 생각해 보자. 문자를 이용한 단항식과 다항식의 연산을 배울 때 학생들은 처음으로 수학적 추상화를 배운다(집합이 중학교 과정에서 빠졌기 때문). 수가 문자로 바뀌고, 문자가 식을 이루어 다항식이 된다. 이 때 다항식을 또다른 문자로 놓을 수 있다는 것과 그 의미를 잘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백에 아흔아홉은 지루하게 (a+b)(c+d)=ab+ad+bc+bd 식의 계산을 반복하거나 곱셈공식을 암기시키는 데서 수업이 끝난다. 여기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치환’은 테크닉으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개념의 지도를 그리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개념의 지도”는 해당 내용을 배우는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 줄 때 형성된다. 수열 단원에서 등장하는 계차수열 문제를 학생들은 싫어한다. 어려운 수열 문제에서 늘 출현하고 계산이 귀찮은데 다른 어떤 내용과도 연관되지 않아 쓸모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차수열은 미분에서 배우는 도함수의 예고편이다. 수열의 극한을 배운 뒤 함수의 극한을 배우는 것과, 계차수열을 배운 뒤 도함수를 배우는 것은 같은 원리다. 이러한 연관관계나 전체를 꿰뚫는 원리를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다. 문제 푸는 기술보다 훨씬 중요한 것인데도.
그러면 왜 교사들은 원리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는가? 교과과정의 양이 많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얼핏 보면 그 말이 맞을 수 있다. 한국의 수학 중등교육이 포함하는 분량이 세계에서 손에 꼽는 수준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교과과정의 내용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교과과정을 축소하면 정말 이 문제가 개선될까? 나는 회의적이다. 그럼 수학 교사들의 자질과 헌신도가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예로 제7차 교육과정 인문계열 학생들은 미적분을 배우지 않았다. 그것이 수학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해 주었는가? 미지수다. 한편 중학교 교과과정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중학생들은 더 이상 집합을 배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렇다 해서 ‘수포자’가 줄어들었는가? 이에 관한 정량적 평가를 나는 어디서도 접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최근에 맡았던 학생과의 첫날 대화 한 대목을 옮기고 싶다: “그럼 수학을 언제부터 놓았어요?” “….아마, ‘혼합계산’ 배울 때 였던 것 같아요.” 혼합계산은 초등학교 과정이다. 이래도 교과과정의 양이 문제인가?
수학 교육의 문제는 교과과정의 양보다 수학교육이 놓인 환경에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의 목적은 좋은 성적이다. 어느 수준까지는 교과 이해도를 높이는 것보다 문제풀이 기술을 배우는 것이 (시간 대비) 효율적인 성적 향상을 담보한다. 그러나 기초가 부실하면 멀리 가지 못한다. 결국 수포자가 양산된다. 특히 상대평가는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한다. 제한된 범위 안에서 문제의 난도를 높이다 보면 괴랄한 문제가 출현하고, 그런 문제를 맞히기 위해 사교육을 받으며, 다시 그런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한 문제가 출제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그렇다고 시험이 쉬워지면 실수 확률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무한정 문제풀이를 반복해야 한다(선행학습을 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제한된 시수를 문제풀이에 배분하다 보면 당연히 기본 원리 설명에 할애할 시간은 줄어든다.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낙오를 피할 수 없다. 기본 원리를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 문제풀이를 거듭하면 누구라도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교과 내용을 줄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의 평가방식이 유지된다면 교과과정을 절반으로 줄여도 문제가 눈에 띄게 완화되리라 보기 어렵다. 수학 교사들의 자격과 헌신도를 문제삼는 시각은 여기서 기각된다(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주 특별한 개인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러한 제약 하에서 수학 교사들이 학생들의 교과 이해도 제고를 수업 목표로 택하기 어렵다.
결국, 문제는 교수법의 파행을 낳는 평가방식과 교과서의 한계로 인한 자율학습의 어려움에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수학 공교육 체계는 교수자가 필수적이지만 사실상 교수자가 부재한 것과 같은 상황이며 개인이 공교육 범주 안에서 그를 타개하기 어렵다. 이 중 평가의 문제가 압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평가는 교육의 사회적 역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니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자율학습의 문제에 관해 나는 교과서가 보다 충실한 설명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좋은 참고서가 많이 나와 있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하나, 결국 교과서가 자기완결적으로 학습자를 인도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눈감는다(그리고 ‘참고서’의 설명은 많은 경우 요점정리에 지나지 않는다). 최소한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학생이 수학을 포기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 고교 생활은 수학과의 분투기로 요약된다. 특히 고교 1, 2학년 때 수학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선행학습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고 수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흔히들 부딪히는 삼각함수의 벽에서 포기하고 문과를 택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3학년 때에야 전체 그림을 좀 잡았다. 좋은 설명이 있었다면 시행착오가 덜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그리고 경제학과에 진학하게 되는데…) 그 경험이 수학 과외에는 큰 도움이 되었으나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현재 수학 교과서의 편집 방향은 교육부의 방침이라고 알고 있다. 이 방침을 바꾸어 충실한 수학적 설명을 수록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상한 스토리텔링이 아닌 조밀하고 친절한 설명이어야 한다. 이런 문제를 그대로 둔 채 교과과정의 양을 줄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공교육은 보편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나면서부터 미분방정식을 푸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필요도, 모든 사람을 미분방정식을 풀도록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러나 교과의 기본 원리와 사고방식을 익히도록 돕는 것은 결코 공교육이 버릴 수 없는 책무이다. 해당 목표가 달성되지 않고 있다고 해서 교과과정의 축소를 해결책으로 삼는 것은 문제를 우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경을 해체하겠습니다” 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기실 교과과정의 파행적 운영은 수학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심각한데 단계적 학습이 비교적 중요한 수학에서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본질적 문제와 씨름하지 않으면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반복/재현된다. 평가가 사회시스템의 함수이므로 쉽사리 손댈 수 없으니 그렇다 친다면, 현재의 조건 하에서 수학 교사들의 유인을 재설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단순 성과급제 말고. 단순 성과급제는 평가의 문제를 확대할 것이다). 어쨌든 교육의 제1문제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하준 교수가 신작을 내니 기사가 좀 나오는 모양. 첫 기사에 대한 지인의 물음에 답한 댓글을 옮겨 놓는다. 이제 자본주의의 중간 관리자, 꼴통 경제학도 취급 신세만 남았나?
두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겠습니다.
1)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하여 2) 장하준 교수의 주장(의 흐름)에 대하여
2)의 경우 그의 제도주의 스탠스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출판물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1. ‘기존 경제학자’들은 장하준 교수의 주장을 외면했는가?
그의 저작 중 가장 큰 파장을 몰고 왔던 건 사다리 걷어차기(2004)이고, 이에 대해서 ‘기존 경제학자’들도 평한 바 있습니다. 개발경제학의 대가 William Easterly 같은 사람이 서평을 남겼고, 요약하자면 그가 던지는 질문들 자체는 좋지만 backup이 튼실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었죠. 그는 너무 쉽게 상관관계에서 인과관계로 옮아갑니다. 그는 독일 역사학파의 지적 전통에 서서 보호주의 경제정책을 옹호하지만 그 근거는 박약합니다. 보호주의 경제정책을 펴서 성공한 나라들을 예시로 들지만, 실패한 나라가 더 많다는 것을 언급하진 않는다는 거죠. 실증연구도 아니며 사례로 든 표본도 편향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더 물으신다면 부연하겠고, 넘어가겠습니다.
2. 장하준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했는가? 혹은, ‘기존 경제학자’들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는가?
금융위기가 그의 세계적 지명도를 급상승시켰지만 그의 저작을 어떻게 살펴보아도 금융위기를 예측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댓글 마지막에서 제가 읽어본 저작의 리스트를 남기지요.) 형이 LG팬이니까 하는 말인데(ㅋㅋㅋ), DTD는 과학인가요? (ㅋㅋㅋㅋㅋ) DTD는 과학이 아니지요. ‘자유 시장 근본주의’에 대한 그의 주장 역시 (방법론적 의미에서)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죽는다는 말에 동어반복 이상의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금융위기 이후 영국 여왕이 “지금까지 당신들은 무엇을 했지요?”라고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지만, 경제학자들은 금융위기를 예측했습니다. 그를 2014 World Thinkers Ranking 9위로 선정했다는 <Prospect> 지는(이 순위는 그닥 믿을 게 못되어 보이지만) 2위에 라구암 라잔 인도중앙은행 총재를 놓았습니다. 라잔은 이미 2005년에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예측하였습니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Fault Lines』가 그에 관한 내용이지요. 예측을 내놓으면 뭐 합니까?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은 연구자지 실제 투자자가 아닙니다.
3.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실패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가?
기사에서 이런 대목이 있는데.
“2008년 금융위기 직전까지도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시장은 실패가 없고, 그나마 존재하는 사소한 결함은 현대경제학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설파했었다. 1995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루카스는 2003년 ‘공황을 예상하는 문제는 이제 해결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중략)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경제학은 심각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자기 분야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마당에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바로 그 루카스가 도입한 <합리적 기대> 라는 개념은 매우 오도되고 있습니다. 합리적 기대는 무슨 초합리적 인간, 예언가를 상정하는 게 아닙니다. 사당 집에서 연구실까지 딱 한 시간 걸리는데, 그에 바탕해서 10시에 도착할 작정으로 움직였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날 2호선에 문제가 발생해서 30분 지체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제 예측은 잘못되었나요? 결과적으로는 잘못되었죠. 하지만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이 해당 시점에 주어진 정보를 모두 이용하여 할 수 있는 예측이라는 의미에서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합리적 기대는 이런 예측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비되는 개념은 비합리적 기대irrational expectation이 아니라 적응적 기대adaptive expectation로, 과거의 정보만을 이용하여 예측한다는 개념입니다.
‘시장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201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유진 파마가 제창한 시장효율성가설에 대한 오해입니다. 시장효율성가설은 주식시장에 대한 내용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주식 가격에 반영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합리적 기대와 통하는 측면이 있죠. 이것 역시, 정보교란이 발생할 경우 가격에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 시장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는 말입니까.
4. 경제학설사의 논쟁들에 대하여
신고전학파 -정확히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 가 역사상 명멸한 경제학파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사실입니다.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문제는 경제학의 논쟁이 학문 내 권력 싸움으로 묘사된다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재미있겠지요. 하지만 현대 경제학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위에 언급한 라잔은 2005년 앨런 그린스펀 당시 연준 총재의 퇴임식에서 금융위기를 예측했고 자리가 자리인지라 욕을 좀 먹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측은 사실로 드러났고 현재 그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미시분석의 팔 할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임이론은 본디 신제도학파의 것입니다. 행태경제학 역시 충분히 수용되고 있습니다. 논쟁의 문제는 여느 논쟁이 그렇듯 ‘그 주장이 내적으로 정합하며 실증적으로 충실히 뒷받침되는가?’의 문제이지 권력 다툼이 아닙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도 헛소리 하면 deadwood라고 까이는 곳이 경제학계입니다. 대중들에게 장하준보다도 더 유명한 폴 크루그먼도 무지 까입니다. 자기 전공 분야 아닌 것을 많이 말하면서 틀리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폴 크루그먼은 98년에 죽었다는 농담도 있다는…) 학계에 대한 오해를 숱하게 양산해 내기도 했고. 민물경제학 vs 짠물경제학의 구도는 사실상 사라졌건만 그의 저작은 최근까지도 그런 대립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죠. 이럴 때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 및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라는 권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서 무슨 권력 다툼을 논한다는 말입니까? 1. 에서 말했지만 그의 논증 자체는 너무 빈약합니다. 권력 드립은 말이 안 됩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노벨경제학상 수상하며 했다는 말을 옮기지요.
“노벨상은 경제학계의 개인이 가져서는 안되는 권력을 개인에게 수여한다. (..) 이는 자연과학에서는 상관이 없다. 여기서 개인이 휘두르는 영향력은 그의 동료 전문가들에게 휘두르는 영향력이다; 그리고 그가 분수에 안 맞는 짓을 하면 그의 동료 전문가들이 그를 찍어내릴 수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는 다르다. 경제학자들은 일반인들, 그러니까 정치인, 언론인들, 공무원, 그리고 시민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악의 화신이라는 하이에크가 상 받으면서 이런 소리 했습니다. 노벨경제학상 반대하는 의도에서 한 말입니다. 이런데도 권력 소리가 나옵니까? 학계에서의 영향력을 ‘권력’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엉망진창이 되는 것쯤은 잘 아시겠죠.
돌아와서, 현대 경제학의 논리체계 역시 치열한 논쟁을 거쳐 구축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겠지요. 경제학이 과학적 방법론을 가장 잘 수용했다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현대 경제학의 논쟁점 중 하나는 Structural vs. Reduced-form approach으로 계량분석의 접근법에 관한 것입니다. 학자마다 선호가 다르고 상당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결론은 어찌 될지 모르죠. 하지만, 더 robust한 결론을 내놓을 수 있는 접근법이 승리하리라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무슨 학계의 기존 권력에 의해서 결정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5. 결론
저도 배우고 있는 입장입니다만, 경제학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학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슨 우파에 경도된 학문인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접근하는 순간 경제학을 이해할 기회를 반은 잃고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빈곤과 불평등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던 아마티아 센은 사회선택이론에서의 업적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악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밀턴 프리드먼은 징병제를 반대했으며, 공공부조정책을 위해 부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 개념을 제시하였습니다. 어떤 학문/주장에 대해서든 그 이해가 최우선이라는 것을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헛발질만 하게 됩니다. 장하준 교수의 책을 많이 읽었지만, 그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돌아선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논증의 빈약성은 둘째 치고, 케임브리지의 권위를 빌려 너무 많은 오해와 신화를 전파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제가 읽어 본 장하준의 저작은 아래와 같습니다.<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국가의 역할>, <쾌도난마 한국경제> 이 정도면 그의 입장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읽어본 입장에서, 앞의 두 권만 읽어도 충분하다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