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회: 저들은 저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나이다

사랑의교회 도로점유 건이 파국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오정현 “영적 배수진 쳤다. 도로 점용 포기 못 해” – 뉴스앤조이

“뭐 서울시가 뭐라 하든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우리는 늘 얘기하듯이 세상 사회 법 위에 도덕법 있고 도덕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6월 16일, 사랑의교회갱신위원회(갱신위)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에 동영상 하나가 떴다. 영상은 오정현 목사가 자리에 앉아 사랑의교회 건축에 관해 얘기하는 내용이다. 이 영상은 2012년 8월 말 사랑의교회 안성 수양관에서 열린 교역자 수련회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뭐 서울시가 뭐라 하든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우리는 늘 얘기하듯이 세상 사회 법 위에 도덕법 있고 도덕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100~200명이 그렇게 난리를 치고 행정소송한다는 것이, 서초구에만 우리 등록 교인이 2만 수천 명인데. 영적 공공재라는 게 있어요.”
“그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계 변경과 건축 기간 연장 등 수백억의 돈이 더 들어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황당함이 있기 때문에, 결국 그 말은 건축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오정현 목사는 영적 공공재라는 기막힌 표현을 떠올린 자신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 한 마디가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공공재의 정의를 들어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도 그럴 만한 맥락에서나 유효하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자 강제력을 부여한 합의다. 이걸 모르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소위 영적 제사법이 세속법에 우선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려 경제학 곧 “세속 철학”의 언어를 빌려온 모양새만으로 충분히 우습다.

사회법 < 도덕법(?) < 영적 제사법(??)이라는 도식이 맞다고 하자. 그런데 교계가 사회 평균보다 도덕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던가. 개별 목회자나 개별 교회, 개별 단체를 넘어 교계가 그랬던 일은 사실상 없다고 생각한다. 한때는 위대한 인물이라도 있었다. 이제 문익환 박형규 김수환은 떠났고 조용기 김홍도가 원로로 군림한다. 옥한흠이 떠난 자리를 오정현이 차지했고 가장 잘 알려진 기독교 기업은 이랜드다. 도덕법 위에 있다는 영적 제사법까지 갈 필요도 없다.

하지만 도덕적 우월성 상실은 문제의 원인보다는 결과다. 기독교는 도덕률을 신봉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교 윤리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에서 파생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따를 것인가? 오늘날 기독교는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있고, 윤리적 우월성의 기초가 될 고유성singularity을 찾지 못하고 있다. 종교규범이 타협불가능한 진리라고 믿는 기독교 우파, 성서가 쓰인 역사적 맥락context의 휘장 뒤로 돌아가 텍스트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현대적 맥락에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좌파 모두 다르지 않다.

성서가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다고 믿는 기독교 우파는 종교 규범을 사회 규범으로 격상시키려 한다. 술담배, 혼전순결, 동성애 문제를 두고 사회와 불화한다. 기독교 좌파는 윤리적 이슈에 관대하다. 이들에게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세상을 뒤집고[modern_footnote]복음주의 좌파 계열에서 자주 읽히는 도널드 크레이빌의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은 이미 뒤집어진 것이다.” 특별히 급진적인 텍스트에서 인용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modern_footnote] 소수자minority를 껴안은 인물이다. 하느님이 세상의 왕으로서 모든 영역에 관여한다고 선언하고, 그 연장선에서 세속 진보 담론의 “성서적 토대”를 찾아낸다. 악성부채탕감을 모토로 내세운 주빌리은행이 대표적 사례로, 구약성서 희년법이 이 운동의 사상적 배경이다. 또는 성서가 가진 차별적 요소를 찾아내 해명하거나 아예 전복적 해석을 내놓는다. 이런 접근은 전통적 접근과 달리 성소수자 문제에 개입할 여지를 만든다.

이 둘은 접근법이 다를 뿐 성서의 (무오성과) 권위를 복원한다는 목표를 공유한다. 그에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완전히 같다. 우파식 접근은 기독교를 사회로부터 유리시키며, 좌파식 접근은 기독교를 시민윤리 변동에 종속시킨다. 종교와 정치를 뒤섞어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신정법divine law과 현대 민주주의의 정치적 동력을 혼동시킨다는 점에서 좌파 쪽이 어쩌면 더 위험하다[modern_footnote]James Davidson Hunter (2010), 배덕만 역 (2014),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새물결플러스.[/modern_footnote]. 교계가 문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케케묵은 주장을 꺼내 들 생각은 없다. 세상은 변한다. 그렇다면 변화의 물결이 거듭되어도 유효한 질문과 그 답을 찾아내어야 한다. “메마르고 야윈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modern_footnote]Walter Wink (2003), 한성수 역 (2014), <참사람>, 한국기독교연구소, p. 508.[/modern_footnote] 은 무엇인가?

종교는 믿음을, 믿음은 도약을 요구한다. 믿어야 뛸 수 있고 뛰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도약하려면 최소한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무엇을, 왜 믿으라는 말인가. 왜 반드시 기독교여야 하는가. 왜 굳이 초월성이란 요소를 도입해서 인생을 귀찮게 만들어야 하는가. 기독교 우파와 좌파의 접근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도덕적, 윤리적 우월성을 확보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기독교 사상가들이 열심히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그리스도의 유일성, 성경의 권위” 에 관해 설명하지만 그들의 말은 동어반복적이다. 복음주의 사상가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한때 복음주의는 학계에서 죽은 것으로 여겨졌다”는 말로 이들 주제를 다루는 대표 저서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을 시작한다. 그 말은 틀렸는데, 신학계를 제외한 학계에서 복음주의가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계열 유명 잡지 <크리스채니티 투데이>가 이 책을 1997년 도서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이 훌륭한 책은 너무나 널리 읽혀 영문판이 구글 스칼라 기준 110번 인용되었다. 늘상 “주류가 나를 무시한다”고 주장하는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2004) 영문판 피인용횟수가 3226회, <나쁜 사마리아인들>)(2007)이 601회다.

흔히 경제성장이 종교를 위축시킨다고 여긴다. 아니다. 사회학과 경제학 연구자들의 공통된 결론이다[modern_footnote]놀랍게도 종교의 경제학economics of religion이란 분야가 있다. 20-30년 된 “젊은” 응용분과다 (주로 응용산업조직론의 형태. Hotelling, Salop의 공간경쟁모형spatial competition models이 종교시장 분석에 자주 활용된다). 사회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종교현상을 분석해 왔는데, 최근에는 종교사회학-경제사회학-종교의 경제학이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듯하다. 유명한 경제학자들도 관련 논문을 쓴다. 공공경제학 교과서로 잘 알려진 Gruber MIT 교수, 언제나 독창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Zingales 시카고 교수 등등. 이쪽 문헌 중 재미있는 논문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따위 없다는 실증연구가 있다.
경제성장과 종교, 세속화, 다원주의에 관한 참고문헌. 모두 경제학과 사회학 분야 유명 학술지에 게재된 것들이다.
– Buser (2014), “The Effect of Income on Religiousness.”, American Economic Journal: Applied Economics.
– Hungerman (2013), “Substitution and Stigma: Evidence on Religious Markets from the Catholic Sex Abuse Scandal.”, American Economic Journal: Economic Policy.
– Hungerman (2005), “Are Church and State Substitutes? Evidence from the 1996 Welfare Reform.” Journal of Public Economics.
– McBride (2010), “Religious Market Competition in a Richer World.”, Economica.
– McBride (2008), “Religious Pluralism and Religious Participation: A Game Theoretic Analysis”,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 Montgomery (2003), “A Formalization and Test of the Religious Economies Model.” American Sociological Review.[/modern_footnote][modern_footnote]베버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테제를 정면 반박하는 연구는 이거다. 무려 경제학 탑저널 QJE에 실렸다. 제목부터 사회학자들과 한 판 붙어보겠다는 패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초록만 읽어도 재미있다. 1저자 이름이 Sascha다. 캬.. 사스가…
– Sascha O. Becker and Ludger Wößmann (2009), “Was Weber Wrong? A Human Capital Theory of Protestant Economic History.”,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modern_footnote]. 세속화secularization와 다원주의pluralism의 영향은 생각보다 복잡하며 종교가 반드시 쇠락하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속화가 사람들을 탈종교화시키리라는 전망은 종교서비스시장에서 공급이 불변이고 (모임 출석 횟수, 출석 시 시간, 기부금 액수 등으로 측정한) 수요만 줄어든다는 말과 같다. 공급도 변한다면, 그러니까 개별 종교의 수요가 줄어들더라도 다양한 종교 내지 교파가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실은 어땠는가? 데이터는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 유럽은 분명히 세속화되었다(수요 변화가 지배적). 미국에서는 다양한 교파가 출현하고 개별 종교 내지 종파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수요 공급 모두 변화). 한국 기독교는 종교시장이라는 난장에서 어디에 자리잡을 것인가. 적어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어야 하고, 주는 방식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신학자가 아니며 저 주제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다만, 종교시장의 공급자로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공급곡선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한국 교계는 쇠락을 피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쌓아올린 사회적 부를 투자해 정신적 유산을 만들고, 무엇을 믿을지 묻고 답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예배와 모임에서 요구하는 시간을 줄여 기회비용을 낮추는 것도 한 방법이다. 특히 시장지배적 지위에 있는 대형교회, 대형 단체들이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물론 시장지배적 지위를 누리던 자들이 접근성을 높일, 공급곡선을 옮길 리가 없다. 모든 것은 수요 측의 문제니, “불신자들”을 보고 “주님을 모르는 세대”가 오고 있다고 개탄하고, 뜨뜻미지근해 보이는 신자들에게는 “네 돈과 시간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훈계하면 되니까. 믿음대로 될 테니까.

예수는 믿음이 부족했다. 돌을 떡으로 바꾸지도, 성전에서 뛰어내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모른다 할 것이다. 돌을 떡으로 바꾼 자들,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한 자들,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불가능하다던 도로 점용허가를 따낸 자들, “그들이 나를 알지 못하듯 나도 그들을 알지 못한다.”

아무런 기대가 없다. 실망도 하지 않는다. 축적된 종교자본이 사라지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어차피 그들에겐 “종교적” 힘이 없다. 길 찾을 능력과 의지가 없으니 긍정적 영향력이 나올 수 없으며, 더 악화시킬 위상이 없으니 부정적 영향력도 나올 수 없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더라도 놀랍지 않다. 오래 전 길 잃은 무리에게 예정된 파산일 뿐이다.

나는 예수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제도종교와 멀어져 신앙의 변방에서 헤매는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교계가 내 길을 찾아 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헤맬 필요는 없다. 여전히 세상에 예수가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첨탑 세워 십자가 매다는 건 그만두고 사람의 아들을 보는 법을 고민하고 나누어야 한다. 오정현 목사가 공공재 타령을 했으니 그대로 돌려주자면, 교계에서 무엇이, 왜 과소공급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출판업계가 대형 서적 도매상 송인서적 부도 문제로 시끄럽다. 정부도 나섰다. 서울시가 12억원대 서적구매를 조기집행하고, 문체부가 저리 융자를 지원한다고 한다.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은 사태 직후 간담회에서 “2000년도 이전부터 정부와 정치권은 우리나라 출판 문화산업을 사양 산업으로 인식하고 지원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했다. 출판계의 자구 노력을 강조했던 분이 이런 발언을 한 심정은 이해한다. (이분은 2015년 1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출판사가 읽을 만한 책을 만드는 데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느냐 보면 ‘×판’이다. 독자가 안 읽는다고 불평하는 건 양심 없는 짓이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편 유통위원장은 “정부는 ​출판계 유통구조 개선을 민간 출판사에게만 맡겨왔다. 그 결과 출혈경쟁이 이어졌다”라며 “정부는 출판계 인프라 개선에 힘써야 한다”고 했단다.

출판업 경영 및 유통이 매우 낙후되어 있다는 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다. 외환위기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 우선 이번 건에서도 보이듯 어음 돌려막기가 만연하다. 소위 위탁판매제에서 나타나는 출판사-도매상-서점 간 거래관계도 심각하다. 서점은 매대를 제공할 뿐 출판사에서 책을 매입하지 않는다. 책이 팔리지 않으면 반품해 버리면 된다. 팔리지 않을 때의 리스크가 출판사에게 지나치게 전가된다.

그러나 출판계 의견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도서정가제 개정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 노력으로 정부가 유통구조(거래관행)에 개입해 달라는 편이 더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소비자 저항도 훨씬 적었을 것이다. 게다가 도서정가제가 출판업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에는 근거가 없었다. 유통구조 개선을 위해 가격규제(재판매가격제한)을 도입하다니, 그야말로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도서정가제가 해법이 아니라고 경고했고, 경고는 현실화되었다.

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도서정가제의 경제적 귀결은 처참하다. 도서가격(베스트셀러 및 스테디셀러)이 상승하여 사실상 담합 상태다. 온라인 거래액이 하락했고 가격 상승을 감안하면 거래량 역시 하락했다. 온라인 거래액이 하락한 만큼 오프라인 거래액이 상승했을까? 오프라인 서점 거래액 통계는 없지만 소비자들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넘어가려면 수요가 가격 변화에 아주 둔감해야 한다. 게다가 서적 구매경로에서 동네서점이 차지하는 비중은 8.15%에 불과하다.

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그런데…정가제 시행 후 송인서적 재무는 약하게나마 호전되었다. 기초적인 재무지표만 살펴보았지만 2013년과 2015년 연말을 비교하면 매출액, 영업이익, 당기순이익, 매출액증가율, 영업이익증가율 모두 상승했다(수익성 및 수익성 추이 향상). 자기자본비율은 상승하고 부채비율은 하락했으며(건전성 향상), 유동성 비율은 상승했다(지급여력 향상). 도매상이 열매를 독점했다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어차피 부도나지 않았나. 정가제가 당초 홍보했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에 정책을 요구하는 역량은 한정되어 있다. 출판계는 근거 없는 낭만 때문에 역량 배분에 실패했다.

송인서적 부도에 관한 메모

나는 다독가는 못 되지만 애서가를 자처한다. 밥 먹는 것 다음으로 책 사는 데 돈을 많이 쓴다. 책값 오르는 걸 환영하진 않지만 책값 때문에 살 책을 안 사진 않는다. 또한 한국어 화자로서 한국 출판업 성장을 진심으로 소망한다. (물론 정도가 있다. 어제 스티븐 스티글러 <통계학의 역사> 가 품절이고 중고가가 정가의 3배에 육박하는 걸 보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뿐인가?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는 절판 후 정가의 10배 가격에 거래되었다. 아, 한국 출판업 얘기하면서 정작 예시가 둘 다 해외 저자 아니냐는 태클은 사양한다.) 출판업계가 “구조개혁”과 “정부지원”이라는 공허한 구호만 부르짖지 말고 실질적 대책을 찾기를 바란다. 한국 시장은 작다. 이 사실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자료

도서정가제 개정 전 부작용을 경고한 KDI 보고서:
조성익(2014), 유통기업의 가격설정능력과 전자상거래의 효과: 도서유통시장 사례를 중심으로.

도서정가제 개정 후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KDI 보고서:
조성익(2015), 도서정가제의 경제적 효과.

 

 

주님의 기업 이랜드, “임금꺾기”로 세상과 구별되다

이랜드가 “임금 꺾기” 꼼수를 활용해서 지급하지 않은 임금총액이 83억, 피해자 4만 명이라는 기사가 떴다.

기사에서 소개된 “임금 꺾기”는 이랜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랜드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가령 커피 프랜차이즈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댓글에 달아 둘 텐데,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커피전문점 노동자들의 근무환경을 조사한 바 있다. 대략 비슷하다.

“노동시장에 저숙련노동자가 초과공급된 상태에서, 균형임금보다 최저임금이 높아 이런 변칙이 발생한다.” 그러지 말라고 최저임금법 제정한 거다. 그리고 한국 최저임금은 지난 10-15년간 가파르게 인상되었는데 (그 전에는 너무 낮았다), 이랜드는 10년 전에도 이랬다. 그 때도 최저임금이 너무 높았다고? 오바마의 대답을 들려주겠다. “Go, and try it.”

저숙련 노동이라고 해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 역시 생산에 기여한다. 생산에 기여한 만큼 – 그러니까 부가가치 – 받아가는 게 미시경제학의 기본이다. “임금은 한계생산물가치와 같다.” 누가 더 하라고 했나.

그게 아까워서 인건비 아끼고 싶으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한다. 아마존이 창고 인력 줄이려고 로봇 개발한 것처럼. 그건 물류업체고 우린 유통뿐 아니라 요식업도 한다고? 맥도널드는 전자주문 도입했다. 패스트푸드와 우리는 다르다고? 고급화 전략을 취할거면 그거 만드는 인력에게도 그만한 대접을 해 주어야 한다. 임금은 한계생산물가치랑 같다니까.

그게 어디 쉽냐고 묻는다면, 그런 걸 해내는 걸 기업가 정신이라고 한다. 기술진보가 바로 같은 노동량 투입해서 더 많은 생산을 하는 것, “생산성 혁신”을 말하는 것이다. 경영자, 임원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는 건 혁신을 포함한 경영상의 결정을 잘 하라는 것이다. 못하겠으면 제 값 치르고 사람 써야지. 아니면 직접 나와서 만들던가. 그게 싫으니 만만한 사람 후려치기 하는건데. 할 줄 아는게 문어발식 사업확장 & 알바 후려치기 뿐인가?

헌금할 돈으로 임금지불이나 제대로 제 때 하기 바란다.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1-(1). 톺아보기: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0. 들어가며

구약성서 레위기 2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어느 누구든지, 주에게 사람을 드리기로 서약하고, 그 사람에 해당되는 값을 돈으로 환산하여 드리기로 하였으면, 그 값은 다음과 같다.스무 살로부터 예순 살까지의 남자의 값은, 성소에서 사용되는 세겔로 쳐서 은 오십 세겔이고,  여자의 값은 삼십 세겔이다. …” (새번역 레위기 27:1-4. Fuchs (1971))

성 격차gender gap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자연스레 노동시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저 성서 구절도 괄호 안에 쓰인 경제학 논문 도입부를 따온 겁니다. 연구 과정에서 여러 방법론을 탄생시키며 노동경제학 발전을 촉진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학계의 중심, 미국의 경우 1990년대 들어 각종 불평등이 심화되었으나 성 불평등은 완화되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이 현상을 “젠더 대수렴The Great Gender Convergence“으로 명명했습니다(Claudia Goldin 하버드대 교수). 비슷한 맥락에서, 시대적 조류를 거스르는 현상(“Swimming Upstream”)이라 쓰기도 합니다(Francine Blau 코넬대 교수). “수렴”이 곧 완전 성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대폭 완화되었다는 점에는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이 글은 한국의 성평등 현황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손에 잡히는 숫자가 필요합니다. 노동시장을 대표하는 지표는 뭐니뭐니해도 고용과 임금입니다. 이외에도 성 격차 지표가 많고 이 둘을 측정하는 방법도 여럿 있지만 여기서는 전통적인 지표를 택하겠습니다. 고용 지표로 경제활동참가율/고용률, 임금 지표로 시간당 임금 (그냥 임금이라 생각하면 됨)을 보겠습니다. 설명하겠지만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용어를 설명하겠습니다.


용어 설명

– 인구 분류:

노동시장을 분석할 때 인구를 보통 이렇게 분류합니다.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경제활동 상태에 따른 인구 분류

 

그리고,

경제활동참가율 = 경제활동인구/생산가능인구

고용률 = 취업자 / 생산가능인구,

실업률 = 실업자 / 생산가능인구

로 정의합니다. 생산가능인구 모두가 경제활동에 참가하면 경제활동참가율이 100%, 아무도 참가하지 않으면 0%가 되는 식입니다.

 

코호트:

어떤 특성을 공유하는 인구집단을 가리켜 코호트cohort라고 합니다. 가령 1970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1970 출생코호트”, 1980-84년에 결혼한 사람들은 “1980-84 결혼코호트”입니다. 1970-74 출생코호트가 50-54세가 되는 2020년에 평균소득을 알아보려면 50-54세 자료를 보면 됩니다. 통계적으로 세대 차이를 감안하는 방법이라 생각하세요.

※ 표와 그래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 수치는 모두 퍼센트입니다.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한국 경제활동참가율은 최근 20년간 남성 70-75%, 여성 50% 내외로 안정적입니다. 그런데 20%p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요? 이 질문에서 출발해 보겠습니다. 성별 참가율을 연령별로 보면 이렇습니다.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자료: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2015).

남성 참가율 곡선은 매끈하게 증가했다 감소합니다. 이런 형태를 흔히 역U자 곡선inverse-U shaped curve이라고 합니다. 반면 여성은 30대에 뚝 떨어졌다가 40대에 어느 정도 회복됩니다만, 벌어진 차이는 메워지지 않습니다. 20대는 남성을 앞서거나 비슷한데요. 보통 한국 여성 경제활동참가율 곡선의 이런 형태를 “M-커브M-curve 현상”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요?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결혼, 출산, 육아가 대표적인 원인입니다. 그건 세계 누구나 겪는 일 아니냐고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눈금 한 칸이 20%라는 데 주의하세요. 생각보다 큽니다.)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자료: ILO (2015). 출처는 본인의 석사학위논문.

다른 나라 여성 참가율 곡선은 한국 남성과 비슷한 역U자 형태입니다. 일본이 한국과 비슷한 M-커브 형태입니다. 경제규모가 어느 정도 이상인 국가 중 한국과 일본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났고, 일본은 최근 10년간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그림에서도 한국보다 일본 곡선이 더 위에 있습니다. 같은 연령대로 비교하면 일본 참가율이 더 높다는 말이지요. 한국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면 역U자 곡선의 일부가 되었을 여성들을 가리키는 단어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경력단절여성”, 줄여서 “경단녀”. 20%p 격차가 여기서 출발합니다.

아니, 미국은 무려 “수렴”했다고 하고, 일본도 나아졌다는데 한국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요? 그래도 지난 세월 많이 나아졌습니다. 지난 50년간 데이터로 그린 연령별 참가율 곡선을 두 개 보겠습니다. 색깔이 진해질수록 현재와 가까워지고, 위로 올라올수록 “좋아지는”겁니다.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자료: 각년도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위 그림은 연도별-연령별 참가율, 아래 그림은 연령별-코호트별 참가율입니다. 5년마다 15-19세 코호트를 새로 추적한 것입니다. 현재 30대 중반인 1995 15-19세 코호트 (1976-80년생) 까지만 의미가 있고, 그 뒤 코호트는 참고만 하십시오.

사실 경활참가율을 단순 연도별로 비교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2014년을 예로 들면, 해당연도 참가율 곡선엔 2014년 20-24세 집단(1986-90년생)과 55-59세 집단(1955-59년생)이 공존합니다. 단순히 이 자료를 이용해 비교하면 세대 차이가 무시됩니다. 코호트별로 보면 여성이 나이 들며 발생하는 변화를 세대별로 관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연도별 비교에는 시대 변화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연도별 그림을 보면 50년간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코호트별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20대 여성의 참가율이 눈에 띄게 상승했습니다. 맨 처음 그림(2015)에서도 20대에는 성별 격차가 거의 없었지요. 그런데 코호트별로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35세 이상으로 가면 코호트별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일자리가 없대도 그렇지, 30년 차이가 나는 1966 코호트와 1995 코호트에 기껏해야 5%p 차이밖에 없다니요. (잠깐! 20대 초반 참가율이 1985 코호트 이후 하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학교육 확대입니다.)

이 숫자들은 채용 차별이 과거에 비해 완화된 것이 사실이나 직장-가정생활 병행이 여전히 어렵다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한창 육아에 바쁠 35-44세 참가율에 코호트별 차이가 없다시피 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한편 20대 참가율 상승은 여성들이 대학에 더 많이 가고, 결혼이 늦어지며 과거 20대에 그만두던 사람들이 30대에 그만두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조삼모사 같지만 그럼에도 30대 참가율은 하락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느리게나마 바뀌고 있다는 뜻입니다.

2001년 11월 정부는 일-가정 양립 정책의 일환으로 출산전후휴가 기간을 60일에서 90일로 확대했습니다. 늘어난 30일분의 급여를 국가에서 지원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육아휴직 급여도 고용보험기금으로 지급하기 시작했지요. 이 때부터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사용자 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산휴가가 1953년, 육아휴직이 1987년에 도입되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늦었습니다. 이듬해부터 집계된 통계를 보면 30대 참가율이 하락하지 않은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modern_footnote]이 통계는 공식 자료를 기반으로 제가 산출한 것이라 오차가 있습니다. 심각하진 않을 거고, 있더라도 실제보다 높은 수치는 아닐 겁니다. 현실이 이 통계보다는 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적당히 참고하세요. 설명은 마지막에 나옵니다.[/modern_footnote].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자료: 각년도 통계청 인구동향조사, 고용보험 DB

간신히 한 자리 수를 유지하는 2002년 수치가 말합니다. 사용이 어느 정도 되어야 집계되는 법이라고요. 다른 자료를 보아도 상황이 비슷합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1970년대부터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실태조사』라는 이름으로 인구·가족 관련 조사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성의 일-가정 양립, 그러니까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관한 내용도 다룹니다. 그런데 2006년에야 이 항목이 포함되었습니다. 법 개정 직후인 2003년 즈음에는 집계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간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보시다시피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모두 사용률이 급상승했습니다. 출산휴가가 보장되는 직장에서 육아휴직도 보장될 거라고 가정하면, 출산휴가 쓰는 사람의 90% 가까이가 육아휴직도 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둘 중 하나만 쓰는 사람이 있으니 저 정도는 아니겠지만, 전반적인 추세가 바뀌진 않을 겁니다.) 실질적인 육아조건이 대단히 개선된 것입니다. 이게 30대 참가율이 하락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실질 보장 수준이 저렇게 향상되었다면, 보장받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역시 자료를 보겠습니다[modern_footnote]이 표의 수치는 좀 큽니다. 2011년 이후에 마지막으로 출산한 사람들 중 한 번이라도 제도를 활용한 사람이면 사용했다고 응답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2015년에” 사용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몇 년치가 누적되었다는 것이지요.[/modern_footnote].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주: <2015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실태조사>에서 인용. 편의를 위해 주요 수치 위주로 재편집.

위에서 언급한 보건사회연구원 2015년 조사에 따르면 주로 공공기관 근무자, 관리·전문직들입니다. 교사와 공무원이 최고라는 인식이 여지없이 확인됩니다. 파란 상자를 보면, 현재 경력단절을 겪는 사람들조차 다른 직장·직종 평균 내지 이상으로 출산육아 보조제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들만 써먹고 있다기보다는 아직 일반 직장에서 제도가 널리 활용되고 있지 않은 것이지요.

한편 경력단절 여성의 경우 비단절 여성에 비해 전반적으로 사용률이 낮습니다. 보조제도 사용과 경력단절 여부 사이에 매우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직 보조제도가 경력단절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계속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 직장으로, 보통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직장으로 간다면 제도보다 성향의 영향이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쇼, 이런 보조제도를 곤란해하는 직장이라면 애초에 여성 채용을 꺼리는 곳 아니겠어요? 그래서 다들 공무원 교사 하려는 거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요.” 옳은 말씀입니다. 문제는 현상의 원인이 정말 차별이냐는 질문 역시 가능하다는 겁니다. 역시 매우 오랫동안 연구된 주제입니다. 이렇게 성별로 종사산업이나 직종이 나뉘는 현상을 성별 직종분리occupational segregation라고 합니다. 아니 이 작자가 보자보자하니까 도대체 뭐라는거야? 싶으시다면 조금 더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다음 글에서 성별 직종분리를 다루겠습니다.


(참고) 출산휴가, 육아휴직 사용률 산출 방법

사용률은 (정책 수혜자 수) / (일하는 산모 수)로 계산합니다. 분자와 분모를 어디서 얻었는지 설명하면 되겠지요. 먼저 분자를 보겠습니다. 국가통계포털 KOSIS에는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에서 나온 출산휴가, 육아휴직 사용자 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출휴, 육휴 급여를 국가에서 받은 사람 수입니다. 이걸 가져왔습니다. 자영업자, 소규모 사업체 종사자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보다 적은 수치입니다.

분모가 문제죠. 출산 중 사고로 산모가 사망하는 경우는 미미하다고 하고, 쌍둥이를 감안하고 나면 출생아 수는 산모 수와 같습니다. 여기에 연도별 평균 가임기 여성 (15-49세) 고용률을 곱해 분모를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오차가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전체 추세를 보려고 하는 것이니 이 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했듯 보건사회연구원 자료는 회고적 자료 (과거 기억을 묻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연도 자료 (횡단면)를 보려면, 보다 복잡한 보정을 하지 않는다면 이 정도가 최선이겠습니다. 논문 쓰는 건 아니니까요.

내용이 좀 심심하죠? 뭘 이리 장황하게 썼나… 싶을 수도 있는데, 민감한 주제기도 하고, 단편적인 수치 나열만 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써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 노잼 숫자놀음을 누가 읽을지 모르겠지만요. ^^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들어가는 글

포스팅 예고.

한 해 동안 젠더 이슈가 많았습니다. 논의를 따라가며, 여성 노동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쓴 노동경제학 전공자로서 한 가지 아쉬웠습니다. 논의가 주로 용어, 태도, 문화에 국한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 이론과 통계자료를 통해서도 성평등, 혹은 성차별 문제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 주제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학계 밖으로 나오면 몇 가지 수치만 단편적, 편의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제의 중요성과 축적된 연구성과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고, 일반 독자를 위한 글도 찾기 어려운 것 같아 노트로 정리해 보려 합니다.

논문도 아니고 방대한 문헌을 다 요약할 순 없으니 정말 기초적인 몇 가지만 다룹니다. (여러 개 다룰 만큼 알지도 못합니다. 언젠가 시리즈를 쓰고 싶은데, 그 프리퀄 격으로 생각합니다.) 다루는 주제나 내용이 특별히 새롭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통계를 소개하고 이론적 설명을 좀 달았습니다. 관련 연구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법한 내용이고, 몇몇 통계는 통념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주는 정도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안 팔릴 건 압니다. 일단 그래프가 많이 나오거든요. 최대한 쉽게 써 보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려 합니다. 거창하게 “성평등(gender equality)”이라고 제목을 달았지만 이 글은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통계가 생물학적 성별을 기준으로 작성되기 때문입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불평등 문제에 무관심한가?

불평등 문제를 교육과 기술혁신 곧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통해 설명한 <교육과 기술의 경주 (The Race between Education and Technology)>(Goldin & Katz, 2009)를 읽고 있다. 소위 주류경제학과 불평등 문제의 관계를 한큐에 요약한 부분이 있어 옮겨 본다. 저자 둘 모두 하버드 경제학과 교수, 덤으로 부부다. 그러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연구자들이 불평등 심화를 인지한 1980년대에 그 중요성을 믿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몇몇은 현상을 면밀히 검토하고, 다른 척도(measure)로 교차검증하면 희석되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던졌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크게 심화된 미국 경제불평등은 척도와 자료를 바꾸어도 꾸준히 관찰되었다. 다른 연구자들은 소득불평등 변화가 저축-차입 상쇄에 따른 가계소득의 일시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1970년 끝 무렵부터 나타난 경제불평등 현상은 실재한다.”

“미국 경제성장률은 지난 10년간 회복되었으나, 성장의 과실은 과거보다 훨씬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근로소득은 국민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대다수 미국 가계는 근로로 생계를 꾸리므로, 불평등 심화에 관한 이야기는 곧 노동시장과 근로소득불평등 변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번역은 본인의 것)

딱히 주류경제학은 불평등에 관심이 없냐고 성토하는 글이라거나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데 불평등 타령하냐는 글 연속으로 봐서 올리는 거 맞다. 경제 양극화가 문제라는 주장이나, 문제없다는 주장이나 의견의 양극화를 부추기기는 매한가지다.

이하는 원문.

“When rising inequality became noticed by researchers in the 1980s, some initially doubted its significance. Some questioned whether the facts would stand up to closer scrutiny and to a wide range of measures. But the large increase in U.S. economic inequality since the late 1970s is robust to a host of alternative measures and is revealed by many data sources. Other researchers were concerned that income inequality changes reflected no more than a rise in the transitory variation in household income that was offset through saving and borrowing, but that does not appear to have been the case. The sharp rise of income inequality of the 1980s is echoed in the large increase in the inequality of consumption per adult equivalent among U.S. households and in long-run measures of family incomes and labor market earnings. Rising economic inequality since the end of the 1970s is a very real phenomenon.”

“U.S. economic growth has recovered over the last decade, but the benefits of economic growth are now far less equally shared than in the past. Only the top part of the U.S. income distribution has seen income gains in recent decades as strong as in the pre-1973 period. Because labor income makes up the vast majority of national income, and since most American families make their living from work, the story behind rising inequality is one about the labor market and changes in the inequality of labor market earnings. We now turn to documenting recent trends in U.S. wage inequ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