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리버럴리즘의 종말 (The End of Identity Liberalism) | NYT (Nov 20, 2016)
마크 릴라(Mark Lilla), 컬럼비아 대학교 인문학 교수. 정치철학. 『사산된 신 (The Stillborn God)』 저자.
칼럼 소개
마크 릴라 컬럼비아대학교 교수는 서구 정치·종교사상사를 연구한 학자입니다. 그는 계몽주의와 그 비판의 역사를 연구하고, 다른 주제로 정치와 종교의 상호연관을 탐구합니다. 2007년 출판한 <사산된 신>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 100선 선정)은 정교분리를 표방하는 서구 자유-민주주의가 끝내 종교와 결별하지 못했고, 정교분리라는 목표란 달성하기 어려우며, 정치신학(또는 신학-정치)의 뿌리가 매우 깊다는 것을 밝힌 역작입니다.
이 글은 지난 11월 대선 이후 마크 릴라가 민주당 패배 요인을 분석한 글입니다. 기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에 책임을 돌리는 글은 많았습니다만, 대부분 단순히 PC를 비난하는 데 그쳤습니다. 이 글은 정치적 올바름이 민주주의의 기초가 될 수 없음을 차분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글이 기고될 때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는 당선자 신분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 취임 후 행정명령을 난발하고 있는 지금, 트럼프 현상에 여전히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공유합니다.
아래는 기고문을 읽고 나서 그의 예전 저작을 참조하여 릴라 사유의 배경을 짐작한 것을 조금 쓴 겁니다. 정치철학에 관해 잘 모르니 몇 마디만 보탭니다.
근대 정치철학은 종교개혁이 낳은 파국, 30년 전쟁이 일단락된 베스트팔렌 조약을 배경으로 탄생했습니다. 종교적 열정이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력을 제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고,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그 문제를 정교분리의 원칙으로 답했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뒤로하고 서로 “이를 꽉 깨물고” 존중하라. 종교는 공론장에서 위협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고, 대신 국가는 종교 통제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오늘날 보편원칙이 된 관용tolerance이 여기서 출발합니다.
릴라는 정교분리가 소원처럼 깔끔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서구 사상사에서 정치신학적 사유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2차 세계대전, 근대의 모든 정신적 유산이 파괴된 “문명의 붕괴” 현장은 종교가 공론장에 재등장하는 계기이자 무대였습니다. 냉전기 정치 이념들은 나야말로 인류를 “구원하리라”고 속삭였죠. 릴라에 따르면 정교분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듯한 현대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사상적 토대가 일정 부분 종교적 사유와 언어에 침습되어 있습니다. 정치 질서가 위태로울 때 종교적 열정이 목소리를 내거나, 사람들이 종교를 호출할 태세가 갖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미국 우파 복음주의의 거두 제리 포웰Jerry Falwell 목사가 설립한 단체 이름이”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라는 데서 손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머리 아프지만 당신이 믿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으며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요. 1980년대 미국에서 보수적 가치의 옹호자를 자임한 도덕적 다수는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니었습니다. 20개 주 조직, 4백만 회원과 2백만 후원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도덕적 다수의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로버츠 빌링 목사가 레이건 선거운동의 종교담당 보좌관이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자유주의의 기초를 놓은 홉스는 종교적 열정이 공포에 기원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위협받으며 느끼는 공포를 종교적 열정으로 치환하고, “구원받기” 위한 선택을 한 결과 트럼프 대통령이 탄생했다, 저는 이것이 릴라의 현실인식이 아닌가 합니다. 이 글에서는 전략만을 말하며 (본인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지만요.
언제나 그렇듯 모든 안경은 현실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릴라 역시 현실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지는 못합니다. 당장, 어쨌든 힐러리 클린턴은 총득표 수에서 승리했죠. 하지만 민주주의의 기초를 고민한다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LA에서 백인 여성이 한국계 노인을 공격하는 등 갈등이 격화되고 있지만, 어쨌든 외부 관찰자인 한국 독자들은 어느 쪽을 비난하기보다 한 발짝, 적어도 반 발짝 밖에서 상황을 고민하기 유리하겠지요.
지적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단, 리버럴리즘이 미국 진보주의를 의미하는 건 압니다. 현재 리버럴리즘의 용법이 대단히 미묘하며 개념도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옮겼습니다. 모든 주석은 역주입니다.
미국 사회가 점점 다양화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보기 좋은 일이다. 외국 관광객, 특히 인종·종교 간 융합에 난항을 겪는 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이를 해내고 있는 미국을 보며 놀라워한다. 물론 완벽하지 않지만, 오늘날 어떤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보다 낫다. 다양성 확대를 이루어 온 미국 역사는 보기 드문 성공담이다.
그런데 다양성에 따라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가 바뀐다면, 어떤 쪽이 바람직한가? 지금까지 약 한 세대 동안 차이를 인지하고 “예찬”해야 한다는 것이 리버럴 표준 답안이었다. 도덕교육(moral pedagogy)의 찬란한 원칙이지만, 오늘과 같은 이념적 시대에 민주정치의 기초로는 형편없다. 최근 미국 리버럴리즘은 인종, 생물학적·사회적 성 정체성에 관한 도덕적 패닉에 빠져들었다. 이는 리버럴의 메시지를 왜곡했고, 리버럴이 수권 능력을 갖춘 통합된 힘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이번 대선 캠페인과 그 불유쾌한 결과의 여러 교훈 중 하나는 정체성 리버럴리즘 시대의 막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세계 정세에 있어 미국의 이익,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민주주의 이해와 연관되는지를 논할 때 가장 탁월하고 사람들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국내 문제로 오자 클린턴은 선거 유세 중 그 넓은 시야를 잃고 다양성 수사법(the rhetoric of diversity)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가는 곳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라틴계, LGBT, 여성 유권자를 콕 짚어 불러냈다. 이는 전략적 실수였다. [다양화된] 미국에서 어떤 “집단”을 거명하려면 모든 집단에 대해 말해야 한다. 불리지 못한 사람들이 배제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데이터에서 나타나듯, 이것이 바로 백인 노동계급 및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이다. 대졸 미만 백인 유권자의 3분의 2가 모두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고 백인 복음주의자의 80% 이상 역시 그랬다.
도덕적 힘 – 정체성과 밀접한 – 에는 물론 순효과가 여럿 있다. 적극적 평등실현조치affirmative actions는 기업 문화를 바꾸고 개선시켰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modern_footnote]2012년 트레이본 마틴 살인 사건 이후 시작된 흑인민권 운동.[/modern_footnote]은 모든 양심적 미국인에게 경종을 울렸다. 대중문화에서 동성애를 정상화하려는 할리우드의 노력은 미국 가정과 공직에서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학교와 언론이 다양성에 집착한 결과, 자기 도취에 빠져 스스로 규정한 집단 바깥 상황에 무지하고, 각계각층 사람들과 접촉한다는 [긴요한] 과제에는 무관심한 리버럴과 진보주의자progressives 세대가 출현했다. 미국 아동들은 정체성이 형성되기도 전인 아주 어린 시기부터 개인 정체성individual identity에 관해 말하도록 주문받는다. 대학에 올 때쯤 그들은 당연히 다양성 담론이 정치 담론을 망라한다 여기고, 계급과 전쟁, 경제, 공공선 등 오래되고 언제나 중요했던 문제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다. 이는 고교 역사 교육과정이 시대착오적이게도 현대식 정체성 정치the identity politics of today를 과거에 투사하고, 우리 나라를 만들어 온 위인과 원동력에 대해 왜곡된 상을 만들어내는 데 상당 부분 기인한다. (가령 여권 신장 운동이 거둔 성취는 실제로 중요했지만, 권리 보장에 기초한 정치체제를 수립한 건국의 아버지들the founding fathers의 업적을 먼저 이해해야 그 성취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학에 온 젊은이들에게, 학생 집단과 교수진, 또한 다양성 전담 행정 관리자들은 “자기 [생활과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정체성 정치에 초점을 맞추고 “다양성 이슈”를 중시하라”고 권고한다. 폭스 뉴스 및 다른 보수 매스컴은 이들 이슈를 둘러싼 “캠퍼스 광기”를 조롱하고, 대개 옳다. 이런 식으로는 대학 캠퍼스에 한 발짝도 들여놓은 적 없는 사람들의 시선에 교육의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대중 선동가 손에 놀아날 뿐이다. “대학생들에게 ‘불리기를 원하는 젠더 대명사designated gender pronouns‘를 선택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의 소위 도덕적 긴급성the supposed moral urgency을 평균적인 유권자에게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유권자들이 젠더 대명사 자리에 “황제 폐하”라고 썼다는 짓궂은 미시간대 학생 이야기[modern_footnote]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가 학내 사이트 개인정보 기입 시 학생들에게 (기존의 Mr., Ms. 등이 아닌) 자유로운 젠더 대명사를 써도 좋다고 하자, 한 학생이 “황제 폐하(His Majesty)”라는 대명사를 입력하며 비꼬았다. 이 기사 참조.[/modern_footnote]에 폭소를 터뜨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캠퍼스식 다양성 의식campus-diversity consciousness[modern_footnote]”다양성 의식”이라는 표현이 그리 직관적이지 않다면 유사한 조어인 “역사 의식”을 떠올리면 되겠다. 아니면 맥락상 의미가 유사한 “젠더 감수성”을 대신 집어넣어도 이해가 빠를 듯하다.[/modern_footnote]이 수 년간 리버럴 언론에 요란하게 침투했다. 미국 신문방송계에서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적극적 평등실현조치는 보기 드문 사회적 성취를 거두었다. Megyn Kelly 前 Fox News, 現 NBC News 앵커, Laura Ingraham라디오 프로 The Laura Ingraham Show 진행자같은 언론인이 명성을 얻으며, 우익 미디어의 얼굴을 문자 그대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어 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한편 소장 언론인·편집자 사이에서 정체성에만 치중하면 할 일을 다 한 것이라는 식의 억측을 조장했다.
최근 프랑스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나는 작은 실험을 했다. 1년 내내 유럽 언론 기사만 읽고 미국 언론엔 손대지 않았다. 유럽 독자들처럼 세상을 보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생각보다 훨씬 유익해서, 나는 미국 기사를 읽으며 근년간 정체성이라는 렌즈가 어떻게 미국 언론보도를 바꾸어 왔는지를 알아차렸다. 가령 “최초로 Y를 해낸 X” 식의 게으른 기사가 재삼 보도된다[modern_footnote]”최초로 유리천장을 뚫고 IT 대표 기업 CEO가 된 …” 식 기사를 말한다. 이 기사 제목이 익숙하다면 바로 읽었다. 한성숙 현 네이버 대표이사가 취임할 때 국내 언론에서 무수히 쏟아진 헤드라인이다.[/modern_footnote]. 정체성 드라마에 열광하는 보도 행태는 안 그래도 보도가 부족한 해외부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이집트 성전환자transgender들의 운명을 다룬 기사[modern_footnote]이런 기사를 말하는 듯하다. Liam Stack, “Gay and Transgender Egyptians, Harassed and Entrapped, Are Driven Underground“, NYT 2016년 8월 10일.[/modern_footnote]가 그렇다. 아무리 흥미롭더라도, 이집트의 미래를 결정하고 미국에도 간접적 영향을 미칠 유력 정치적·종교적 조류[modern_footnote]무슬림 형제단을 가리키는 듯하다.[/modern_footnote]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유럽의 어떤 메이저 언론사도 그런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 정체성 정치가 가장 화려하게 실패한 곳은 선거정치electoral politics다. [정치 담론이] 건전했던 시절 국가정치는 “차이”가 아니라 공통성commonality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운명에 관한 사람들의 상상을 가장 잘 포착하는 사람이, 그가 누구든 국가정치를 지배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아주 잘 해냈다. 그의 비전을 무어라 생각하건. 레이건 전술을 모방한 빌 클린턴도 그랬다. 빌 클린턴은 민주당을 장악해 정체성-의식을 중시하는 계파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고, (국가건강보험처럼)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국내 정책에 힘을 쏟은 한편 1989년 소련 이후의 세계에서 미국이 맡을 역할을 규정했다. 그는 재선에 성공하며 민주당 지지세력 내의 여러 집단을 위해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정체성 정치는, 표현이야 아주 풍부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정체성 정치가 선거에서 결코 승리하지 못하며, 오히려 패배할 이유이다.
미국 언론이 분노한 백인 남성에게 인류학적이라고까지 할 법한 관심을 기울이자, 이들 비난받고 숫제 잊혀졌던 집단에 대해서만큼이나 리버럴리즘의 현주소도 낱낱이 드러났다. 리버럴들은 이번 대선을 두고 트럼프가 경제적 손해를 인종적 분노로 바꾼 것이 주효했다는 손쉬운 해석을 내놓는다. 이른바 “백인우월주의 반동” 명제the “whitelash” thesis다. 이렇게 해석하면 여전히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한편 다른 유권자들이 주장하는 우선 관심사를 무시할 수도 있어 편리하다. 공화당이 장기적으로 인구통계학적으로 끝장나고 리버럴이 미국을 접수하리라는 망상을 부추겨 현실에 눈감을 수도 있다. [실상은] 트럼프의 라틴계 득표율이 예상 외로 높았다는 사실로부터 인종 집단이 미국에 오래 머무를수록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분화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끝으로, 백인우월주의 반동 명제를 받아들이면 다양성에 대한 강박 때문에 다른 미국인들, 백인이고 지방민이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체성이 위협받거나 무시받는 소외 집단이라고 여기게 된 책임을 면피할 수 있어 편리하다.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다양화된 미국의 현실에 반발하며 나서진 않는다 (그들은 어쨌든 비교적 동질 지역에서 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으로 일컬어지며 도처에서 울려퍼지는 다양성 수사법에 반발하고 있다. 리버럴들은 아직도 존속하는 KKKKu Klux Klan가 미국 정치 최초의 정체성 운동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정체성 놀음에 빠진 사람들은 패배를 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탈-정체성 리버럴리즘a post-identity liberalism이 필요하다. 이는 정체성 정치 이전의 리버럴리즘이 거둔 성공에서 출발해야 한다. 새 리버럴리즘은 [정체성 집단 성원이 아니라] 미국 국민으로서의 미국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 다수에게 중요한 사안을 강조하여 지지기반을 넓히는 데 집중해야 한다. 시민이라면 공존하며 서로 도와야 하는 국가[공동체]로서의 미국을 말해야 한다. 범위가 한정된 사안, 특히 섹슈얼리티나 종교와 연관되어 상징성이 강하며 잠재적 지지자의 마음을 돌아서게 할 법한 사안은 점잖고 섬세하게, 적절한 수준으로 다루어야 한다. (버니 샌더스 식으로 말하자면, 미국은 리버럴들의 빌어먹을 화장실 타령에 신물이 났다.)
이에 투신하는 교사들은 민주주의 질서가 부여한 정치적 책임에 다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미국의 정부 체제, 역사상 주요 사건과 중요 세력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는 열성적 시민 육성이 바로 그 책임이다. 탈-정체성 리버럴리즘은 또한 민주주의 시민이 권리와 함께 의무를 부여받는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가령 현실을 명확히 알 것, 투표에 참여할 것. 탈-정체성 리버럴 언론은 국가 내에서 무시되어 온 영역 – 특히 종교 –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modern_footnote]기고문 앞에 코멘트했듯 릴라는 근대 민주주의와 정치신학의 충돌에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자다.[/modern_footnote]. 그리고 세계 정치를 바꾸는 힘, 특히 그 역사적 층위에 관해 미국 대중을 교육할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몇 해 전 플로리다에서 열린 노조 대회에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1941년 “네 가지 자유” 연설 패널 토론자로 초청받았다. 홀을 가득 메운 지부 대의원 중에는 남성과 여성, 흑인, 백인, 라틴계가 모두 있었다. 애국가 제창으로 행사를 시작했고, 루스벨트의 연설 녹음을 들으려 자리에 앉았다. 무리를 둘러보며, 다르게 생긴 얼굴들이 열 맞추어 앉은 모습, 루스벨트 연설에 놀라울 정도로 집중하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감명받았다. 그가 만인을 위해 주문한 네 가지 자유, 곧 의사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와 신앙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를 선포하는 루스벨트 본인의 강렬한 음성을 들으며, 현대 미국 리버럴리즘의 진정한 토대가 무엇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