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세계에 민주주의 운영의 모범을 보이다 (South Korea just showed the world how to do democracy), WP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두고 미국 최대 일간지 중 하나인 워싱턴포스트(WP)가 “한국이 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였다”고 극찬했습니다. 한편 새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이 트럼프 행정부와 다를 수 있으나,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와 맞물리면 긍정적인 협력도 가능할 것이라 전망했습니다. 이는 WP가 지난 2일 진행한 문재인 대통령과의 대담 기사 논조와도 유사합니다.

기사 번역본을 보지 못해서 옮겨 보았습니다. 경제정책 이슈가 불거지지 않는다면, 이 포스팅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정치 관련 포스팅을 쉽니다. 이하는 전문번역입니다. 참고를 위해 원문에 있는 링크도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강조 역시 원문을 따랐습니다. 번역 관련 지적 환영합니다. 대괄호[] 안은 역자 첨부입니다.


한국, 세계에 민주주의 운영의 모범을 보이다 (South Korea just showed the world how to do democracy)

워싱턴포스트 국제면 분석기사(원문 링크) | Ishaan Tharoor 기자

서구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위기와 [국제 질서를] 좀먹는 국수주의의 발흥을 두고 개탄하고 있는 지금, 한국은 인민의 힘(people power)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기쁜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화요일에 치러진 조기대선에서 한국 유권자들은 문재인을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리버럴 정치인 문재인은 [보수 집권 후] 10년 만에 청와대를 차지한 첫 진보 대통령으로서 취임했다. 새 대통령의 대북 정책 철학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와 마찰을 빚을 수 있다.

그러나 문재인의 승리가 놀라운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지난 7개월 간 이어진 정치적 혼란 와중에 집권했다. 한국 언론은 당시 대통령 박근혜를 둘러싼 부패·뇌물 혐의를 취재하여 보도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시위와 법적 절차가 뒤따랐고 박근혜는 결국 탄핵되어 3월에 권좌를 떠났다. 대선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변화를 원한 유권자들은 적폐청산을 내세운 전직 인권변호사 문재인을 지지했다.

반(反)박근혜 시위는 곳곳에 만연한 재벌 대기업의 영향력 및 정경유착 의혹을 보며 국가적으로 확산된 좌절감과 연관되어 있다. 시위가 시작되던 11월, 김완규 씨(34세, 회사원)는 안나 피필드(Anna Fifield) 본지 도쿄 지국장에게 한국인들이 박근혜의 범법행위(misdeed)로부터 “우리가 정치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정부 운영 감시를 얼마나 게을리했는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한국, 세계에 민주주의 운영의 모범을 보이다 (South Korea just showed the world how to do democracy), WP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 안나 피필드 지국장 트위터. 출처는 기사 원문.

 

감동적인 이야기다. 미국 후원 하의 독재정권이 수십 년 통치했고, 1980년대 후반에야 민주주의로 이행한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크리스찬 카릴(Christian Caryl) 본지 오피니언 편집자는 박근혜가 파면된 3월에 이렇게 썼다. “한국은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보기 드문 시민행동에 고무되어, 관행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인상적으로 변화를 향한 운동(campaign)을 벌였고, 오늘 가장 극적인 형태의 결실을 얻었다. 북쪽 사촌들은 꿈 속에서나 비슷하게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시간이 멈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무기에 의존하는 것 외에는 미래 계획이 없는 지도자에게 얽매여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지난 화요일, 피필드 지국장은 그가 대내적으로 “정부 투명성을 강화하고 한국 경제를 지배하는 대기업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썼다. “유권자들은 또한 경제 부진과 빈부 격차 심화를 염려했다. 문 대통령은 공공부문 일자리 81만 개 창출, 노동시간 단축 등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약속했다.” 여당 의석은 과반수 미만이다.

그러나 워싱턴 평론가들에게는 한국과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떻게 변화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다. 문 대통령은 북한과의 화해(rapprochement), 적어도 적극적 대화(positive engagement)를 지향한 정치 전통에 속한 인물이다. 이는 북한의 최근 미사일 실험 이후 단계적으로 압박 강도를 높여 온 백악관 방침과 어긋난다.

앤드류 여 미국가톨릭대 교수는 본지 블로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북 제재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해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남북대화를 추진하고 ‘경제공동체’를 촉진하며, 역내 협력국들을 설득하여 대북 강경책에서 대화로 선회하려는 새 정부는 워싱턴과 대북정책을 조율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재인은 또한 미국의 첨단 미사일 방어 시스템, 사드 배치를 맹비판했다. 그는 지난 정부가 충분한 검토 없이, 대선 직전 서둘러 배치를 결정했다고 주장한다. 한국 진보 진영의 불만은 트럼프가 사드 배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더욱 심화되었다. 김두연 한반도미래포럼 객원연구원의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 기고에 따르면, “워싱턴이 사드를 배치하도록 서울을 협박한 뒤, 가까운 동맹국에게 비용을 뒤집어씌운다는 인식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한미관계를 낙관할 이유 역시 존재한다.

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시사한다. “한국의 과거 진보 대통령들처럼, 문재인은 한반도 문제에 보다 주도적인 자세로 임할 것이다. 그는 미국이나 중국에 단순히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는 “아메리카 퍼스트” 독트린을 강조하며 [다른 곳에서도] 미국이 지정학적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우선하는 트럼프 행정부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선거 전 문 대통령은 피필드 지국장에게 말했다. “저는 트럼프 대통령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합리적인 사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강경한 어조로 대하지만, 선거 기간 중 그는 ‘김정은과 햄버거 먹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저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그런 실리적 접근법을 지지합니다.”

문재인이 트럼프와 견고한 교감을 형성한다면 평양과의 긴장을 완화시킬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변화를 향한 요구가 실질적 결과를 낳는다는 징표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오늘 인터넷에서 익숙한 그림을 하나 보았습니다. 한 해가 흘러 데이터가 업데이트되었음에도, 그림의 내용과 결론은 익숙했습니다. 무슨 그림이었을까요? OECD의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의 일부인 「초장시간 노동자 비율 국제비교」인포그래픽이었습니다.

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주: OECD (2017)

이 숫자는 취업자 중 주당 60시간(한국 통계는 54시간 이상) 넘게 일하는 노동자의 비율입니다. 노동통계의 강자 한국은 22.6%, 다섯 명 중 한 명으로 2위를 차지합니다. “형제의 나라” 터키가 간발의 차이로 1위네요. 역시 노동조건이 열악한 이웃 나라 일본과 한국의 격차는 무려 13.4%p입니다.
이 통계보다 유명한 OECD 노동통계가 하나 있습니다. 한국이 수십 년간 부동의 1위를 차지해 오다가 최근 멕시코에 왕좌를 물려준 통계, 1인당 연간 노동시간입니다. 매년 이 수치가 발표될 때면 언론은 “韓 근로자 연간 근로시간 OECD 1위… 12년 연속” 등의 표제를 쏟아냈습니다. 항상 최상위 랭커인 멕시코와 한국, 터키를 묶어 “OECD 개노답 삼형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주: OECD (2017).

두 지표를 함께 보면 이렇습니다. OECD 평균을 기준점으로 그래프를 4개로 분할하면, 한국이 속한 1사분면은 1인당 노동시간도 길고 초과근무자 비율도 높습니다. 일본이 속한 2사분면은 1인당 노동시간은 짧지만 초과근무자 비율은 높습니다. 그리스가 속한 4사분면은 노동시간이 길지만 초과근무자 비율은 낮고요. 선진국 다수가 속한 3사분면은 노동시간도 낮고, 초과근무자 비율도 낮습니다. 이래저래 한국과 ‘개노답 형제들’의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로축 값이 유사한 국가들 사이에도 세로축 값에 편차가 있습니다. 연간 근로시간이 높더라도 어떤 국가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 많이 일하고, 어떤 국가는 비교적 소수가 아주 많이 일하기 때문입니다.)

자료: OECD Statistics, OECD Better Life Index. 2015년 통계 기준.

그런데 이 삼형제의 우애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초장시간 노동자 비율 통계는 아직 채 5년이 되지 않았으니, 2000년부터 발표된 1인당 연간 노동시간 추이를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자료: OECD Statistics.

 

돌아보면 2000년 한국 수치는 충격적입니다. 당시 2위 멕시코보다 무려 200시간 더 일했습니다. 살인적인 수준이지요. 하지만 1\5년 동안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한국 노동시간은 극적으로 하락했습니다. 그 때부터 함께 최상위 랭커였던 형제 국가 멕시코, 칠레, 그리스의 하락세와 비교하면 그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한국은 여전히 “개노답 삼형제”의 일원이지만, 명백히 발전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측면을 볼까요? 노동시간은 1인당 GDP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덜 일하는데, 국민소득도 함께 줄어들면 노동시간 감소를 마냥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림에 함께 나타내면 이렇습니다.

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자료: OECD Statistics. 2015년 통계 기준

한국은 이번에도 역시 개노답 형제들과 함께 4사분면에 있습니다. OECD 평균보다 오래 일하고, 1인당 GDP는 적습니다. (ㅠㅠ) 1인당 GDP가 비슷한 스페인, 이탈리아에 비해 연간 400시간 더 일합니다. 노동시간이 비슷한 국가들과 1인당 GDP를 비교해 봐도 좋을 텐데, 노동시간이 비슷한 국가가 없습니다. (ㅠㅠㅠ)
이 그림 역시 몇 국가를 뽑아 2000년부터 15년간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자료: OECD Statistics. 글씨 색깔별로 연도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파랑(2000), 빨강(2005), 초록(2010), 노랑(2015)입니다.

한국을 볼까요? 앞서 보았듯 연간 노동시간이 극적으로 감소하는 가운데 1인당 GDP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위치에서 헤매는 다른 개노답 형제들과는 다르지요. 물론 저 국가들과 한국을 단독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저 흐름이 앞으로 지속될지도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부터 15년간, 도중에 세계 금융위기라는 거시경제 충격을 받으면서 1인당 GDP 성장과 연간 노동시간 감소를 이루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변화의 속도는 더디지만 한국은 분명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OECD 통계가 발표될 때면 매년 개노답 삼형제를 못 면하는 것 같고, 내 주변은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다 논할 수 없지만 저는 앞으로도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물론 발전해왔다는 사실,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의 한계에 면죄부를 주지는 않습니다. 개선이 필요하다면 비판해야 합니다. 지금껏 발전해 올 수 있었던 이유도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해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늦게 노동절을 기념합니다. 통계가 작성되기 전부터 저 급격한 하락, 또는 개선, 또는 발전을 위해 분투한 이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더하여, 故 이한빛 CJ E&M PD,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크레인 사고 사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수학 교육과정은 왜 점점 이상해지는 것인가?

과외돌이 시험을 앞두고 문제풀이 리뷰해 준 뒤 든 잡상.

수학 과외 8년차. 현행 2009 개정 교육과정은 수업하면 할수록 이상하다. 집합 개념 없이 함수를 가르친다거나, 도함수를 배울 예정이면서 계차수열은 삭제한다거나. 뜬금없이 초월함수(지수·로그·삼각함수)를 삭제한다거나. 등비수열은 남겨두고 지수함수만 삭제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지수와 로그를 안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내용 줄이겠다는 취지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렇게 앞뒤가 안 맞게 줄이면 곤란하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교과과정 분량을 줄여 수포자를 줄이겠다는 발상이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한다. 기초 단계 이해가 불충분해서 심화되는 내용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보이는 것이지, 내용이 많아서 과부하 걸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껏 주로 고등학생 과외를 했다. 수업을 해 보면 절대다수의 학생이 중학교 단계에서 배우는 등식의 의미(간단히 말해 “같다”와 “같아야 한다”)와 추상화(수-문자-식)의 의미를 숙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공사를 새로 하다 보면 사칙연산부터 다시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성적이 당장 오르지 않자 학부모는 선생을 자르고 마는데…)

가령 중학교에서 배우는 실수의 상등조건(a=b⇔a-b=0) 내지 대소관계는 기초적이면서 매우 중요하다. 얼핏 보면 당연해 보이니 대충 넘어간다. 저렇게 정의하는 이유나 필요를 몰라도 문제를 어느 정도 풀 수 있다. 그러나 윗 단계에서는 한계가 드러난다. 이 글을 읽는 분들 대부분은 아마 저 조건이 다른 수학적 대상에 대해 어떻게 바뀌는지 익히는 것, 같다는 조건을 차가 0이라는 조건으로 변형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테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렇지 않고, 수가 식으로, 함수로 바뀔 때 매번 새로 암기한다. 이런 현상이 전 단원에 걸쳐 일어난다. 일일이 쓰자면… 여백이 모자라다. 당연히 학습 부진이 나타난다.

고등학교 때 나라고 다 알았을까. 그랬다면 이과에 갔을 거다(…) 과외를 오래 하고 수학공부도 계속하다 보니 과거에 무엇이 부족했었는지 깨닫는 것뿐이다. 이번 과외를 마치면 (자녀가 생긴다는 가정 하에) 적어도 10년은 관심 갖지 않겠지만, 8년간 지켜보니 교육과정은 점점 꼬이는 것 같다. 나보다 훨씬 수학공부 많이 한 분들이 만드실 텐데 이유가 뭘까.

4차 산업혁명? 문제는 대체탄력성이다

정보기술과 경제성장 이슈도 결국 대체탄력성 문제다. 소비부문(재화간 대체탄력성)과 생산부문(요소간 대체탄력성) 모두. “특이점이 온다”고? 기술적 특이점이 반드시 경제적 특이점으로 이어질까?

이게 소위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모든 논자를 걸러도 되는 이유다. 공포 마케팅을 부추길 뿐 누구도 대체탄력성 – 반드시 이 용어를 쓸 필요는 없다 – 은 말하지 않는다. (* 직업별 대체확률이 그나마 근접하지만 다른 말이다. 애당초 대체탄력성이 비탄력적이면 저런 논의가 불필요하다.)

<21세기 자본> 때와 비슷하다. 그 때도 대체탄력성이 핵심 이슈였다(Rognlie의 비판). 그 외의 주 이슈는 80년대 tax reform(Feldstein의 비판) 정도. 둘 다 국내 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다. 온갖 변죽을 울려댄 것에 비하면 아예 없다시피했다. 그래도 중앙일보에서 다룬 적이 있어, 이 케이스보다는 사정이 낫다.

주말에 논문 읽고 정리한 걸 바탕으로 포스팅을 하려 했으나… 글이 영 안 써지는 관계로 불평부터 늘어놓아 본다.

최소주의-반지성주의 혼종

나는 미니멀리즘(또는 최소주의)과 반지성주의를 제 편한 대로 뒤섞는 부류를 매우 싫어한다. 이런 부류가 입에 달고 사는 대사가 있으니 “말이 너무 어렵다.”

저 태도의 정체는 “나는 좀 비뚜로 본다”는 자의식과잉이다. 저런 부류는 타인에게 입증/설득의무를 부과하지만, 이해할 의사가 별로 없다. 실상 설득이 아니라 자의식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볼썽사나운 것도 드물다. 모르면 모른다, 공부할 생각이 없으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저런 태도는 알을 깨고 나오지 않아도 되니 편리하다. 생각이란 걸 하고 있다는 착각이야 개인의 자유다. 영원히 알 속에 갇혀 있겠다는 자유도 자유니까. 뭐, 그 안에서 관점놀음으로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래된 생각이다. 확실히 대선공약 갑론을박의 계절이 왔는지 저런 글이 타임라인에 몇 올라와서 써 보았다. 한 줄만 보태자면, 경험상 교회가 저런 태도가 싹트는 토양 중 가장 비옥한 축에 속한다. 대단히 유감이다.

인터뷰 준비 잡상

연구란 지식생산 활동을 말한다. 연구자의 소임은 지식생산이다.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생산이라고 부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만들어내야 한다.

만들어낸 결과가 인식 지평을 많이 넓힐수록 좋은 연구다. 전에 명지대 김두얼 교수님이 쓰신 일화를 빌려오면, “그 교수는 남들이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상황을 놓고 중요한 직관을 도출한 논문을 쓰고 나면, 그것을 N명으로 일반화시키는 논문을 쓴다. (…) 그의 논문이 정말로 어떤 부가가치가 있나 보면 거의 0에 가깝다.” 어쨌든 좋은 연구는 좋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남의 질문에서 출발한 연구가 좋을 수 있을까. 그보다, 난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이 고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그 교수가 나보다 훨씬 똑똑하겠지.)

나는 흐름을 파악하여 체계를 잡고 종합정리하는 데 능하다. 어디까지나 다른 능력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엄밀히 말해 지식생산은 아니다. 가공이라면 모를까. 당장 연재가 그렇다. 어느 정도 공부하면 누구나 쓸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석사논문도 미국에서 나왔던 연구결과를 한국에서 재현해 본 것이었다. 내생성 검증에 그치지 않고 생존분석을 이용해 주어진 문제에서 내생성의 함의를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좋은 질문? 글쎄.

끝까지 가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딜레탕트로 남는 게 어떠냐는 회의가 공존한다. 지금라도 늦지 않았을지 모른다, 굳이 끝까지 가 봐야 알겠느냐는 속삭임이다. 유학을 가고 박사를 받으면 이 양가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마 답은 얻을 게다. 어떤 방향이건.

예상 문답 준비는 마쳤건만 자문자답이 더 어렵다. 아, 자문자답은 영어로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긴 하다. 그것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