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 10주차.

두 번째 모듈이 시작되었다. 첫 모듈을 끝내고 나니 그저 퍼져 있고 싶어진다. 이게 모듈제의 단점이라면 단점, 아니 그냥 단점이다. ㅋㅋ

– 어제 자동차를 샀다. 오피스메이트가 다니는 교회 담임목사가 이 지역을 꽉 잡고 있는 딜러와 오랜 친구라고 해서 그 쪽을 통했다. 혼다 어코드 2008년형. 7,200불 줬다. 2010년대에 나온 차를 사고 싶었는데 조금 아쉽다. 차알못에 초보운전이라 이제 갈 길이 멀다. 벌써 겨울이 걱정된다.

1학기, 10주차.

– 한편, Winter is here. 일주일 새 바람이 매서워졌다. 아직 11월도 되지 않았는데 이러면 1-2월을 어떻게 날지 걱정이다. 주말에 히터를 청소할 계획이다.

1학기, 10주차.

– 슬슬 체력이 달리는 느낌. 운동을 해야 하는데… 후. ESL을 다시 한 번 욕해 본다. 2학기에는 꼭꼭 운동 다녀야지. 지금은 간신히 팔굽혀펴기 좀 하는 수준… 유산소가 필요합니다 ㅜㅜ

– 전반적으로 첫 모듈 교수들이 티칭에 더 능했다. 과목별로 강의가 3번씩 있었는데… 다들 수업이 지루하다. (절대로 “만만하다”는 뜻이 아님) 살아남아라, 용사여!

 

1학기, 9주차.

첫 모듈이 끝났다.

– 성적이 나쁘지 않게 나왔다. 아직 공식적인 건 아니지만 미시와 거시는 모두 1등일 것이다. 경제수학은 기대 이상이었다. 기말고사 평균이 상상초월로 낮아서 발생한 일인 듯. 기말 문제가 길고 어려워 시간 관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인데, 난 푼 문제만큼은 제대로 풀었고 그 결과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다. 어드미션 프로필 / 코스웍 퍼포먼스 / 리서치 퍼포먼스가 전부 별개라고 하지만, 어쨌든 기분 좋으니 된 것 아닌가? (근데 시험 못 봤으면 또 저거로 정신승리했겠지. 인간이란…)

– 동기들에게 모듈 리뷰 워크샵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모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동기가 8명으로 적고, 출신국가가 5개국이라 특정 국가 출신들끼리 파벌을 형성할 일도 없으니 남은 것은 함께 살아남는 것이다. Spillover effect!

– 오늘 미주리 경제학과에서 박사과정 3년차 계신 분이 놀러 오셔서 하루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실제로 뵌 건 처음이었지만 정말 즐거웠다. 미국 와서 한국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날.나도 차를 사면 시카고나 미시간, 오하이오에 있는 지인들을 방문할 수 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답이 안 나온다.

– 수업이 조금 더 rigorous했으면 좋겠다. 퀄 지나면 어차피 내가 보는 분야만 볼 것이다. 그러니 코스웍 때 좀 맛을 많이 보고 싶은데. 사람마다 의견이야 다르겠지만 나는 코스웍 수업은 다양한 내용을 깊이, 그러니까 빡세게 가고 퀄 시험 자체는 쉽게 가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영대 소속이라서 좋은 점도 많지만, 아무래도 경제학 전공이 아닌 학생들도 함께 끌고 가다 보니 미시-계량 시퀀스 밀도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아서 아쉽다.

– 두 번째 모듈은 첫 모듈에 비해 훨씬 부담이 적을 것 같다. 미시2는 일반균형과 후생경제학, 거시2는 Stochastic Dynamic Programming, RBC, Asset Pricing, Unemployment를 다룬다. 대충 뭔지는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확률통계(Probability and Statistics) 역시 지금까지 공부했던 수리통계학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다. 수업을 Hogg and Craig로 하니까 대충 말 다 한 것이지. 푸아송이나 지수분포는 솔직히 볼 일이 없어서 좀 잊어버렸지만;; 다시 보면 기억나겠지. 아무래도 들고 온 Casella and Berger를 좀 읽으면서 내공을 쌓는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이 수업 들으면서 그냉 널널하게 시간 보내면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 미시이론을 어느 정도로 깊게 공부해야 할까? 첫 모듈 미시이론은 그리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8주 동안 선호체계부터 불확실성 하의 선택이론까지 나갔으니 표준진도에 맞춘 것이지만 깊이는 별문제다. 그냥 MWG+Rubinstein 수준? 석사 때도 했던 내용이라 익숙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설렁설렁 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Jehle and Reny나 Kreps – Old or New – 를 리뷰 때 적당히 skimming할 예정. 거시가 확실히 가장 demanding하고 수업을 잘 따라가야 한다. 다행히 거시 교수들이 가장 티칭에 열정적이고 탁월한 것 같다.

 

어쨌든 박사과정 생활 아직까지는 즐겁게 하고 있다. 다들 대학원생에게 life가 없다고 불평하는데, 물론 나도 동조하지만, 나는 이런 생활 양식을 사랑한다. 내가 멍청해서 지식을 더 스펀지처럼 빨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만족스럽다고 할 만하다. 학부 때도 이렇게 살았어야 하는데… 는 지나고 하는 소리가 맞다. 학부 시절 보냈던 그 숱한 방황의 세월이 있어 지금 이렇게 안정적으로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방어의 사자” 발터 모델Walter Model 원수의 어록을 떠올린다.

Every minute that we lose will cost us great losses later that we will not be able to afford. We must push forward now, otherwise we risk everything. Hurry yourself with the technical aspects, a lot of time has already been lost.

 

Go ahead!

1학기, 8주차.

모듈 1 종료 직전. 학기 절반이 지나갔다.

#. 거시와 경제수학 기말고사 모두 결과를 기다려봐야 한다. 두 과목 모두 작년보다 현저히 어렵게 출제되었다. 수요일로 예정된 미시 시험은 무엇이 나올지 종잡을 수가 없다.

#. 동기들에게 리뷰 워크샵을 만들자고 제안할 생각이다. 방법은 차차 고민해보아야 할 듯.

#. 한편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이론을 엄밀하고 깊이 있게 배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내 직관은 그저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첫 술에 배부르겠냐만은, 글쎄… 지금 충분히 엄밀하고 깊이 있게 배우고 있는 건가? 간단한 질문인데, “나는 이런 문제를 낼 수 있는가?” 대답은 No에 가깝고, 그 간극을 좁히는 방법을 모르겠다. 한편 지금 느껴지는 장벽은 누가 가르쳐서 넘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하는 영역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1년차의 지상목표는 퀄 통과니까 시키는 대로 공부하자.

1학기, 3주차.

매주 하나씩 기록을 남기려 했건만 두 번째 주부터 실패. Labor Day가 낀 휴일이었는데도 숙제하느라 바빴다.

모듈제가 학생들을 계속 몰아붙이는 제도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당장 다음 주가 경제수학 중간고사. 한국 대학생들은 아직 “개강 실화?”를 되뇌고 있는 시점에 중간고사다. 학기 1/4 선이 왔다는 걸 체감하기에는 좋은 듯. 아무튼 저 시험을 시작으로 죽음의 레이스가 시작된다. 경수 중간고사 – 미시숙제 – 경수숙제 – 거시퀴즈 – 미시숙제 – 거시퀴즈 – 거시중간 – 미시중간 – 경수기말 – 거시기말 – 미시기말. 살려주세요 ㅠㅠ

거시가 가장 수학적으로 demanding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경제수학과 미시는 아직 할 만 하다. 거시 교수님은 그냥 너드 수학덕후인 것 같다. 내용 자체는 한국에서 접했던 것들인데 한층 일반화된 환경에서 모형을 푼다. 지금은 Welfare Theorem을 일반적으로 다루는 중. 경제수학은 선형대수가 계속 피곤하게 하는 걸 빼면 괜찮다. 다행히 선형대수가 시험에 빡세게 나오진 않는단다. 미시는 진도가 생각보다 느린데, 다음 주부터 4주 연속으로 숙제가 예정된 걸 보니 이제 슬슬 시동 거는 것 같다.

미시 교수님은 첫 수업이라 솔루션이고 뭐고 없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미시 숙제 중 한 문제가 꽤 tricky했는데 TA 세션 때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왠지 뿌듯했다. (???) 하지만 나올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분명히 한국 사람들이 처음에는 앞서 나가지만 나중에는 다 역전된다고… 열심히 해야겠다.

ESL과 TA 때문에 시간 빼앗기는 게 아니라면 좀 여유롭게 지낼 수도 있을 것 같다. TA야 계속 해야 할 테니 ESL만 없어도 살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럴 여건이 안 된다. 매일 새벽 1시 넘어서 퇴근한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직 힘들진 않은데, 장기 레이스를 생각하면 어서 ESL 끝났으면 싶다. 돌아오는 주에 경제학교수법 마지막 수업이 끝나니 그래도 좀 나아질 거라 기대해 본다.

경제학 교과서 전쟁?

평소 학계 동향을 잘 전해주시는 기자님이 이번엔 경제학원론 계의 “대안교과서” 에 관한 기사를 써 주셨다.

“경제학 교과서 낡았다”…불신 커지는 유럽 대학가

경제학만큼 대중의 신뢰와 불신을 동시에 받는 학문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경제학이 많은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현실과 이론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한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불신을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였다.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학문에 대한 실망이 확산됐다. 선진국과 신흥국을 가리지 않고 성장이 둔화하면서 불평등이 도드라졌다.

기사에서 언급된 <Economy>, 그러니까 Bowles 교수가 이끈 CORE 프로젝트 팀의 새 교과서는 샘플 챕터 몇 개만 읽어보았지만 몇 마디만 보탠다.

이건 주류-비주류 견해차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교육철학(교수법 철학?)의 차이가 아닐까. 경제학을 사회”과학”으로 가르칠 것인지, “사회”과학으로 가르칠 것인지의 문제라는 말이다. 이러한 견해차는 꽤 오래 된 것으로 아는데, CORE 팀 교과서는 후자를 대변하는 최초의 원론 교과서다.

기존 경제학 교과서는 우선 표준모형을 셋업하고 그 가정을 하나씩 완화하며 현실에 접근한다. 과학 과목에서 흔히 택하는 접근이다. 반면 <Economy>는 현실 문제에서 출발한다.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현실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경제학과 학부생들에게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다른 사회과학 분과학문의 성과를 좀 더 반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교재로 수업하면서 이론적 기초도 잘 닦는 것은 어지간한 강의력으로 불가능하다. 원론 단계에서 무엇을 더 중시할 것인가? 여기서 다시 교육철학으로 돌아온다.

굳이 한쪽을 택하라면, 나는 기존 방식으로 교육받은 사람이라 그런지 이론적 기초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경제학원론 교과서가 현실과 멀다고 생각해서 학부 때 주화입마를 오래 겪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학의 가치는 다양한 이슈를 관통하는 이론에 있다. “경제학자처럼 생각하는 법”을 익히려면 이론체계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한쪽을 굳이 폄하할 이유는 없다. 교육에 관한 관점 차이일 뿐이고,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두 책을 상보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어느 한 쪽이 주류경제학 교과서, 다른 쪽이 비주류경제학 교과서가 아니다. <Economy> 참고문헌 목록에는 최신 경제학 논문이 즐비하다.

하여 불필요한 대립 구도를 피했으면 한다. 기사에 이런 문장이 있다. “무엇보다 《경제》가 담고 있는 정치적 함의에 대한 경계심이 크다. 볼스 교수 등은 훔볼트대 학생을 상대로 한 설문 결과 등을 들어 현재 경제학자들이 반드시 파헤쳐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불평등’이 꼽히고 있음을 역설한다. 불평등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는 주류 경제학의 기존 분위기와는 사뭇 톤이 다르다.” 불평등 연구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경제학자가 과연 있을까? 불평등의 존재를 용인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연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부유해 보이는 고급 아파트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허름한 판자촌이 형성된 모습을 담은 표지”는, 주류경제학계의 논문공장장 Daron Acemoglu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첫 장에서 소개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학 교과서 전쟁?

경제학 교과서 전쟁?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첫 장에 등장하는 노갈레스(Nogales) 시. 이 도시의 북쪽(위 사진)은 미국 애리조나 주, 남쪽(아래 사진)은 멕시코에 속해 있다. 문자 그대로 벽 하나를 두고 소속 국가가 달라지는 것.

 

한편 이런 문장도 있다. “이들은 (..) 판매자와 구매자 간의 관계나 가격 설정 과정도 현실의 복잡함과 달리 매우 도식화돼 있다고 했다. (..) 또 현대 경제학의 기틀을 세운 이론 중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이론이나 존 내시의 게임이론 등 핵심적인 부분을 홀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부분은 Bowles 교수의 기고문을 그대로 옮겨온 것인데, 솔직히 그에게 묻고 싶다. 원론에서 이걸 다 다룰 수 있나?

기사에 언급된 폴 새뮤얼슨 경제학원론은 인간적으로 너무 낡은 게 맞다. 그 책 초판이 1948년에 나왔는데 지금은 2017년이다. 맨큐나 크루그먼 교과서도 수 차례 개정된 시점이다. 그렇다고 새 교과서가 나오지 않느냐? 아니다. Acemoglu-Leibson-List, Cowen-Tabarrok 등 젊은 저자들은 이론적 토대를 중심에 두면서 최대한 현실 문제를 다루려 애쓴다. 이들 교재는 특히 현대 경제학의 최대 성과인 실험과 실증을 책 구상 단계에서부터 고려하여, 2000년대 초중반 이전에 쓰인 교과서들과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실증과 실험을 염두에 두고 이론 설명을 전개하려면 그 전에 쓰인 책에 두어 장 추가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보고 원론 수업 하라고 하면 A-L-L 공저를 주교재로 쓰고 <Economy>를 읽기 자료로 쓸 듯.

1학기, 1주차

박사과정 첫 학기 첫 주가 끝났다. 사무실을 배정받았고, 시간표가 대략 확정됐고, 할 일도 정해졌다.

퍼듀 대학교는 학기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박사과정의 경우 변형된 학기제를 운영한다. 한 학기를 두 개의 모듈(module)로 나누어 모듈이 바뀌면 수강 과목도 모두 바뀐다. 수업 밀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보인다. 이번 모듈에 수강하는 과목은 총 3+1과목으로 표준 커리큘럼 구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선 Micro Theory 1, Macro Theory 1, Math for Econ이 있고, P/F 과목인 Teaching Economics(“경제학교수법”)가 있다.

미시 수업은 하루 휴강해서 아직 감이 안 잡힌다. 경제학교수법은 부담이 크지 않다. 첫 주 수업에서는 교수님이 대충 경제학원론 첫 수업에 해당하는 내용을 샘플로 강의해주고 본인 강의를 평가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 샘플 수업의 내공이 어마어마해서 비판할 게 많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원론조차 직관보다 수리적 전개 중심이었다. 그래서 직관적으로 가르치라는 말이 잘 와닿지 않았는데, 40분짜리 강의를 들으면서 마음 속으로 무릎을 얼마나 쳤는지 모른다. 하아.

거시는 신고전파 성장이론을 중심으로 거시에서 쓰는 도구(dynamic programming과 그 수리적 배경)를 훈련할 것 같다. 수업이 아주 건조하다. 농담은 커녕 미소조차 짓지 않고 수식을 적어 내려가는 교수님을 보고 있자면 참… 식 전개도 스킵하는 경우가 많아서 진도가 아주 빠르다. 특이한 점은 optimal control을 아예 배제하고 시작했다는 거다. 석사 때 거시에서도 Bellman Equation을 배웠지만, 사실 cake-eating problem 수준에서 끝났고 Ramsey model 등은 전부 optimal control로 간단하게 풀고 넘어갔다. 여기서는 optimal control 따위 언급조차 하지 않고(…) 바로 discrete time model로 시작한다. 아직 별 문제는 없지만 Hamiltonian 사용하는 방법은 언급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경제수학은 최적화이론을 자세히 다룬다. Math Camp 없이 수업을 시작해서, 수강한지 5년 넘은 선형대수 지식을 끌어오는 데 좀 시간이 걸렸다. 인간적으로 1주일은 math camp 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경제수학 가르치는 분은 본인이 쓴 교과서를 갖고 있다. 경제수학의 바이블 Simon & Blume (1994)보다 1년 먼저 나온 책이고 매우 컴팩트하게 쓰인 책이다. 정작 수업은 그냥 강의노트로 한다. 원래 이 분이 작년까지 미시도 담당했는데 올해부터 바뀌었다고 한다. 고년차 학생들 얘기를 들어 보니 일단 바뀐 게 잘 된 것 같긴 한데, 미시 시험을 보면 또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겠다만, 수학 수업과 미시 수업 분위기가 같아지는 건 끔찍할 것 같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공부에 전력투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퍼듀는 모든 입학생에게 TA 의무를 부과한다. Fellowship을 받더라도 부담이 절반으로 줄어들 뿐 TA를 해야 한다. 나는 매주 한 시간동안 40명의 학생을 데리고 리뷰 세션을 진행하고, 역시 매주 4시간의 office hour를 운영해야 한다. 끔찍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TA를 하려면 영어 말하기 능력 시험에 통과해야 하는데, 5점 차이로 떨어져서 ESL를 수강해야 한다. ㅋㅋㅋㅋㅋㅋㅋ… 이 ESL이 매주 4+1+0.5시간을 잡아먹는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견뎌내야 한다.

그래도 공부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앞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장단기 목표도 모두 정해져 있다. 물론 험난한 과정을 마치고 박사를 받는다고 해서 밝은 미래가 보장되진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나는 간신히 TOP50 안 프로그램에 들어왔고, 경제학 유학 나오는 사람은 나 내지는 앞뒤 세대가 가장 많을 것이다. 한국 대학 임용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으며, 정출연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많이 유지될지도 미지수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고개를 들지만,

안토니오 그람시에게 다시 기대어 보자.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 본시 진지전에 임하는 혁명가의 말이지만 이제는 탈맥락화되어 독자적인 의미를 획득했으니 그냥 내 맘대로 쓰기로 한다. 앞으로 망하기만 하라는 법은 없잖은가. 이 곳에서 내가 어떤 연구자로 준비될 것이고, 어떤 연구를 하게 될 지에 집중하는 게 우선이다. 여기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다 쓰고 나서 비관해도 늦지 않다. 따지고 보면 유학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 나날도 있었다.

나올 때, 내가 아는 모든 교수님이 생각을 복잡하게 하지 말라고 조언하셨다. 특히 1년차 때는 더더욱. 다행히 예전과 달리 잡상에 시달리지 않는다. 얻어맞기 전에는 계획이 그럴 듯 한 법이니, 시험 한 번 말아먹으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차피 퀄 떨어지면 그 뒤의 일은 아예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고, 지금부터 플랜 B를 준비하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어리석은 일이다. 다시, 오늘에 집중하면 된다는 결론이다. 20대 초중반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이런 마인드로 지낼 것이다. 당장의 과외 염려는 여자친구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고, 이 역시 내가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지난 12월에 나는 썼다. “먼 길을 돌아온 미련한 자에게 기회가 허락되기를 빈다.” 기회는 허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