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조상은 누구인가? (Eunhee Kim)

페이스북 원문 링크


요즘 상고사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일련의 역사논쟁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논쟁의 근저에 있는 ‘조상’이라는 문화적 개념이다. 우리 모두 단군이라는 뛰어난 인물의 후손이어서 ‘ 남남’이 아니라 ‘한 핏줄’이며 한 때 북방을 정복했던 ‘우수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한민족의 기원’이나 비슷한 ‘유사역사학’의 고대사를 향한 열정 밑에 깔려 있다. 또한 지금의 영호남 사람들이 천오백년 쯤 전에 번성했다고 추정되는 가야 왕국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후손들이라는 전제 하에 가야사의 복원은 국가가 주도해야 할 학술연구가 되었다. 가양왕국을 만든 훌륭한 조상의 자손들인데 지금 싸우며 살아야 하겠는가?

자고로 한국 사회에서 조상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극도로 중요했으며 아직도 그러하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조상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기록하는족보의 발간이 성행했고 조선이 망한 후에도 인쇄술과 통신, 교통이 발달하면서 족보발간은 오히려 급증했다. 일상생활에서도 본관을 밝히는 관습은 한국사회에서 조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본관은 수 백 년 전에 혹은 천년도 훨씬 전에 살았다고 하는 먼 조상의 본적지가 있는 행정구역의 이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고 가까운 조상이 살았던 곳도 아니다. 그럼에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본관을 알고 있고 호적제도가 폐지된 후에 등장한 가족관계 기록부에도 본관을 기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와 본관이 같은 동성동본이라는 것은 그 사람도 까마득히 오래 전에 살았던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얼마 전까지도 동성동본 간의 결혼은 마치 근친상간이나 가까운 혈족 간의 결혼처럼 법으로 금지되었고 도덕적으로도 터부시되었다.

역사학자 송준호는 “조선사회사 연구” 에서 본관제도처럼 적게는 몇 백 년 길게는 천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먼 조상의 후손임을 확인해주는 제도는 전 세계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 조선시대 후기이래 한국에만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고려시대에 본관은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곳, 즉 본적과 같았으며 왕실에서조차 동성동본불혼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가계기록이었던 ‘팔고조도’는 ‘나’를 기점으로 하여 친가와 외가의 조상들을 고조부까지만 기록하였다. 고조의 대에서 모두 16명의 조상이 존재하게 되는데 고조할머니들은 빼고 고조할아버지만 8명이 되기에 ‘팔고조도’라고 불렀다.

동북아의 유교적 문화권에 속한 중국이나 일본에도 우리나라처럼 본관을 따지는 습속은 없다. 대규모 부계친족집단이 존재했던 중국에서도 본관은 송 대 이후로 조상 대대로 살았던 본적지를 가리키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될 때는 본관을 바꿨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아주 가까운 조상이 같아도 사는 지역이 다르면 본관이 다를 수 있다.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지역에서 대대로 눌러 살게 되면 각각 독립된 씨족집단을 이루게 된다. 중국식이라면 남원에서 몇 백년 살아온 전주 이씨들은 아마도 남원 이씨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후손들이 조상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몇 백 년을 살아도 자신들의 출신을 말할 때 몇 백년 전의 조상들이 살았던 행정구역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 조상들의 후손임을 밝혔다. 그래서 동성동본인 사람들은 일정한 지역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살았다.

아득히 먼 부계 조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사대부 계층에서 시작되었다. (문옥표&김광억의 “조선양반의 생활세계” 참조). 유학자들은 각 집안에 내려오는 여러가지 가계기록들, 호적, 묘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등을 수집하여 보통 사오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 자신들의 부계 시조를 추적하는 ‘조상찾기’ 사업을 전개하였고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동성동본 전체 혹은 그 분파의 족보를 편찬하고 간행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주요 족보에서 계보가 비교적 확실한 실질적인 시조(중시조)는 언제나 고려시대에 중앙의 관계에 진출해 크게 성공하여 가문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시조와 명목상의 시조 사이에는 정확한 계보를 알 수 없어 여러 세대가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뛰어난 조상을 중시조로 내세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슷하게 동성동본 집단이 분파되어가는 과정에서도 높은 관직에 올랐거나 뛰어난 유학자로 이름을 날린 인물의 직계 후손들은 독립된 ‘파’ 를 형성하였고 이 ‘파’를 흔히 문중 혹은 종중이라고 불렀다.

동성동본집단이 가문의 이름을 빛낸 명망있는 인물 중심으로 분파되어가는 과정은 중국의 친족집단이 공동재산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분파되어가는 과정과 대조적이다. 본관의 개념이 없는 중국에서는 언제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지역에 처음으로 이주하여 후손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준 입향조가 시조로 받들어진다. 공동재산(corporate property)으로 조묘(신위를 모시는 사당)를 짓고 공동재산의 수익금으로 기제사를 지내며 남는 돈은 자손들이 나누어 갖는다. 입향조보다 앞선 세대의 조상들에 대해선 아무 관심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개의 자손’이라는 개념도 없다. 입향조의 한 후손이 많은 공동재산을 남기게 되면 그 후손의 직계 자손들은 분리되어 나간다.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재산을 남기지 못해도 명망높은 사람의 후손들은 지역사회에서 특별히 더 존경받고 대우받게 되면서 자연히 방계 후손들로부터 구분이 되어 ‘파’가 형성된다. 이렇게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과 지위가 거의 ‘조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일반 교양인들이 ‘한민족의 기원’이나 ‘단군시대’의 연구에 전폭적인 관심을 갖는 것은 16세기, 17세기 유학자들의 조상찾기와 비슷하다. 부계 친족집단이 ‘한민족’으로 확대된 것 만이 다르다. 그들은 1000년, 1500년 이상을 한반도에서 기반을 닦아온 우리들의 입향조가 아니라 한반도로 이주해 들어오기 훨씬 전, 아니 몇 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북방의 광할한 영토를 종횡무진했던 ‘우수한’ 한민족의 조상들을 찾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당신의 부모는 몇 분인가? 두 분이다. 조부모는 몇 분인가? 네 분이다. 증조부모는? 여덟 분이다. 이렇게 세대를 거듭해 올라갈수록 우리의 생물학적 조상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는 어느 한 개인은 수없이 많은 조상들의 자손이라는 것을 뜻한다. 나보다 20대 위의 조상의 숫자는 104만 8576명이다. 이 중 겹치는 조상들도 있을 것이다. 이를 감안해도 수많은 조상들이 있는 것은 변함없다. 그런데 이 생물학적 현상에 문화가 개입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초기에는 팔고조도에서 볼 수 있듯이 위로 올라갈수록 조상의 숫자가 많아지니까 편의를 위해서 위로 4대 고조할아버지 대까지만 조상으로 인식하고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상의 개념에서는 조상은 어디까지나 개인을 중심으로 인식되며 수십대 위로 올라가며 훌륭했던 시조나 파시조를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개인을 어느 조상 한 사람의 후손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계로만 조상을 찾아 올라갈 때 아무리 많은 세대를 올라가도 부계 조상 한 사람 만이 인지될 뿐이다. 개인은 ‘우암 자손’ 처럼 ‘아무개의 자손’ 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부계 조상 한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사람이라 해도 그가 몇 십 만 명의 생물학적 조상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인식된다면 그의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은 없어진다. 가령 덕수 이씨 중에서 지금 살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후손에게 이순신은 그저 그를 낳아준 수 십만 명의 조상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 수많은 조상 중에는 잘난 사람 못지 않게 못난 사람 또한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몇 천년 전에 한반도 위의 북방을 호령했던 사람들이 21세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반만년전에 살았던 수없이 많은 우리의 생물학적 조상들이 중앙아시아와 몽골 뿐만 아니라 동남아에도, 중국에도, 일본에도 살고 있었을 것임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그 조상들은 지금의 한국 말고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일 확률도 크다. 한마디로 말해 몇 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조상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민족의 기원’이라는 연구주제 자체가 17세기 이래 조선을 지배했던 조상 중심의 문화체계 속에서 뛰어난 조상 한 사람과 그의 남계 후손들을 상정했던 조상의 개념에서 나온 발상이다. 마찬가지로 가야사의 복원 프로젝트 역시 신라와 백제에 버금간다고 하는 1500년 전의 ‘훌륭한’ 조상들의 가야왕국을 보여주고자 하는 족보적 목적의식에서 추진되고 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 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조상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학문적 가치가 충분하다. 우리가 훌륭했던 조상 만을 찾아 나설 때 한국사 연구는 항상 조상이 얼마나 지혜롭고 훌륭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족보적 역사연구가 확대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 몇 백년 전 몇 천년 전 조상이 훌륭하다고 해서 우쭐할 것도 없으며 조상이 못났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 조상중심사회에서 탈피하여 과거지향적 조상의 관념에서 벗어나 현재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학은 현상유지편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아니다 (조석주)

페이스북 원문 링크

이 글을 내가 썼더라면, 싶은 글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제목은 내가 붙인 것이다.

“경제학은 그렇게 협소하지 않다.”


1. 제도적 관점에서 볼 때, 시장은 소유권을 정의하고 보장한 후, 자발적 교환을 통해 자원을 배분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2. 세상에 시장 메커니즘으로 모든 재화의 배분이 이루어지는 경제는 없다. 일례로, 미국에서 신종 플루가 유행해서 사망자들이 발생하는데 막 백신이 생산되면, 그걸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파는 식으로 공급하지 않는다. 그 독감이 걸렸을 때, 사망확률이 높은 예컨대 임산부, 노인, 어린이 등에 우선적으로 접종을 한다. ‘필요에 의한 분배’라는 소위 ‘공산주의’적 방식도 자본주의가 크게 발달한 국가의 자원배분 방식에 섞여있다.

3. 현실의 법, 제도하의 정치경제적 과정에서 어떠한 배분과 분배가 일어나게 되는가하는 문제와 그러한 분배가 그 공동체 성원들의 윤리적 관념에 부합하는지 특히 정의로운 분배인가 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다. 독감백신이 임산부, 노인, 어린이에게 먼저 분배되는 방식이 과연 정당한가를 물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시장메커니즘에 의해 배분되고 있는 영역도 그 결과와 과정의 정당성을 물을 수 있다.

4. ‘자본주의 사회니까 당연하다’는 말은 별로다. 첫째, 자본주의라고 해서 시장메커니즘에 의한 배분만 있는게 아니다. 둘째, ‘시장에 의한 배분’ 자체도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소유권을 공동체에서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따라 배분의 결과가 다 다르다. 셋째,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자체도 선택의 산물이지 항구불변의 상수가 아니다.

5. 내가 미시경제학을 가르치며,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경제학적 사고방법의 유용성을 알리는 것이다. 여기서 경제학적 사고방법이란, 개인들의 인센티브와 선택의 총체적 결과로 자원의 배분을 설명함과 동시에, 여러 경제의 과정을 사회전체에서 자원이 배분되고 희소한 가치가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방식의 ‘하나’로 바라보고 그 결과를 궁극적으로 사람 개인들의 행복과 불행의 척도로 평가하는 방법을 말한다. 내 미시경제학 수업의 많은 부분은 가격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에 관한 것이고, 또한 시장 메카니즘에 의한 배분이 갖는 고유의 장점을 강조해서 가르친다. 하지만, 학생들이 더 큰 틀에서 자원배분의 방식을 이해하고, 정당하고 실현가능한 배분의 방식들을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스스로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내 능력껏 노력을 한다.

6. ‘전기는 상품인데, 상품은 많이 사면 깎아는 줘도 가격을 올리는 법은 없으니 전기요금 누진제는 잘못되었다’는 주장. ‘토지와 건물의 소유자가 얻는 임대소득이 임대관리로 고용된 노동자의 임금 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높지 않느냐는 문제제기에, 자본주의니까 자본의 기회비용만큼 얻는게 당연하지 무슨 노동가치론이냐’는 응답

이런 말들의 맞고 틀림과 별도로, 이런게 마치 당연히 ‘경제학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경제학은 그렇게 협소하지 않다.

“임대업이 꿈인 나라”의 임대소득 분포

타임라인에 임대소득 이야기가 오르내려서, “임대업이 꿈인 나라”의 임대소득 분포가 궁금해졌다.

가구별 임대소득분포 통계를 찾아보았다. 소득분포 자료가 늘상 그렇듯이 잘 가공된 공식 통계는 찾지 못했고, 재정패널 원자료를 분석한 학회 발표논문을 하나 찾았다[modern_footnote]이진수(2016), 가계 부동산 임대소득 특성 및 영향요인 분석, 2016년 한국도시행정학회 동계 학술대회 발표논문. 아마 missing data 처리 등 최소한의 데이터 전처리를 한 뒤 기초통계를 산출했을 것이므로 peer-review 문제는 비교적 덜하지 싶다. 통계조사 시 데이터 입력이나 응답의 성실성 문제, 임대소득 포착 문제야 있겠으나 여기서 그것까지 고려할 수는 없다. 뭐.. “여기”가 아니더라도 뾰족한 대책은 없다. 실증 문제는 일단 있는 데이터로 얘기하고, 더 나은 데이터가 발견되면 주장을 재검토하면 된다.[/modern_footnote]. 논문에서 그림을 옮겨 왔다. 첫 번째는 비교적 보기 편하게 요약된 도표, 두 번째는 알아서 읽어야 하는 소득분포/누적분포 도표다. 미리 밝혀 두는데 난 이쪽 논의를 잘 모른다. 데이터를 찾아본 것 뿐이다.

"임대업이 꿈인 나라"의 임대소득 분포

"임대업이 꿈인 나라"의 임대소득 분포

논문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임대소득이 있는 가구는 8.6%다. 임대소득이 상당히 집중되어 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임대소득가구는 한 가지 종류의 임대소득만 갖고 있다고 한다. 임대소득은 집중되어 있지만 다양한 부동산을 소유한 “부동산 재벌”은 현실에서 매우 드문 사례라는 것이다.
임대소득분포도 이를 뒷받침한다. 소득분포자료는 흔히 오른쪽 꼬리가 길다.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은 사람이 많고, 고소득자는 적지만 이론적으로 소득의 상한은 없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해 소득분포도의 오른쪽 꼬리가 길고 두껍게 나타날수록 불평등이 심하다.

임대소득분포 역시 오른쪽 꼬리가 길다. 연간 임대소득 1,500만원 미만 가구가 전체 임대소득가구의 75%를 차지한다. 한 달에 150만원이 안 떨어지는 셈인데 관리비 등등 감안하면 “임대업이 꿈”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반면 상위 10%부터는 적어도 연간 4,000만원 이상의 임대소득을 올린다. 8.6%의 10%이니 전체 가구의 0.86%만이 이러한 고소득을 얻는 것이다. 임대소득의 집중도 문제가 다시 드러난다.

임대소득 유무별 가구 월평균소득 분포를 비교하면 임대소득이 있는 경우의 평균소득이 높다. 그러나 월평균소득 300만원 미만 가구 비중이 각각 60%, 50% 수준으로 10%p 차이에 불과하다. 임대소득의 집중도를 고려하면 이 정도 격차는 작은 게 아닐까? 단, 연령대를 함께 고려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다. (가령 60대 이상에서 임대소득 유무)

불평등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당장 이 자료에서도 나타난다. (단, 이 자료만 가지고 임대소득자 내 불평등이 심각하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다룰 때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편이 여러 모로 이롭다. 현실의 극화dramatization는 많은 경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인식의 극화polarization을 낳기 십상이다.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들을 경알못이라고 싸잡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생활경제에서 느끼는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그런 멘탈리티 형성 메커니즘은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멈추면, 혹은 더 자극적인 묘사만 찾아 전시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차분한 논의의 시대는 요원해 보인다. 2010년대에 방송된 일련의 공중파 다큐멘터리 시리즈, 그러니까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SBS 다큐 <최후의 제국>, MBC PD수첩 <돈으로보는 대한민국> 등은 분노감 형성에 감정선을 맞추었다. 사람들의 평균 인식은 공중파 다큐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


페친 김현성 님이 쓴 이 글을 보고 썼다. 결과적으로 이 분이나 나나 한풀이굿의 전형적 사례인 이 글을 보고 커멘트한 것.

배리 아이켄그린, 드와이트 퍼킨스, 신관호, 『기적에서 성숙으로: 한국경제의 성장』 [KDI-Harvard 연구시리즈], 2013.

배리 아이켄그린, 드와이트 퍼킨스, 신관호, 『기적에서 성숙으로: 한국경제의 성장』 [KDI-Harvard 연구시리즈], 2013. 서평은 아니고 메모.

배리 아이켄그린, 드와이트 퍼킨스, 신관호, 『기적에서 성숙으로: 한국경제의 성장』 [KDI-Harvard 연구시리즈], 2013.

한국 경제성장 종합연구. 이런 책을 발간할 수 있는 반추 역량이 성숙도의 지표는 아닐까.

이 책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06년부터 하버드대학교와 공동진행한 연구과제 ‘민주화와 세계화 시대 한국경제의 성과와 과제’의 첫 총서다. 과제명에 걸맞게 과거 성장의 기록을 충실히 검토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서·결론 제외 총 6장 구성으로, 각각 “거시경제의 성장원천”, “성장구조의 변화”, “서비스 부문과 경제성장”, “수출과 경제성장”, “외국인 직접투자와 경제성장”, “위기와 성장”을 다룬다. 저자진이 화려하다. 배리 아이켄그린 버클리대 교수, 드와이트 퍼킨스 하버드대 명예교수, 신관호 고려대 교수 모두 국제금융, 통화정책, 아시아 경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학자들이다.

간단히 정리해 본다. 잘 알려진 대로 한국은 60년간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오늘날 저성장 불안이 만연하나, 저성장은 경제 성숙이 수반하는 “평균으로의 회귀” 다. 1인당 소득 $10,000 – 16,000 구간을 지나며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지 않은 국가는 없다. 한국은 오히려 성장 둔화를 오랫동안 억제하는 데 성공한 특이한 국가에 속한다. 이 현상에 관한 우려는 과장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 없는 경제는 없으니, 성장 둔화세가 가파른 건 사실이다. 연구진은 서비스부문 생산성·외국인 직접투자·교육 생산성 부진을 원인으로 꼽고, 이에 대응하는 정책제안을 간략히 내놓는다. 이외에도 “급진적인 제안”으로 해외 노동력 유치, 아시아 역내투자 활성화(=해외 노동력 활용)을 언급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경제성장 조급증을, 한국 정부는 국가주도 성장전략을 내려놓으라고 거듭 당부한다.

내게는 이 책을 종합평가할 거시경제 식견이 없다. 언뜻 심심해 보일 수 있으나 광범위한 통계를 기반으로 구축한 논증 탑이 정교하다고만 해 두겠다. 논증 고리가 탄탄하고, 반론을 떠올리면 몇 문단 이내에 다루어진다. (물론 내가 거시를 잘 몰라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 데이터가 아쉬운 측면이 있지만 더 나은 자료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언론과 서점가에 만연한 위기론·비관론도 대부분 논파한다. 일일이 다루진 않지만 더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를 제공한다. 원서 발간 시점에서 5년, 연구과제 발주 시점에서 10년이 지났다는 점은 아쉽지만 연구 내용과 시사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간 새로운 위기론 분파로 소위 4차 산업혁명을 둘러싼 기술발전 담론이 대두하긴 했다. 나는 “로봇과 인간의 경주 시대에도 인간이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을 수 있는 국민경제 균형성장경로가 존재한다”(Acemoglu, Restrepo MIT 교수), “[경제적] 특이점은 멀었다(Singularity is not near)”(Nordhaus 예일대 교수)는 주장을 더 신뢰한다. 기술발전이 찬란해지는 만큼 그림자도 크게 드리울 테지만, 아직 경제전망을 수정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구 수행 후 5년간 한국 경제가 연구진 제안을 이행하지는 못했다고 보인다. 올해 초 화제가 된 정혁(2016)[modern_footnote]Jeong Hyeok (2016), “Assessment of Korea’s Economic Growth Experience Through the Lens of Neoclassical Growth Model”, working paper.[/modern_footnote]의 장기 성장회계에 따르면 총요소생산성(TFP)의 1인당 GDP 증가율 기여도는 2010년대 들어 2000년대 대비 4분의 1 미만이다. 연구진은 또한 (고성장기에 도농이동 등으로 확보했던) 유휴노동력이 소진되었으니 여성·고령인구 활용, 해외 노동력 유치, 나아가 자본 해외 진출을 통한 해외인력 확보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10년 시차를 둔 연구인 정혁(2016)은 한국 경제가 이들 중 고령인구 활용을 택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게다가 연구진은 노동자 숙련 유지에 초점을 두고 고령인구 활용을 주문했으나, 고령자 고용의 현실은 은퇴·경력단절 후 재취업한 “열화된”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한국경제는 끝장이란 말인가? 일단 작년 말부터 시끄러웠던 위기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성장은 장기 담론이다.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성장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한다. 담고 있는 내용의 수준에 비해 어렵지 않다. 특히 자료 설명이 아주 친절하다. 성장회계 요인분해법 외에는 수식도 나오지 않는다. 회귀분석 결과를 말로 잘 풀어 설명하므로 그것만 보아도 좋다. 단 내용-도표-주석을 오가는 끈기가 필요하며, 원활하게 이해하려면 회귀분석 결과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참고로, 당연하게도, 이 책에는 “성장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식의 멍청한 질문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대강의 메모. 아래에는 내용 정리 겸 몇 가지 생각을 적어보았다. 정리 수준은 언제나 책보다 독자 수준을 따라가는 법, 한참 부족하지만 기록을 남겨 둔다. 자세히 풀어쓴 책일수록 두 번 읽기 힘들어 적어 두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글 길이와 퀄리티는 무관하다. 그리고 이 책이 선사하는 독서 경험에서 방대한 자료를 빼놓을 수 없다. 요약은 어디까지나 요약이다.

2장에서는 한국 경제성장사를 계량적으로 개관한다. 우선 60년대 이래 경제성장의 역사를 성장회계법으로 분석하고, 국가 간 성장회귀분석으로 국제비교한 후 둘을 교차검증한다. 성장회계 분석 결과는 널리 알려진 시나리오와 대부분 일치한다. 정부주도 개혁 – 총요소생산성 상승 – 자본수익률 상승 – 투자 촉진이 그것이다. 국가 간 회귀분석은 경제개방과 수출지향 전략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한편 한국 경제성장은 총요소생산성과 자본스톡이 동시에 크게 증가했다는 점에서 개도국과 구분된다. 성장회계에서 인적자본(교육) 기여도가 방법론 문제로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데, 저 둘을 동시에 달성하며 경제를 견인할 수 있었던 근저에 높은 교육수준이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한국 역시 경제가 선진수준에 근접하며 나타나는 성장둔화 현상의 예외가 아니었다. 1인당 GDP $10,000 – $16,000 (PPP, 2000년 물가 기준) 구간을 지나며 성장속도가 느려지지 않은 경제는 없다. 어떤 알려진 변수도 이 보편적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며 한국 케이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성장 추세가 꺾인 기점이 외환위기는 아니었다. 한국 경제성장 추세는 1997년이 아니라 1989년에 구조적 변화를 겪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투자율과 자본장비율 상승이 성장 둔화를 상쇄하여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 주장은 뒤에서도 계속해서 검증된다. (이 책은 외환위기의 원인과 성격을 경제성장 맥락에서 재평가하는 데에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3장에서는 성장 과정의 경제구조 변천을 다룬다. 먼저 통상의 시나리오를 재확인한다. 제조업 중심 성장 이후 탈산업화, 곧 첨단기술산업 및 서비스 부문으로 이행하는 구조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현재 고소득 국가들이 모두 겪어온 보편적 성장경로다. 단 연구진은 한국 제조업 고용 감소 시점이 현재 선진국들이 겪었던 시점보다 빨랐다고 지적한다. 제조업 고용 감소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노동자들은 결국 자영업자 내지 영세업체 노동자가 되었다. 서비스 부문이 고용의 70% 이상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구조변화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지는 못했다. 당장 첨단(ICT) 투자는 해당 산업을 성장시켰으나 경제 전체의 성장을 견인하지는 못했다. 서비스 부문 문제는 4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3장의 또다른 주제는 한국 경제성장 논의의 뜨거운 감자 또는 불화의 사과, 산업정책이다. 산업정책은 구조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연구진은 관련 자료 및 연구를 폭넓게 들어 시기별 산업정책을 평가한다. 우선 50년대의 경우 소득수준은 낮았으나 개방정책이 총요소생산성을 높였고, 6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성장 드라이브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쓴다[modern_footnote]이 책보다 더 최근에 나온 논문의 해석과 통한다. 김두얼(2016),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성장의 기원: 1953-1965”, 경제발전연구.[/modern_footnote]. 이어 60년대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한다.

그러나 70년대 정책 평가는 양가적이다. 박정희 정권이 중화학공업 육성 관련 여러 업종을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공업 발전이 없었으리라는 의견(Rodrik 1994)이 지배적이다. 이에 반해 연구진은 모방 대상으로서 일본이 존재했음을 들어 개입이 없었더라도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전환했을 것이며, 정책은 방향이 아니라 속도를 바꾸었으리라고 쓴다. 물론 속도를 높인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재벌의 정치 영향력을 키워 정경유착이 심해졌고, 경제의 차입의존도를 높였으며, 재벌의 확장주의적 성향을 형성했다. 이는 후일 외환위기의 씨앗이 된다. (“외환위기는 한국경제 모순이 복합적으로 표출한 사건” 식 설명 좋아하는 분들이 반길 듯하다. 이 평가는 외환위기 성격 규명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 부분은 기존 견해가 더 현실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국제정세가 한국의 중화학공업화에 유리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연구진도 이 사실을 언급하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고 보는 듯하다.

80년대 이후 정책은 단호하게 부정적으로 평한다. 제5공화국에서 정부는 과거 재벌이 정부를 필요로 했다면 정부도 재벌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정부가 엄격한 성과기준을 적용하지 않기 시작했다. (김재익 수석이 주로 비판받는 대목인 중화학공업 비중 축소가 실현되지 않은 과정이 예시가 될 듯하다.) 90년대에 공업이 고도화되며 발전이 정부 영향을 벗어나자 이 문제가 더욱 심해졌다. 규제는 지대추구를 조장하는 요식행위로 전락했다. 연구진은 60-70년대와 90년대를 비교하며 아예 이렇게 쓰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산업정책이 수출 붐을 일으키고 포항제철과 현대 등의 성공적인 기업을 키워낸 데 반해, 1990년대의 정책은 한보철강과 여타 정치적 특혜를 입은 기업들을 탄생시켰고, 결국 이들의 파산으로 인해 1997~1998년 금융위기의 바탕이 마련된 셈이었다.” 외환위기는 경제의 짐이 되어 버린 과거식 산업정책이 현대화되는 중대 계기였다. 장기 데이터를 활용한 실증연구는 대부분 산업정책이라는 신화를 깨뜨리는 듯하다. 분석 방법은 다르지만 차명수, 김낙년 교수 등의 수량경제사 연구도 산업정책보다는 교육이나 제도에서 원인을 찾는다.

4장에서는 서비스 부문에 초점을 맞춘다. 한국 서비스산업 생산성은 왜 낮은가? 서비스부문 생산성이 제조업보다 느리게 상승하는 현상은 OECD 국가들이 보여 주는 경험적 사실이다. 제조업보다 노동집약적이므로 혁신이 어렵고, 대부분의 서비스업종이 교역불가능하여 경쟁압력이 낮기 때문이다. 한국의 특수성이라면 제조업 고용비중 하락에 따라 “밀려난” 노동자들이 서비스업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modern_footnote]이 문제는 노동경제학 실증연구의 전통적 주제다(Roy model). 사람들이 비교우위에 따라 직종과 부문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뛰어난 사람은 대기업 가고 못 간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가? 사람마다 제각기 의견이 있겠지만, 아직 국내 문헌에서 합의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자영업에 관한 신뢰할 만한 데이터나 연구가 드물다. 제조업-서비스업 구분과 임노동-자영업 구분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한국 노동시장 특성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일단 “심증”에 얼기설기 붙인 자료로 밀고 나가 보자.[/modern_footnote]. 그러나 이 사실들만로는 한국 서비스부문 부진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연구진은 서비스업 진입규제가 지나치다는 “뻔한” 진단을 증거와 함께 제출한다. 특히 중소기업이 과보호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비스 부문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1인당 부가가치가 현저히 낮다. 반면 급여-매출비율은 낮지 않고 영업이익률은 높다(’05년 자료). 이는 중소기업들이 지대(rent)를 얻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주장은 익숙하다. 그렇다면 부문 내 업종별 차이와 기업규모별 차이 중 무엇이 더 중요한 요인인가? 다른 자료를 찾아보았다. 2013년 기준 광업·제조업 내 중소기업 비중은 98%, 38%, 71% (각각 기업 수, 출하액, 종사자 수)이며 서비스업 내 비중은 98%, 72%, 83%이다. 서비스 부문에서 비중이 더 높다. 생산성 저해 요인이 여럿 있겠으나, 규모별 차이 역시 생산성 -노동생산성·총요소생산성 모두 – 개선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보인다. 실제로 대기업 주도 서비스업인 금융업·통신업은 생산성 및 그 증가율이 다른 업종에 비해 훨씬 높다. 도소매업, 숙박업 등의 생산성 증가율이 음수인 것과 대조적이다.

이렇게 생각해봤으나… 이 자료로부터 결론을 확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는 회의가 자꾸 고개를 든다. 그래서 연구진이 서비스 부문 생산성을 언급할 때마다 개운치 않았다. 우선 서비스 부문은 측정오차(measurement error) 문제가 상시 존재하고 심각하다. 게다가 자영업자 문제가 데이터를 더욱 꼬아버린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교육·의료·금융·법률 분야 생산성 개선 가능성을 언급하는데, 교육과 의료는 시장가격이 존재하지 않는 대표적인 비시장 서비스업이므로 생산성 추계에 문제가 많다. 자료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최근 자료를 이용한 분석을 찾아보았다. 이종화·송철종(2014)[modern_footnote]이종화·송철종(2014), “한국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 분석”, 한국경제의 분석.[/modern_footnote]이 비교적 잘 정리된 연구로 보여 해당 논문과 세미나 자료를 읽어 보았다. 그러나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이종화·송철종(2014)에서는 시장-비시장서비스업을 구분하여 분석하는데, 시장서비스업 생산성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결과가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 서비스부문 생산성이 낮지 않다고 해석해야 할까? 실제로 TFP와 종종 연관되는 혁신 관련 지수에서 한국은 꽤나 상위권이다.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을 도출하려면 연구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내 공부도 더 필요하고…)

말이 나온 김에 중소기업 얘기를 조금만 더 쓰면, 중소기업은 각종 정책적 배려를 받고 있다. 자본조달, 노동자 채용, 유통 등 다양한 채널에 중소기업 보조정책이 존재한다. 육성·장려·진흥 등의 이름을 갖고 있는 이들 정책은 정권 성향과도 무관하다. 부처로는 중소기업청이 있고, 대통령 산하 동반성장위원회가 또 있다. 입법도 될 것 같다. 지난 정부부터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 법제화 움직임이 생겨나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논의가 터져 나오고 있다. 더하여 현재 제조업 위주의 적합업종 제도를 서비스업으로 확대하려는 듯한 모습도 보인 바 있다. 생계형 적합업종 법제화는 문재인 대통령 공약이기도 했다. 중소기업청을 중소기업부로 승격시킨다면 그 기조에 따라 법제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일련의 “도그마”를 “유치기업 보호론”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경쟁정책 없는 보호정책은 성장을 저해한다. 경쟁이 심해서 과당경쟁이란 말이 나오는데 무슨 말이냐고? 어제 문 닫은 동네 빵집만 떠올리면 곤란하다. 정부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규모 이상 성장하지 않는 소위 피터팬 증후군 현상이 이 문제의 부산물 중 하나다. 이미 지적된지 오래이며, 염려스럽다.

5장에서는 한국경제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출에 대해 논의한다. 경제성장사 내러티브를 조정하며 “위기” 보다는 “수렴”에 초점을 맞추는만큼, 연구진은 수출 관련 위기론을 공들여 논박한다. 앞서와 같이 외환위기 이후 한국 제조업 국제경쟁력이 하락하고 수출부문이 공동화되며 성장률이 하락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고성장기 수출성장률을 회복하지 못하고 상품수출 증가율이 부진한 것은 위기의 전조가 아니라 성숙의 징표다. 수출국 다변화, 수출품 다양화, 수출품의 기술수준 모두 한국 수준 국가에 기대되는 정도에 부합한다. 연구진은 유사한 특성을 가진 국가들과 비교하면 한국 수출은 여전히 좋은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대내외 여건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고환율 정책으로 대표되는 수출지향적 산업정책은 더 이상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한국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전환 중이다. 서비스 국제교역이라는 새로운 경쟁환경 하에서 서비스업 생산성 부진은 미래성장을 좀먹을 수 있다. 중국의 부상도 역시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소비재 시장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고, 중간재와 자본재 수출에도 타격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진은 전체 수출품을 종합하면 한국이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가장 적은 피해를 입는 국가일 수 있다고 평가한다. 더 큰 변화는 과거와 달리 수출과 성장의 관계가 약해졌다는 것이다. 수출산업이 유발하는 고용 역시 점점 적어지고 있다. 요약하면 수출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수출과 성장이 과거와 같은 경로로 상호강화하지는 않는다. 이 분석이 “수출 주도 성장의 시대는 끝나고 내수 중심 성장으로 전환할 때가 왔다”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6장에서는 투자, 특히 외국인직접투자(FDI)의 현황과 역할을 짤막하게 다룬다. 우선 연구진은 외국인직접투자 저조가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합의된 연구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박는다. 이에 따라 FDI-성장 관계보다는 한국 성장사에서 FDI의 역할과 향후 FDI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조명한다. (다른 챕터에 조금씩 나누어 실을 수 있는 내용인데 윗선에서 이런 챕터 넣으라는 얘기가 나와서 독립시킨 듯한 인상이다.) 한국은 성장 과정에서 FDI보다 차입과 산업정책을 활용했고 여전히 반FDI 규제 및 사회환경을 갖고 있다. 그 결과 FDI 대상국으로서 그리 매력적이지 않고, 중국의 부상 역시 한국 FDI 증가의 장애물로 작용했다.

반면 FDI 투자국으로서 한국은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진 국가들에게 기대되는 만큼 투자하고 있다. 결국 유출보다 유입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통념 두 가지를 반박한다. 먼저, 해외투자로 인해 국내 산업 공동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통념은 사실이 아니다. 둘째로 (국내기업의) 국내투자가 해외투자보다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리라는 통념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결국 FDI를 받거나 하면 좋고, 한국은 과다유입·유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진단이다. 마지막으로 (‘적절한’) 직접투자유입이 늘어나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전망한다(이는 역내 진출을 통해 해외노동력을 활용하라는 제안과 연결된다.)

7장에서는 소국개방경제 한국이 주기적으로 겪는 경제위기와 성장의 관계를 고찰한다. 한국은 지난 50년간 4차례 위기를 겪었다. 60년 수출 드라이브가 낳은 1970-71년 위기(72년 8.3 조치로 이어짐), 80년대 초 중화학공업 육성책이 촉발한 외채 위기, 97년 외환위기, 08년 세계금융위기가 그것이다. 연구진은 위기의 원인, 경과, 파급효과를 나누어 분석한다. 먼저 연구진은 이들 위기가 결국 공격적인 친성장정책을 추구하는 한국 성장모델의 부산물이라고 진단한다. 한국 경제는 높은 수요 압력 하에서 고투자율을 유지하고 과도한 차입금을 사용하며 성장했다. 특히 단기부채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로 인해 자본흐름 역전 리스크에 취약해졌다. 잘 알려졌듯 97년 외환위기 역시 이 문제가 극적으로 터진 사례다.

그러나 앞서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에 겪은 위기의 본질도 동일하다. 세 번 모두 국제통화기금이 개입했고 강력한 구조조정을 주문받았다. 산업정책 평가에서도 나타났지만 군사독재 시절 경제정책이 경제성장을 낳지 않았으며, 경제가 특별히 안정적으로 운영된 것도 아니다. 당시 경제정책을 신화화하거나, 97년 외환위기를 김영삼 정권 책임으로 돌리는 것 모두 번지수를 잘못 찾는 것이다. 공격적 정책을 펼치며 위기 리스크를 감수한 대가로 성장이라는 열매를 얻었으며 위기는 매번 개혁의 촉매로 작용했다. 97년 외환위기조차 성장률을 지속적으로 저해하지는 않았다. 외환위기 이후 투자율이 감소했으나, 이는 오히려 경제 성숙의 증거다.

08년 금융위기의 경과와 대응은 한국 경제가 분명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한국 내부에서 비롯되지 않았고, 97년의 교훈으로 충격을 제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전과 구별된다. 당시 한국은 국가 단기부채가 여전히 높았으나 그의 50%에 달하는 외환보유고를 유지했으며, 기업 레버리지도 과거에 비해 낮았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더 심각한 영향을 받았는가? 역설적으로 한국 금융시장이 국제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이렇게 쓴다. “한국이 금융적인 압력에 유난히 취약하다고 입증된 정확한 이유는, 한국이 IMF와 미국 재무성의 권고에 따라 대단히 충실하게 금융 시스템을 국제화했기 때문이다. (..) 금융 발전과 국제화도 나름의 장점이 있겠지만, 세계 금융시장의 혼란기에는 그렇지 않다.” 이 서술을 보면 “외환위기 이후 강제된 신자유주의 워싱턴 컨센서스가 한국 경제를..”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국제경제학 교과서의 불가능한 삼위일체(impossible trinity)를 풀어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과거와 달리) 금융위기에 비교적 잘 대처했고 위기 후 경제 성과도 우수한 편에 속한다.

8장에서는 논의를 종합하여 결론을 내놓는다. 연구진은 앞선 분석을 요약하며 한국이 지나친 불안을 불식시켜야 하며, 한국은 더 이상 모방할 수 있는 역사적 사례가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정책 제안은 앞에서 정리한 대로다. 앞서 교육 관련 정책과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연구진은 노동의 질 측면에서 대학교육의 양적 확장이 한계에 다다랐고 질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한다. “식상한” 지적이다. 그런데 연구진이 언급하는 세부 사항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먼저 연구진은 산학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지금까지 거둔 소기의 성과로 특허출원이 02년에서 08년 사이 4배로 늘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저 산학협력 결과물의 유용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연구진의 두 번째 제안은 대가급 연구자를 유치하기 위해 급여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인구조 설계는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학생 신분이라 그런지, 학문후속세대 양성 부진이 한국 대학이 연구기관으로서 겪는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인문사회계열에서 그렇다.

8장 끝에서 연구진은 2장에서 쓰인 성장회계법과 국가간 회귀분석을 이용하여 중기 경제전망을 전망한다. (연구진은 “중기”임을 강조하는데 이는 현실적 의미도 있겠으나 모형의 가정 때문이다.) 즉, 2010-20년과 2020-30년을 나누어 잠재성장률을 산출한다. 연구진이 노동, 자본, 투자, TFP 증가율 등을 조합하여 여러 시나리오를 가정하여 산출한 한국의 실질 GDP 성장률은 연 4.5-6%(2010-20), 3.3-4.7%(2020-30)였다.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겠으나, 2010년대 후반 시점의 독자는 예측 범위가 적절했는지, 틀렸다면 이유는 무엇인지 평가할 수 있다. 2010년부터 2017년까지 실현된 성장률은 연평균 3.5% 수준으로 이에 비해 낮았다. 우선 확인할 수 있는 문제는 TFP 였다. 연구진 시나리오 중 가장 보수적인 가정은 투자율 30%, TFP 증가율 2%였다. 2010-2015년 사이 실제 투자율은 28~32% 수준으로 비슷했으나 TFP 증가율은 많이 달랐다. 앞서 인용한 정혁(2016)에 따르면 2010-2014년 TFP 성장률은 0.5%에 불과했다. 대내외 여건이 예상과 달라진 측면도 있겠으나 그것까지 알 수는 없다.

그럼 2020-30년 경제성장률은 연구진 전망치인 3.3-4.7%보다 밑에 있을까?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한국 경제성장률은 여전히 주요국 중 높은 편에 속한다. 연구진은 한국이 성공적인 구조개혁(=TFP 상승)을 해내리라고 가정했다고 한다. 심지어 책 마무리 문장이 “…한국의 이러한 개혁 정신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라는 낙관이다. 개혁은 상당 부분 정치의 영역이다. 뜨뜻미지근하지만 새 정부의 역할을 기대한다는 말을 남길 수밖에 없겠다. 무디스도 새 대통령이 대내외 성장 역풍에 맞서 구조조정을 하리라는 이유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던가. 거시알못 석사 나부랭이보다 무디스가 잘 알 것이다.

늘 버릇처럼 다는 번역과 편집 이야기. 이 책은 하버드대학출판부에서 영문으로 먼저 출판된 뒤 한국어판으로 나왔다. 번역이 애매하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감수가 필요해 보인다. 전문서적임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읽을 만하지만, 가끔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문장이 출현한다. 다행히 회사 도서관에 원서가 있어 참조할 수 있었다. 최소 두 명 이상의 역자가 따로 작업하고 감수 없이 합친 것으로 보인다. 가령 lag/lagged variable이란 표현의 경우 2장에서는 “지체”라고 옮긴 반면 6장에서는 정확히 “시차변수”로 번역한다. 시차변수라는 용어를 아는 역자가 지체라는 표현을 택할 리 없다. 이런 용어 문제는 주로 1-4장에서 발생한다.

한편 앞 부분 번역에는 정치적인 문제도 있다. 원문은 “the military coup”과 “assassination of President Park”을 각각 5.16 군사정변과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고 있다. 2, 3장 역자는 이를 각각 “5.16 군사혁명”과 “박 대통령 시해”로 옮겼다. coup는 “Coup d’état”(쿠데타의 프랑스식 표현)에서 온 단어로, 혁명이란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대통령은 군주가 아니므로 시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6장 역자는 assassination을 “암살”로 옮겼다. 같은 사람이 “시해”와 “암살”을 혼용할 가능성은 낮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편집상의 문제가 하나 더 있다. 표 안의 숫자가 틀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 가령 회귀분석 robustness check 중 결정계수가 0.61에서 0.06으로 튄 사례가 있다. 원서를 보니 원래 숫자는 0.60이다. 표 데이터 없이 수기로 옮기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을 문제다. 좀 이상하다. 이걸 발견하고 나서 표를 좀더 깐깐하게 체크했는데 이런 오기가 너덧 개쯤 더 있다. 다행히(?) 꼼꼼히 읽으면 숫자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이 정도 기획연구시리즈 단행본에는 감수자를 두는 게 어땠을까 싶다.

통신 기본료 폐지?

국민인수위원회發 통신정책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스마트폰 원가공개를 하겠다는데, 안 될 말씀이다. 부가가치란 게 뭔가?

욕 좀 먹을지언정 기본료 폐지 공약 역시 철회했으면 한다. 실익이 적다. KISDI가 매년 발간하는 <통신시장 경쟁상황 평가>에 따르면 한국 통신비는 국제적으로 비싼 편이 아니다. 설령 비싸더라도 일차원적 가격통제로 해결하려 들면 안 되며, 해결할 수도 없다. 오래된 떡밥이자 안철수 후보 공약이었던 제4이동통신사 도입도 나는 어렵다고 본다. 그럼 어떻게? 단말기 유통 채널을 다양화하고 알뜰폰(MVNO)을 지속적으로 활성화하는 게 당장으로서는 최선 아닐까. 지금도 헬로모바일 유심요금제는 타사 대비 매우 저렴하다. 아, 단통법은 없애고.

노동소득분배율 하락과 슈퍼스타 기업의 대두 (NBER w23396)

예전부터 관심 많았고 언젠가 연구해 보고 싶던 주제에 관한 워킹 페이퍼가 나왔다. ㅠㅠ 저자진이 갓갓, 갓갓갓, 갓갓갓갓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기존의 해석과 다른 새로운 모형을 내놓고, 2) 미시자료에 기초하여, 3) 모형을 지지하는 여러 통계적 근거를 내놓았다. 부럽… 아니 admire…

초록을 옮겨 보았다. 초록만 봐도 thought-provoking paper. 저녁 먹고 왕겜 보다 피곤하면 읽어야지…


노동소득분배율 하락과 슈퍼스타 기업의 대두 (The Fall of the Labor Share and the Rise of Superstar Firms), NBER w23396, 2017.

Autor (MIT), Dorn (U of Zurich), Katz (MIT), Patterson (MIT), Van Reenen (MIT).

지난 몇십 년간 미국 및 여타 다수 국가에서 노동소득분배율 하락 현상이 나타났다는 점은 꾸준히 확인되었으나 그 원인은 불명확하다. 이에 관한 기존 실증분석은 주로 거시자료나 산업별 자료에 의존하여, 기업 간 이질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이 논문은 1982년부터의 미국 경제총조사(U.S Economic Census) 및 국제자료를 분석하여 “슈퍼스타 기업”이 대두하며 노동소득분배율이 하락했다는 새로운 해석을 입증한다. 세계화나 기술진보가 개별 산업 내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기업에 유리하다면, 생산물시장 시장집중도는 상승할 것이다. 개별 산업에서 슈퍼스타 기업, 곧 이윤이 높지만 부가가치/매출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은 기업의 시장지배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슈퍼스타 기업”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노동소득분배율은 하락할 것이다.

연구 가설에서 통계적으로 검정할 만한 (이론적) 예측이 여럿 도출된다.

  • 산업 매출은 소수 기업에 집중된다.
  • 시장집중도가 가장 크게 상승한 산업의 노동소득분배율이 가장 크게 하락한다.
  •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의 원인은 기업 간 재배분에 기인한다. 기업 내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이 아니다.
  • 노동소득분배율 감소분의 구성요인 중 기업 간 재배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시장집중도가 가장 커지는 부문에서 가장 크다.
  • 이러한 현상은 미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나타난다.

본 연구는 이상의 예측을 뒷받침하는 증거 역시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