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오늘 인터넷에서 익숙한 그림을 하나 보았습니다. 한 해가 흘러 데이터가 업데이트되었음에도, 그림의 내용과 결론은 익숙했습니다. 무슨 그림이었을까요? OECD의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의 일부인 「초장시간 노동자 비율 국제비교」인포그래픽이었습니다.

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주: OECD (2017)

이 숫자는 취업자 중 주당 60시간(한국 통계는 54시간 이상) 넘게 일하는 노동자의 비율입니다. 노동통계의 강자 한국은 22.6%, 다섯 명 중 한 명으로 2위를 차지합니다. “형제의 나라” 터키가 간발의 차이로 1위네요. 역시 노동조건이 열악한 이웃 나라 일본과 한국의 격차는 무려 13.4%p입니다.
이 통계보다 유명한 OECD 노동통계가 하나 있습니다. 한국이 수십 년간 부동의 1위를 차지해 오다가 최근 멕시코에 왕좌를 물려준 통계, 1인당 연간 노동시간입니다. 매년 이 수치가 발표될 때면 언론은 “韓 근로자 연간 근로시간 OECD 1위… 12년 연속” 등의 표제를 쏟아냈습니다. 항상 최상위 랭커인 멕시코와 한국, 터키를 묶어 “OECD 개노답 삼형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주: OECD (2017).

두 지표를 함께 보면 이렇습니다. OECD 평균을 기준점으로 그래프를 4개로 분할하면, 한국이 속한 1사분면은 1인당 노동시간도 길고 초과근무자 비율도 높습니다. 일본이 속한 2사분면은 1인당 노동시간은 짧지만 초과근무자 비율은 높습니다. 그리스가 속한 4사분면은 노동시간이 길지만 초과근무자 비율은 낮고요. 선진국 다수가 속한 3사분면은 노동시간도 낮고, 초과근무자 비율도 낮습니다. 이래저래 한국과 ‘개노답 형제들’의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로축 값이 유사한 국가들 사이에도 세로축 값에 편차가 있습니다. 연간 근로시간이 높더라도 어떤 국가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 많이 일하고, 어떤 국가는 비교적 소수가 아주 많이 일하기 때문입니다.)

자료: OECD Statistics, OECD Better Life Index. 2015년 통계 기준.

그런데 이 삼형제의 우애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초장시간 노동자 비율 통계는 아직 채 5년이 되지 않았으니, 2000년부터 발표된 1인당 연간 노동시간 추이를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자료: OECD Statistics.

 

돌아보면 2000년 한국 수치는 충격적입니다. 당시 2위 멕시코보다 무려 200시간 더 일했습니다. 살인적인 수준이지요. 하지만 1\5년 동안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한국 노동시간은 극적으로 하락했습니다. 그 때부터 함께 최상위 랭커였던 형제 국가 멕시코, 칠레, 그리스의 하락세와 비교하면 그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한국은 여전히 “개노답 삼형제”의 일원이지만, 명백히 발전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측면을 볼까요? 노동시간은 1인당 GDP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덜 일하는데, 국민소득도 함께 줄어들면 노동시간 감소를 마냥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림에 함께 나타내면 이렇습니다.

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자료: OECD Statistics. 2015년 통계 기준

한국은 이번에도 역시 개노답 형제들과 함께 4사분면에 있습니다. OECD 평균보다 오래 일하고, 1인당 GDP는 적습니다. (ㅠㅠ) 1인당 GDP가 비슷한 스페인, 이탈리아에 비해 연간 400시간 더 일합니다. 노동시간이 비슷한 국가들과 1인당 GDP를 비교해 봐도 좋을 텐데, 노동시간이 비슷한 국가가 없습니다. (ㅠㅠㅠ)
이 그림 역시 몇 국가를 뽑아 2000년부터 15년간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은 언제까지나 OECD 노동분야 “개노답 삼형제” 일까?
자료: OECD Statistics. 글씨 색깔별로 연도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파랑(2000), 빨강(2005), 초록(2010), 노랑(2015)입니다.

한국을 볼까요? 앞서 보았듯 연간 노동시간이 극적으로 감소하는 가운데 1인당 GDP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위치에서 헤매는 다른 개노답 형제들과는 다르지요. 물론 저 국가들과 한국을 단독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저 흐름이 앞으로 지속될지도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부터 15년간, 도중에 세계 금융위기라는 거시경제 충격을 받으면서 1인당 GDP 성장과 연간 노동시간 감소를 이루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변화의 속도는 더디지만 한국은 분명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OECD 통계가 발표될 때면 매년 개노답 삼형제를 못 면하는 것 같고, 내 주변은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다 논할 수 없지만 저는 앞으로도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물론 발전해왔다는 사실,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의 한계에 면죄부를 주지는 않습니다. 개선이 필요하다면 비판해야 합니다. 지금껏 발전해 올 수 있었던 이유도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해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늦게 노동절을 기념합니다. 통계가 작성되기 전부터 저 급격한 하락, 또는 개선, 또는 발전을 위해 분투한 이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더하여, 故 이한빛 CJ E&M PD,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크레인 사고 사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수학 교육과정은 왜 점점 이상해지는 것인가?

과외돌이 시험을 앞두고 문제풀이 리뷰해 준 뒤 든 잡상.

수학 과외 8년차. 현행 2009 개정 교육과정은 수업하면 할수록 이상하다. 집합 개념 없이 함수를 가르친다거나, 도함수를 배울 예정이면서 계차수열은 삭제한다거나. 뜬금없이 초월함수(지수·로그·삼각함수)를 삭제한다거나. 등비수열은 남겨두고 지수함수만 삭제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지수와 로그를 안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내용 줄이겠다는 취지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렇게 앞뒤가 안 맞게 줄이면 곤란하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교과과정 분량을 줄여 수포자를 줄이겠다는 발상이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한다. 기초 단계 이해가 불충분해서 심화되는 내용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보이는 것이지, 내용이 많아서 과부하 걸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껏 주로 고등학생 과외를 했다. 수업을 해 보면 절대다수의 학생이 중학교 단계에서 배우는 등식의 의미(간단히 말해 “같다”와 “같아야 한다”)와 추상화(수-문자-식)의 의미를 숙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공사를 새로 하다 보면 사칙연산부터 다시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성적이 당장 오르지 않자 학부모는 선생을 자르고 마는데…)

가령 중학교에서 배우는 실수의 상등조건(a=b⇔a-b=0) 내지 대소관계는 기초적이면서 매우 중요하다. 얼핏 보면 당연해 보이니 대충 넘어간다. 저렇게 정의하는 이유나 필요를 몰라도 문제를 어느 정도 풀 수 있다. 그러나 윗 단계에서는 한계가 드러난다. 이 글을 읽는 분들 대부분은 아마 저 조건이 다른 수학적 대상에 대해 어떻게 바뀌는지 익히는 것, 같다는 조건을 차가 0이라는 조건으로 변형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테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렇지 않고, 수가 식으로, 함수로 바뀔 때 매번 새로 암기한다. 이런 현상이 전 단원에 걸쳐 일어난다. 일일이 쓰자면… 여백이 모자라다. 당연히 학습 부진이 나타난다.

고등학교 때 나라고 다 알았을까. 그랬다면 이과에 갔을 거다(…) 과외를 오래 하고 수학공부도 계속하다 보니 과거에 무엇이 부족했었는지 깨닫는 것뿐이다. 이번 과외를 마치면 (자녀가 생긴다는 가정 하에) 적어도 10년은 관심 갖지 않겠지만, 8년간 지켜보니 교육과정은 점점 꼬이는 것 같다. 나보다 훨씬 수학공부 많이 한 분들이 만드실 텐데 이유가 뭘까.

이언 모리스, 『가치관의 탄생』, 2014.

이언 모리스 (2014), 이재경 역 (2016), 『가치관의 탄생 (Foreagers, Farmers, and Fossil Fuels)』 . 서평과 메모 중간 어디쯤.

이언 모리스, 『가치관의 탄생』, 2014.

“에너지 획득 방식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가치관을 결정한다”는 간단하지만 논쟁적인 명제를 방대한 리서치에 입각해 논증한 책. 도덕과 윤리의 총체로 여겨지는 “가치관”의 기초에 실상 도덕이 없음을 보이려는 기획이다. 전작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확장팩으로도 읽힌다. 저자가 빅 히스토리를 조직하고 전개하는 솜씨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본인 주장 – 논평 – 재반론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구성도 훌륭하다.

내용 요약에는 큰 의미가 없어 생략한다. 이 책의 탁월성은 앞의 두 가지, 방대한 사례를 거시적 안목으로 엮어내어 명제를 뒷받침했다는 점과 비판-반비판을 수록하여 논의의 깊이를 더했다는 점에 있다. 주장 자체가 참신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모든 주장이 새로울 필요는 없다. 논증의 문제는 언제나 근거이지 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모리스의 주장을 “인류 가치관 변천사를 꿰뚫는 수량적 거시지표가 존재하며 그에 따른 설명은 다음과 같다.” 라고 생각하면 보기에 따라 새로울 수는 있다. 그가 수량경제사(cliometrics)가 아니라 고고학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나는 거시적 시각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거시적 설명에는 환원주의가 불가피하다. 추상이란 으레 그런 법이지만 보통 미시방법론은 그런 경향이 덜하다. 모리스가 채택한 지수화 비교 기법(전작의 사회발전지수, 본작의 에너지 획득량)은 환원 그 자체다. 지수는 현실의 다면성을 체계적으로 사상하는 도구이며 지수화는 필연적으로 논의를 일차원으로 축소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단점이 장점을 능가한다. 따라서 연구자는 먼저 지수의 장점 내지 불가피성을 해명하고, 이어서 지수 산출 메커니즘을 설득해야 한다.

전작에 5점 만점에 5점을 주었지만, 본문에서 저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수중에 책이 없어 확인할 수 없는데, 부록에서 더 궁금한 사람은 자신의 웹페이지를 참고하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서 서두에서 모리스는 “세상의 모든 학자는 환원주의자다”라며 정면승부를 건다. 재반론 섹션에서 지수 도입의 필요성과 산출 메커니즘의 제문제도 간략하나마 해명하며 두 책의 핵심 방법론을 방어해낸다. 이 책이 전작의 확장팩 격으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전작을 낸 뒤 “유물론자이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라는 평가를 들었다고 쓴다. 내가 마르크스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과연 그런 것 같다. 이 책의 논지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테제,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토대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구성된다. 마르크스 역사이론에서 생산관계와 계급 분화, 생산력-생산관계의 갈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모리스는 생산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생산관계는 일절 논하지 않는다. 모리스의 논의는 마르크스 테제와 거리가 있는 셈이다.

오히려 이 책은 현대 경제학의 시각과 친화적이다. 효용함수, 비용-편익분석 등의 개념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핵심 논지를 조금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가치관과 물리적 현실은 분리할 수 없다. 물리적 현실은 가치관을 담는 그릇이다.” “문화적 융통성 자체도 우리의 생물학적 본질의 일부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융통성에는 환경 변화에 대응해 우리의 효용을 계속 극대화하기 위한 핵심가치 재해석 능력도 포함된다.” 효용극대화가 제일목적이라니, 역사학자가 쓴 글 맞나 싶을 정도다. 논평자 리처드 시퍼드 교수도 이 부분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환경 변화에 대응한 핵심가치 재해석 능력이 곧 가치관 변형 능력이다. 그러니 가치관이 효용극대화를 위해 변한다는 관점은 지극히 기능주의적이다. 결국 제약하의 최적화를 달성하기 위해 효용함수가 동태적으로 변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좀 우겨 보자면 요소편향적 기술진보를 상정한 경제성장이론과도 통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더하여 저자는 시퍼드 교수의 비판에 이렇게 응수한다. “시퍼드 교수는 해답이 “감성으로 유지되는 가치관”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가치관을 말하는 걸까? 아쉽게도 거기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 시장이 세상의 걱정을 모두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기후문제에는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매우 놀랐다. 과문한 탓인지 인문학 교수가 이런 식의 주장을 펼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가치관이 아니라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 본질이라면 가치관은 더 이상 정오 내지 우열이 아니라 유효성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이 결론은 내 평소 생각과 일치한다. 과거가 되어 버린 세계의 기준으로 쓰여진 기록을 현대의 시각으로 평가·비판하는 행위에는 큰 의미가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보자. 현대기준-과거비판의 대표 주자 중 하나는 PC를 과거(동화 등)에 대입하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과거기준-현대비판의 대표 주자는 기독교다. 기독교의 근간에는 유목사회 가치관이 있으며 이는 야훼와 바알의 대립으로 상징된다. (단, 모리스는 이 책에서 유목사회를 거의 다루지 않았고 그 점을 한계로 인정한다.) 내가 보기에 그 가치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러면 기독교 역시 기축시대의 종교로 이제 시효를 다했는가? 답은 아직 미지수지만, (적어도 내게는) 중요한 질문이다. 아, 내 질문 방향이 “유효했”음을 확인했다는 덤도 이 책에서 얻은 수확이다.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 중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밝혔듯 거시를 덜 선호하는 취향도 깨뜨릴 정도로 괜찮은 책이다. 이 책이 내 올해의 책이 될까? 작년에는 역대급 책인 Goldin & Katz의 『The Race between Education and Technology』가 있어 전작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를 2016 올해의 책으로 뽑지 못했다. 올해는 어떨지 궁금하다. 그런데 8월에 박사과정 들어가면 당분간 책을 읽지 못할 테다. 3개월 안에 더 나은 책을 찾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론이 어딘가 우습지만, 기대된다.

Angrist & Pinscke, 『고수들의 계량경제학』, 2014.

Angrist & Pinscke (2014), 강창희 박상곤 역(2017), 『고수들의 계량경제학(Mastering ‘Metrics)』. 서평과 메모 중간 어디쯤.

Angrist & Pinscke, 『고수들의 계량경제학』, 2014.

실용성과 직관적 설명을 모두 갖춘 최신 응용계량경제학 입문서, 또는 학부생 RA 양산 비급.

요새 손에 잡히는 대로 학부 교과서를 읽으며 개념의 흐름을 정리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읽은 책. 원서는 2014년에, 번역서는 두 달 전에 나왔다. 이렇게 좋은 책이 학부를 졸업하고 나서야 나오다니.

저자들의 히트작 “대체로 해롭지 않은 계량경제학(Mostly Harmless Econometrics)”의 학부 버전이다. 내가 알고 있는 계량 교과서 중 가장 친절하다. 평균, 분산(공분산) 개념과 연산법칙을 아는 독자라면 소화할 수 있다. 심지어 저 개념에도 지면을 할애했을 정도로 친절하다. 물론 다른 개념도 쓰이지만 저자들이 때마다 자세히 설명한다.

저자들은 이 책을 철저히 실용서로 기획한 것 같다. 수식을 최소화하고 핵심을 전달하려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정규방정식이니 최량선형불편추정량(BLUE)이니 하는 용어와 수식에 질려 계량 책을 접은 경험이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전혀 나오지 않는다. 부실공사가 의심되는가? 이론적 배경 설명을 덜어냈을 뿐, 저자들은 추정치를 꼼꼼하게 해석하는 시범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최소한의 계량 literacy가 생기고, 역시 최소한의 실증모형 돌리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수퍼바이저가 업무를 정확히 지시해 준다면 프로젝트 즉시전력으로 일할 수 있다. 한계야 있겠지만. (학부생 RA 가르치기 귀찮아서 쓴 책 아닐까?)

고전적 가정 하의 선형회귀모형에서 출발하여 가정을 하나씩 완화시키는 방식의 표준 전개와 조금 다르다. 목차 순서가 다음과 같다. 무작위 시행 – 회귀분석 – 도구변수 – 회귀단절법 – 이중차분법 – 교육수익률 추정. 여기서 알 수 있듯, MHE와 마찬가지로 무작위대조실험(RCT) 철학에 기초한다. 1장에서 무작위 시행이라는 발상의 탄생과 필요성을 다룬 뒤, 회귀분석부터 이중차분법까지 계량경제학 도구를 RCT 시각에서 해석하며 설명한다. (그러니 2장에서 Omitted Variable Bias 식을 정확히 이해해야 뒤 논의를 편하게 따라갈 수 있다.)

챕터마다 연구방법론 설명에 적합한 사례를 하나 잡고 그 맥락에 의존해서 설명하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보통 교과서는 추상이론 설명 후 응용사례를 소개한다. 이론 설명에 예시를 동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이다. RCT 배경 책인만큼 그 방식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RCT 연구자들은 무작위실험 사례의 특성을 철저하게 파고들어 식별전략(identification strategy)을 찾아내곤 한다.

계량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이 책으로 시작해서 Wooldridge의 학부 교과서 Introductory Econometrics (일명 Baby Wooldridge)로 보완하면 될 듯하다. (번역 소식을 전해 주신 모 페친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내가 보기엔 당분간 이 조합보다 나은 입문서 조합이 나올지 의문일 정도로 좋다. 한국어 사용자 입장에서는 두 책 모두 번역된 것도 장점이다. (Baby Wooldridge는 전반부만 번역되었기 때문에, 저 책 대신 역자 한치록 교수님의 <계량경제학 강의>를 써도 좋겠다. 바로 MHE로 넘어가는 것도 물론 괜찮은 옵션이다.)

단, 역서 수식 표기(특히 하첨자)에 더러 오류가 있다. 영어 문장 구조를 그대로 옮긴 듯한 직역도 조금 아쉽다. 그래도 충분히 읽을 만한 번역이고, 멋대로 의역한 것보다 이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구루가 얘기해주는” 컨셉인데 이런 글을 한국식 글쓰기로 옮기기 까다롭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4차 산업혁명? 문제는 대체탄력성이다

정보기술과 경제성장 이슈도 결국 대체탄력성 문제다. 소비부문(재화간 대체탄력성)과 생산부문(요소간 대체탄력성) 모두. “특이점이 온다”고? 기술적 특이점이 반드시 경제적 특이점으로 이어질까?

이게 소위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모든 논자를 걸러도 되는 이유다. 공포 마케팅을 부추길 뿐 누구도 대체탄력성 – 반드시 이 용어를 쓸 필요는 없다 – 은 말하지 않는다. (* 직업별 대체확률이 그나마 근접하지만 다른 말이다. 애당초 대체탄력성이 비탄력적이면 저런 논의가 불필요하다.)

<21세기 자본> 때와 비슷하다. 그 때도 대체탄력성이 핵심 이슈였다(Rognlie의 비판). 그 외의 주 이슈는 80년대 tax reform(Feldstein의 비판) 정도. 둘 다 국내 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다. 온갖 변죽을 울려댄 것에 비하면 아예 없다시피했다. 그래도 중앙일보에서 다룬 적이 있어, 이 케이스보다는 사정이 낫다.

주말에 논문 읽고 정리한 걸 바탕으로 포스팅을 하려 했으나… 글이 영 안 써지는 관계로 불평부터 늘어놓아 본다.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Air), 2016.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 2016.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Air), 2016.

이 책은 젊은 나이에 눈부신 성취를 이룬 저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기록이다. 저자 폴 칼라니티는 인도계 미국인으로 스탠퍼드, 케임브리지, 예일에서 학위를 받았다.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영문학도로 출발하여 의학과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탐구의 일환으로 신경외과 의사가 되었다. 모교 스탠퍼드대학교 병원 교수직을 제의받기 직전 폐암에 걸려 서른여섯에 사망했다.

저자는 먼저 의사가 되기까지 거친 지적 여정을 회고한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한사코 거부했던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돌아온 길을 이야기 형식으로 술회한다. 그리고 암 투병을 겪으며 경험한 지적·생애적 전환을 기술한다.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지 않는다. 의사이자 철학자로서의 사유를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어린 딸을 생각할 때를 제외하면 격정적인 대목이 없다. 한창 삶의 의미를 고민할 때, 언젠가 죽음을 대면한다면 쓰고 싶다 생각한 글의 전범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담담하게 글을 남기는 사람은 드물다.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묻는다. 칼라니티가 의사로서 남들보다 오래 독립을 지킬 수 있었기에 이 기록이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몇 주 전, 말기 난소암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여성이 뉴욕타임스에 자기 남편은 좋은 사람이며, 함께 해줄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기고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녀도 전업 작가였다.

읽기 힘들었다. 늘상 들여다보는 책과 달리 수식은커녕 도표 하나 없었고 문장도 평이했다. 분량도 적었다. 그럼에도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반 이상 느렸다. 어머니를 떠올린 까닭이다.

나는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하길 바랐다. 어머니는 간호사, 종교인이자 “똑똑한 셋째 누나”였다. 글도 잘 쓰셔서 학부모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도 몇 차례 하셨다.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다. 간호사로서 가진 난소암에 대한 지식과 경험, 살고 싶다는 소망, 목회자로서 의연하게 하느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해하지는 못했다. 어째서 병증에 대한 지식이 공포로만 귀결되는가.

길을 찾기 위해 나는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싯다르타 무케르지가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에 “암 환자는 생의 새로운 정상상태(new normal)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쓴 말을 옮긴 날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말은 뒷전이고 내가 상황을 파악하려 그 두꺼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더 기뻐했다. 답답했다.

칼라니티의 수려한 문장을 빌려 그런 어머니를 조금 이해했다. 그는 어린 딸 케이디에게 짧은 편지를 남긴다.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생애사 정리를 권할 게 아니라 내가 귀 기울였어야, 길 잃은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갔어야 했다.

톨스토이는 죽어가는 인물의 심리를 충격적인 묘사로 정리한 바 있다. “아무도 그를 그가 원하는 만큼 동정하지 않았다.” 이 무심한 자는 그 대목을 읊조리면서도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인텔리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귀가 없단 말인가.

책을 다 읽고 며칠 뒤 꿈을 꾸었다. 얄궂은 꿈이었다. 초기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했다. 재활 중 눈 뒤에 악성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시간이 교묘히 뒤틀려, 첫 수술 때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 재활을 다짐하며 같이 잘 해보자고 말할 때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의사는 두 번째 종양 소견을 내놓으며 리스크가 크니 선택은 본인의 몫이라고 말했다. 말의 심연 속에서 한참 헤매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다. 돌아보지 않던 얼굴이었다. 한참 울다 깨어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목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구약성서 창세기가 연상되는 표현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보다 세련된 언어로 나를 일깨워 주어 감사하다. 바람 된 그의 숨결이 안식하기를 빈다.

“나는 스탠퍼드에서 영문학을, 케임브리지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며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 나는 죽음의 두 가지 수수께끼인 경험적인 징후와 생물학적인 징후, 즉 아주 인격적이면서도 철저히 비인격적인 측면들을† 파헤치기 위해 의학을 탐구했다.”

“폐암 진단은 확정되었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무척 익숙했던 죽음이 이제 내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죽음과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지만, 아직 죽음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치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이 남긴 발자국을 보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할 텐데, 기로에 선 내 앞에 보이는 거라곤 텅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유한성에 굴복한다. 이런 과거 완료 상태에 도달한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대부분의 야망은 성취되거나 버려졌다. (..) 돈, 지위, <전도서>의 설교자가 설명한 그 모든 허영이 시시해 보인다. 바람을 좇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 : 역자는 “personal and impersonal”을 “개인적이면서도 비개인적인”이라고 옮겼다. 문맥상 “인격적이면서도 비인격적인”이 맞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