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1-(1). 톺아보기: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0. 들어가며

구약성서 레위기 2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어느 누구든지, 주에게 사람을 드리기로 서약하고, 그 사람에 해당되는 값을 돈으로 환산하여 드리기로 하였으면, 그 값은 다음과 같다.스무 살로부터 예순 살까지의 남자의 값은, 성소에서 사용되는 세겔로 쳐서 은 오십 세겔이고,  여자의 값은 삼십 세겔이다. …” (새번역 레위기 27:1-4. Fuchs (1971))

성 격차gender gap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자연스레 노동시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저 성서 구절도 괄호 안에 쓰인 경제학 논문 도입부를 따온 겁니다. 연구 과정에서 여러 방법론을 탄생시키며 노동경제학 발전을 촉진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학계의 중심, 미국의 경우 1990년대 들어 각종 불평등이 심화되었으나 성 불평등은 완화되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이 현상을 “젠더 대수렴The Great Gender Convergence“으로 명명했습니다(Claudia Goldin 하버드대 교수). 비슷한 맥락에서, 시대적 조류를 거스르는 현상(“Swimming Upstream”)이라 쓰기도 합니다(Francine Blau 코넬대 교수). “수렴”이 곧 완전 성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대폭 완화되었다는 점에는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이 글은 한국의 성평등 현황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손에 잡히는 숫자가 필요합니다. 노동시장을 대표하는 지표는 뭐니뭐니해도 고용과 임금입니다. 이외에도 성 격차 지표가 많고 이 둘을 측정하는 방법도 여럿 있지만 여기서는 전통적인 지표를 택하겠습니다. 고용 지표로 경제활동참가율/고용률, 임금 지표로 시간당 임금 (그냥 임금이라 생각하면 됨)을 보겠습니다. 설명하겠지만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용어를 설명하겠습니다.


용어 설명

– 인구 분류:

노동시장을 분석할 때 인구를 보통 이렇게 분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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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 상태에 따른 인구 분류

 

그리고,

경제활동참가율 = 경제활동인구/생산가능인구

고용률 = 취업자 / 생산가능인구,

실업률 = 실업자 / 생산가능인구

로 정의합니다. 생산가능인구 모두가 경제활동에 참가하면 경제활동참가율이 100%, 아무도 참가하지 않으면 0%가 되는 식입니다.

 

코호트:

어떤 특성을 공유하는 인구집단을 가리켜 코호트cohort라고 합니다. 가령 1970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1970 출생코호트”, 1980-84년에 결혼한 사람들은 “1980-84 결혼코호트”입니다. 1970-74 출생코호트가 50-54세가 되는 2020년에 평균소득을 알아보려면 50-54세 자료를 보면 됩니다. 통계적으로 세대 차이를 감안하는 방법이라 생각하세요.

※ 표와 그래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 수치는 모두 퍼센트입니다.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한국 경제활동참가율은 최근 20년간 남성 70-75%, 여성 50% 내외로 안정적입니다. 그런데 20%p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요? 이 질문에서 출발해 보겠습니다. 성별 참가율을 연령별로 보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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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2015).

남성 참가율 곡선은 매끈하게 증가했다 감소합니다. 이런 형태를 흔히 역U자 곡선inverse-U shaped curve이라고 합니다. 반면 여성은 30대에 뚝 떨어졌다가 40대에 어느 정도 회복됩니다만, 벌어진 차이는 메워지지 않습니다. 20대는 남성을 앞서거나 비슷한데요. 보통 한국 여성 경제활동참가율 곡선의 이런 형태를 “M-커브M-curve 현상”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요?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결혼, 출산, 육아가 대표적인 원인입니다. 그건 세계 누구나 겪는 일 아니냐고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눈금 한 칸이 20%라는 데 주의하세요. 생각보다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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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ILO (2015). 출처는 본인의 석사학위논문.

다른 나라 여성 참가율 곡선은 한국 남성과 비슷한 역U자 형태입니다. 일본이 한국과 비슷한 M-커브 형태입니다. 경제규모가 어느 정도 이상인 국가 중 한국과 일본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났고, 일본은 최근 10년간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그림에서도 한국보다 일본 곡선이 더 위에 있습니다. 같은 연령대로 비교하면 일본 참가율이 더 높다는 말이지요. 한국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면 역U자 곡선의 일부가 되었을 여성들을 가리키는 단어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경력단절여성”, 줄여서 “경단녀”. 20%p 격차가 여기서 출발합니다.

아니, 미국은 무려 “수렴”했다고 하고, 일본도 나아졌다는데 한국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요? 그래도 지난 세월 많이 나아졌습니다. 지난 50년간 데이터로 그린 연령별 참가율 곡선을 두 개 보겠습니다. 색깔이 진해질수록 현재와 가까워지고, 위로 올라올수록 “좋아지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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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각년도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위 그림은 연도별-연령별 참가율, 아래 그림은 연령별-코호트별 참가율입니다. 5년마다 15-19세 코호트를 새로 추적한 것입니다. 현재 30대 중반인 1995 15-19세 코호트 (1976-80년생) 까지만 의미가 있고, 그 뒤 코호트는 참고만 하십시오.

사실 경활참가율을 단순 연도별로 비교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2014년을 예로 들면, 해당연도 참가율 곡선엔 2014년 20-24세 집단(1986-90년생)과 55-59세 집단(1955-59년생)이 공존합니다. 단순히 이 자료를 이용해 비교하면 세대 차이가 무시됩니다. 코호트별로 보면 여성이 나이 들며 발생하는 변화를 세대별로 관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연도별 비교에는 시대 변화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연도별 그림을 보면 50년간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코호트별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20대 여성의 참가율이 눈에 띄게 상승했습니다. 맨 처음 그림(2015)에서도 20대에는 성별 격차가 거의 없었지요. 그런데 코호트별로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35세 이상으로 가면 코호트별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일자리가 없대도 그렇지, 30년 차이가 나는 1966 코호트와 1995 코호트에 기껏해야 5%p 차이밖에 없다니요. (잠깐! 20대 초반 참가율이 1985 코호트 이후 하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학교육 확대입니다.)

이 숫자들은 채용 차별이 과거에 비해 완화된 것이 사실이나 직장-가정생활 병행이 여전히 어렵다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한창 육아에 바쁠 35-44세 참가율에 코호트별 차이가 없다시피 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한편 20대 참가율 상승은 여성들이 대학에 더 많이 가고, 결혼이 늦어지며 과거 20대에 그만두던 사람들이 30대에 그만두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조삼모사 같지만 그럼에도 30대 참가율은 하락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느리게나마 바뀌고 있다는 뜻입니다.

2001년 11월 정부는 일-가정 양립 정책의 일환으로 출산전후휴가 기간을 60일에서 90일로 확대했습니다. 늘어난 30일분의 급여를 국가에서 지원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육아휴직 급여도 고용보험기금으로 지급하기 시작했지요. 이 때부터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사용자 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산휴가가 1953년, 육아휴직이 1987년에 도입되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늦었습니다. 이듬해부터 집계된 통계를 보면 30대 참가율이 하락하지 않은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modern_footnote]이 통계는 공식 자료를 기반으로 제가 산출한 것이라 오차가 있습니다. 심각하진 않을 거고, 있더라도 실제보다 높은 수치는 아닐 겁니다. 현실이 이 통계보다는 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적당히 참고하세요. 설명은 마지막에 나옵니다.[/modern_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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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각년도 통계청 인구동향조사, 고용보험 DB

간신히 한 자리 수를 유지하는 2002년 수치가 말합니다. 사용이 어느 정도 되어야 집계되는 법이라고요. 다른 자료를 보아도 상황이 비슷합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1970년대부터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실태조사』라는 이름으로 인구·가족 관련 조사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성의 일-가정 양립, 그러니까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관한 내용도 다룹니다. 그런데 2006년에야 이 항목이 포함되었습니다. 법 개정 직후인 2003년 즈음에는 집계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간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보시다시피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모두 사용률이 급상승했습니다. 출산휴가가 보장되는 직장에서 육아휴직도 보장될 거라고 가정하면, 출산휴가 쓰는 사람의 90% 가까이가 육아휴직도 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둘 중 하나만 쓰는 사람이 있으니 저 정도는 아니겠지만, 전반적인 추세가 바뀌진 않을 겁니다.) 실질적인 육아조건이 대단히 개선된 것입니다. 이게 30대 참가율이 하락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실질 보장 수준이 저렇게 향상되었다면, 보장받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역시 자료를 보겠습니다[modern_footnote]이 표의 수치는 좀 큽니다. 2011년 이후에 마지막으로 출산한 사람들 중 한 번이라도 제도를 활용한 사람이면 사용했다고 응답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2015년에” 사용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몇 년치가 누적되었다는 것이지요.[/modern_footnote].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1: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주: <2015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실태조사>에서 인용. 편의를 위해 주요 수치 위주로 재편집.

위에서 언급한 보건사회연구원 2015년 조사에 따르면 주로 공공기관 근무자, 관리·전문직들입니다. 교사와 공무원이 최고라는 인식이 여지없이 확인됩니다. 파란 상자를 보면, 현재 경력단절을 겪는 사람들조차 다른 직장·직종 평균 내지 이상으로 출산육아 보조제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들만 써먹고 있다기보다는 아직 일반 직장에서 제도가 널리 활용되고 있지 않은 것이지요.

한편 경력단절 여성의 경우 비단절 여성에 비해 전반적으로 사용률이 낮습니다. 보조제도 사용과 경력단절 여부 사이에 매우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직 보조제도가 경력단절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계속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 직장으로, 보통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직장으로 간다면 제도보다 성향의 영향이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쇼, 이런 보조제도를 곤란해하는 직장이라면 애초에 여성 채용을 꺼리는 곳 아니겠어요? 그래서 다들 공무원 교사 하려는 거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요.” 옳은 말씀입니다. 문제는 현상의 원인이 정말 차별이냐는 질문 역시 가능하다는 겁니다. 역시 매우 오랫동안 연구된 주제입니다. 이렇게 성별로 종사산업이나 직종이 나뉘는 현상을 성별 직종분리occupational segregation라고 합니다. 아니 이 작자가 보자보자하니까 도대체 뭐라는거야? 싶으시다면 조금 더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다음 글에서 성별 직종분리를 다루겠습니다.


(참고) 출산휴가, 육아휴직 사용률 산출 방법

사용률은 (정책 수혜자 수) / (일하는 산모 수)로 계산합니다. 분자와 분모를 어디서 얻었는지 설명하면 되겠지요. 먼저 분자를 보겠습니다. 국가통계포털 KOSIS에는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에서 나온 출산휴가, 육아휴직 사용자 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출휴, 육휴 급여를 국가에서 받은 사람 수입니다. 이걸 가져왔습니다. 자영업자, 소규모 사업체 종사자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보다 적은 수치입니다.

분모가 문제죠. 출산 중 사고로 산모가 사망하는 경우는 미미하다고 하고, 쌍둥이를 감안하고 나면 출생아 수는 산모 수와 같습니다. 여기에 연도별 평균 가임기 여성 (15-49세) 고용률을 곱해 분모를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오차가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전체 추세를 보려고 하는 것이니 이 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했듯 보건사회연구원 자료는 회고적 자료 (과거 기억을 묻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연도 자료 (횡단면)를 보려면, 보다 복잡한 보정을 하지 않는다면 이 정도가 최선이겠습니다. 논문 쓰는 건 아니니까요.

내용이 좀 심심하죠? 뭘 이리 장황하게 썼나… 싶을 수도 있는데, 민감한 주제기도 하고, 단편적인 수치 나열만 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써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 노잼 숫자놀음을 누가 읽을지 모르겠지만요. ^^

 

성평등, 아직도 가야 할 길: 들어가는 글

포스팅 예고.

한 해 동안 젠더 이슈가 많았습니다. 논의를 따라가며, 여성 노동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쓴 노동경제학 전공자로서 한 가지 아쉬웠습니다. 논의가 주로 용어, 태도, 문화에 국한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 이론과 통계자료를 통해서도 성평등, 혹은 성차별 문제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 주제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학계 밖으로 나오면 몇 가지 수치만 단편적, 편의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제의 중요성과 축적된 연구성과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고, 일반 독자를 위한 글도 찾기 어려운 것 같아 노트로 정리해 보려 합니다.

논문도 아니고 방대한 문헌을 다 요약할 순 없으니 정말 기초적인 몇 가지만 다룹니다. (여러 개 다룰 만큼 알지도 못합니다. 언젠가 시리즈를 쓰고 싶은데, 그 프리퀄 격으로 생각합니다.) 다루는 주제나 내용이 특별히 새롭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통계를 소개하고 이론적 설명을 좀 달았습니다. 관련 연구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법한 내용이고, 몇몇 통계는 통념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주는 정도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안 팔릴 건 압니다. 일단 그래프가 많이 나오거든요. 최대한 쉽게 써 보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려 합니다. 거창하게 “성평등(gender equality)”이라고 제목을 달았지만 이 글은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통계가 생물학적 성별을 기준으로 작성되기 때문입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불평등 문제에 무관심한가?

불평등 문제를 교육과 기술혁신 곧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통해 설명한 <교육과 기술의 경주 (The Race between Education and Technology)>(Goldin & Katz, 2009)를 읽고 있다. 소위 주류경제학과 불평등 문제의 관계를 한큐에 요약한 부분이 있어 옮겨 본다. 저자 둘 모두 하버드 경제학과 교수, 덤으로 부부다. 그러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연구자들이 불평등 심화를 인지한 1980년대에 그 중요성을 믿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몇몇은 현상을 면밀히 검토하고, 다른 척도(measure)로 교차검증하면 희석되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던졌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크게 심화된 미국 경제불평등은 척도와 자료를 바꾸어도 꾸준히 관찰되었다. 다른 연구자들은 소득불평등 변화가 저축-차입 상쇄에 따른 가계소득의 일시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1970년 끝 무렵부터 나타난 경제불평등 현상은 실재한다.”

“미국 경제성장률은 지난 10년간 회복되었으나, 성장의 과실은 과거보다 훨씬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근로소득은 국민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대다수 미국 가계는 근로로 생계를 꾸리므로, 불평등 심화에 관한 이야기는 곧 노동시장과 근로소득불평등 변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번역은 본인의 것)

딱히 주류경제학은 불평등에 관심이 없냐고 성토하는 글이라거나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데 불평등 타령하냐는 글 연속으로 봐서 올리는 거 맞다. 경제 양극화가 문제라는 주장이나, 문제없다는 주장이나 의견의 양극화를 부추기기는 매한가지다.

이하는 원문.

“When rising inequality became noticed by researchers in the 1980s, some initially doubted its significance. Some questioned whether the facts would stand up to closer scrutiny and to a wide range of measures. But the large increase in U.S. economic inequality since the late 1970s is robust to a host of alternative measures and is revealed by many data sources. Other researchers were concerned that income inequality changes reflected no more than a rise in the transitory variation in household income that was offset through saving and borrowing, but that does not appear to have been the case. The sharp rise of income inequality of the 1980s is echoed in the large increase in the inequality of consumption per adult equivalent among U.S. households and in long-run measures of family incomes and labor market earnings. Rising economic inequality since the end of the 1970s is a very real phenomenon.”

“U.S. economic growth has recovered over the last decade, but the benefits of economic growth are now far less equally shared than in the past. Only the top part of the U.S. income distribution has seen income gains in recent decades as strong as in the pre-1973 period. Because labor income makes up the vast majority of national income, and since most American families make their living from work, the story behind rising inequality is one about the labor market and changes in the inequality of labor market earnings. We now turn to documenting recent trends in U.S. wage inequality.”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2013.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The Why Axis: Hidden Motives and the Undiscovered Economics of Everyday Life), 2013.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2013.

무엇이 서평쓰게 하는가?

읽는 재미가 있는 실험경제학 교양서. 최전방 연구자들이 2013년에 출간한 만큼 최근 연구 사례가 잘 정리되어 있다. 전반적 톤이 유쾌하다. 이런 농담도 던진다. “전통적 경제학에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므로 기부를 부탁하는 다이렉트메일을 그저 씩 웃으며 던져버리리라 추측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전부 이기적인 것은 아니고 심지어 경제학자들 중에도 친절한 행동에 친절하게 보답하고 싶어하는 좋은 사람이 있다.”

저자들은 화려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입담으로 자신들의 연구 분야를 세일즈한다. “사람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가 통상 경제학의 금과옥조다. 이 책은 한 걸음 나아가 사람이 ‘어떤’ 인센티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주목한다. 저자들은 경우에 따라 비금전적 인센티브가 금전적 인센티브만큼 중요하며, 무작위대조실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 RCT)이 인센티브의 종류와 정도를 식별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설파한다.

성 격차(2, 3장), 교육과 불평등(4, 5장), 차별(6, 7장), 공공정책(8장), 자선사업(9, 10장), 기업활동(11장) 등 다양한 사례가 근거로 동원된다. 내용을 떠나 글에 흡인력이 있다. 만만치 않은 액수의 실험연구 예산을 확보한 비결을 알 법하다. 읽다 보면 우울한 과학에 오염된 나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 읽을 때쯤 서평 많지 않으니 하나 쓰는 게 어떠냐고 쿡쿡 찌른다. 관심 있게 읽은 대목 위주로 정리했다.

성 격차(gender gap)의 원인은 무엇인가? 노동경제학자들은 이 주제를 오랫동안 탐구해 왔다. 최근 성별 교육수준 균등화에 따라 학력의 영향이 줄어들자 연구자들은 인적자본이론 바깥에서 원인을 찾는다. 저자들은 성별 경쟁심리 차이를 든다. 여성이 남성보다 경쟁적 환경을 덜 선호하며, 근로계약조건을 협상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도 더 많다는 것이다. 군인은 남성, 간호사는 여성 식의 성별 직종분리(occupational segregation) 현상도 경쟁심 차이로 설명한다.

문제는 본성과 사회적 학습 중 경쟁심 차이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nature vs. nurture”). 이 문제는 단순히 계량경제학을 적용하기 어렵다. 경쟁심 측정이 어렵다는 점을 둘째 치더라도, 기존 데이터가 문화적 요인에서 자유롭지 않다. 서구사회에서의 실험 역시 무의미하다. 저자들은 실험을 위해 부계•모계사회로 떠난다. 실험 결과를 토대로 이들은 사회적 학습이 경쟁심리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문화적 요인에 따라 여성은 남성만큼, 혹은 그보다 더 경쟁심이 강할 수 있다 (Gneezy, Leonard, List 2009, Econometrica).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2013.
마사이족이 부계 사회, 카시족이 모계 사회다.

이는 성 담론뿐 아니라 정책에도 시사점을 갖는다. 생물학적 요인의 영향이 지배적이라면 남성에게 유리한 교육환경이나 노동시장 관행 개선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청(소)년-성인 타겟팅). 사회적 요인의 영향이 크다면 여자아이들이 조기에 경쟁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아동 타겟팅). 저자들은 후자의 손을 들어 주면서 성별 사회화 양상을 바꾸기 위해 “남학교와 여학교를 분리하는 시스템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다른 실험에서 모계사회 구성원들에게서 이기심이 덜 나타났다고 보고하며, 저자들은 “여성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라고 ‘경제학스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학교 성별 분리 주장은 일견 당황스럽지만 논리적이다. 똑같이 시험 만점 받아도 여학생은 별 말 없이 넘어가고 남학생은 칭찬한다면 경쟁심은 다르게 발달할 것이다. 남자 형제를 둔 여성에게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들이 인용하는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교사들이 평균적으로 남학생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인다. 성별을 분리하면 그런 요인이 원천차단된다.

발전된 논의를 접해보지 못한 탓인지, 경제학을 못해서인지 동의하기 어렵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아닐까. 진부한 이야기지만, 이성과 인간 대 인간으로 공존하는 법은 매우 중요하고 조기에 익혀야 한다. 나는 학교가 최소한의 시민윤리 교육의 일환으로 이를 가르쳐야 하며 남녀공학이 그에 알맞는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곳에서 습득할 수 있다면 고려해 볼 수 있겠지만, 1자녀 가구가 늘고 하다못해 교회 출석인구도 줄어드는 마당에 어디서 배우겠는가?

양육이 본성보다 경쟁심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과 여성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인류를 구원할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모계 문화에서만 발현된다면 양육의 영향이 큰 것이므로 여성성으로 명명할 수 없다. 게다가 모계문화가 여성 가부장제일 뿐이라면?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는 대답은 유전자를 특정하지 못하는 한 결국 “우리들의 무지(our ignorance)”를 인정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대목이었다고 생각한다. 괴테를 꼭 오마쥬하고 싶었던 걸까

챕터 마지막에서 당혹감이 짙어진다. “끝으로, 효과적으로 경쟁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행복해지는 열쇠는 아니다. 마음의 평정은 자신의 직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 부모로 이웃으로 살아가면서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딸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힘빠지는 문장이다. 마음의 평정이라니? 동네 목사님 설교라면 납득할 수 있겠다. 청교도적 발상이 아니라는 학교 성별분리도 의심스러워진다. 페미니즘 찬반여부를 떠나, 경제학자의 글쓰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육과 불평등을 다룬 4-5장은 새롭지 않다. 시카고 교육정책 개혁에 실험적 방법을 응용한 사례를 중심으로 내용을 풀어 간다. 학업성취도 증진을 위해 어떤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공부는 내적 동기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일회성 보상이 장기적으로는 악영향을 미친다”는 통설에 근거가 희박하다고 말한다. 일회성 보상엔 분명히 학업성취도 증진 효과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긍정적 효과가 없지만 부정적 효과도 없다. 아동교육정책에 조기개입이 중요하다는 결론은 체티(Chetty), 헤크만(Heckman)의 유명한 연구와 궤를 같이한다. (여담으로 내 부모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런 약속을 하지 않으셨는데, 10년 전으로 돌아가서 이 책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전과목 만점을 받은 날 부모님은 탕수육을 하나 시켜 주셨다. 다음날 그 이야기를 들은 담임 선생이 그게 다냐며 어이없어하던 표정이 기억난다. 흑.)

6-7장 차별의 경제학은 교과서적이다. 게리 베커 스타일 선호에 의한 차별(discrimination by preference)과 통계적 차별(statistical discrimniation, 책에서는 경제적 차별이라는 용어 사용)을 설명하고 차별 원인을 식별한 실험사례를 소개한다. 장애인에게 더 비싼 가격을 부르는 자동차 딜러들이 차별주의자인가? 실험 결과는 그들이 합리적 선택을 할 뿐 차별주의자가 아님을 시사한다. 딜러들이 장애인들이 딜러를 여럿 만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가격을 책정한 것. 결국 차별이 타인에 대한 적의에 기반하면 선호에 의한 차별, 불완전정보 하 이윤극대화의 결과라면 통계적 차별이다. 국내로 눈을 돌리면, 최근 논란이 된 서강대 쥬시 아르바이트 채용 공고가 전형적인 통계적 차별 사례다.

저자들은 현대 미국에서 선호에 의한 차별보다 통계적 차별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주장은 시사점이 뚜렷하다. 통계적 차별 완화에는 할당제 등 적극적 평등실현조치(affirmative action)보다 경제주체들 간 정보전달(signalling)을 원활하게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다. 장애인 의무고용법보다 비장애인과 생산성 차이가 없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돕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것. 정보경제학의 전형적 결론이다. 소비자가 기업에 정보를 제공하는만큼 기업은 그 정보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밝혀야 한다는 결론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박사과정 지망생으로서 명문대 교수인 저자들에게 묻고 싶었다. “지원자들이 정보(GPA, SOP, 연구경력, 추천서 등)를 제공하는 만큼, 정보가 심사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공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8장 공공정책의 경제학은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라는 “미국적이지 않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넛지>처럼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실험을 통해 알아낸 사례를 소개한다. 아무런 물음 없이 기본값을 정해 버리는 넛지 방식(별도의 의사 표명 없다면 장기를 기증)에 도덕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과정을 간소화하고 선택의 결과를 알려주는 뉴슨스nuisance 방식(의사 표명할 경우 장기 기증하지 않음)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여기서부터 책이 좀 지루해졌다. 시카고 범죄통계시스템 구축을 오라클에 의뢰하고, 조건으로 전국 경찰서에 DB를 팔아주겠다고 했다는 대목이 가장 흥미로웠다. 한국이라면 경찰청이 통합 DB 사업 발주하고, 사업은 하청에 하청을 거쳐…(이하 생략)

9, 10장 자선사업의 경제학은 기부행위의 동기를 밝히고 기부액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찾는다. 사례 자체는 모두 흥미롭다. 자선단체에 기업경영 방식을 도입한 스마트트레인 소개, 기부 동기의 이중성(자기만족, 이타심)을 분석하며 이기적 이타주의(egoistic altruism)를 말하는 과정은 꽤 읽을 만 하다. 여러 기부 요청 방법 실험을 일일이 소개할 때 조금 호흡이 늘어지지만 능란한 글솜씨 덕분에 무난하게 읽힌다.

내가 이 장에서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한 이유는 이 문제에 관심이 없으며, 기부 문화가 미국보다 덜 활성화된 한국인이기 때문인 것 같다. 경제학의 합리성 가정 비판에 익숙한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이 장에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 나온다. “인간의 행동이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동기를 이해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각자 충족하려고 애쓰는 서로 다른 욕구와 필요는 전통적이고 제한적인 전제, 고정관념,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방법, 전통적 행동방식에 맞지 않는다.”

저자들은 끝까지 실험의 우월성을 역설한다. 좀 과격한 표현이지만 외팔이 경제학자 – “on the other hand”가 없는 – 느낌. 이 책에서만큼은 균형잡힌 안내자보다 세일즈맨을 자처하는 듯하다. 연구 파트너나 기금 지원자에 대해 후하게 서술할 때면 그런 느낌이 두드러진다. 후반부로 갈수록 방법론 홍보를 위해 무리수를 던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실험이 기업활동 혁신을 돕는다는 주장(11장)은 성기고 동어반복적이다. 실험을 종용하는 에필로그도 비슷하다. RCT의 한계와 향후 연구 전망을 정리하며 마무리하는 편이 더 나았으리라 생각한다. 세일즈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다 이해할 수는 있겠다.

짧은 독서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실험경제학이 다른 분야보다 교양서에 적합한 것 같기도 하다. 일화로 각색하기 편하다. 이 책이나, 역시 RCT를 활용한 개발경제학의 간판 스타 에스테르 듀플로의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가 앵거스 디튼의 <위대한 탈출>, 앤서니 앳킨슨의 <불평등을 넘어>보다 재미있었다. 둘 중 관심분야를 뽑으라면 후자인데도 그랬다. (전자 그룹이 20세 이상 젊은 것도 한 이유겠다. 후자 그룹과 동년배인 탈러의 <넛지>는 아주 지루했다.)

경제학은 인간이 합리적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있는가? 이 책은 그러한 비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알리는 훌륭한 전도서다. 쉽게 쓰려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추론을 따라가는 재미도 있다. 베개맡에 두고 가볍게 읽기 좋다. 경제학 연구자들이 인간행동 원리를 밝히기 위해 생각보다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입문 강의 보충자료로 써도 좋겠다. 여전히 표준 원론 교과서로 군림하는 <맨큐의 경제학>에는 적어도 5판까지 실험경제학 관련 내용이 없다시피하다.

대가의 깊이를 원하는 독자에겐 다른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은 학술적 토론에서 성공한 논거를 위트 있게 소개하지만, 엄밀한 논리를 전개하지는 않는다. 책의 강점인 다양한 사례 전부가 새롭지도 않다. 1장의 유치원 원장 사례부터 스티븐 레빗이 <괴짜경제학>에서 다룬 에피소드다. 관련 독서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을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관심 분야만 골라 읽거나 성평등, 자선사업의 경제학 부분만 읽어도 충분하다. 그래도 저자들의 필력을 감상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번역도 괜찮다.

오바마 특별기고문 번역 후기

(원래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오바마 대통령 기고 번역에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제게 읽고 번역하며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선사했는데, 비슷한 경험을 하셨기 바랍니다.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부탁을 하나 하고, 원글 앞에 너무 긴 도입을 붙이는 것 같아 쓰지 않았던 코멘트를 몇 줄 적으려고 합니다.

예상은 했지만 페친 신청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상한 분 아니면 일단 수락하긴 할텐데 혹시 정보나 식견을 기대하신다면, 감사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저는 전문번역가도 경제학 박사도 아닙니다. 장삼이사 중 한 명입니다(듣보가 듣보를 자처하면 슬퍼지는데ㅠㅠ). 당장 그 글도 제가 쓰지 않았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글을 옮긴 것에 불과하지요.

전 평소 페이스북에 글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정보함량이 높은(informative) 글 별로 없습니다. 이따금 일상적인 또는 사변적인 글을 올리는 정도입니다. 아직 제대로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다 어디서 조금 읽은 내용 표현 바꿔서 아는 척 하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이고, 페이스북에서 숱한 고수들을 보고 배운 게 많으니 저도 무언가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부분이지만 저는 내향적인 사람이라 의도한 이상으로 노출된다는 게 상당한 스트레스거든요. 뻘글의 자유도 중요하구요 ㅋ 정말 가끔 이런 글을 올릴 때는 전체공개로 올립니다. 그러니까! 혹시 생각이 궁금하신 분들은 팔로우만 해 주시면 됩니다. 이미 친구신청하신 분들은 아니다 싶으면 얼른얼른 끊어 주십시오. ^^

이쯤하고, 글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전 글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번역을 마음먹었습니다. 첫 번째 문단에서 이민, 무역, 기술 혁신을 둘러싼 갈등이 현재 미국의 문제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단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것들을 “변화”로 묶으면서 슬쩍 2008 대선 슬로건을 상기시킵니다. “저는 분명히 변화를 외치며 당선되어 8년의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군요. 그럼 앞으로는 어쩌죠?”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으신가요? 1, 2문단은 대충 봐도 잘 요약된 깔끔한 문제제기입니다. 그런데 배후에 이런 메시지까지 있는 도입부라니요.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글이 다루려는 주제를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와우!

이민배척주의의 역사를 언급한 세 번째 문단은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노예해방 슬로건 “We shall overcome”을 연상시키는 “We will overcome(우리는 넘어설 겁니다.)”으로 끝납니다. 역사적 맥락을 배치하지 않았다면(있는 지금도), 이 추론이 억지라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상시키는 인상”만 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변화”에 강조 표시가 없었던 것처럼요. “We shall overcome”을 그대로 가져오면 Shall이 사실상 사어인 건 둘째 치고, 문구가 가진 역사적 무게 때문에 물 흐르듯 하던 흐름이 확 끊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We will overcome”은 정확히 그 목적에 부합합니다. 정말 훌륭한 구성이지요. 내용도 정말 훌륭하지만, 이런 세련미가 글의 품격을 배가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 비판도 통쾌했지만, 저는 여기서 번역을 생각했습니다.

글에는 오바마가 최근 거시경제 이슈는 물론 경제(학) 자체를 어느 정도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시장실패의 사례로 언급한 내용들은 미시경제학 교과서의 시장 실패와 정보경제학 항목을 정확히 예시로 옮긴 겁니다. 거시경제정책의 두 축이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며, 그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미국 탑스쿨 졸업하고 기라성 같은 경제학 교수들으로 구성된 경제자문위원회를 갖고 있는 미국 대통령이 저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네. 경제학원론만 들은 학부생도 그 정도 지식은 압니다. 하지만, 우선 이 글은 그 뿐 아니라 최근의 총요소생산성(TFP) 둔화 및 그 측정(measurement) 이슈, 교육과 기술의 경주, 국제무역의 효과, 불평등, 법인세와 투자 등 여러 주제도 간결하지만 핵심을 잘 짚고 있습니다. 더하여, 이론과 자신의 지식, 경험을 결합하여 한 편의 완결된 글을 써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경제학 박사까지 하고도 이상한 말 하는 사람 정말 많습니다.

노동경제학에 관심이 많은 제게는 최저임금과 근로장려세제(EITC)가 같이 언급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글에는 열거만 되었지만, 조금 풀어쓰면 “최저임금을 올립시다! 어느 정도 올리는 건 고용에 그렇게 심각한 영향까지는 주지 않는다는 실증연구 결과도 꽤 축적되었습니다. 최저임금은 빈곤 대책으로는 비효율적이라고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빈곤가구 타겟팅이 확실한 근로장려세제를 무자녀가구에게도 확대합시다.”가 됩니다. 경제학자나 관료가 아니라 대통령이 이 정도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덮어놓고 오바마 찬양하려는 확대해석이 아닙니다. 비꼬려는 의도는 없습니다만 대다수 최저임금 인상론자들이 저렇게 두 가지를 묶어서 언급하시는 것을 본 적 있으신가요? 최저임금 인상과 EITC를 묶기 위해서는 저런 이해, 최저임금제와 EITC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숱한 현안을 처리해야 하는 대통령이 머릿속에 꼭 이론적 틀을 정리해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그림을 이해하고 참모를 잘 기용하는 것도 훌륭한 리더십입니다. 그렇지만 본인이 충분한 이해력과 통찰력을 가진다면 더욱 훌륭하겠지요. 이 글에는 그런 식견과 식견으로부터 나온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말 쉽습니다. 경제학도로서, 그리고 선출된 지도자를 보는 시민으로서 감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말 잘 안 하지만, 이쯤 되면 글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 않습니까?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글이 주는 인상만큼 100% 성공적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걸 일일이 지적할 만큼 미국 경제에 밝지 않기 때문에 섣부른 논평은 삼가겠습니다. (전문가라도 정책의 모든 파급효과를 당대에 “정확히” 평가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무모하고 빗나가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글이 교묘하게 그런 실패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글이 폄하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가 명확한 이해와 뚜렷한 철학을 바탕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며 포괄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경제정책론으로 이 글은 정말 탁월합니다. 이 글의 청사진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우리가 알던 경제 지식을 전부 뒤엎어야 하는 날일 겁니다. 이 글은 현대 경제학의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글의 가치입니다. 당분간 이 정도의 글이 나오긴 어려울 거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사진은 이 글이 실린 <이코노미스트> 표지입니다. 타이틀은 <The Road to Brexit>지만, 오황상 칼럼 제목인 <The Way Ahead>로 바꾸어도 될 만한 표지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트럼프와 클린턴으로, 앞에 놓인 갈림길을 “우리 앞에 놓인” 갈림길이라고 생각해 볼 만 하지 않을까요? 아닌 것 같으시면… 마음의 눈으로 보시면 보입니다. ^^

오바마 특별기고문 번역 후기
The Economist 2016년 10월 8일자 표지.

우리 앞에 놓인 길 (The Way Ahead), 버락 오바마 특별기고, The Economist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10월 8일 이코노미스트 지에 기고한 칼럼 전문을 번역했습니다. 워낙 훌륭한 글이라 전문 번역이 금방 올라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직 없길래(발견하지 못했음) 조금이라도 더 읽히기를 바랄 겸, 혼란한 국내 정세에서 눈도 돌릴 겸 해보았습니다. 답답하신 분들은 천조국 황상의 품격을 보시고 잠깐이나마 힐링하시기를. 약 A4 5-6매 분량입니다.

쉽게 쓰인 글이라 될 수 있으면 편하게 읽히도록 번역했습니다. 능력이 닿는 한 원문을 살렸습니다만 내용 전달에 중점을 두고 의역도 많이 했습니다. 원문이 매우 명료하게 잘 쓰인 글이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전적으로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원문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오류 지적 환영합니다.

(추가) 제가 이 글을 번역한 이유는 당장 해야 할 한영번역이 하나 있는데 귀찮아서..는 아니고, 우선 경제를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거시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경제학 전공자랍니다. ㅋㅋ

오바마 대통령은 이 글에서 임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간을 정리하고, 현재 미국 정계에서 벌어지는 논쟁(결국 대선 경선 과정의 트럼프, 샌더스 식 포퓰리즘)을 단호하게 평가하는 한편 앞으로 자신의 후임자들과 미국이 나아갈 비전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글의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했습니다.

* 퍼가셔도 좋지만 출처는 밝혀 주십시오.


우리 앞에 놓인 길 (The Way Ahead) | 버락 오바마 미합중국 대통령 | The Economist

 

저는 요즘 어딜 가던 비슷한 질문을 듣습니다. 미국 정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이민, 무역, 기술 혁신으로부터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큰 혜택을 누려 온 나라가 어떻게 갑자기 반이민, 반무역 경향을 보이는 건가요? 왜 일부 극좌, 그보다 좀더 많은 극우 인사들은 되돌릴 수 없고, 대다수에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식의 조악한 포퓰리즘을 내세우는 건가요?

미국에서 세계화, 이민, 기술, 심지어 변화 자체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불안감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종종 국제기구나 무역협정, 이민에 대한 회의론에서 비치는 불만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유럽연합을 탈퇴하기로 결정한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나 세계 곳곳에서 포퓰리즘 정당이 득세하는 현상에서도 관찰됩니다.

이런 불만은 대부분 본질적으로 비경제적인 공포에서 비롯됩니다. 오늘날 일부 미국인들이 표출하는 반이민, 반멕시코, 반무슬림, 반난민 감정은 예전에도 있었던 이민배척주의 파동(nativist lurches)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가령 1789년 외국인과 선동방지법(Alien and Sedition Acts), 1800년대 중반 무지주의당(Know-Nothings),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반아시아 감정, 그 외에도 미국을 위협하는 집단이나 사상을 통제한다면 과거의 영광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는 메시지가 외쳐졌던 모든 시대 말입니다[modern_footnote]역사적 명칭은 앨런 브랭클린의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국역본을 참조했습니다.[/modern_footnote]. 우리는 이 공포를 넘어섰고, 또다시 넘어설 겁니다[modern_footnote]원문은 “We will overcome…”입니다. 흑인인 오바마 대통령이 노예해방 운동(어쨌든 제도적으로는 성공한) 의 슬로건 “We shall overcome”을 변주하면서 이민 문제도 동일하게 성공할 것이라는 신념을 암시한 것은 아닐까 해서 밝혀 둡니다.[/modern_footnote].

하지만 일부 불만이 기인하는 장기적 경제 요인(long-term economic forces)에 대한 염려는 타당합니다. 몇십 년 간의 생산성이 하락하고 불평등이 심화되며 저소득·중산층 가계의 소득증가가 둔화되었습니다. 세계화와 자동화가 진행되며 노동자들이 괜찮은 임금(a decent wage)이나 자리를 확보할 힘을 꽤 잃었습니다. 물리학자나 공학자가 될 수 있었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실물경제의 혁신에 재능을 발휘하는 대신 금융권에서 돈을 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8년 금융 위기를 거치며 기존에도 종종 ‘다른 세상’에 있다고 여겨지던 기업과 엘리트 계층은 더욱 일반인들에게서 유리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게임이 조작됐다”는 주장을 선뜻 받아들인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납득할 만한 불만은 우선 문제를 개선하기보다 대체로 악화시킬 정치인들이 부채질한 것이고, 불만스러울지라도 자본주의가 번영과 기회를 향한 역사상 최고의 견인차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25년간 극빈곤층 인구 비율은 40% 근방에서 10% 밑으로 하락했습니다. 작년에 미국 가구의 소득이득(income gain)은 기록적인 수준이었고 빈곤율은 1960년대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하락했습니다. 실질임금은 1970년대 이래 가장 빠르게 상승했습니다. 이러한 발전은 지금의 정치적 논쟁 근저에 있는 불안감을 자극하는 세계화와 기술 변혁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세계를 규정하는 모순입니다.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지만, 사회는 불안과 불만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과거의 낡은 폐쇄경제로 후퇴하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세계화와 그에 수반될 수 있는 불평등을 인지하고, 세계 경제가 최상위층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작동하도록 하는 데 전념하며 전진하는 것 사이에서 말입니다.

풍요를 향한 힘(A force for good)

이윤 추구 동기는 기업이 소비자들이 열광하는 제품을 만들고, 은행이 성장산업에 여신을 제공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모두에게 공유되는 번영과 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경제학자들은 경제가 방임될 경우 실패할 수 있음을 오랫동안 인정해 왔습니다. 시장 실패는 <The Economist>가 보도해 온 대로 독점·지대추구 경향, 공해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기업활동, 소비자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정보 격차, 또는 과도하게 비싼 건강보험 등의 형태로 발생하곤 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에 의해 지배되며 다수 대중에 책임지지 않는 자본주의는 모두에게 위협입니다. 경제는 빈부 격차가 줄어들고 성장 기반이 넓어질 때 더욱 번영합니다. 인류의 1%가 가 99%가 가진 만큼의 부를 소유하는 세계는 결코 안정적일 수 없습니다. 부자와 빈자의 격차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기술 발전에 따라 이제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고 특권층의 생활을 마치 슬럼가 어린이가 인근 고층 건물을 보듯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는 정부가 그에 부응하는 결과를 내놓는 것보다 빠르게 커지고, 불공정 의식이 만연하며 체제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약화됩니다. 신뢰가 없다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지난 수 세기 동안 성취해 온 발전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진보와 위험의 이러한 모순은 수십 년간 진행 중입니다. 저는 지난 8년간의 행정부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합중국을 완벽하게 만드려면 훨씬 오래 걸리리라는 것을 늘 인정합니다. 대통령직은 국가가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도록 각자 맡은 부분을 수행하는 릴레이입니다. 그럼 제 후임자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더 나은 진보를 위해서는 미국 경제 메커니즘이 대단히 복잡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거대 은행을 분할한다거나 수입 관세를 대폭 인상한다는 급진적인 개혁이 언뜻 매력적으로 들리겠지만, 경제는 그렇게 관념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경제를 대대적으로 재설계한 뒤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가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성공할 수 있는 체제라는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대신 네 가지의 구조적 과제에 대처해야 합니다. 생산성 증가를 촉진하고, 불평등과 맞서 싸우고, 모든 구직자들에게 일자리를 보장하고, 미래 성장이 대비된 탄력적이고 견실한(resilient) 경제를 이룩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경제 활력 회복하기(Restoring economic dynamism)

첫째, 최근 우리는 인터넷, 모바일 기기 및 네트워크, 인공지능, 로봇공학, 신소재, 에너지 효율성 향상, 개인맞춤의학(personalized medicine)으로부터 놀라운 기술진보를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은 생활을 변화시킨 데 비해, 아직 생산성 증가율 집계에 포함되지는 않았습니다[modern_footnote]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아직 측정된 생산성 성장률(measured productivity growth)을 증가시키지는 못했습니다.”가 됩니다. 관련 연구 맥락을 살리자면 직역이 맞겠지만, 편독성을 위해 의역했습니다.[/modern_footnote]. 지난 10년간 미국의 생산성 증가율이 G7 국가 중 가장 높긴 했지만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증가 속도 자체가 느려졌습니다(차트 1 참조). 경제가 더 빠르게 성장하지 않는다면 파이를 어떻게 나누어도 사람들이 원하는 수준의 소득을 창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길 (The Way Ahead), 버락 오바마 특별기고, The Economist
기사 원문에서 발췌.

최근 생산성 둔화의 주 요인은 공공/민간투자 부족이고, 이는 어느 정도 금융위기의 후유증입니다. 하지만 투자 부족의 또다른 원인은 우리가 자초하는 여러 제약입니다. 사실상 모든 새로운 공적 자금원 조성을 거부하는 반세금 이데올로기, 미래에 닥칠 (특히 기간시설물의) 유지보수비 부족에 대한 집착, 교량·공항 개선 등 이전에 초당파적으로 합의했던 계획을 가망 없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당파적 정치체제 말입니다.

법정세율을 낮추고 허점은 없애는 법인세 개혁과 기초 연구개발에 대한 공공투자를 통해 민간투자와 혁신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교육 중심 정책은 경제성장률 증대와 성장의 과실을 공유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정책은 조기 아동교육 예산 증액부터 고등학교 개선, 대학 교육비 부담 완화, 양질의 직업훈련 확대까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생산성과 임금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제무역 하에서 “정상을 향한 글로벌 경주(a global race to the top)”[modern_footnote]문맥 상 “경주”보다는 “경쟁”이 적합해 보이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교육지원정책 중 하나 “A Race To the Top (정상을 향한 경주, 성과중심 교육정책)”의 명칭을 가져왔다고 보여서 이렇게 옮겼습니다.[/modern_footnote]을 창출해야 합니다. 몇 지역은 대외 경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나, 무역의 이익은 피해보다 훨씬 컸습니다. 수출은 불황 탈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 경제자문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수출을 하는 미국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에 비해 평균 18% 높은 임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를 통과시키고, 유럽연합과의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협상을 타결하도록 의회를 계속 압박할 겁니다. 이들 협정과 강화된 무역집행(trade enforcement)은 노동자와 기업 모두에게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마련할 겁니다.

둘째, 생산성이 둔화되는 한편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그 폭은 미국에서 가장 현저했습니다. 1979년에 미국 상위 1% 가구는 전체 세후소득의 7%를 차지했습니다. 2007년에 그 비율은 17%로 두 배 이상 상승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라는 본질적인 의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성공을 시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공을 열망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사실 우리는 노력하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고, 우리 자녀 세대는 더욱 그러리라 확신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 더 많은 불평등을 용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했듯, “우리는 자본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지만, 가장 비천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modern_footnote]”while we do not propose any war upon capital, we do wish to allow the humblest man an equal chance to get rich with everybody else.”[/modern_footnote] 심화된 불평등의 문제는 바로 여기, 즉 지위 상승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데 있습니다. 불평등은 부의 사다리의 맨 위와 아래 발판을 끈끈하게 만들어서, 아래에서 올라가는 것과 정상에서 내려오는 것 모두 어려워집니다.

경제학자들은 불평등 심화의 다양한 원인을 열거한 바 있습니다. 기술, 교육, 세계화, 노조 쇠퇴, 최저임금 하락 같은 요인 말입니다. 아마 이 모두가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이 모든 분야에 대해 실질적인 진보를 달성해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문화와 가치의 변화 역시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기업 임원과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는 교회, 자녀의 학교, 시민단체 등 곳곳에서 이루어진 노동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제한되었습니다. 그래서 CEO들은 평균적인 노동자에 비해 20-30배 정도의 보수를 가져가는 데 그쳤습니다. 이러한 제약의 감소 내지 소멸이 오늘날 최고경영자들이 250배 이상의 보수를 지급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경제는 빈부 격차를 줄이고, 성장 기반을 광범위하게 확대할 때 더욱 번영합니다. 단순한 도덕적 차원의 주장이 아닙니다. 연구에 따르면 불평등이 심한 국가일수록 성장이 취약하고, 자주 불황을 겪습니다. 부가 상류층에 집중되었다는 것은 시장경제를 견인하는 다수 소비자들의 지출이 감소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길 (The Way Ahead), 버락 오바마 특별기고, The Economist
기사 원문에서 발췌.

미국은 진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작년 소득분포 하위, 중위 가구의 소득이득은 상위 가구보다 많았습니다(차트 2 참조). 집권 기간 동안, 그러니까 2017년을 기준으로, 우리는 소득 하위 5분위 가구소득을 18% 상승시켰습니다. 반면 연간소득 추산 8백만 달러 이상인 상위 0.1% 가구의 평균세율은 (재무부 계산에 따르면) 거의 7%p 인상했습니다. 우리 행정부 하에서 입법된 세제 변경에 따르면, 상위 1% 가구가 “정당한 몫(their fair share)” 이상을 납부하는 반면 그 외 가구들은 적어도 1960년 이전 어떤 행정부의 세제 변경에 의해서보다도 더 많은 소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의 노력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수십 년간 심화된 불평등을 되돌리는 법안을 더욱 적극적으로 제정해야 합니다. 노조는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노동자들이 파이의 더 큰 몫을 차지하도록 돕는 한편, 글로벌 경쟁에 적응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연방최저임금 인상, 무부양자녀 노동자에 대한 근로장려세제(EITC) 확대, 고소득자 조세 혜택 제한, 성실한 학생의 학업을 가로막는 터무니없는 대학 교육비 책정 금지, 그리고 성별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셋째, 경제의 번영은 구직자들이 충분한 일자리 기회를 얻을 수 있는가에도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장기적인 핵심생산인구(prime-age workers) 노동시장참가율 하락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1953년에는 25-54세 남성의 3%만이 비경제활동인구였습니다. 지금은 12%가 그렇습니다. 1999년에 여성 핵심생산인구 23%가 비경제활동인구였습니다. 지금은 26%입니다. 성장하는 경제에서 경제활동인구에 편입·재편입하는 사람들은 고령화와 2013년 말부터의 베이비부머 은퇴를 상쇄하고 노동시장참가율을 안정화시키지만, 장기 감소 추세를 뒤집지는 못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길 (The Way Ahead), 버락 오바마 특별기고, The Economist
기사 원문에서 발췌.

비자발적 실업에는 생활만족도, 자존감, 신체건강, 그리고 사망률이라는 대가가 따릅니다. 이는 노동시장참가율이 가장 가파르게 하락한 집단인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충격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진통제(opioid) 남용, 그에 따른 과다복용 사망 및 자살(overdose death and suicides)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 놓일 때도 노동시장에 남아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전만큼의 소득을 보장하는 임금보험은 그 중 하나입니다. 양질의 커뮤니티 칼리지나 검증된 직업훈련 모델의 접근성을 확대하고, 새 일자리 탐색을 보조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따라서 더 많은 노동자들이 실업 보험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급휴가와 보장된 유급병가, 양질의 보육 및 조기교육 접근성 확대로부터 노동자와 고용주 모두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초당적 지지를 받은 형사사법제도(criminal justice system) 개혁 및 경제활동 재진입 개선 조치가 법제화된다면 역시 노동시장참가율이 향상될 겁니다.

더 견고한 기반 쌓기 (Building a sturdier foundation)

마지막으로, 금융위기는 보다 탄력적이고 견실한 경제, 오늘을 위해 내일을 희생하는 일 없이 지속가능하게 성장하는 경제의 필요성을 통렬하게 지적했습니다. 자유 시장이 구조적 실패를 대비하고 공정경쟁을 보장하는 규칙 하에서만 번창할 수 있다는 점에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경제체제는 위기 이후 은행 자본금 인상, 단기 자금 의존도 경감, 금융기관 및 시장 감독 강화 등의 월가 개혁을 통해 보다 안정적이고 장기경제성장 친화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 대형 금융기관들은 더 이상 이전에 하던 식으로 손쉽게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고, 그 증거로 시장은 점점 그들이 “대마불사”할 정도로 크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modern_footnote]”the market increasingly understands that they are no longer “too big to fail”.”[/modern_footnote]. 그리고 우리는 금융기관들이 소비자들에게 상환할 수 있도록 조건이 미리 고지·조율된 대출을 제공할 책임을 부과하기 위해 최초의 감시기구인 소비자금융보호국(CFPB)을 창설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금융 부문(shadow banking system)은 여전히 취약점을 보이고 있으며 주택 금융 시스템은 아직 미개혁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해 온 이상으로 나아가야 하지, 되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한편 더 급진적인 개혁의 옹호자들은 지금까지 성취해 온 진보를 지나치게 자주 간과하고, 체제 전체를 규탄하곤 합니다. 체제의 규칙을 구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언제나 토론 대상이지만, 지금까지의 진보를 부정하면 우리는 더 취약해질 뿐입니다. 그 반대가 아닙니다.

미국은 부정적 외부충격(negative shock)이 발생하기 전에 좀 더 대비해야 할 겁니다. 지금 같은 저금리 시대에 미래의 경기침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더 큰 규모의 재정정책을 집행해야 하며, 통화정책만으로 경제안정화를 달성하려 해서는 안 될 겁니다. 유감스럽지만 나쁜 정치는 좋은 경제를 짓밟아 버릴 수도(override) 있습니다. 우리 행정부는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10여 개 이상의 법안을 제정하여 진가를 인정받은 수준(2009-2012년 1.4조 달러 재정지원)이상의 확대재정를 확보했습니다만, 상식적 조치 하나하나를 통과시키기 위해 의회와 상당히 소모적으로 충돌해야 했습니다. 저는 시도하려던 몇 가지 확장정책을 시행하지 못했고, 의회는 역사에 남을 국가부도 사태를 들어 위협하며 성급하게 경제긴축을 강제했습니다. 제 후임자들은 어려운 시기의 긴급 조치를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어야 할 겁니다. 대신 실업 급여 같은 (경제 침체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가구 및 경제 지원금은 자동으로 인상되어야 할 겁니다[modern_footnote]”자동으로”는 대략 물가연동 정도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한편 앞 문장에서 2013년 양당의 연방정부 부채 상한선 인상 합의 결렬 후 “자동으로” 발동한 시퀘스터 조치를 언급했음을 염두에 두는 것 같기도 합니다.[/modern_footnote].

필요한 시기에 경제 지원을 확대하고 시민들에게 장기 채무를 이행하기 위해, 호경기에는 반드시 재정지출을 (적정 선에서) 유지해야 합니다. 부담적정보험법(Affordable Care Act)에 따른 의료비 경감[modern_footnote]예. 오바마케어를 가리킵니다.[/modern_footnote], 최고 부유층에 대한 세제 혜택 제한 등의 정부재정지원 억제책(curbs to entitlement growth)을 이용한다면 투자 기회나 성장을 저해하지 않고 장기적 재정 문제를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합니다. 지난 5년간 경제성장률 증대와 탄소배출량 저감이 상충한다는 관념은 끝났습니다. 미국은 에너지 부문 탄소배출량을 6% 감축했고, 바로 그 기간 동안 경제는 11% 성장했습니다. 미국의 발전은 미래 세대를 위해 지구를 구할 최고의 기회를 제시하는 역사적인 파리기후협정 도입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길 (The Way Ahead), 버락 오바마 특별기고, The Economist
기사 원문에서 발췌.

미래를 향한 희망 (A Hope for the future)

미국의 정치 시스템은 실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요, 저도 압니다. 하지만 미국 정치는 200년 넘게 경제사회적 발전의 원천이었습니다. 지난 8년간의 발전 역시 세계에 어느 정도의 희망을 주었을 겁니다. 온갖 분열과 불화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대공황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금융 시스템은 납세자들의 부담 한 푼 없이 안정화되었고 자동차 산업도 구제되었습니다. 저는 의료 서비스를 개혁하고 새로운 차량 및 발전소 탄소배출량 감축 규칙을 도입하는 한편, 초반부에 재원을 집중 투입한(front-loaded) 경기부양책을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이상 규모로 시행했으며, 1930년 이래 가장 포괄적인 금융 시스템 규칙 개정을 감독했습니다.

결과는 명백합니다. 경제는 더욱 튼튼해졌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2010년 초부터 1,500만 개의 새로운 민간 일자리가 창출되었고, 임금이 상승하고, 빈곤율이 하락하며, 불평등 추세는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2,0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새로 건강보험 혜택을 얻은 반면 의료비는 지난 50년 사이 가장 느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연간적자는 거의 3/4 수준으로 감축되었습니다. 탄소배출량 역시 감소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를 위한 새로운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미래에는 반드시 경제성장, 특히 지속가능하며 열매가 공유되는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국은 모든 국가와 함께 최선을 다해 모든 시민과 앞으로 올 세대를 위한 보다 건실하고 번영하는 경제를 이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