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활의 자세 (김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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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늦깍이로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제자에게 추석 인사 이메일을 받아서 답장을 해 주었다. 간단하게 두가지 정도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는 연구가 생각처럼 진전이 빠르지 않게 되면 조급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조급함이 연구자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것 같다.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하나씩 알아가는 자체를 즐기는 것이 마음을 다스리는데 좋은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2.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는 좀더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불안한 마음에 밤늦게 비효율적으로 책상에 앉아있으면서 정작 집중하고 생각하는 시간은 짧을수 있기에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 것인지 계속 체크해 가면서 스스로의 공부 습관을 계속 업그레이드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마치 구글이 A/B test 를 통해서 계속 학습하고 진화해 나가는 것과 비슷하리라. 생각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은 무식한 것이고 생각만 하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게으른 것이다.

근로장려세제는 최저임금의 대안인가? (이상헌)

ILO 이상헌 박사님의 글. 페이스북 원문 링크


근로장려세제는 최저임금의 대안인가?

(괜한 약속을 해서 쓰는 글. 마감에 걸려 개요만 씀. 길고 조악하니, 관심있는 분만 읽으시길 ^^)

– 근로장려세제 (earned income tax credit, EITC)는 저소득 근로층을 위한 소득 지원 프로그램으로 미국에서 시작. 자녀가 있는 근로가구를 대상으로 하며, 일정 소득 이하를 가진 가구에만 적용. 이것을 굳이 “tax”, “tax credit” 라고 불려서 혼돈을 초래하기도 하는데, 미국의 독특한 정책구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고, 사실상 소득보조금임. 미국에서 가장 큰 예산규모를 가진 빈곤퇴치 정책.

– 그 기원을 엄밀히 따지기는 힘들지만, 존슨 대통령이 “사이버 혁명” 시대를 맞아 미래정책을 구상하도록 한 특별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 Triple Revolution에서 시작했다는 견해가 많음. 1960년대 중반에 발간된 보고서는 기술혁명에 따른 일자리 부족과 소득 불안정성 및 빈곤 퇴치를 위해 기본소득을 제안함. 프리드만을 비롯한 경제학자들이 일부 수용하고 현실 정책으로 적용되면서 negative income tax 개념으로 발전. 일정 소득 이하의 가구에게 부족분을 국가가 보장한다는 주장.

– 유럽과 달리 별다른 빈곤정책 없었기 때문에 정책적 필요성에 대한 공감은 있었지만, 기본소득안은 격력한 저항에 직면. 존손 대통령도 반대. 청교도적인 노동관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아젠다. 대신, 미국에서 중요한 다른 가치인 “가족”을 중심으로 재구성. 가족지원 프로그램으로 전환이 되었지만, 이것도 반대에 부딪힘. “노동 여부”가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 결국 포드 정부는1970년대 중반에 “노동”과 “가족”에 결합된 빈곤프로그램 도입. 이것이 EITC. 노동하는 가정에 자녀가 있는 경우만 적용. 굳이 말하자면, 기본소득의 “역사적 변용” 인데 **, 1980년대부터 본격 적용되었고, 그 이후로 팽창. 최근에 자녀 없는 저소득 가구에 적용하자는 주장이 대두. 현행 제도는 아래 그림 참조.

– 따라서 EITC는 미국적 제도 및 정책의 산물임. 물론 외국에서도 더러 이용되지만, 상당한 변용을 겪는 것이 일반적.

– 한국에서는 EITC가 2008년에 도입된 후 “저소득층의 노동의욕 고취”를 위해 확대되어 옴. 2011년부터는 무자녀가구에게도 확대. 이런 면에서는 미국보다 앞섬. 물론 한국의 “선진적”인 면모를 보인 장면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같은 정책이라도 맥락이 다르기 때문. 미국에서는 근로가구층을 전제로 한 뒤, 이들의 소득 보전을 돕는 것임. 한국에서는 저소득가구의 노동시장 진출을 유도한다는 측면이 강함. 작은 차이이겠만, 한국에서는 이 때문에 쉽게 무자녀가구에게 EITC 확대된 것으로 보임 (이미 한국적 변용이 이루어진 것)

– 한국에서 EITC의 노동공급 증가 효과는 실증적으로 따져 보아야 할 문제. 개인적으로 그 효과가 크지 않을 것으로 봄. 첫째, 한국의 저소득층의 고용율은 상대적으로 높고 (중산층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음), 전체적으로 고용율이 낮은 것은 공급 측면보다는 노동수요적 요인 (일자리의 질)이 더 중요함. 둘째, 현재 EITC는 노동공급 결정을 바꿀 정도로 지원액이 높지 않다. 결국 전체적으로 애매함. 물론 기왕에 일하는 저소득층이 노동공급을 늘리는 효과 (노동시간의 증가)는 있을 듯.

– 이미 언급한 대로, EITC는 영미권을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에서 많이 채택하는 정책은 아닌데, 최근 부쩍 관심이 높아진 이유는 일부 경제학자들이 최저임금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

– 표준 경제학 이론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주장임. 최저임금은 기업의 비용에 일차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고용 감소 효과를 배제하기는 힘든데, 그리고 최저임금이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차라리 저소득 가구에게 소득보전해 주는 방식이 낮다. 노동시장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한다는 것. 이 주장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있어 왔던 주장이고, 실제로 최저임금 반대론으로 사용됨.

– 최저임금에서 보장된 노동자의 후생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EITC를 설계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함. 하지만 두가지가 빠져 있음. EITC는 resource-intensive 하다 (미국에서는 최대규모의 빈곤퇴치 정책). 따라서 재원 조달의 문제를 따져야 하는데, 예컨대 법인세 증가를 통해 조달할 것인가? 이런 일반균형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빠져 있음. 둘째는, 노동시장 교란 효과. EITC는 기업의 비용 효과와 노동자의 ‘도덕적 해이’ 때문에 최저임금보다 우월하다고 보는데, EITC 대안은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초래할 가능성.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보전이 주어진 경우 합리적 기업은 임금을 낮출 유인이 높아진다. 그에 따른 추가적 소득소실분은 EITC에서 추가적 소득 보전을 해 줄 것이기 때문. 임금 하방 압력이 커지고, 비효율적 한계기업을 유지하게 됨으로써 경제 전체적 효율성이 떨어짐. 한때 최저임금을 앞선 이유로 폐지했던 영국이 최저임금을 블레어 정부 때 도입한 이유도 바로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맞고자 한 것임. 최근 미국에서 최저임금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

– 핵심: 일을 하는 데도 빈곤한 층을 근로빈곤 (working poverty)라 하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 정책과 사회보장 정책의 효과적인 연계가 필요함. 대체 관계가 아님. 최저임금이 할 일은 최저임금이 해야 하고, 소득지원정책이나 기타 사회보장정책이 할 일도 마찬가지. 최저임금을 보완할 사회보장정책은 꼭 EITC일 필요는 없지만, 노동소득을 보전해 주는 소득지원정책이라는 광범한 의미에서의 EITC는 필요하다.

– 유럽 국가에서 EITC 류의 정책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까닭은 이미 사회보장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네델란드, 프랑스, 핀란드에도 EITC 류의 정책이 도입되어 있지만, 제도적 보완물로만 사용되고 주축이 되진 않음. 사각지대를 해결하는 “한가지” 제도 방식이고, EITC를 중심으로 제도 구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EITC가 최대의 빈곤정책인 미국과는 다르다.

– 최저임금과 EITC를 유기적 설계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다. 최저임금을 노동자 1인을 두고 설계한 뒤, EITC정책이 저소득 가구의 소득을 지원해 주는 방식도 있고, 최저임금을 평균 가구 방식으로 접근 (평균 가구원 수, 평균 취업자 수, 표준 최저생계비) 한 뒤 부족분을 EITC가 돕는 방식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경우 최저임금을 평균임금의 일정비율 (예를 들자면, 60-65%)에 맞춰 정한 뒤, 저소득 층의 소득부족분을 EITC가 책임지는 방법이 좋을 듯 하다. 하지만, 후자를 위해서 꼭 EITC라는 이름과 방식이 필요한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전체적인 사회복지 제도 틀내에서 유기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근로장려세제는 최저임금의 대안인가? (이상헌)

케네스 포머란츠,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 한국어 번역본은 지뢰밭이다.

이번 달에는 케네스 포머란츠의 역저 『대분기』를 반드시 다 읽겠노라 다짐하고 읽기 시작했다. 4일 만에 결론을 내렸다. 국역본은 초벌번역 수준도 안 되는 지뢰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읽어 보려다가 79페이지에서 인내심이 다하고 말았다. 왜 4일 동안 100페이지도 못 읽었는가 하면, 번역 때문에 도무지 몰입이 안 된다.

웬만하면 번역은 그러려니 하는데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책의 분량이 많고 포메란츠 교수의 문장이 간결미와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넘어가기 어렵다. 유사한 주제, 유사한 볼륨인 이언 모리스 저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번역은 읽을 만했던 것으로 기억하건만.

투박한 직역으로 문장과 단어의 어감을 살리지 못한 것은 예사다. 아예 기본적인 뜻을 틀리거나 문장을 제멋대로 잘라서 옮긴 경우도 많다. 번역이 아닌 국문 글쓰기의 문제도 한몫하는데 특히 주술호응 안되는 문장이 부지기수다.

오류를 몇 개만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딱 두 단락에서 뽑았다.

(언급하는 오류의 전후 내용을 요약 소개하자면 이렇다. 산업화 당시 유럽의 기술 발전은 전적으로 독보적인 수준은 아니었으며, 유럽이 우위를 구축하는 과정은 유럽의 성과뿐 아니라 석탄 발견 등의 행운이나 중국의 은 경제 전환 같은 외부의 독자적 발전에 따른 이득에도 의존했다.)

먼저 내가 폭발하고 만 79쪽 마지막 문장이다.

“만약 이런 ‘부수적‘ 요인이 없었다면, 유럽의 발명품만으로는 18세기 중국과 인도 및 다른 국가에서 꾸준히 이룩해온 주변적 기술 향상보다 사회.경제적으로 훨씬 더 혁명적인 충격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적”이 단어 뜻이 미묘하게 계속 엇나가는 듯하다는 느낌에 물증을 제공한 단어다. 일반적으로 “주변부”는 “혁명적”과 대조되지 않는다. “미미한”을 의미하는 marginal의 직역으로 보여 찾아보니 실제로 그랬다. 다음은 원문이다.

“Without these “external” factors, Europe’s inventions alone might have been not much more revolutionary in their impact on economy and society than the marginal technological improvements that continued to occur in eighteenth-century China, India, and elsewhere.”

포머란츠는 이 문장에서 당대 타 지역에 비해 혁명적이었다고 평가되는 유럽 기술 발전 역시 단독으로 떼어 놓고 보면 오늘날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미미한”) 타 지역 기술 발전과 별 차이 없었을 수 있다는 주장을 요약하며 주 논지 중 하나를 제시한다. 이런 문장을 틀렸다는 건 독자가 책 내용을 이해하건 말건 신경쓰지 않겠다는 것과 진배없다.

“주변적”은 “덜 중요한” 뭐 이런 뜻이니 대충 비슷하게 이해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다고 치고 계속 살펴보자. 당장 이 문장에서 “external”을 “부수적”으로 옮긴 것 역시 오류다. 강조를 살린 “외부적”으로 옮기는 게 맞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나타난 이유를 추적하자면 내용을, 특히 이 문장의 앞 단락을 제대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차차 보기로 하고 내용도 파악할 겸 문제의 앞 단락을 첫 문장부터 한 번 살펴보자.

총자본으로 구현한 기술을 비교해보면, 유럽이 우위를 점한 분야 중 상당수가 산업혁명 이전 2세기 또는 3세기 동안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유럽에는 여전히 낙후한 분야가 있었다.”

“When we turn to comparisons of the technology embodied in the capital stock, we do find some important European advantages emerging during the two or three centuries before the Industrial Revolution; but we also still find areas of European backwardness.”

“총자본으로 구현한 기술”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자본량/자본스톡에 체화된(포함된) 기술”이 맞다. 포머란츠는 이 앞 문단에서 1800년 이전 서유럽의 자본스톡이 다른 구세계보다 더 많지 않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흐름상 이 문단에서는 자본스톡의 양적 수준 말고 그에 내재된 기술수준을 비교해보자는 말이다. 국문번역은 자본으로 기술을 구현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구현한” = “embody” = “체화한” 의 뇌내번역이 가능한 독자라야 제대로 이해할 것이다. 그 정도로 눈감아 주자면 번역은 왜 하는가?

역자들은 이 문장에서 “area”를 “분야”로 번역했다. 맞는 번역이다. 이 다음 문장에서도 그렇게 했는데, 갑자기 다다음 문장에서는 “지역”으로 바뀌면서 문장이 이상해진다. 거기선 그 뜻으로 쓴 걸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한다면, 전문 연구자는 그런 혼동을 만들지 않으며 여기서 “지역”은 place로 쓰고 있다. 문제의 문장은,

“그렇기 때문에 우세한 유럽의 몇몇 지역은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 중요했던 반면, 기술적으로 앞선 사회임에도 특정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As it worked out, some of the areas in which Europe had an edge turned out to be important for truly revolutionary developments, while the particular areas in which other societies had better techniques did not.”

그냥 통째로 틀렸다. “유럽이 우세했던 분야의 일부는 실제로 혁명적 발전에서 중요했던 반면, (유럽에 비해) 다른 사회[구세계]가 우세했던 특정 분야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특정 분야”는 유럽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분야로, 이 문장과 첫 문장 사이의 내가 건너뛴 문장에 이미 소개된 분야(THE paricular areas!)다.

이 다음 문장에서 포머란츠는 유럽이 타 지역과 달리 토지의 제약을 상당히 해결하고 비약적인 자립 성장(breakthrough self-sustaining growth)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에는 상기 기술 발전 외에도 특정 자원(석탄, 은)의 발견이라는 행운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 문장 번역도 괴상하지만 넘어간다)

그리고 나서 나오는 내용은,

“이는 부분적으로 세계적 연관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적 연관성이라는 것도 결국 유럽인이 이룬 성과(대부분 폭력으로 획득한), 계속된 행운 그리고 독자적 발전이 결합해 형성된 것이다.”

“It was also partly due to global conjunctures. Those global conjunctures, in turn, were shaped by a combination of European efforts (many of them violent), epidemiological luck, and some essentially independent developments.”

단어부터 보자. 세계적 “연관성”이 무슨 번역일까? “conjuncture”는 “a combination of circumstances or events”라는 뜻이다. 적절한 역어를 떠올리기는 어렵지만 단순히 “연관성”이라 하기는 어렵다. 주석이라도 달았어야 한다.

게다가 “epidemiological(역학적)”을 “계속적”이라는 전혀 상관없는 뜻으로 옮겼다. “역학적 행운”은 유럽의 신대륙 정복을 도운 전염병을 가리키는데, “계속적 행운” 이라고 하면 앞에서 나온 자원 발견이 계속되었다는 식의 말이 되어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이 오역은 이유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European efforts” 역시 “유럽인들의 활동”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

본문에서 “부분적으로(partly)”라는 표현은 유럽의 성장요인을 열거할 때 쓰였다. 즉 “세계적 연관성” 역시 기술발전, 행운 같은 하나의 요인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국문번역 두 번째 문장은 “세계적 연관성”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는 뉘앙스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건 멋대로 “하지만”을 첨가하고 “in turn”을 “결국”으로 옮겼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세계적 연관성은 ~ 결합으로 형성되었다.”로 옮겨야 한다.

포머란츠가 언급한 사례를 활용하여 내용 해설을 하자면 신항로개척/신대륙 발견(유럽인들의 활동), 전염병(역학적 행운), 중국의 은 경제 전환([유럽 외 지역의] 독자적 발전)이 결합한 “”상황””이 바로 “세계적 연관성” 이다.

이제 다시 나를 폭발하게 만든 문장으로 돌아와 보자. “global conjunctures”를 가리키는 “external factors”가 왜 “부수적 요인”이 되었을까? “하지만”을 첨가해서 “global conjunctures”를 평가절하했기 때문에 부수적일 수밖에! 그리고 원문에서 external에 강조 표시를 한 이유는 “global”이지만 “conjuncture”이기 때문인데 (단순히 외부에서만 결정되는 요인이 아니라는 것) 이 압축적 표현이 “부수적 요인” 이라는 오역으로 바뀌면서 내용이 미궁에 빠진다. “부수적 요인” 이 있다면 “주 요인”은 무엇인가? 유럽의 기술? 줄곧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해 왔는데도?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external의 뜻은 중학생 수준이므로 이 번역은 의도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역자의 이해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놀랍게도 이들 오류를 뽑아내는 데는 두 단락으로 충분했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간단하다. 역자들이 책을 완벽히 이해하고 전체 원고의 통일성(consistency)을 기하며 원고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역자들의 전체적 이해도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문자 그대로 읽자면 앞뒤가 안 맞으니 내용의 통일성이 없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솔직히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면 이렇게 내용 흐름이 박살나지는 않는다.

왜곡번역 논란이 있었던 앵거스 디튼의 <위대한 탈출>조차도 자의적 편집 때문에 흐름이 중간중간 끊겼을망정 대충 읽을 만 했다. 이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수준이다. 어차피 한정된 독자가 읽을 책, 1쇄절판시키고 새 번역으로 새로 내는 게 낫겠다.

난 영어를 그리 잘 하지도 않고,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이런 식으로 단정적인 글을 쓰는 것도 싫어한다. 그럼에도 번역이 정말 끔찍해서 쓸 수 밖에 없었다. 근 3년 사이 읽은 책 중 최악이었다. 혹시나 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본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중세의 역습 (theBaldFace 블로그)

ISIS 발흥 관련 읽어볼 법한 글. (원문 링크)

(역사의 진보)

나는 보수주의자다. 쓰던 것을 좀처럼 버리거나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문화의 포근한 힘을 사랑하고, 배타적이고 특이한 인간사의 모든 사투리들을 소중히 여긴다. 나는 진보주의자다.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문명의 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진보한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회의론이다. 언제나 내일보다 못한 오늘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의 오늘은 언제나 내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고달프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나무 위에 살던 유인원이 초원으로 내려와 직립보행을 시작한 이래, 인류의 삶은 전체적으로 꾸준한 향상을 경험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은 위대하지만, 고대의 삶으로 돌아가 행복을 느낄 현대인은 없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에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중세 유럽의 암흑기다. 찬란한 로마 제국의 전성기가 지나간 후, 인류 역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퇴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를 거쳤다. 인류의 문명이 유래 없이 가파른 성장을 성취했던 20세기 말부터, 세계사는 일종의 변곡점을 지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빅뱅 직후의 우주처럼 팽창했고 기술은 10년 전의 SF 영화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속도로 발전했다. 그것을 뒷받침하던 질서가 수명을 다해 가면서, 도처에서 중세적 특징이 또다시 눈에 띠고 있다. 우리는 암흑시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슬람주의의 확산)

인간은 언제나 세속적인 삶을 누릴 태세가 되어 있다. 그것을 뒷받침해 줄 사상적 근거가 있는 한은. 그것을 가장 웅변적으로 증명한 사상가는 막스 베버였다. 현대 서구의 세속적 삶은 종교개혁을 통해 비로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세속적인 삶을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상체계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베버였다. 불행히도, 7세기에 탄생한 종교 이슬람은 자신만의 존 캘빈도, 마틴 루터도 가지지 못했고, 막스 베버는 더더욱 가져보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무슬림들은 현대문명 속에서 살면서도 중세적 사상체계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현대 무슬림들이 겪고 있는 진정한 싸움은 어쩌면 스스로의 현대와 중세가 벌이고 있는 내부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비교적 최근까지 중동지역에서 종교적 삶의 원리와 현대적 생활방식을 한 곳에 붙들어 매 주고 있던 힘은 권위주의적인 정치체계였다. 나름대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터키 같은 곳에서, 그것은 군부의 힘으로 유지되었다. 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산유국들은 원유 수입을 국민에게 뇌물로 제공함으로써 안정을 유지한다. 중세 유럽처럼 닫힌 세계에서였다면, 사상적 도전이 먼저 일어나고, 그것이 사회 구성의 원리를 변화시켰을 터이다. 그러나 2011년 ‘아랍의 봄’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공화정을 채택하고 있던 아랍 국가의 인민들은 서구적 혁명을 벤치마킹 했고, 줄줄이 독재정권을 퇴출시켰다. 그러므로, 이것을 ‘봄’에 비교하는 수사는 서구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독재가 사라진 아랍 국가에서 커다란 정치적 공백을 메운 것은 이슬람주의였다. 테러단체처럼 취급되던 무슬림 형제단이 온건파로 대접받는 세상이 되었다. 전문가들은 이슬람주의의 승리를 선언하고, 그 원인을 여러 곳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의 대약진처럼 보이는 현상은, 실상은 새로 생긴 진공의 공간을 공기가 채운 것과도 같은 현상이다. 길이 패이면 빗물이 고이는 것과 같이.

이슬람 세계가 스스로의 막스 베버를 찾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고유의 사상체계 속에서 세속적 삶을 보듬어 줄 열쇠를 찾아내지 못하는 한, 사람들은 익숙한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이 겪던 현대와 중세의 내적 갈등은 정치적 갈등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와 독재정권에 의해 유예되었던 이슬람 세계의 자생적 발전과정에 이제야 시동이 걸린 셈이다. 그 과정은 쉬울 리가 없고, 그 종착점은 가까울 턱이 없다. 그래서 한동안 우리는 중동지역에서 중세적 갈등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갈등은 언제나 극단주의와 과격주의의 득세를 야기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보복행위에 대한 사상적 핑계를 필요로 하므로, 극단주의는 또다른 극단주의의 번성을 돕는다. 이슬람세계의 극단주의가 비이슬람권과 갈등을 일으키면, 비이슬람권에서도 극단주의자들이 더 큰 목소리를 얻는다. 이것이 21세기의 세계를 중세로 데려가줄 지도 모를 공식이다.

(중세적 군인의 탄생)

여러 해 전 이라크에 출장 갔을 때, 우리 일행을 호위해준 것은 미군 병력과 쿠르드족 페쉬메르가 전사들, 그리고 Blackwater Worldwide라는 PMC(Private Military Compay) 업체의 용병들이었다. 이들의 차림새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다양한 국적의 전직 특수부대 출신 이들 용병들은 옷차림새와 개인화기도 제각각이었고, 가벼운 보호장비에 야구모자나 스카프 차림이었다. 살상을 경험해본 사람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그들은, 치열한 전투의 한복판에 떨어뜨려 놓아도 제 한 몸 정도는 능히 지켜낼 것처럼 보이는 사내들이었다.

이들은 한무더기의 Rambo들이었다. 만약 PMC에 고용되지 않았더라면, 냉전으로부터 해고된 이들 전사들은 각자 사회에서 부적응 증상을 겪고 있지 않았을까. 따지고 보면 이슬람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고 있는 알카에다를 비롯한 수많은 무자히딘 전사들 역시 냉전으로부터 해고된 실업자들인 셈이다.

냉전이 끝나면서 총을 들고 국가를 위해 싸울 용감한 전사들에 대한 수요는 줄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사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와 기술의 진보 덕분에 핸드폰으로 사제폭탄을 터뜨릴 수 있게 된 신형 전사들은 새로운 형태의 싸움에 개입하고 있다. 이들이 임하는 싸움은 더이상 국가 대 국가의 싸움이 아니라 국가 대 개인 또는 국가 대 집단의 싸움이다. 마치 로마제국 말기의 전쟁이 야만족 부족과 제국의 혼란스러운 전쟁이었던 것처럼.

PMC 용병들과 무자히딘들이 마치 중세의 기사들처럼 각자 자신만의 무기와 복장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길한 상징처럼 보인다.

(해적의 활동)

로마제국의 진정한 멸망은 내해(mare nostrum)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 지중해가 해적의 활동무대가 되고, “로마를 통하는” 모든 길 위에 도적과 강도가 들끓게 된 것이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중세가 제국의 쇠망과 중앙권력의 약화에서 비롯되었다면, 새로운 중세는 국제질서의 정통성 약화와 개인의 국제정치적 empowerment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말라카 해협에서, 아덴만에서, 기니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해적들의 존재는 그러한 상념을 불러 일으킨다. 오늘날은 질서의 바깥에 존재하는 개인들도 전례 없이 효과적으로 질서를 위협할 폭력수단을 가질 수 있다.

국제질서를 떠받치고 있던 정통성이라는 합의된 틀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오늘, 다가오는 무질서(The Coming Anarchy)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는 무엇인가. 현명한(worldly wise) 삶이 아닌 현명하게 세속적인(wisely worldly) 삶.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냘프지만 확실한 열쇠가 아닐까.

* 외삽(extrapolation)과 비교정치
* 분석과 종합
* 베스트팔리아 조약의 수명과 비교시점
* 세계화의 역설


이 밈을 삽입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세의 역습 (theBaldFace 블로그)


수학 중등교육을 둘러싼 잡음에 관한 단상

수학 교과과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 있는 모양이다. 난 수학/수학교육의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6년간 고교 수학 과외 선생 노릇을 해온 경제학도로서 드는 생각을 난삽하나마 정리해 본다.

새로 맡은 학생과의 첫만남에서 나는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진다. “원이 뭔가요?” (“한 점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라는 원의 정의는 중학교 1학년 때 배운다.)

열의 여섯은 잠깐 생각하다 답을 내놓는다. 그러면 이어서 묻는다. “원의 방정식이 어떻게 되나요?”

여섯 중 넷은 암기한 대로 대답한다(넷은 여기서 포기). “엑스제곱 더하기 와이제곱은 알제곱이요.” 역시 이어서 묻는다. “그게 무슨 뜻이죠?”

“방금 말한 원의 정의를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대답한 학생을 나는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네?” 하더니, 앞서 물어본 질문을 생각하고 “아하!” 하는 학생도 한 번 본 일이 있다(여기까지만 되어도 괜찮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은 “선생님, 그거야말로 무슨 말씀이시죠?”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이 때 당황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이어 간다. “좌표평면에서 두 점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구하죠?”(이건 중학교 3학년 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운 뒤 배운다.)

공식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학생은 편안한(?) 마음으로 아예 처음부터 공사를 시작한다(원의 정의도 마찬가지). 내가 맡았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식을 암기하고 있었는데, 이런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착잡해진다. “그 공식과 원의 정의를 합치면 원의 방정식이 나와요. 앞으로 이런 것 계속 물어볼 거예요. 수업 시작합시다.”

이런 문답은 학생들이 어디서부터 개념의 연결고리를 놓쳤는지 점검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리고 이건 원 말고 다른 개념으로도 가능하다. 가령 “이차방정식의 근과 계수의 관계”,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 “완전제곱식”, “제곱근의 정의”의 연속기도 유용하다. 어쨌든, 비극은 내가 묻는 내용이 무슨 비기(秘技)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내가 묻는 내용은 전부 교과서에 언급되거나 교사용 지도서에서 강조하도록 되어 있다. 곧, 학생들의 침묵은 수학 수업이 학생들에게 교과과정을 숙지시키는 데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다. 무엇이 문제인가?

수학 교과서는 설명과 예제, 유제, 연습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설명은 말 그대로 “핵심”을 “간결”하게 서술하는 데 그친다. 때문에 초심자의 이해를 돕기에 부족하다(설명 자체는 훌륭하다). 요새 시끄러운 “스토리텔링”은 초심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심화학습을 목적하는 중급자 이상에게는 싱겁다. 그러니 이도저도 아닌 책이다. 교과과정 전체의 지도를 그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근 단원 시작과 끝에 이전 학년 및 이후 학년과의 연관성이나 이전 학년 내용의 복습을 돕는 내용이 삽입되었으나, 그 역시 학생들에게 충분한 안내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수학 교과서는 교수자의 보조가 있어야만 전체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과서 수준” 이라는 말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다.

수학 교사들은 이러한 내용을 충실히 다루어 주는가? (직간접적인) 경험상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수학 수업은 적당히 내용을 가르치고 공식을 암기하도록 한 뒤 문제풀이 위주로 진행된다. 가끔 학생들이 나와서 풀도록 시키기도 한다. 이런 수업의 문제를 짚자면 끝이 없다. “수학을 왜 배워야 하나요?”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그보다 작은 “이건 왜 배워요?”에도 대답하지 못한다. 또한 문제풀이에 역점을 두면서 “왜 그렇게 풀어야 하는가?”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역설적 방식이다. 숱한 사람들이 경험하여 알듯, 최악의 방식이라는 말이다.

가령 “겹치는 부분은 치환한다”를 생각해 보자. 문자를 이용한 단항식과 다항식의 연산을 배울 때 학생들은 처음으로 수학적 추상화를 배운다(집합이 중학교 과정에서 빠졌기 때문). 수가 문자로 바뀌고, 문자가 식을 이루어 다항식이 된다. 이 때 다항식을 또다른 문자로 놓을 수 있다는 것과 그 의미를 잘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백에 아흔아홉은 지루하게 (a+b)(c+d)=ab+ad+bc+bd 식의 계산을 반복하거나 곱셈공식을 암기시키는 데서 수업이 끝난다. 여기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치환’은 테크닉으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개념의 지도를 그리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개념의 지도”는 해당 내용을 배우는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 줄 때 형성된다. 수열 단원에서 등장하는 계차수열 문제를 학생들은 싫어한다. 어려운 수열 문제에서 늘 출현하고 계산이 귀찮은데 다른 어떤 내용과도 연관되지 않아 쓸모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차수열은 미분에서 배우는 도함수의 예고편이다. 수열의 극한을 배운 뒤 함수의 극한을 배우는 것과, 계차수열을 배운 뒤 도함수를 배우는 것은 같은 원리다. 이러한 연관관계나 전체를 꿰뚫는 원리를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다. 문제 푸는 기술보다 훨씬 중요한 것인데도.

그러면 왜 교사들은 원리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는가? 교과과정의 양이 많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얼핏 보면 그 말이 맞을 수 있다. 한국의 수학 중등교육이 포함하는 분량이 세계에서 손에 꼽는 수준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교과과정의 내용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교과과정을 축소하면 정말 이 문제가 개선될까? 나는 회의적이다. 그럼 수학 교사들의 자질과 헌신도가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예로 제7차 교육과정 인문계열 학생들은 미적분을 배우지 않았다. 그것이 수학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해 주었는가? 미지수다. 한편 중학교 교과과정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중학생들은 더 이상 집합을 배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렇다 해서 ‘수포자’가 줄어들었는가? 이에 관한 정량적 평가를 나는 어디서도 접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최근에 맡았던 학생과의 첫날 대화 한 대목을 옮기고 싶다: “그럼 수학을 언제부터 놓았어요?” “….아마, ‘혼합계산’ 배울 때 였던 것 같아요.” 혼합계산은 초등학교 과정이다. 이래도 교과과정의 양이 문제인가?

수학 교육의 문제는 교과과정의 양보다 수학교육이 놓인 환경에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의 목적은 좋은 성적이다. 어느 수준까지는 교과 이해도를 높이는 것보다 문제풀이 기술을 배우는 것이 (시간 대비) 효율적인 성적 향상을 담보한다. 그러나 기초가 부실하면 멀리 가지 못한다. 결국 수포자가 양산된다. 특히 상대평가는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한다. 제한된 범위 안에서 문제의 난도를 높이다 보면 괴랄한 문제가 출현하고, 그런 문제를 맞히기 위해 사교육을 받으며, 다시 그런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한 문제가 출제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그렇다고 시험이 쉬워지면 실수 확률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무한정 문제풀이를 반복해야 한다(선행학습을 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제한된 시수를 문제풀이에 배분하다 보면 당연히 기본 원리 설명에 할애할 시간은 줄어든다.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낙오를 피할 수 없다. 기본 원리를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 문제풀이를 거듭하면 누구라도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교과 내용을 줄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의 평가방식이 유지된다면 교과과정을 절반으로 줄여도 문제가 눈에 띄게 완화되리라 보기 어렵다. 수학 교사들의 자격과 헌신도를 문제삼는 시각은 여기서 기각된다(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주 특별한 개인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러한 제약 하에서 수학 교사들이 학생들의 교과 이해도 제고를 수업 목표로 택하기 어렵다.

결국, 문제는 교수법의 파행을 낳는 평가방식과 교과서의 한계로 인한 자율학습의 어려움에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수학 공교육 체계는 교수자가 필수적이지만 사실상 교수자가 부재한 것과 같은 상황이며 개인이 공교육 범주 안에서 그를 타개하기 어렵다. 이 중 평가의 문제가 압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평가는 교육의 사회적 역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니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자율학습의 문제에 관해 나는 교과서가 보다 충실한 설명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좋은 참고서가 많이 나와 있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하나, 결국 교과서가 자기완결적으로 학습자를 인도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눈감는다(그리고 ‘참고서’의 설명은 많은 경우 요점정리에 지나지 않는다). 최소한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학생이 수학을 포기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 고교 생활은 수학과의 분투기로 요약된다. 특히 고교 1, 2학년 때 수학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선행학습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고 수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흔히들 부딪히는 삼각함수의 벽에서 포기하고 문과를 택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3학년 때에야 전체 그림을 좀 잡았다. 좋은 설명이 있었다면 시행착오가 덜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그리고 경제학과에 진학하게 되는데…) 그 경험이 수학 과외에는 큰 도움이 되었으나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현재 수학 교과서의 편집 방향은 교육부의 방침이라고 알고 있다. 이 방침을 바꾸어 충실한 수학적 설명을 수록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상한 스토리텔링이 아닌 조밀하고 친절한 설명이어야 한다. 이런 문제를 그대로 둔 채 교과과정의 양을 줄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공교육은 보편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나면서부터 미분방정식을 푸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필요도, 모든 사람을 미분방정식을 풀도록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러나 교과의 기본 원리와 사고방식을 익히도록 돕는 것은 결코 공교육이 버릴 수 없는 책무이다. 해당 목표가 달성되지 않고 있다고 해서 교과과정의 축소를 해결책으로 삼는 것은 문제를 우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경을 해체하겠습니다” 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기실 교과과정의 파행적 운영은 수학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심각한데 단계적 학습이 비교적 중요한 수학에서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본질적 문제와 씨름하지 않으면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반복/재현된다. 평가가 사회시스템의 함수이므로 쉽사리 손댈 수 없으니 그렇다 친다면, 현재의 조건 하에서 수학 교사들의 유인을 재설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단순 성과급제 말고. 단순 성과급제는 평가의 문제를 확대할 것이다). 어쨌든 교육의 제1문제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앵거스 디턴,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 2014.

앵거스 디턴,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 2014.

앵거스 디턴,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 2014.

작년 피케티 열풍 당시 한국경제신문에서 그 대항마로 내밀었던 책이다. 서문과 에필로그만 읽고 일단 꽂아 둔다는 것이 벌써 6개월 되었다. 밀린 숙제 하는 기분으로 ‘읽어 치운다’.

책 앞표지에는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진시키나”, 뒷표지에는 “정통 주류경제학자가 밝히는 불평등 그리고 빈곤 해소의 대안”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불평등이 촉발하는 성장을 찬미하기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자신의 책이 피케티의 대립항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디턴은 오히려 무척 어이없어했을 것이다. 디턴은 이 책에서 특별한 대안을 내놓기보다는 역사적 서술 및 현재 당면한 문제의 분석에 치중하며, 에필로그에 와서야 낙관론을 개진한다. 그러나 그 낙관조차 의기양양한 선언과는 거리가 멀다. 가령 에필로그에서 그는 “미국의 경우 현재와 같은 극단적인 소득과 부는 100년 이상 본 적이 없다. 부의 엄청난 집중 현상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파괴의 숨통을 막아 민주주의와 성장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조심스럽게 낙관한다”고 쓴다. 다른 대목에서 그는 불평등을 “장애”로 묘사한다. 광고에 낚여 책을 구매했다면(이런 사람들에는 나도 포함된다) 속은 기분마저 들 정도다. 어쨌든, 책의 표지를 떼어 버린다면 편견 없이 내용에 접근할 수 있을 듯하다.

책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인류는 경제성장에 힘입어 “삶, 죽음, 질병으로부터의 대탈출”을 해왔다. 비록 최근 성장세가 흔들리고, 불평등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인간의 “탈출” 욕구는 뿌리깊은 것이며 “탈출”의 역사와 수단에 관한 지식은 부의 집중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는다. 정체된 듯한 발전의 지표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온 진보가 막대했다는 증거다. “탈출”에 성공하는 국가들이 많아지며 새로운 불평등과 문제가 야기될 것이나, 이러한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전반적으로 텍스트가 잘 조직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처에서 경제학자 특유의 “on the other hand”가 명시적/암시적으로 드러나는데, 구조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각 장의 요점과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남겨 둔다.

1-2장은 기대수명, 웰빙지표, 사망률, 의학의 발달에 관해 서술하며 발전의 역사를 추적한다. 3-4장은 국가 간 사망률, 기대수명 및 영양실조 지표를 이용하여 “사망/죽음의 불평등”에 관한 논의이다. 소득이 높은 국가일수록 기대수명이 길고, 영아사망률이 낮으며, 영양공급이 잘 되어 있다는(평균신장을 대리변수로 이용) ‘당연한’ 결과와 함께, 기대수명 증가율의 정체 등이 비관론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이 부분은 교과서를 읽는 듯 지루했다.

5장은 경제성장과 빈곤의 관계를 논의한다. 1973년 이래 미국의 경제성장은 멈추지 않았으나 빈곤율은 감소하지 않았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빈곤선(poverty threshold)이 함께 상승했기 때문인가? 디턴은 여기서 미국의 빈곤선이 절대적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 입안자조차 동참한) 개혁 요청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인플레이션 보정을 제외하면 1963년에 산출된 빈곤선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니 빈곤율의 정체는 빈곤선의 지나친 상승에 기인하지 않는다. 디턴은 대신 빈곤 측정의 다른 문제에 의해 공식 수치에 정부의 빈곤 경감 프로그램 성과가 반영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빈곤율 통계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불분명한’ 주장을 내놓은 뒤, 숙련편향적 기술진보에 따른 불평등 문제를 개관한다.

이어 그는 자연스럽게(!) 상위 소득 점유율 변화와 함께 Piketty-Saez(2003) 방법론(세금 영수증을 이용한 Top Income의 역산)을 내놓는다. (피케티는 이 외에도 몇 번 더 인용된다.) 그는 피케티 연구를 폄하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 연구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빈곤 문제 해결에 진전이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고 평가한다. 6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에 따라 야기되는 불평등을 다룬다. 과거에 비해 국가 간(inter-national) 불평등은 줄어들고 국가 내(intra-national) 불평등은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 제시된다. (이는, 내가 알기로, 불평등 논의에서 합의된 몇 항목 중 하나다.)

7장에서 디턴은 국제원조의 비효율성(내지 무용성)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는 “1인당 0.3$만 기부한다면 세계 빈곤이 해결됩니다” 식의 슬로건을 한 쪽에서 물을 공급하면 다른 쪽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 여기는 수력학적 접근(hydraulic approach)이라 부르며 이것은 곧 원조 환상(aid ilusion)이라 단정한다. 이의 연장에서 “최빈국이 발전의 사다리에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수준의(최소한의) 원조”를 주장하는 제프리 삭스는 가장 강력한 비판 대상이다.

이 주장은 단순히 복지(=국내원조)가 야기하는 문제가 국제원조에서도 재현된다는 논리에 기반하지 않는다. 흔히 국내 원조를 둘러싼 논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조가 인센티브를 왜곡하여 빈곤의 영구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단순 실업급여가 음의 순임금을 발생시켜 노동의욕을 하락시킨다는 것은 신고전학파 노동공급모형의 가장 간단한 확장이다) 그러나 국제원조의 문제는 원조가 수혜국 빈곤층의 행태에 미치는 영향이 아닌 수혜국 정부의 행태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 일반적으로 정부의 예산제약은 세금에 의해 결정된다. 정부지출이 비효율적일 경우 (민주주의에서는 선거에 의한) 정치적 피드백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다. 바꾸어 말하면 방만한 재정지출의 기회비용은 집권자의 임기이고, 따라서 정부는 정치적 합의 하에서 예산 지출/세금 인상을 단행해야 한다.

그러나 국제원조가 존재할 경우 정부는 정치적 책임을 크게 지지 않고도 원조금에 의해 예산제약을 확대할 수 있다. 이는 결국 권위적 정치체제 및 엘리트의 부패로 연결된다. 책에 나오는 사례에서도 나타나듯, 여러 실무적 문제에 의해 기부국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복잡한 조건을 설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부패는 피할 수 없다. 간단히 애쓰모글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논지를 빌리면, 민주주의는 포용적 정치제도로써 정치권력의 적절한 분배와 사유재산권의 보장을 통해 포용적 경제체제와 보완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국제원조는 민주주의의 환류 기능을 약화시켜 수혜국의 정치제도가 포용적 정치제도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거나 민주주의를 착취적 경제제도로 회귀시킨다. 그리고 “악순환은 착취적 정치제도에서 비롯된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낳고, 이어 경제적 부와 권력으로 정치권력을 살 수 있으므로 착취적 경제제도 역시 착취적 정치제도를 뒷받침한다.” 디턴의 눈으로 볼 경우 국제원조야말로 ‘사다리 걷어차기’인 셈이다. (단..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관계는 그 역사만큼이나 복잡한 논쟁이다.)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은 추천사에서 7장을 원용하여 대북 원조 중단을 주장한다. 대북 원조가 북한 정권(=착취적 정치체제)의 존속을 지속시키는가? 나는 북한 전문가가 아니지만 정황상 그럴 것이라는 추측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나는 대북원조를 디턴이 보여준 원조국-수혜국의 구도에 대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경제학자보다는 국제정치학자의 목소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원조를 중단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가? 이 주장은 당장 신문만 펴도 알 수 있는 중국의 존재를 무시하는 견해다. 다시 말해 “원조가 자생적 기반 형성을 저해한다”는 디턴의 논지에 따른 원조 중단은 무의미하다. “친중, 통미봉남” 등 북한의 행태에 따른 외교역학을 배제하더라도 저 주장은 잘못되었다.

어쨌든, 통일을 하지 않더라도 평화체제의 구축은 반드시 달성되어야 할 목표다. 원조를 시작으로 경제적 교류를 확장하고 공동의 이해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당장 개성공단이 그러한 목표 하에 운영되고 있지 않는가.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개성공단이 닫혔고, 실제 폐쇄 이후 재가동되기도 했으나, 규모가 더욱 커질 경우 외교가 경제적 교류를 차단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그리고 경제의 상호의존성은 전쟁의 기회비용 중 하나이며 무력충돌의 사전적 제동장치로 작동한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큰 관계가 없는 두 국가는 전쟁의 기회비용이 상대적으로 작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두 국가가 전쟁을 벌이기란 어렵다. 대북관계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차후 방침은 달라질 것이다. 통일로 가는 주춧돌이건, 평화체제 구축의 시발점이건, 원조는 그를 위한 비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한반도 문제에서는 보다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짐작컨대 추천사는 책을 꼼꼼히 읽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되었을 것이다.)

디턴은 전반적으로 건조한 어조를 유지한다. 그러나 7장의 끝에서 그는 다분히 경제학자답게도 이렇게 쓴다.

“프린스턴대학의 학생들이 세상이 더 살기 좋고 부유한 곳이 되도록 돕는 데 깊은 도덕적 의무감을 품고 찾아와 이야기하는 경우, 나는 이런 아이디어에 대해 토론하며 학생들이 장래 소득에서 십 퍼센트를 기부하려는 계획, 이것도 해외 원조 금액을 늘리려는 계획에서 이들을 멀리 떼어놓는다. 나는 학생들에게 정부에 대항하지 말고 자신의 정부 안에서 일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해치는 정책을 중단하도록 정부를 설득하고, 세계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국제 정책을 지원하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아직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의 탈출을 위한 진정한 방책이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가령 정부에 대항해야 하는 이유는 빈곤 외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진보의 믿음은 도덕적 동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디턴은 지루한 도표를 들여다보며 연구했을 것이며 독자인 나도 꼼꼼히 읽으려 노력했다.

어딘가 아쉬운 독서. 주 논지를 파악하려면 5-7장만 읽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디턴은 영국사를 언급하며 키스 토머스나 로이 포터 등 역사학 권위자들을 인용한다. 경제학자가 역사학자를 인용하는 풍경이 사뭇 낯선 한편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