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에는 케네스 포머란츠의 역저 『대분기』를 반드시 다 읽겠노라 다짐하고 읽기 시작했다. 4일 만에 결론을 내렸다. 국역본은 초벌번역 수준도 안 되는 지뢰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읽어 보려다가 79페이지에서 인내심이 다하고 말았다. 왜 4일 동안 100페이지도 못 읽었는가 하면, 번역 때문에 도무지 몰입이 안 된다.
웬만하면 번역은 그러려니 하는데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책의 분량이 많고 포메란츠 교수의 문장이 간결미와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넘어가기 어렵다. 유사한 주제, 유사한 볼륨인 이언 모리스 저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번역은 읽을 만했던 것으로 기억하건만.
투박한 직역으로 문장과 단어의 어감을 살리지 못한 것은 예사다. 아예 기본적인 뜻을 틀리거나 문장을 제멋대로 잘라서 옮긴 경우도 많다. 번역이 아닌 국문 글쓰기의 문제도 한몫하는데 특히 주술호응 안되는 문장이 부지기수다.
오류를 몇 개만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딱 두 단락에서 뽑았다.
(언급하는 오류의 전후 내용을 요약 소개하자면 이렇다. 산업화 당시 유럽의 기술 발전은 전적으로 독보적인 수준은 아니었으며, 유럽이 우위를 구축하는 과정은 유럽의 성과뿐 아니라 석탄 발견 등의 행운이나 중국의 은 경제 전환 같은 외부의 독자적 발전에 따른 이득에도 의존했다.)
먼저 내가 폭발하고 만 79쪽 마지막 문장이다.
“만약 이런 ‘부수적‘ 요인이 없었다면, 유럽의 발명품만으로는 18세기 중국과 인도 및 다른 국가에서 꾸준히 이룩해온 주변적 기술 향상보다 사회.경제적으로 훨씬 더 혁명적인 충격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적”이 단어 뜻이 미묘하게 계속 엇나가는 듯하다는 느낌에 물증을 제공한 단어다. 일반적으로 “주변부”는 “혁명적”과 대조되지 않는다. “미미한”을 의미하는 marginal의 직역으로 보여 찾아보니 실제로 그랬다. 다음은 원문이다.
“Without these “external” factors, Europe’s inventions alone might have been not much more revolutionary in their impact on economy and society than the marginal technological improvements that continued to occur in eighteenth-century China, India, and elsewhere.”
포머란츠는 이 문장에서 당대 타 지역에 비해 혁명적이었다고 평가되는 유럽 기술 발전 역시 단독으로 떼어 놓고 보면 오늘날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미미한”) 타 지역 기술 발전과 별 차이 없었을 수 있다는 주장을 요약하며 주 논지 중 하나를 제시한다. 이런 문장을 틀렸다는 건 독자가 책 내용을 이해하건 말건 신경쓰지 않겠다는 것과 진배없다.
“주변적”은 “덜 중요한” 뭐 이런 뜻이니 대충 비슷하게 이해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다고 치고 계속 살펴보자. 당장 이 문장에서 “external”을 “부수적”으로 옮긴 것 역시 오류다. 강조를 살린 “외부적”으로 옮기는 게 맞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나타난 이유를 추적하자면 내용을, 특히 이 문장의 앞 단락을 제대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차차 보기로 하고 내용도 파악할 겸 문제의 앞 단락을 첫 문장부터 한 번 살펴보자.
“총자본으로 구현한 기술을 비교해보면, 유럽이 우위를 점한 분야 중 상당수가 산업혁명 이전 2세기 또는 3세기 동안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유럽에는 여전히 낙후한 분야가 있었다.”
“When we turn to comparisons of the technology embodied in the capital stock, we do find some important European advantages emerging during the two or three centuries before the Industrial Revolution; but we also still find areas of European backwardness.”
“총자본으로 구현한 기술”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자본량/자본스톡에 체화된(포함된) 기술”이 맞다. 포머란츠는 이 앞 문단에서 1800년 이전 서유럽의 자본스톡이 다른 구세계보다 더 많지 않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흐름상 이 문단에서는 자본스톡의 양적 수준 말고 그에 내재된 기술수준을 비교해보자는 말이다. 국문번역은 자본으로 기술을 구현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구현한” = “embody” = “체화한” 의 뇌내번역이 가능한 독자라야 제대로 이해할 것이다. 그 정도로 눈감아 주자면 번역은 왜 하는가?
역자들은 이 문장에서 “area”를 “분야”로 번역했다. 맞는 번역이다. 이 다음 문장에서도 그렇게 했는데, 갑자기 다다음 문장에서는 “지역”으로 바뀌면서 문장이 이상해진다. 거기선 그 뜻으로 쓴 걸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한다면, 전문 연구자는 그런 혼동을 만들지 않으며 여기서 “지역”은 place로 쓰고 있다. 문제의 문장은,
“그렇기 때문에 우세한 유럽의 몇몇 지역은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 중요했던 반면, 기술적으로 앞선 사회임에도 특정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As it worked out, some of the areas in which Europe had an edge turned out to be important for truly revolutionary developments, while the particular areas in which other societies had better techniques did not.”
그냥 통째로 틀렸다. “유럽이 우세했던 분야의 일부는 실제로 혁명적 발전에서 중요했던 반면, (유럽에 비해) 다른 사회[구세계]가 우세했던 특정 분야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특정 분야”는 유럽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분야로, 이 문장과 첫 문장 사이의 내가 건너뛴 문장에 이미 소개된 분야(THE paricular areas!)다.
이 다음 문장에서 포머란츠는 유럽이 타 지역과 달리 토지의 제약을 상당히 해결하고 비약적인 자립 성장(breakthrough self-sustaining growth)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에는 상기 기술 발전 외에도 특정 자원(석탄, 은)의 발견이라는 행운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 문장 번역도 괴상하지만 넘어간다)
그리고 나서 나오는 내용은,
“이는 부분적으로 세계적 연관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적 연관성이라는 것도 결국 유럽인이 이룬 성과(대부분 폭력으로 획득한), 계속된 행운 그리고 독자적 발전이 결합해 형성된 것이다.”
“It was also partly due to global conjunctures. Those global conjunctures, in turn, were shaped by a combination of European efforts (many of them violent), epidemiological luck, and some essentially independent developments.”
단어부터 보자. 세계적 “연관성”이 무슨 번역일까? “conjuncture”는 “a combination of circumstances or events”라는 뜻이다. 적절한 역어를 떠올리기는 어렵지만 단순히 “연관성”이라 하기는 어렵다. 주석이라도 달았어야 한다.
게다가 “epidemiological(역학적)”을 “계속적”이라는 전혀 상관없는 뜻으로 옮겼다. “역학적 행운”은 유럽의 신대륙 정복을 도운 전염병을 가리키는데, “계속적 행운” 이라고 하면 앞에서 나온 자원 발견이 계속되었다는 식의 말이 되어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이 오역은 이유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European efforts” 역시 “유럽인들의 활동”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
본문에서 “부분적으로(partly)”라는 표현은 유럽의 성장요인을 열거할 때 쓰였다. 즉 “세계적 연관성” 역시 기술발전, 행운 같은 하나의 요인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국문번역 두 번째 문장은 “세계적 연관성”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는 뉘앙스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건 멋대로 “하지만”을 첨가하고 “in turn”을 “결국”으로 옮겼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세계적 연관성은 ~ 결합으로 형성되었다.”로 옮겨야 한다.
포머란츠가 언급한 사례를 활용하여 내용 해설을 하자면 신항로개척/신대륙 발견(유럽인들의 활동), 전염병(역학적 행운), 중국의 은 경제 전환([유럽 외 지역의] 독자적 발전)이 결합한 “”상황””이 바로 “세계적 연관성” 이다.
이제 다시 나를 폭발하게 만든 문장으로 돌아와 보자. “global conjunctures”를 가리키는 “external factors”가 왜 “부수적 요인”이 되었을까? “하지만”을 첨가해서 “global conjunctures”를 평가절하했기 때문에 부수적일 수밖에! 그리고 원문에서 external에 강조 표시를 한 이유는 “global”이지만 “conjuncture”이기 때문인데 (단순히 외부에서만 결정되는 요인이 아니라는 것) 이 압축적 표현이 “부수적 요인” 이라는 오역으로 바뀌면서 내용이 미궁에 빠진다. “부수적 요인” 이 있다면 “주 요인”은 무엇인가? 유럽의 기술? 줄곧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해 왔는데도?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external의 뜻은 중학생 수준이므로 이 번역은 의도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역자의 이해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놀랍게도 이들 오류를 뽑아내는 데는 두 단락으로 충분했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간단하다. 역자들이 책을 완벽히 이해하고 전체 원고의 통일성(consistency)을 기하며 원고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역자들의 전체적 이해도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문자 그대로 읽자면 앞뒤가 안 맞으니 내용의 통일성이 없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솔직히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면 이렇게 내용 흐름이 박살나지는 않는다.
왜곡번역 논란이 있었던 앵거스 디튼의 <위대한 탈출>조차도 자의적 편집 때문에 흐름이 중간중간 끊겼을망정 대충 읽을 만 했다. 이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수준이다. 어차피 한정된 독자가 읽을 책, 1쇄절판시키고 새 번역으로 새로 내는 게 낫겠다.
난 영어를 그리 잘 하지도 않고,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이런 식으로 단정적인 글을 쓰는 것도 싫어한다. 그럼에도 번역이 정말 끔찍해서 쓸 수 밖에 없었다. 근 3년 사이 읽은 책 중 최악이었다. 혹시나 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본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