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 (오욱환)

교육학자의 글이지만 학문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 듯하다. 두고두고 읽을 글이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

오욱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인생은 너무나 많은 우연들이 필연적인 조건으로 작용함으로써 다양해집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전공분야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길로 접어든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을 겁니다. 전공이 같았던 동년배 학우들이 각기 다른 진로를 선택함으로써 흩어진 경험도 했을 겁니다. 같은 전공으로 함께 대학원에 진학했는데도 전공 내 하위영역에 따라, 그리고 지도교수의 성향과 영향력에 따라 상당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겁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저는 한국교육학회나 분과학회에 정회원으로 또는 준회원으로 가입한 젊은 학자들에게 학자로서의 삶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몇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합니다. 이 조언은 철칙도 아니고 금언도 아닙니다. 학자로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하우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읽기를 바랍니다. 이 조언은 제가 젊었을 때 듣고 싶었던 것들입니다. 젊은 교육학도였을 때, 저는 이러한 유형의 안내를 받지 못했습니다. 직업에 따라 상당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직업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기 때문에, 저는 직업을 생업(生業)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학문은 권력이나 재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학자로서의 성공은 학문적 업적으로만 판가름됩니다. 자신의 직업을 중시한다면, 그 직업을 소득원으로써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치로 받아들여야 맞습니다. 아래에 나열된 조언들은 제가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조언들은 제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있다”고 확신하십시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구직난을 호소하지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구인난으로 애를 태웁니다. 신임교수채용에 응모한 학자들은 채용과정의 까다로움과 편견을 비판합니다만, 공채심사위원들은 적합한 인물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공정한 선발 과정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공정하게 진행되기를 기원하면서 요구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는 데에 더 힘쓰십시오.
  • 학문에 몰입하는 학자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젊은 학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모형이 되어줄 스승, 선배, 동료, 후배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에는 따라해 보는 방법이 효율적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스타일을 갖추면 됩니다. 학문에의 오리엔테이션을 누구로부터 받느냐에 따라 학자의 유형이 상당히 좌우됩니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면, 반드시 학문에 혼신을 다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존경할 수 없는 학자들을 직면했을 경우에는, 부정적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다시 말해서, 그 사람들과 다르기 위해 노력하면 정도(正道)로 갈 수 있습니다.
  •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위대한 학자보다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그렇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모형으로 삼으십시오. 의식을 해야만 인식되는 사람은 일상적인 모형이 될 수 없습니다. 수시로 접하고 피할 수 없는 주변의 학자들 가운데에서 모형을 찾아야 합니다. 그 모형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에는, 여러분이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때, 눈을 들어 조금 더 멀리 있는 모형 학자들을 찾으십시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분이 훌륭한 학자에 가까워집니다.
  • 아직 학문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가능한 조속히 결정해야 합니다.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학문은 적당히 해서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일에 매진할 리 없고, 매진하지 않는 일이 성공할 리 없습니다. 학계에서의 업적은 창조의 결과입니다. 적당히 공부하는 것은 게으름을 연습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게으른 학자는 학문적으로 성공할 수 없으며, 학계는 지적 업적을 촉구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읽고 쓰는 일보다 더 오래 할 수 있고 더 즐거운 일을 가진 사람은 학문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읽었는데도 이해되지 않아서 속이 상하고 글쓰기로 피를 말리는 사태는 학자들에게 예사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읽고 씁니다. 이 일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일은 어렵고 힘들수록 더 가치 있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읽고 쓰는 일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그 일에 다가간다면, 학자로서 적합합니다.
  •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다면, 대인관계를 줄여야 합니다. 학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학문에 투입하는 시간은 다른 업무에 할당하는 시간과 영합(zero sum)관계에 있습니다. 학문을 위한 시간을 늘리려면 반드시 다른 일들을 줄여야 합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대인관계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 전화번호부가 보험설계사의 전화번호부처럼 다양하고 많은 인명들로 채워져 있다면, 학문하는 시간을 늘릴 수 없습니다. 물론 대인관계도 사회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학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학문을 직업으로 선택하면 불행해집니다.
  • 학문 외적 업무에 동원될 때에는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헌신하지는 마십시오. 젊은 학자들은 어디에서 근무하든 여러 가지 업무―흔히 잡무로 불리는 일―에 동원됩니다. 선택할 수 있을 때에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그 일을 부탁한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보다 직위가 높고 영향력이 더 큽니다. 그리고 그들은 젊은 학자들이 일하는 자세를 눈여겨봅니다. 잡무를 부탁하는 사람들은 젊은 학자들에게 평생 직업을 제공하거나 추천하거나 소개하는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기 싫지만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성실해야 합니다.
  • 시작하는 절차를 생략하십시오. 논문을 쓸 때 가장 힘든 시기는 시작할 때입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결과가 나올 리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면 될 일을 시작하는 절차에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고 길일(吉日)이나 적일(的日)을 찾다가 실기(失機)합니다. 신학기에, 방학과 함께, 이 과제가 끝나면 시작하려니까 당연히 신학기까지, 방학할 때까지, 과제가 끝날 때까지 미루게 되고 정작 그 때가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새로운 변명꺼리를 만들어 미루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은 재치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답니다(성경 잠언 26:16). 논문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즉시 그리고 거침없이 많이 기록해두어야 합니다. 적기를 기다리다가는 아이디어를 놓칩니다. 사라진 아이디어는 천금을 주어도 되찾을 수 없습니다.
  • 표절은 학자에게 치명적인 오명이 됩니다. 표절은 의식적으로도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도 일어납니다. 표절에의 유혹은 게으름과 안일함에서 시작됩니다. 표절을 알고 할 때에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유리한 변명이 충분히 만들어집니다. 표절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모르고 표절할 수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발표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글쓰기에 엄격한 사람들을 가까이 해야 하고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발표된 후에 표절로 밝혀지면, 감당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 시간과 돈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도서구입에 인색하고 음주나 명품구매에 거침없다면 학자로서 문제가 있습니다. 읽을 책이 없으면 읽어야 할 이유까지도 사라집니다. 책을 구입하고 자료를 복사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면 구입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지를 따지는 것은 책을 사지 않으려는 이유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 문헌들을 읽거나 가까이 두고 보아야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 새 책을 구입했을 때나 새 논문을 복사했을 때에는 즉시 첫 장을 읽어두십시오. 그러면 책과 논문이 생경스럽지 않게 됩니다. 다음에 읽을 때에는, 시작하는 기분이 적게 들어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구입한 책과 복사한 논문을 도서관 자료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읽은 부분에 흔적을 많이 남겨두십시오.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반론이 생각나면, 그 쪽의 여백에 적어두십시오. 그것이 저자와의 토론입니다. 그 토론은 자신이 쓸 글의 쏘시개가 됩니다.
  • 학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학회의 주체로서 활동하고 손님처럼 처신하지 마십시오. 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긍정적 모형들과 부정적 모형들을 많이 접해보십시오. 좋은 발표들로 모범 사례들을 만들어가고 실망스러운 발표들을 들을 때에는 그 이유들을 분석해보십시오. 학회에 가면 학문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학회에 가면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성적 자극도 받을 수 있습니다.
  • 지도교수나 선배가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해주지 않음을 명심하십시오. 학위논문을 작성할 때 지도교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배의 조언은 학위논문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와 도움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그들에게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홀로서기가 시련이듯이, 학자로서의 독립도 어렵습니다. 은사나 선배에의 종속은 그들의 요구 때문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젊은 학자들이 스스로 안주하려는 자세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 걸작(傑作)이나 대작(大作)보다 습작(習作)에 충실하십시오. 논문을 쓰지 못하는 학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걸작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들은 다른 학자들의 논문들을 시시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찮게 평가한 논문들과 비슷한 수준의 논문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논문을 쓰는 데 엄청난 압박을 느낍니다. 걸작에 대한 소망은 학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걸작은 쉽게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걸작을 지향한 논문이라고 해서 걸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논문을 쓸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그 논문들이 쌓여지면서 걸작과 대작이 가능해질 뿐입니다.
  •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곧바로 연구업적에 대한 압박이 시작됩니다. 교수직을 구하려면 반드시 연구업적을 충분히 갖추어야 합니다. 많은 대학에서 연구보고서는 연구업적으로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저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번역서에 대한 평가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낮습니다. 번역보다 창작에 몰두하십시오. 번역은 손쉬워 보이지만 아주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생색도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역했을 경우에는 지적 능력을 크게 의심받습니다.
  • 학자가 되고 난 후에는 저서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압박도 만만치 않습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러 책을 찾을 때 다른 학자들이 쓴 책들만 보이면 상당히 우울해집니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이 교과서와 전공서를 출판할 때에는 뒤처지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학자들이 젊었을 때부터 교과서 집필을 서두릅니다. 교과서 집필은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어렵습니다. 교과서에 담길 내용은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쓸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논문과는 다르게, 교과서 집필은 다른 학자들도 알고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작업이어서 표절의 가능성도 아주 높고, 오류가 있을 경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학자로서 최소 10년은 지난 후에 교과서 집필을 고려하십시오.
  • 학회에 투고한 논문이 게재되지 않더라도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학회에서 발행되는 정기학술지에의 게재 가능성은 50퍼센트 수준입니다. 까다로운 학술지의 탈락률은 60퍼센트를 넘습니다. 그리고 학계의 초보인 여러분이 중견·원로 학자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아이디어를 짜내어 논문을 작성한 후 발송했더니 투고양식에 맞지 않는다고 퇴짜를 맞거나,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게재불가 판정을 한 심사평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신 문헌과 자료를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문외한인 심사자를 만나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게재불가를 받은 자신의 논문보다 훨씬 못한 논문들이 게재되는 난감한 경우도 겪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투고해야 합니다. 학회에 투고하기 전에 학회 편집위원회보다 더 까다로운 사람들로부터 예비 심사를 받기를 권합니다.
  • 학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학문 활동을 쉽게 생각합니다. “앉아서 책만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은 소일거리처럼 책만 보는 일이 아닙니다. 논문작성은 피를 말리는 작업입니다. 이 일을 오랫동안 해 온 저도 논문을 작성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논문은 다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글이 아닙니다. 인문사회계에는 깜짝 놀랄 일이 많지 않습니다. 논문의 주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찾아야 합니다. 논문은 새로운 것을 밝히는 작업이라는 점에 집착함으로써 낯선 분야에서 주제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 논문을 쓰려면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논문의 아이디어는 직감(hunch)에서 나올지 몰라도 논문 글쓰기는 분명히 인내를 요구하는 노역입니다. 책상에 붙어 있으려면 책상에 소일거리를 준비해 두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컴퓨터는 최상의 제품을 구비하십시오. 프린터는 빨리 인쇄되는 제품을 구비하고 자주 인쇄하십시오. 퇴고는 반드시 모니터보다는 인쇄물로 하십시오. 퇴고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논문을 심사하듯 비판적으로 살펴보십시오. 논문의 초고를 작성했을 때쯤이면 내용을 거의 외우게 됩니다. 그래서 오류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무리 세심하게 작성하더라도 초고에는 오류가 아주 많습니다. 이 오류들을 잡아내려면 그 논문을 남의 논문처럼 따져가며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부터도 읽고, 뒤에서부터도 읽어야 하며, 중간부터도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오래 묵혔다가 다시 읽어보기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쓴 글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방법은 모두 동원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학회에 투고했을 때 심사위원들이 남의 글을 비판하듯 읽기 때문입니다. 논문심사자들은 심사대상 논문에 대해 호의적이 아닙니다. 이들은 익명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며 탈락률을 높여달라는 요구를 받을 때에는 아주 냉정해집니다.
  • 학자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반드시 지적 업적을 갖추어야 합니다. 연구업적이 부족하면, 학계에서 설 땅이 별로 없습니다. 부족한 연구업적을 다른 것들로 보완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떳떳하지도 않습니다. 쫓기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우울해집니다. 자신의 전공영역에서 발간되는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을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관심이 끌리는 논문들은 복사하여 가까운 데 두십시오. 그 논문들을 끈기 있게 파고들면, 여러분이 써야 할 글의 주제와 소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젊은 교육학자들이 학자로서의 일상을 즐거워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 가지 학술모임에서 이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들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한국의 교육학이 발전하기를 기대합니다.

(한국교육학회 뉴스레터, 45(3), 5-9, 통권260호)

3월 첫째 주 NBER (2017-02-27)

총 20개. 흥미로운 페이퍼가 많다. 노동/교육경제학이 많고 금융/통화와 경제사 연구도 세 개나 있다.


– 컴퓨터보조학습에서 나타나는 동료효과: 무작위실험의 결과 (Peer Effects in Computer Assisted Learning: Evidence from a Randomized Experiment)
= 동료효과,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맹모삼천지교는 교육경제학의 오래된 주제다. 존재하는가?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저자들은 수학 컴퓨터보조학습(CAL)에서의 동료효과를 측정한다. 중국 시골 초등학교에서 무작위실험을 진행했다.

결과는: 1) CAL은 학생들의 수학 평균점수를 유의미하게 상승시킨다. 2) 혼자 하건 다른 학생과 짝지어 하건 효과는 유사하다. 3) 못하는 학생은 혼자 할 때보다 잘하는 학생과 짝이 될 때 점수를 더 많이 올린다. 4) 잘하는 학생은 혼자 할 때보다 못하는 학생과 짝이 될 때 점수를 더 많이 올린다. 4) 평균 수준 학생은 누구와 짝이 되어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5) CAL이 학생들 수준을 “수렴”시킨다는 증거가 없다.

우열반 나누는 것보다 섞는 게 낫다는 정책 시사점이 있나 싶었는데, 저자들이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짝짓는 방법을 바꿀 때도 이 결과가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학생들이 주고받는 상호영향이 중요하다. 일대일 매칭이 아니라면 학생들은 보다 어울리고 싶은 사람을 찾아갈 수 있고, 그 때는 개선효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다.

공군사관학교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최적 동료집단”을 설계하여 동료효과를 측정하였으나 학생들이 “지정된” 동료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하고 동질집단을 형성(endogenous peer group formation)했다는 Carrell, Sacerdote, and West (Econometrica 2013)의 연구 결과를 remind.

 

– 온라인 중등후교육 수익률 연구 (The Returns to Online Postsecondary Education)
= 제목만 봐도 매우 핫한 주제를 건드리는 페이퍼. 퍼미션 문제로 NBER 웹사이트에서 잠시 내려졌다. SSRN에서 초록 볼 수 있었는데 없어졌다. 나도 내용을 보진 못했는데 아마 전형적인 교육수익률 추정 연구일 듯하다. 다른 요약문을 참고해 보니 연구에 따르면 온라인 중등후교육 수익률이 매우 낮다. 3년 이상 등록한 학생을 기준으로, 완전온라인(exclusively online)은 연평균 853달러, 온라인-대면 병행(partly online and partly in person)은 연평균 1,670달러의 추가 수입을 얻었다. 더 짧은 기간 등록한 학생은 수입 상승률이 더 낮았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 효과성이 낮고, 심지어 교육수익률이 온라인 과정 등록금 대출도 못 갚을 정도라면 간단히 말해 낭비라는 결과. 논쟁을 일으킬 만한 연구다. 역시나 이쪽 업계 종사자들의 십자포화를 맞는 모양이다. 논문을 못 봐서 뭐라 평가는 못 하겠다.

 

– 산업화 초기의 기술-숙련 보완성 (Technology-Skill Complementarity in Early Phases of Industrialization)
= 기술-숙련 보완성이란 기술이 숙련노동을 수요하는 방향으로 진보한다는 것을 말한다. 원본은 Griliches(1969)의 자본-숙련 보완성 가설(Capital-Skill Complemtarity Hypothesis). 대단히 흥미로운 논문. 프랑스 자료를 이용해서 산업화 초기인 19세기에도 기술-숙련 보완성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기존에는 산업화 초기에는 기술-비숙련이 보완적이었고(Mokyr 1993), 차차 기술-숙련이 보완관계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Goldin and Katz QJE 1998). 초기에도 기술-숙련 보완성이 성립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렇게 되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결국 교육의 산물에 불과했다는 연구 결과(Becker and Wößmann 2009) 와 함께 인적자본이론 1승 추가인가. “인적자본의 세기”를 넘어 “인적자본의 시대” 아닌가.

 

– 진보적 도시와 살기 좋은 도시 중 어디에서 지역 공공부문에 의한 지대추출이 더 큰가? (Is Local Public Sector Rent Extraction Higher in Progressive Cities or High Amenity Cities?)
= 정치인이 주어진 권한을 자신의 이익극대화에 활용하는 것을 지대추출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Public Finance를 잘 모른다) 다른 생활여건이 좋은 도시일수록 사람들이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수요가 비탄력적) 정치인이 지대추출할 여지가 커진다. 공공부문 종사자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납세자들로부터 더 많은 돈을 “뜯어낼” 수 있다는 얘기. Brueckner and Neumark (AEJ 2014) 연구가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내놓았다.
이 연구는 “그렇다면 생활환경이 좋은 도시에 사는 공공부문 종사자들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론한다(보상적 임금격차). 오히려 임금수준은 지역의 정치적 성향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연방 레벨 데이터로 비교하자 깡시골 앨러배마에 비해 캘리포니아 임금프리미엄이 그리 높지 앞다(=보상적 임금격차가 존재한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도시 레벨 데이터로 비교하자, 환경이 좋은 해안 도시들은 공공고용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임금을 많이 지급하진 않았다. 같은 카운티 내에 있더라도 진보적인 도시일수록 공공부문 임금이 높았다. BN2014를 성공적으로 반박하는 듯.

 


그 외 흥미로운 논문.
– 선거 캠페인에서의 페니매칭게임: 상원의원 선거 언론 보도 실증연구 (Matching Pennies on the Campaign Trail: An Empirical Study of Senate Elections and Media Coverage)
– 건강 인센티브의 구조: 현장실험 결과 (The Structure of Health Incentives: Evidence from a Field Experiment)
– 주 의료보험 의무가입과 노동시장 성과의 관계: 오래된 질문, 새로운 증거 (State Health Insurance Mandates and Labor Market Outcomes: New Evidence on Old Questions)

– 브레튼우즈체제의 성립과 종말: 1958-1971 (The Operation and Demise of the Bretton Woods System; 1958 to 1971)
– 1933년 런던 세계경제회의와 대공황의 끝: “체제변화” 분석 (The London Monetary and Economic Conference of 1933 and the End of The Great Depression: A “Change of Regime” Analysis)
– 통화단일화의 여진: 금융시장의 이력현상 (Aftershocks of Monetary Unification: Hysteresis with a Financial Twist)
= 아이켄그린 논문이다. 내가 거시알못이긴 한데, 통상 노동시장이 이력현상 channel이라고 들었다. 여기서는 금융시장도 channel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듯. 서론 결론하고 본론 반쯤 읽었는데 대충 맞는 것 같다.
– 파마를 위한 “버블” ( Bubbles for Fama)
= 제목만 봐도 감이 온다.

– “우리 가족끼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관찰한 혈연조직과 신뢰의 범위 (Keeping It in the Family: Lineage Organization and the Scope of Trust in Sub-Saharan Africa)
– 농업 다양성, 구조적 변화, 그리고 장기 발전: 미국의 증거 (Agricultural Diversity, Structural Change and Long-run Development: Evidence from the U.S.)

인터뷰 준비 잡상

연구란 지식생산 활동을 말한다. 연구자의 소임은 지식생산이다.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생산이라고 부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만들어내야 한다.

만들어낸 결과가 인식 지평을 많이 넓힐수록 좋은 연구다. 전에 명지대 김두얼 교수님이 쓰신 일화를 빌려오면, “그 교수는 남들이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상황을 놓고 중요한 직관을 도출한 논문을 쓰고 나면, 그것을 N명으로 일반화시키는 논문을 쓴다. (…) 그의 논문이 정말로 어떤 부가가치가 있나 보면 거의 0에 가깝다.” 어쨌든 좋은 연구는 좋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남의 질문에서 출발한 연구가 좋을 수 있을까. 그보다, 난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이 고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그 교수가 나보다 훨씬 똑똑하겠지.)

나는 흐름을 파악하여 체계를 잡고 종합정리하는 데 능하다. 어디까지나 다른 능력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엄밀히 말해 지식생산은 아니다. 가공이라면 모를까. 당장 연재가 그렇다. 어느 정도 공부하면 누구나 쓸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석사논문도 미국에서 나왔던 연구결과를 한국에서 재현해 본 것이었다. 내생성 검증에 그치지 않고 생존분석을 이용해 주어진 문제에서 내생성의 함의를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좋은 질문? 글쎄.

끝까지 가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딜레탕트로 남는 게 어떠냐는 회의가 공존한다. 지금라도 늦지 않았을지 모른다, 굳이 끝까지 가 봐야 알겠느냐는 속삭임이다. 유학을 가고 박사를 받으면 이 양가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마 답은 얻을 게다. 어떤 방향이건.

예상 문답 준비는 마쳤건만 자문자답이 더 어렵다. 아, 자문자답은 영어로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긴 하다. 그것 참 다행이다.

한국의 말로 하는 연구, 독일의 글로 하는 연구 (Koosy Koo)

페이스북 원문 링크


한국의 말로 하는 연구, 독일의 글로 하는 연구.

(먼저, 이 글에서 예로 드는 사례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독일과 한국의 모든 연구실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알려드립니다)

독일의 현재 연구실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큰 문화 충격은 바로 랩 세미나 발표가 없다는 점이었다. 과제 워크숍 및 학회 발표 외에는 PPT 발표를 해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충격적인 이유는 한국에서는 모든 연구를 PPT 자료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첫 연구 주제 PPT 발표부터, 마지막 졸업 논문 심사 PPT 발표까지.. 연구 아이디어 정리도 PPT 문서에 하고, 관련 논문 조사하고 공부도 PPT 문서에 하고, 강의를 위한 수업 자료도 PPT 문서로 만들었다.

그 시절은 스티브 잡스의 Keynote 스피치가 붐을 일으키고, 서점에는 스티브 잡스의 노하우 분석 및 따라 하기 책이 넘쳐났다. 교수님께서도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PPT 발표를 강조하셨고, 랩 세미나 발표 때는 PPT 자료의 글자 크기, 폰트, 그림의 배치, 색깔 등에 대한 지적을 받으며 올바른 PPT 자료 만드는 법을 숙달해 왔다.

단지 발표자료뿐만 아니라, 유머와 비유를 섞어가며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센스와 물 흐르듯이 유창한 언변술은 박사과정이라면 필수로 익혀야 하는 중요한 자질이었다. 또한, 신입생이 새로운 기법으로 화려하게 PPT 발표를 하면, 단번에 훌륭한 학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발표 즉 말로 하는 연구가 중요하게 여겨진 이유는, 한국에서는 연구 평가를 글이 아닌 말로 하기 때문이다. 연구과제 제안서 심사도 발표로 하고, 연구결과 심사도 발표로 한다. 물론 제안서와 결과 보고서를 글로 제출하긴 하지만, 그 문서를 심사위원들이 정말 읽어보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실제 평가는 발표 비중이 크다.

대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석박사 학위 논문 심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학위 논문은 발표 심사 일주일 전에 제출하고, 논문에 대한 평가보다는 발표 심사 때 발표 내용을 기반으로 당락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 후에 논문은 다시 수정해서 제출하면 되는데, 논문의 최종본은 대부분 심사를 받지 않고 통과된다.

즉, 글이 아닌 말로 연구에 대한 모든 중요한 평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의 장점은 효율성이다. 글로 된 논문, 제안서, 보고서는 읽고 의견서를 작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말로 된 발표는 듣고 바로 의견을 말로 전달하면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 대부분 매주 정기적인 랩 세미나는 한 번에 한 명의 교수님이 여러 학생의 연구 진행 사항을 점검하고 지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로 빠르게 진행된 연구는 그만큼 많은 것을 놓치게 되는데, 그것들은 글로 된 논문을 작성할 때 역습으로 나타난다. 내 경험을 얘기해보면,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하다가 결국 introduction은 맨 마지막에 쓰기로 하고 건너뛴다. 두 번째 관련 연구 부분을 쓸 때는, 지금껏 찾고 공부한 논문들이 좀 오래된 것 같아서 최근 논문을 찾다가 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게 된다. 세 번째, 내가 한 연구가 기존 방법보다 더 좋다는 점을 적어야 하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이쯤 되면 논문 마감은 며칠 남지 않았고 맨붕에 빠진다. 연구 방법과 실험 결과만 잘 정리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어찌어찌 제출은 하지만… 예상대로 이렇게 작성된 논문은 대부분 reject 되고 만다.

연구 결과도 잘 나왔고, 그동안 세미나 때 교수님과 선배님들 지도받으면서 잘한 것 같은데.. 뭐가 잘못되었을까?

말의 힘은 화자에게 주도권이 있다는 점이다. 화자의 태도, 언변술, 발표의 진행속도에 청자는 따라갈 수밖에 없다. 특히 토론 형태가 아닌 일방적인 발표에서는 청자는 화자의 주장에 설득당할 가능성이 높다. 히틀러가 쓴 책은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말로 독일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만 봐도 말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연구자에게도 발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연구 진행을 말의 힘을 빌려 하게 되면, 논리 전개의 세밀한 검토를 받을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는 점이다. 세미나 때 발표자가 보여주는 제한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발표 속에서 연구의 단계 단계 논리적인 결함을 찾기란 쉽지 않다. 특히 PPT 자료의 속성상 발표자는 연구의 단점은 최대한 감추고 장점은 최대한 부각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서 청중을 설득하려고 애쓰게 된다.

만약 충분히 검증되어 출판된 논문을 설명하는 발표라면 장점이나 특징을 부각해도 되겠지만, 연구가 진행 중인 내용을 발표를 통해 지도받기에는 세밀한 논리 전개를 검증하기에 자료와 시간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그렇게 말로 전개되고 완료된 연구는 글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본인 스스로 모순을 발견하여 전개가 안 되거나, 그 글을 읽은 평가자에게 쉽게 논리적인 결함을 지적받게 된다.

이런 말로 하는 연구 시스템에서 잘 훈련된 필자가 독일에서 연구를 진행하며 가장 먼저 놀란 사실은 랩 세미나 없이도 연구실이 잘 굴러가는 것이었다. 대신 교수님이 연구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고 자주 순회하며 개개인 학생들과 토의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에 비교하자면 같은 방에 있는 선배 같은 느낌이랄까.. 석사 학생들에게는 포닥들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된다. (참고로 우리 랩은 박사과정 10명에 포닥이 4명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연구 지도는 글로 진행한다. 처음 학생에게는 교수님 또는 포닥이 작성한 연구주제가 1~2장의 요약 논문 형태의 글로 주어지고, 학생도 연구를 진행할수록 논문 형태의 문서를 구체화해가며 지도교수 또는 포닥에게 정기적으로 피드백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지도하는 입장에서는 이 학생이 연구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 얼마나 관련 연구 조사를 했는지, 본인의 의견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장 사이의 논리적 전개에 대해서도 이유를 물어보고 설명이 부족하면 보충하게 한다.

지금까지 네 명의 석사 논문을 이런 식으로 지도하며 느낀 점은, 처음에는 주어진 연구주제를 비판 없이 따라 하던 학생들이 점점 스스로 각 논리적 단계마다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연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자연스럽게 논문 한 편이 완성된다. 그다음에 발표는 이렇게 완성된 논문을 요약해서 사람들에게 내용을 소개하는 자리이다. 지적이 아니라 박수받아 마땅한 자리이다.

독일의 박사학위 심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먼저 논문을 제출하면, 심사위원들이 읽어보고 의견 및 수정사항을 준다. 그걸 바탕으로 논문을 수정해서 다시 제출하고 피드백을 받는다. 이런 과정을 보통 일 년 넘게 진행하고, 심사위원들에게 통과가 되면, 비로소 많은 사람에게 논문을 발표하고 축하를 받는다. 즉, 말로 된 발표는 글로 된 논문을 요약해서 설명하는 수단이지, 말로 진행한 연구를 글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말과 글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말은 이해시키는 주도권이 화자에게 있고, 글은 이해하는 주도권이 독자에게 있다. 또 말은 감정적이고 글은 이성적이다. 연구를 말이 아닌 글로 해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이 철저하고 세밀해야 하고 점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연구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하는데 비해,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말로 진행되는 연구 분위기는 아마 우리 사회가 글을 읽고 생각하고 묵상하는 여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래도 연구는 긴 호흡으로 차분히 꼼꼼하게 생각하고 서로 점검하고 타인의 지적을 이성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발표자료 꾸미느라 밤새는 시간에 자기 생각을 한 문장이라도 더 글로 표현해보고, 교수님들이 학위논문을 읽어보고 논리적인 문제점들을 찾아주고, 과제 심사위원들이 연구보고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의견서를 작성해서 피드백을 준다면… 그 안에서 여러 생각이 모아지고 구체화 돼서 우수한 연구도 훌륭한 연구자도 길러지지 않을까?

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 비판

보건사회연구원 주최 제13차 인구포럼에서 발표된 논문 한 편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내용인즉슨,

ㅇ 교육투자기간을 줄이는 정책은 대기업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불필요한 휴학, 연수, 자격증 취득 등이 채용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지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을 것. 시간을 합리적으로 투자할 줄 아는 인재를 뽑는다는 것을 고용시장에 알림으로써 불필요한 스펙 쌓기로 시간과 돈을 허비하는 것을 막고 지원자와 기업 간 탐색과 매칭이 일어나는 연령을 낮출 수 있을 것임
ㅇ 또한, 교육투자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한 남녀가 서로 원하는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IT 기술과 연계하여 높여줄 수 있는 정책개발 필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기술을 이용하여 바쁜 일상을 대신하여 가상공간에서 자신을 대신하여 배우자를 탐색할 수 있는 정보기술을 개발하여 대학에 보급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음
ㅇ 마지막으로, 여성의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하향선택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관습 또는 규범을 바꿀 수 있는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함. 이는 단순한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음

청년취업 부진이 눈높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면 보수를 자임하는 지도교수님이 하시던 말씀이 있다. “취업눈높이 운운하는 사람은 경제학자 아냐. 경제학 기본도 모르는 소리야. 자기가 한 인적자본 투자가 있고, 갖고 있는 소득이 있으면, 선호에 맞추어 일할 의사가 정해지잖아. 결혼 의사도 마찬가지야. 그건 국가건 뭐건 누가 개입할 수 있는 게 아냐.”

보사연 보고서 논란 관련 포스팅 대부분은 해당 보고서가 발표된 <제13차 인구포럼> 보도자료를 참조했다. 연구원이 포럼 자료집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보도자료의 2/3을 차지하는 정책시사점에 포화가 집중되는 모양이다. 연구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한 기사가 있어 읽어 보았다.

원문을 확인하지 않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정책 시사점 말고) 실증분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다. 초산연령 상승 이유가 결혼 이후 초산까지 걸리는 기간이 증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초혼연령이 상승해서라는 얘기는 이미 많이 나온 바 있다. 고학력 고소득 여성의 결혼이행확률이 낮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내용이 있다. “여성은 고소득·고학력 여성일수록 미혼으로 남을 확률이 높았고, 남성은 저학력·고소득일수록 미혼일 가능성이 컸다.”

흔히들 결혼이 돈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저학력 남성은 소득이 높아질수록 결혼이행확률이 낮아진단다. 의아하지 않은가? 이 현상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고학력-고소득 여성 결혼이행확률이 낮은 건 당연하다. 언급했듯 이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는 건 넌센스다. 저학력(고졸이하)남성이 고학력(석사이상)여성보다 많을 테니 정책적으로도 이쪽이 더 중요하다. 저학력 고소득 남성은 결혼을 안 하는 것인가, 못 하는 것인가? 바꾸어 말하면 고학력여성이 저학력남성을 기피하기 때문인가, 저학력남성이 고학력여성을 기피하기 때문인가, 둘 다인가? 여기에 집중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질문은 이거다. 학력-소득별 매칭된 결혼assortative marriage이 일어나고 있다면, 저학력-고소득 남성이 저학력-고소득 여성과 매칭되지 않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고 본다. 저학력-고소득 여성이 고학력 남성을 선호하거나, 저학력-고소득 여성 자체가 과소공급되거나. 물론 둘 다겠으나. 일단 두 가지 사실이 알려져 있다. (1) 2000년대 초반부터 여성 대학진학률이 남성보다 더 높다. (2) 해당 연령대 남성 인구가 더 많다. 저학력 남성 절대인구가 저학력 여성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구구조 하에서 저학력여성과 남성의 고소득이행확률은 어떨까? 성별 이행확률이 같아도 저학력여성은 과소공급된다. 그런데 기존 성별 임금격차 연구를 바탕으로 추측컨대 여성의 이행확률이 낮을 것이다. 이유는 물론 차별. 저학력 고소득 여성은 더더욱 줄어든다. 나는 국가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겠다는 정책 시사점을 굳이 도출한다면 여기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학력 고소득 여성의 눈높이가 아니라.

정책시사점은 할 말이 없는 수준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예전 레바툰에 국가가 저출산 대책으로 단체미팅 시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국가가 차라리 그런 매칭서비스 제공하라는 것이 VR 운운하는 것보다 낫다. 궁서체다.

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 비판
레바 의문의 1승

** 논문의 계량분석이 결혼이행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 기간을 갖고 duration analysis를 한 건지, 결혼여부더미를 두고 probit/logit을 돌린 건지 모르겠다. 학력별 이야기도 집단별로(가령 고졸이하/대졸이상) 따로 돌린건지, 단순히 회귀분석 결과를 갖고 all other things equal, 학력이 낮아질수록~ 이라고 한 건지 모르겠다. 후자라면 저렇게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동성혼 관련 인식조사

젠더 이슈가 터질 때면 난리가 난다. 정작 인식 관련 통계를 본 적이 없어서 한 번 찾아보았다.

통계가 안 보이는 데엔 이유가 있다. 내가 서베이에 친숙하지 않아 못 찾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통계 자체가 미비하다. 이런저런 자료야 있으나, 쉬운 걸 물어보면서 & 부정기라도 여러 차례 시행했고 & 표본 및 조사방법을 밝혀 둔, 신뢰할 만한 서베이는 찾지 못했다. (여성가족부나 여성정책연구원은 성평등 인덱스 & 성 인지 예산/통계 쪽으로 바쁜 것 같다.)

그나마 여성가족부 2016년 조사가 있으나 결과가 그리 흥미롭지 않다. 응답자 특성별 분해 결과도 안 나와 있어서 더욱 그렇다. 오히려 동성결혼 법적 허용 찬반에 관한 서베이가 존재한다. 한국갤럽에서 동성애 관련 인식을 2001, 2013, 2014년에 조사한 바 있다. (01, 14년은 몇 가지 질문을 했고, 13년에는 동성결혼 찬반 여부만 물었다.)

동성혼 관련 인식조사

주의주장을 보다 답답해서 정리해 본 것이라 딱히 덧붙일 말이 없다. 굳이 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일 듯. 다만 동성애 관련 인식이 이 정도로 빠르게 변할 줄은 몰랐다. 특히 13, 14년 사이 급격한 변동은 놀라울 뿐이다. Overall 기준 01-13년 사이에 반대 비율이 67%로 불변이었는데 13-14년 사이에 9%p 떨어졌다. (12년간 변화 < 1년간 변화)

총합은 연령별, 지역별, 학력별 등 인구특성별 반대와 찬성 비중이 변하면 따라 변한다. 12년간 특성별 반대-찬성-무응답 간 상쇄에 따라 총합 변화가 부진하다 역전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연도별 자료가 있는 게 아니라 검증 불가능하다. 요인은 더더욱 오리무중.

게다가 13-14년 9%p 변화는 전 연령대에서 찬성비율이 상승한 결과다. 2030은 그렇다 쳐도 40대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걸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역시 뭐든지 빨리 변하는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