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문제는 대체탄력성이다

정보기술과 경제성장 이슈도 결국 대체탄력성 문제다. 소비부문(재화간 대체탄력성)과 생산부문(요소간 대체탄력성) 모두. “특이점이 온다”고? 기술적 특이점이 반드시 경제적 특이점으로 이어질까?

이게 소위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모든 논자를 걸러도 되는 이유다. 공포 마케팅을 부추길 뿐 누구도 대체탄력성 – 반드시 이 용어를 쓸 필요는 없다 – 은 말하지 않는다. (* 직업별 대체확률이 그나마 근접하지만 다른 말이다. 애당초 대체탄력성이 비탄력적이면 저런 논의가 불필요하다.)

<21세기 자본> 때와 비슷하다. 그 때도 대체탄력성이 핵심 이슈였다(Rognlie의 비판). 그 외의 주 이슈는 80년대 tax reform(Feldstein의 비판) 정도. 둘 다 국내 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다. 온갖 변죽을 울려댄 것에 비하면 아예 없다시피했다. 그래도 중앙일보에서 다룬 적이 있어, 이 케이스보다는 사정이 낫다.

주말에 논문 읽고 정리한 걸 바탕으로 포스팅을 하려 했으나… 글이 영 안 써지는 관계로 불평부터 늘어놓아 본다.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Air), 2016.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 2016.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Air), 2016.

이 책은 젊은 나이에 눈부신 성취를 이룬 저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기록이다. 저자 폴 칼라니티는 인도계 미국인으로 스탠퍼드, 케임브리지, 예일에서 학위를 받았다.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영문학도로 출발하여 의학과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탐구의 일환으로 신경외과 의사가 되었다. 모교 스탠퍼드대학교 병원 교수직을 제의받기 직전 폐암에 걸려 서른여섯에 사망했다.

저자는 먼저 의사가 되기까지 거친 지적 여정을 회고한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한사코 거부했던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돌아온 길을 이야기 형식으로 술회한다. 그리고 암 투병을 겪으며 경험한 지적·생애적 전환을 기술한다.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지 않는다. 의사이자 철학자로서의 사유를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어린 딸을 생각할 때를 제외하면 격정적인 대목이 없다. 한창 삶의 의미를 고민할 때, 언젠가 죽음을 대면한다면 쓰고 싶다 생각한 글의 전범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담담하게 글을 남기는 사람은 드물다.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묻는다. 칼라니티가 의사로서 남들보다 오래 독립을 지킬 수 있었기에 이 기록이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몇 주 전, 말기 난소암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여성이 뉴욕타임스에 자기 남편은 좋은 사람이며, 함께 해줄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기고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녀도 전업 작가였다.

읽기 힘들었다. 늘상 들여다보는 책과 달리 수식은커녕 도표 하나 없었고 문장도 평이했다. 분량도 적었다. 그럼에도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반 이상 느렸다. 어머니를 떠올린 까닭이다.

나는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하길 바랐다. 어머니는 간호사, 종교인이자 “똑똑한 셋째 누나”였다. 글도 잘 쓰셔서 학부모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도 몇 차례 하셨다.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다. 간호사로서 가진 난소암에 대한 지식과 경험, 살고 싶다는 소망, 목회자로서 의연하게 하느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해하지는 못했다. 어째서 병증에 대한 지식이 공포로만 귀결되는가.

길을 찾기 위해 나는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싯다르타 무케르지가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에 “암 환자는 생의 새로운 정상상태(new normal)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쓴 말을 옮긴 날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말은 뒷전이고 내가 상황을 파악하려 그 두꺼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더 기뻐했다. 답답했다.

칼라니티의 수려한 문장을 빌려 그런 어머니를 조금 이해했다. 그는 어린 딸 케이디에게 짧은 편지를 남긴다.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생애사 정리를 권할 게 아니라 내가 귀 기울였어야, 길 잃은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갔어야 했다.

톨스토이는 죽어가는 인물의 심리를 충격적인 묘사로 정리한 바 있다. “아무도 그를 그가 원하는 만큼 동정하지 않았다.” 이 무심한 자는 그 대목을 읊조리면서도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인텔리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귀가 없단 말인가.

책을 다 읽고 며칠 뒤 꿈을 꾸었다. 얄궂은 꿈이었다. 초기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했다. 재활 중 눈 뒤에 악성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시간이 교묘히 뒤틀려, 첫 수술 때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 재활을 다짐하며 같이 잘 해보자고 말할 때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의사는 두 번째 종양 소견을 내놓으며 리스크가 크니 선택은 본인의 몫이라고 말했다. 말의 심연 속에서 한참 헤매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다. 돌아보지 않던 얼굴이었다. 한참 울다 깨어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목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구약성서 창세기가 연상되는 표현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보다 세련된 언어로 나를 일깨워 주어 감사하다. 바람 된 그의 숨결이 안식하기를 빈다.

“나는 스탠퍼드에서 영문학을, 케임브리지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며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 나는 죽음의 두 가지 수수께끼인 경험적인 징후와 생물학적인 징후, 즉 아주 인격적이면서도 철저히 비인격적인 측면들을† 파헤치기 위해 의학을 탐구했다.”

“폐암 진단은 확정되었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무척 익숙했던 죽음이 이제 내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죽음과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지만, 아직 죽음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치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이 남긴 발자국을 보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할 텐데, 기로에 선 내 앞에 보이는 거라곤 텅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유한성에 굴복한다. 이런 과거 완료 상태에 도달한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대부분의 야망은 성취되거나 버려졌다. (..) 돈, 지위, <전도서>의 설교자가 설명한 그 모든 허영이 시시해 보인다. 바람을 좇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 : 역자는 “personal and impersonal”을 “개인적이면서도 비개인적인”이라고 옮겼다. 문맥상 “인격적이면서도 비인격적인”이 맞다고 생각한다.

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2015.

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2015. 서평은 아니고 메모.

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2015.

존잘러가 쓴 한국 사회과학계 현실 비판서이자 본인 학술이력 자기민속지. 민속지를 가장한 자기 PR로 읽을 수도 있다. 저자의 의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학문적 진로를 희망하는 학부생을 위한 안내서로도 훌륭하다. 김종영 교수의 <지배받는 지배자>와 함께 읽으면 그 책이 제시한 “Academia Immunda(학문은 더럽다)”는 명제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책 모두 부르디외 이론을 원용한다는 점에서 이들도 “지배받는 지배자”이며 “글로벌 지식장 상징폭력”의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전반부에서 한국 사회과학계(저자가 속한 사회학)를 가차없이 비판하고 후반부에서 본인이 학계 내 상징자본을 획득한 과정을 상술한다. 먼저 김경동, 조한혜정, 강정인, 한완상 등 국내 유명 학자들을 시쳇말로 극딜한다. “서구에 종속되지 않은 한국적 사회과학”, “우리 땅에서 적실성 있는 학문”이라는 무의미한 기치에 매몰되었다고 지적한다. 소위 적실성을 따지기 전에 글로벌 학문 장에 맞는 수준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게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적실성 구호 자체가 허황되었으며, 이들의 학술적 기여와 교육 모두 엉망이라고 융단폭격을 가한다. 학자들이 “일반인을 위한 OO학” 류 대중서적, 강연 등에 골몰하는 행태도 비판한다.

후반부에서는 본인이 박사과정 시절부터 현재까지 겪은 학계 이야기를 부르디외의 장 이론을 축으로 서술한다. 저자는 학계 컨텍스트를 예로 들어 장 이론의 주요 개념을 설명한다. 학생이 지식 장의 규칙을 체득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아비투스), 학술활동이 유의미하며 일생을 걸 만한 일이라는 공모(일루지오), 축적된 학술활동 성과(상징자본), 상징자본을 가진 선행연구자의 저작을 읽어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상징폭력) 무엇을 읽을지, 무엇이 가치있는 탐구 대상인지 설정하는 권한을 둔 경쟁(상징투쟁). 그리고, 한국 학계에는 상징자본이 될 만한 독창적 이론/이론가가 없으므로 서구 학자들이 행사하는 상징권력에 의해 상징폭력을 겪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뒤에는 논문을 완성하고 투고하는 과정, 학계 내 역학 관계 등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다른 교수에게 논문 논평을 요청했다가 대판 싸운 일화가 아주 흥미롭다. 학자들도 사람이라는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은 상징투쟁이며, 저자는 그가 상징투쟁을 통해 획득한 상징자본을 전시하며 독자에게 상징폭력을 행사한다. 전반부에 한국 사회과학계를 비판한 것도 상징폭력의 일환이다. (굳이 이런 식으로 쓰는 까닭은 저자 본인이 책에서 이렇게 언급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뛰어난 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 납득할 만한 내용이었는데, 솔직히 “대가”들의 자필 편지를 일일이 사진찍어 실은 걸 보면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어쨌든 국내 석사과정 정도 거치면 이런 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 저자처럼 개념화하지는 못하겠지만. 학계에 대한 환상을 가진 학부생이 읽으면 큰 도움이 될 듯하다. 나로서는 유학을 앞두고 읽으니 생각이 많아진다. 상징자본은커녕 박사학위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그 전에 내게 pacific-wide한 어장관리를 하고 있는 학교들이 과연 최종 어드미션을 줄까. 이러다 보면 저자가 쓰듯 “우리가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한국의 현실은 해외유학의 역사가 반세기를 넘겼지만 아직도 숱한 학생이 박사학위를 받으려 미국과 유럽의 명문대학으로 떠난다는 사실이다. 왜일까?”라는 질문을 부질없이 다시 던져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답은 잘 알고 있다.

덧. 저자는 경제학과 출신이다. 학부생 때 교재며 이론이 모두 영미의 것이었기 때문에 경제학을 때려치우고 사회학을 택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학자와의 서신에서 이렇게 쓴다. “비록 경제학은 과학장의 요건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부르디외가 이상적으로 상정한 자연과학 모형에 가장 가깝지만, 경험적 타당성에서 평가할 때 완벽한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들부들…ㅋㅋㅋㅋㅋ (경제학이 경성과학hard science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고민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RCT 하는 사람들은 – 가령 Duflo – 그렇게들 말하던데, 나는 아직 유보적이다.)

한국의 R&D 생산성이 낮은 이유 (강왕구)

페이스북 원문 링크


우리 연구개발(R&D)은 생산성이 낮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말 그럴까? 내 생각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우리 R&D는 혁신적인 성과를 내는데 실패하고 있다. 이유는 뭘까?

우리 연구개발이 혁신적인 결과를 내는데 실패한 이유는 혁신적인 연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 개풀 뜯어 먹는 이야기냐고? 우리 R&D 주제들을 보면,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 결과가 나온 주제들의 재탕들이 대부분이다. 처음부터 혁신적인 주제에 도전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혁신적인 결과가 나오겠는가? 처음부터 등산의 목표를 에베레스트산으로 하지 않고, 백두산이나 한라산으로 잡고는, 세계적인 등산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의 연구자들은 왜 혁신적인 주제들에 도전하지 않는가? 천성이 게을러서? 노오오력을 안하는 헬조선 인민들의 특성때문에? 난 기본적으로 노오오력 드립치는 인간들은 다 싹 모아서 국외추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대륙이라도 발견되면, 노오오력 드립치는 인간들을 보내, 자기들끼리의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주고 싶다. 그러면 거기서도 서로서로 노오오력 드립치고 있을 듯 하기는 하다만.

우리가 혁신적인 주제에 도전하지 않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거나, 생각보다 복잡하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우리 연구개발에 대한 평가가 보상보다는, 체벌 위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혹독한 체벌 위주로. 우리 연구개발에서 가장 확실하게 보장되고 지켜지는 원칙이 하나 있다. 그건 다음과 같다.

“당신이 국가연구개발에 실패하면 당신은 x된다는 것이다.” x되는 정도는 다르지만, 이건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연구팀원, 그리고 당신에게 펀딩한 전담기관과 담당부처 공무원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건 연구개발 규모가 크건 작던 상관이 없다.

연구개발은 (1) 연구개발 주제를 선정하고(기획단계), (2) 연구를 수행할 주체를 선정하고(선정평가), (3) 연구를 수행해서 결과를 산출하고, (4) 이를 평가하는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제부터 우리가 왜 혁신적인 연구에 실패하는 지 단계별로 살펴보자. 먼저 (1)의 단계에서 혁신적인 주제가 선정되지 않는다. 왜나고? 이 단계에서 주도를 하는 주체는, 정부부처 공무원과 전담기관 담당자, 그리고 기획위원으로 추천된 전문가들이다. 요즘은 전담기관에 기간제로 고용된 PD, MD, 단장들이 포함된다. 이 단계에서 기획자들은 결코 혁신적인 주제를 발굴하지 못한다. 혁신적인 연구개발 주제는, 실패확률이 80%이상이 되는 주제를 의미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실패하면 x되는 환경에서 혁신적인 주제를 발굴하는 건, 기획자집단이 그 많큼의 확률로 x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 연구개발 주제는 외부의 비전문가들이 보기에는 혁신적이고, 내부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별로 실패가능성이 없는 주제들만이 선정된다. 우리가 혁신적인 결과를 내 올수 없는 첫번째 이유이다.

(2)의 단계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반복된다. 하나의 연구개발 주제에 대하여 대략 3~4팀이 도전한다. 이중에서 비록 혁신적인 주제가 아니지만, 그래도 혁신적인 방법으로 도전하는 팀이 있다. 당신이 선정평가를 하는 주체라고 생각해 보자. 결코 이 팀을 뽑지 않는다. 왜나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혁신성은 태생적으로 그만큼의 높은 실패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니 혁신적인 연구개발 방법을 제안하는 팀은, 그만큼의 실패가능성이 높은 팀이다. 이런 팀 뽑았을 경우에는 당신도 실패에 대해 연대책임을 져야 될 가능성이 크다. 당신같으면 이런 팀을 뽑겠나?

자 이제 (3)의 단계를 살펴보자. 당신이 연구개발 책임자다. 당신은 원래부터 혁신적인 사람이라서, (1)과 (2)의 과정에서 비록 덜 혁신적인 주제와, 당신이 제출한 아주 안전한 방법의 계획서를 무시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지금까지는 훼이크다 이 xx들아. 이제부터는 내 꼴리는대로 연구개발 함 해볼거다.”라고 할 수 있을까? 전혀 불가능하다. 우리 연구개발을 감독하는 전담기관들(연구재단, KEIT, 등등)은 그렇게 핫바지들이 아니다. 연구계획서에 포함되지 않은 장비는 절대 사면안되고, 새로운 세부연구주제도 결코 시작해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계획서에 없는 해외출장 같은건 절대 가면 안된다. 원래 연구개발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뭔가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불확실한 현상이 관측되거나,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보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연구개발(R&D)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모든 연구개발은 연구개발계획서에 명확하게 정의된 것만 해야 한다. 불확실한 것에 도전하기 위하여 아주 확실한 방법만을 사용해야 한다. 왜? 연구개발이 실패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연구팀만 지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담기관은 관리감독 책임을 진다. 이때 감사관은 연구방법등에 대해서는 1도 모르기때문에, 구매내역, 출장내역 등만 줄기차게 뒤진다. 뭐 그래도 해외출장건은 좀 심하다. 연구를 진행하다보면, 해외와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가 필요해진다. 근데 어떻게 처음에 계획한 해외출장만을 인정해 주는지는 참 어이가 없다.

이제 어찌어찌 (4)의 최종평가 단계에 왔다고 보자. 당신이 평가받는 항목은 어이없게도 연구결과가 아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면, 연구결과는 세계 최초나 2~3번째 연구성과로 포장되어 있다. 평가는 결과에 집중되지 않는다. 평가는 당신이 사용한 연구비에 집중된다. 연구결과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연구수행 과정에 대한 감사다. 혁신성은 꿈도 꾸지 말라. 혁신적인 것을 추구하다가는 결과도 엉망이고, 그 과정에서 이러저런 꼬투리만 쌓인다. 그리고 한번 찍히면 다시는 국가연구개발 과제와는 바이바이다.

사실, 이런 감사와 체벌위주의 시스템은 연구개발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국가원리쯤 된다. 공무원이나, 전담기관의 담당자나, 연구개발을 진행하는 연구원이나 모두 관심사는 체벌을 받지 않는 것에 있다. 왜나고? 그 체벌의 강도가 너무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엄한 부모밑에서 훈육되는 아이들과 같다. 먹는것, 입는것, 사귀는 친구, 컴퓨터게임, 읽는 책들에 대해서 일일이 감시하고 잔소리하고, 때로는 귓방망이도 올려붙이는 아주 엄격한 부모다. 이런데 자라서 피카소가 되라고? 택도 없는 이야기다.

최소주의-반지성주의 혼종

나는 미니멀리즘(또는 최소주의)과 반지성주의를 제 편한 대로 뒤섞는 부류를 매우 싫어한다. 이런 부류가 입에 달고 사는 대사가 있으니 “말이 너무 어렵다.”

저 태도의 정체는 “나는 좀 비뚜로 본다”는 자의식과잉이다. 저런 부류는 타인에게 입증/설득의무를 부과하지만, 이해할 의사가 별로 없다. 실상 설득이 아니라 자의식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볼썽사나운 것도 드물다. 모르면 모른다, 공부할 생각이 없으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저런 태도는 알을 깨고 나오지 않아도 되니 편리하다. 생각이란 걸 하고 있다는 착각이야 개인의 자유다. 영원히 알 속에 갇혀 있겠다는 자유도 자유니까. 뭐, 그 안에서 관점놀음으로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래된 생각이다. 확실히 대선공약 갑론을박의 계절이 왔는지 저런 글이 타임라인에 몇 올라와서 써 보았다. 한 줄만 보태자면, 경험상 교회가 저런 태도가 싹트는 토양 중 가장 비옥한 축에 속한다. 대단히 유감이다.

3월 둘째 주 NBER (2017-03-06)

총 13편. 한 편 빼고 전부 흥미로웠다. 석사과정 학생일 때 이렇게 읽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ㅠㅠ


– 어떻게 “틀린 게 맞게 되는”가? 마술적 전쟁기술과 잘못된 믿음의 지속성 (Why Being Wrong can be Right: Magical Warfare Technologies and the Persistence of False Beliefs)
= 과학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 어째서 소멸하지 않는지를 이론적으로 밝힌 논문. 이런 믿음은 1) 관찰하기 어려운 제약이 있어 반박하기 어렵고 2)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내부경쟁을 촉진할 때 유지된다.

어떤 고대 부족 전사들이 샤먼의 축복을 받으면 칼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고 믿는다고 하자. 단, 남의 것을 훔치거나, 여성과 잠자리를 갖거나, 사과를 먹으면 안 된다. 이 경우 전사가 죽더라도 샤먼의 축복이 무효인지 축복이 유효했으나 어젯밤 실수로 음식에 든 사과를 먹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절도나 성관계가 금지당하므로 무력집단이 평판과 기강을 잃는 최대 요인 중 두 개가 원천차단된다. 이러면 전사집단의 행태가 사회적 최적에 가까워지고, 유지될 조건을 만족한다. 대충 이런 얘기. 논문은 아프리카 사례를 가져왔는데 꽤 재미있다. 예시가 논문의 절반이고 엄청 흥미롭다.

그냥 학부 게임이론만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다 해서 13페이지니 그냥 심심풀이로 읽어 볼 수 있을 정도. 처음 읽었을 때는 뭐 이런 게 NBER까지 가나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뻗어나갈 여지가 많은 것 같다.

– 도구변수와 인과메커니즘: 무역이 노동자들과 유권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Instrumental Variables and Causal Mechanisms: Unpacking The Effect of Trade on Workers and Voters
= 계량방법론을 확장해서(식별문제 해결) 최근의 “포퓰리즘 반동(populist backlash)”과 국제무역의 관계를 세 단계로 나누어 분석한다. 아주 시사적인 페이퍼. 가설은 쉽다. 어떤 국가가 저임금 제조업 국가들과의 무역에 “노출”됨 – 노동시장에 영향 – 투표행태에 영향.

여기서는 먼저 무역 “노출”이 투표행태에 미치는 영향의 인과관계를 확립한다. 그리고 무역에 따른 노동시장 교란의 인과관계를 정립한다. 마지막으로 이 두 효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도출한다.

독일 데이터를 이용해 실증분석한 결과, 수입경쟁은 극우정당 지지율을 상승시켰다. 이 상승분을 (무역의) “직접효과” 와 노동시장을 거친 “간접효과(mediated effect)”로 분해한 결과, 간접효과가 더 컸다. 직접효과는 비교적 작았고 방향이 달랐다. 즉, 간접효과를 상쇄했다는 것.

저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효과를 차단할 수 있다면 무역이 오히려 정치적으로 “중재적인(moderating)” 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시사점을 내놓는다. (미국의 분석결과와는 조금 다르다고 한다.)

– 경제발전과 윤리적으로 민감한 행위 규제의 관계 Economic Development and the Regulation of Morally Contentious Activities
= 저자들은 윤리적으로 첨예한 이슈인 낙태와 성매매, 대리모와 경제발전의 관계를 실증분석하고 간단한 해석 틀을 제공한다. 해당 이슈에 “관대한” 입법이 이루어지려면 관대한 유권자들이 늘어나야 한다.

유권자 수 변화는 크게 1) “관대한” 입법의 경제효과 2) 경제발전이 사람들의 “도덕적 분노”에 미치는 효과 3) 경제발전에 따른 사람들의 가치평가 기준 변화라는 3개 요인에 영향받는다. 요인분해한 항등식을 40년짜리 국가별 데이터로 실증분석한 논문.

결과 자체는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비경제적 요인이 이만큼이나 중요했다”라서 뻔하다면 뻔한 논문. 최근 실증연구자들이 비경제적 요인으로 계속 눈을 돌리는 것 같다. 종속변수건 독립변수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 보편 프리스쿨 교육은 성공적인가? 프로그램 접근성과 프리스쿨의 효과 (Does Universal Preschool Hit the Target? Program Access and Preschool Impacts)
= 프리스쿨은 불평등으로 직결되는 성취도 격차를 줄일 방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다양한 프리스쿨 프로그램이 사회적 취약계층 아동들에게 미친 영향을 비교분석한 연구는 없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선택적 프로그램보다 주 재정지원 보편 프리스쿨 프로그램이 더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이건 제목을 번역할 재간이 없었다. 한국어가 “보편 vs. 선택”인데 비해 영어는 “universal vs. targeted”라서 가능한 제목. 보편적 프로그램이 선택적 프로그램보다 정책효과를 “적중” 시켰다는 본인 주장을 깔끔하게 요약했다. 키야..

– 학교 점심식사 품질과 학업성취도의 관계 (School Lunch Quality and Academic Performance)
= 급식충 헌정 페이퍼(…) 학교 식단의 영향은 오래된 주제다. 식단은 학생들의 육체적 건강(비만)과 정신적 건강(충분한 영양공급과 인지발달의 상관관계) 둘 모두와 연관되어 있다.

캘리포니아 데이터로 분석한 결과 1) 건강한 식단이 비만율을 낮춘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2) 건강한 식단을 공급할수록 시험 점수가 향상되었다. 식단 칼로리 총량보다 식단 영양구성 품질의 영향이었다. 이제 캘리포니아 학생들은 학교 탓을 할 수 있게 됐다. “내가 하버드에 못 간 건 고딩 때 학교 식단이 bullxxxx였기 때문이야.”

– 국가 모델 차이가 지역 내 집합행동과 경제발전에 미치는 영향: 베트남 역사의 사례 The Historical State, Local Collective Action, and Economic Development in Vietnam
= 오래 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지배했던 국가가 각각 중앙집권/지방분권적이었다는 점을 이용한 연구. 국가가 역사적으로 사라지더라도 그 유산은 남아 영향을 미치는가? 즉, 과거의 정치체제 차이는 오늘날의 생활수준과 경제발전 정도에 영향을 주는가? 이 질문을 자연실험/회귀단절법으로 실증분석한 논문.

국경지역에 위치한 탓에 중간에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지배권이 넘어간 지역을 그렇지 않은 지역과 비교했다. 중앙집권형 국가(북베트남)가 멸망하더라도 국가 강제력이 사회적 규범의 형태로 남아 해당 지역의 경제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짓는다. 역사적 데이터 많이 썼다는데, 글쎄… 솔직히 이런 페이퍼 처음 봤을 땐 fancy하다고 생각했지만 요샌 좀 회의적이다. 흠…

여담으로, 본문에서 제임스 스콧의 <농민의 도덕경제 (The Moral Economy of the Peasant)>가 인용되었다. 내가 경제학 논문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이 책 인용 처음 봤다. 어쨌든 정치학 쪽에 더 가까운 페이퍼인 건가 싶다.

=== 이외 논문.

– 최초의 공공보건 캠페인은 성공적이었는가? 결핵운동의 사망률효과 (Was The First Public Health Campaign Successful? The Tuberculosis Movement and Its Effect on Mortality)

– 이스라엘 이민사와 세계화의 교훈 Israel’s Immigration Story: Globalization Lessons
– 브렉시트가 해외투자와 생산에 미친 영향 (The Impact of Brexit on Foreign Investment and Production)

– 충동적 소비와 재무적 웰빙: 술 마시기 쉬워지면 어떻게 될까? Impulsive Consumption and Financial Wellbeing: Evidence from an Increase in the Availability of Alcohol
– 대공황기의 재무마찰과 고용 Financial Frictions and Employment during the Great Depression

– 큰 은행이 고평가되는가? Are Larger Banks Valued More Highly?
– FX 시장의 계량경제학: CLS 은행결제 자료에서 나온 새로운 발견 (FX Market Metrics: New Findings Based on CLS Bank Settlement Data)